#4
잠이 안 오네요.
그렇겠지.
…
…
선생님은 밖에서 무얼 하셨나요?
128건의 재물 손괴, 83건의 공공기물 파손. 이하 셀 수도 없는 못된 짓 기타 등등.
와아, 터프하시네요.
자네는 이런 데 올 사람 같지 않은데.
저는 뭐, 그겁니다. 변호사가 절 엿 먹였죠.
…
하하, 진짭니다. 제 마누라 엉덩이에 붙어 있던 변호사 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오는 길이니까요.
남 말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선생님만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얼마나 하셨는데요?
하루.
-와. 구경하러 못 간 게 아쉽네요. 그러면, 그 전은요?
구멍을 파고 살았지.
그것 참, 진짜였으면 좋겠네요.
폭동을 피해서, 집 아래의 구멍에서 살았다고.
아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참신하네요. 그건.
그랬을지도.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너무 일찍 들어간 게 문제였지.
그게 문제가 되나요?
IE.
그건-문제긴 문제였죠. 하지만 치료제랑 백신이 나온 지도 오래고, 이제는 별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일찍 들어갔다고. 가족들이 앓던 게 유해 환경 필터까지 뚫고 들어온 포잔지 뭔지 때문이란 걸 알 때까진,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고.
10년 만에 바깥에 나와서, 가능한 한 그럴싸해 보이는 녀석들에게 부탁해서 약을 얻었어.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 아니면 내 눈깔 둘 중 하난 확실하게 맛이 간 거지. 하필 약에다 장난을 치는 놈들이라니.
허 참-유감이네요.
결국 나 혼자 나왔어. 이번엔 약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시간 낭비도 많이 했지. 영문도 알 수 없는 도시들을 돌고 돌다가 결국 출발지였던 이곳에서 꼬리를 잡고, 지금. 여기.
…
그러고 보니 말이야, 그쪽이 뭘 하던 사람인지는 아직-
거기 신사 분들, 수다 아직 안 끝났습니까?
…
…
저기,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뭔가?
그 오늘 하신 일 말인데요, 굉장히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128건이니 하는 거요.
아, 그거. 사실 나도 들은 거야. 좀 묘한 사람한테서.
*
“아무도-”
없다. 어찌된 영문인지 소녀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선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집 안을 천천히 조사하고 있다. 별다르게 눈에 띄는 것은 없다. 허나 오히려 그 점이 그의 의구심을 자극한다. 언뜻 보기엔 멀쩡한 사람 사는 집처럼 집기나 가구 따위가 배치되어 있지만, 정작 사람이 사는 집에 있어야 할, 집 주인 자체를 나타내는 ‘사유물’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건 그릇이나 가구가 다가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세세한 요구를 해결하는 개인 물품과,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자기만의 표시와 물건의 정리 방법 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디라도 멀쩡한 사람이 하루 이상 몸을 담고 살다 간 공간이라면, 다른 사람이 ‘어지럽혔다’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법칙으로 물들여진 공간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것이 이 집에는 전혀 라고 해도 문제없을 만큼 보이지 않는다. 부엌의 싱크에도, 침실의 침구에도 누군가 사용했었다는 흔적이 전혀 없다. 마치 진짜가 아닌, 소꿉놀이로 그럴싸하게 꾸며 만든 집 마냥.
“-이번엔 아래냐.”
선원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그 점만이 아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같이 아무도 없어야 할 집 안에서, 시각 이외의 방식으로 무언가가 느껴진다.
나무로 된 바닥을 밟는 지긋한 소리, 희미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온기, 비어있는 공간에서 때때로 맴도는 숨결. 이런 것들을 아마 ‘기척’이라고 부를 터이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많이 의존하는 시각 대신, 무의식 속에서만 익숙해져 있는 다른 감각들로만 타인을 느끼는 것은 역시 낯설면서도 기묘한 경험이었다.
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천장에서 나는 발소리를 듣고 2층의 침실로 올라가면, 현관 쪽에서 사람의 기침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역시나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에 멍하니 서 있노라면 귀 뒤쪽으로 희미한 온기를 띈 바람이 불쾌하게 와 닿는 것이었다.
일부러 이쪽의 주의를 끄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집 안에서 일상적으로 나는, 생활의 소음에 가깝다. 온기가 느껴지는 높이나, 소리에서 느껴지는 중량감으로 볼 때 조금 전까지 있던 소녀가 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이곳의 위치와 상태를 생각해 볼 때, 이 집과 그 소녀가 평범한 세상의 존재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져 볼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가설은 이 집이 IE라고 부르는, 생물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감염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
자세히 살펴 본 집과 안의 물건들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바닥과 벽을 비롯하여 모든 가구가 평범한 물건처럼 보이지만, 전부 나무로 되어 있다. 그것도 시원하고 축축한 살아있는 나무. 모양과 색깔은 감쪽같지만 그 촉감과 무게감만은 속일 수 없다. 놀랍게도 벽에 달린 전구 역시 빛을 내는 열매 비슷한, 엄연한 식물이었다.
어려서부터 못이 박히게 들어 온 IE의 특성에 따르면 그것은 생명체의 ‘희망’이라는 부분에 반응한다고 한다. 아까까지 부엌에 앉아서 들은 이야기에 미루어 볼 때, 이곳을 만들어 낸 희망이라는 것의 정체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집을 지켜다오.’
정말로 부탁을 한 건지도 확실치 않은, 그 약속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집을 꾸미고, 여기로 들어오려던 자들도 모두 배제했다. 그리고 언제 올지, 오긴 할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계속해서 기다렸다.
“…음?”
뭔가가 이상하다. 줄거리 자체는 매끄럽게 이어지는데, 이야기의 끄트머리가 말끔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과거와 달리 현재의 이야기에서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처음 이 집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다. 거기다 소녀는 선원을 보자마자 ‘아빠’라고 불렀다. 선원의 기억 어디를 뒤져 보아도 그가 그런 호칭으로 불릴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과 닮은 구석이 있는 얼굴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혹시 이건가?”
여전히 옆구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포. 이거라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것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문제없이 이어진 이야기의 여기저기가 마구 뒤집히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신경을 끊으려 할 때마다 귓가를 건드리는 알 수 없는 기척.
“-잠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움직여대던 사고의 퍼즐이 아주 우연히, 어떤 구석에 들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런 게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선원은 즉시 몸을 움직여 가 본 적이 있는 어떤 장소로 향해, 거기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고는 힘껏 부러뜨렸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