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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작가 : 에르노
작품등록일 : 2016.10.5

누군가 그를 미친듯이 원한다! 영문도 모른 채 쫒기는 소년, 그는 어째서 납치당하는가?
벗어날수록 옭아매오는 그물, 그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치명적인 음모가 정체를 드러낸다!

강대한 라니냐 제국의 볼모가 되어버린 도림 왕국의 태자, 상냥하고 친절하나 실은 비성숙한 자아에 고통받는 그는 제국을 적대하는 식민지 독립파에 의해 납치당하고 만다. 탈출을 시도하고 흉악한 적들과 추격전을 벌이며 이색적인 해적과 조우한다. 스릴 넘치는 모험과 풋풋한 사랑을 통해 자아의 성장을 일궈나가는 다크판타지.



표지는 핀터레스트 펌입니다.

 
01.고장난 마차바퀴
작성일 : 16-10-06 17:14     조회 : 541     추천 : 1     분량 : 8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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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이도가 무사할 무렵.

 

  “오빠!”

 

  이선화의 오빠, 이도는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눈을 떴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땀 흘리면서 막 이상한 소리를 냈어요.”

 

  이도는 눈을 크게 뜬 채 선화를 바라보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머리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냥 악몽을 좀 꿨어.”

 

  이도는 심호흡을 해서 안정을 찾았다. 익숙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마차의 흔들림이다. 그와 여동생 이선화는 지금 마차 안에 있다. 이도는 선화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창문에서 비추는 햇빛과 부딪쳐 부서지는 듯하다. 약간 분홍빛을 띠는 뺨이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오빠와 판박이였다. 여동생의 얼굴에서 붉은 뺨을 빼고 머리를 짧게 치고 턱을 좀 각지게 하면 누가 봐도 오빠일 정도이다. 마차가 덜컥거릴 때마다 선화의 은발도 찰랑거려, 라벤더와 라즈베리 향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덜커덩 덜커덩.

 

  근데 마차가 이렇게 소리가 컸나?

 

  이도는 선화의 미소가 만든 입가의 패인 골을 바라봤다. 균열처럼 보였다. 그것은 이도에게 자신과 선화 사이에 흐르는 공통점을 상기시켰다. 핏줄. 아버지의 핏줄. 더 나아가 도림 왕족의 핏줄.

 

  저주 받은 핏줄. 병든 왕가. 총명함과 수려한 외모와 맞바꾼 광인의 계보.

 

  한 명은 대신과의 회의 시간에 자신의 목을 칼로 갈라 죽었고, 한 명은 명절에 절벽에서 춤을 추다가 떨어져 죽었고, 한 명은 실수로 막내 하나만 남겨두고 자식을 자기 손으로 깡그리 죽인 탓에 신하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도는 백 년에 한 번 나오는 정상인으로 여겨진다.

 

  정말 그럴까? 이도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화는?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그 예쁜 얼굴 뒤에 광기가 꿈틀거리고 있을까.

 

  아니야, 이 생각은 그만 두자.

 

  이도가 말했다.

 

  “안 피곤하니?”

 

  “괜찮아요, 오빠. 그리고 보리스가 말해줬는데 이제 거의 다 왔대요.”

 

  그 말을 듣자 이도는 가슴이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림이 라니냐 제국에 패배한 이후, 이도와 이선화가 황제의 대자가 되어 제국의 성도로 이송되는 중이라는, 달갑지 않은 사실을 떠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도는 선화를 측은한 눈빛으로 보았다.

 

  “심심하지? 이제 여정 막바지라서 얘깃거리도 다 떨어져서.”

 

  “어머! 아니에요!”

 

  선화는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저는 오빠랑 있는 것만으로 안심되고 좋은걸요.”

 

  이도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귀여운 여동생이다.

 

  갑자기 마차가 덜컹하며 멈춰 섰다. 선화가 꺅 하고 소리 질렀다. 밖이 웅성거리더니 보리스 대장군이 마차 문을 열었다. 장발이 좌우로 흔들거리며 각진 얼굴을 가렸다가 보이게 했다가 했다.

 

  “다들 엉덩이 안 찧었습니까?”

 

  “저흰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인가요?”

 

  “마차 바퀴가 고장 났습니다. 오늘은 더 가긴 어려울 것 같군요.”

 

  바퀴가 망가졌다고? 왜 갑자기?

 

  “그럼 야영인가요.”

 

  이도는 창문 밖을 둘러보았다. 떡갈나무 숲 속이었다. 슬슬 해가 지는 터라 으스스한 느낌이 났다. 한 나무 밑에 하늘소의 시체가 으깨져있다. 개미가 잔뜩 꼬였다.

 

  “마차만 괜찮았다면 밤이 되기 전에 숲을 통과하고 마을에 머물렀을 텐데요. 황제를 만나 뵙기 하루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아닙니다. 저흰 괜찮아요.”

 

  보리스 대장군은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났다. 보리스 대장군. 그는 도림 왕국 패배의 일등공신이다. 그만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는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세심한 배려가 몸에 익은 그의 인품 덕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니, 이미 누그러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답답한 궁궐을 떠나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청량한 숨을 들이마셨을 때부터.

 

  “어쩔 수 없네. 그래도 삼림욕 한다 생각하지, 뭐.”

 

  “네.”

 

  선화는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하지만 침구를 펼치는 걸 보니 마음을 먹은 듯하다. 마차는 컸기에 두 명이 충분히 잘 수 있다. 애초에 취침도 감안해 만들었다. 이도도 이불을 깔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자기에 이른 시간이라 산책을 하고 싶었다. 이도가 잠시 떠난 사이 선화는 눕고서 한숨을 쉬었다.

 

  한 제국병이 다가오더니 고장 난 바퀴를 손보기 시작했다. 선화는 그 모습을 내려 보았다.

 

  “바퀴가 고장 났다고 하던데요. 왜죠?”

 

  “바퀴가 마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자님.”

 

  “제가 그렇게 무거워 보이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선화는 입술을 삐죽였다.

 

  “예비가 있잖아요?”

 

  “그게, 예비바퀴를 가지고 다니던 병사가 훨씬 예전부터 잃어버렸다고 실토했습니다. 질책 당할까봐 함구했다는 군요. 강등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잘난 제국병도 실수를 다 하네요. 바퀴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칠칠한 군대라니 말이에요. 덕분에 애꿎은 저랑 오빠만 고생하네요.”

  선화는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제국병은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인상을 썼다.

 

  말소리를 들은 이도가 다가왔다.

 

  “무슨 일 있나요?”

 

  선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어머, 오빠! 벌써 왔어요? 더 돌아다니시다 오시지요?”

 

  “그냥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제국병이 대답했다.

 

  “아아, 바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제국병들이 천막을 치고 아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위 병력만 약 삼백 명이었다. 그 중 몇몇은 불을 피워 취사 준비를 했다. 몇몇은 무기를 갈았다. 이도는 천천히 구경하며 숲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쯤이면 되겠지?”

 

  이도는 단검으로 땅을 팠다. 발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너비였다. 어느덧 깊이가 팔 하나 들어갈 정도 되었다. 이도는 그 안에 가시함정처럼 단검을 박아놓았다. 그 위에는 풀을 덮었다. 흙도 조금 뿌렸다.

 

  ‘헛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도 왠지 대장군에게는 이도의 걱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장군 자신이 별로 그런 위험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말했다가 헛물 킨다면 그만큼의 굴욕이 없다. 사실 누가 대자 호위 일행을 공격하는 모험을 할지 의문이기도 하다. 도림 왕국이? 남방의 군소 국가들이? 북방 유목민들이? 제국령들이? 대체 누가?

 

  작업을 마친 이도는 나무에 기대 쉬었다. 슬슬 밤이 될 무렵, 이도는 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이미 선화는 누워서 졸고 있다. 그가 들어보자 눈을 부비며 말했다.

 

  “어디 갔다 왔어?”

 

  “그냥 산책 좀. 난 신경 쓰지 말고 자.”

 

  “오빠도 빨리 자. 아하암.”

 

  선화는 입이 터져라 하품을 하고는 잠에 빠져버렸다. 이도도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품 안에 장검을 꼭 붙든 채.

 

 

 

 늑대 울음소리처럼 밤중에 울리는 비명소리.

  이도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길 바랐으나, 올 게 왔다. 이도는 장검을 뽑아들며 일어섰다. 선화도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일어났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조심해. 누가 우리들을 습격하고 있어.”

 

  이도는 귀를 기울였다. 화살소리가 난다.

 

  “엎드려!”

 

  이도는 선화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선화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화살이 핑 하고 지나갔다. 창문을 뚫고 온 것이다. 선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 우리, 어, 어떡해요?”

 

  곧이어 무기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 불이 타오르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벌써부터 비릿한 피 냄새도 풍긴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마차에서 나왔다. 아영지가 불타고 있다. 제국병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말들은 모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도망 못 가게 말을 집중사격 한 것이다.

 

  “대자님들, 괜찮습니까?”

 

  평상복에 무기만 든 보리스 대장군이 나타났다. 얼굴에 피가 튄 걸로 보아 이미 일전을 치룬 모양이다.

 

  “대장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누가 습격하는 겁니까?”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가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리스 대장군은 불타는 야영지를 향해 소리쳤다.

 

  “1분대부터 5분대까지는 오른쪽 숲으로 빠져 선화님을 성도까지 호위하라! 6분대부터 10분대까지는 왼쪽 숲으로 가 이도님을 호위하라! 모두 서둘러라!”

 

  이도는 보리스 대장군의 팔을 붙잡았다.

 

  “대장군, 대장군께서는 선화를 따라 가주세요. 부디 제 동생을 지켜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자, 어서 가라!”

 

  대장군은 선화의 팔을 잡고 오른쪽 숲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뒤를 여러 제국병이 따라붙었다. 선화는 숲 속으로 빠지기 전에 이도를 향해 외쳤다.

 

  “오빠! 꼭 무사해야 돼요!”

 

  “괜찮아, 꼭 만날 수 있어!”

 

  한 제국병이 이도 옆으로 다가왔다.

 

  “대자님, 어서 가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도는 제국병들과 함께 왼쪽 숲으로 빠졌다. 괴한 무리는 “대자를 잡아라!”라고 소리 지르며 추격해왔다. 저 놈들은 대자를 노리는 것인가? 대체 누가? 왜? 무엇을 목적으로 하든 너무 무모한 짓이다.

 

  “아아악!”

 

  이도 뒤에서 달리던 한 제국병의 목이 화살에 관통 당했다. 그는 피를 부글부글 내뿜으며 쓰러졌다. 곧이어 숲 여기저기서 숨어있던 괴한들이 나타나 공격했다. 하지만 제국병들은 하나같이 정예였기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괴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툭툭 튀어나오는 모습은 공포였다.

 

  “이도님, 이쪽으로! 컥!”

 

  이도를 따르던 마지막 제국병이 뒤에 칼을 맞고 죽었다. 결국 이도 혼자 남아버렸다. 선화는 무사할까? 내가 잡힌 대신 선화가 무사하면 좋을 텐데. 젠장! 이도는 입술을 씹으며 장검을 꺼내들었다. 괴한들이 그를 빙 둘러싼 채 천천히 다가왔다.

 

  “순순히 잡혀가진 않아.”

 

  이도는 검을 고쳐 쥔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울린다. 어둠 속에 안광과 칼날의 날카로움만이 보인다. 오른쪽의 한 괴한이 움직인다. 이도는 재빨리 자세를 그 쪽으로 향했다. 내리쳐오는 칼날, 검을 가로로 세워 막아낸다. 괴한은 칼을 옆으로 돌려 베기를 시도한다. 이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적의 칼이 허공을 가른다. 이도는 검을 세로로 돌려 찌른다. 놈의 오른 어깻죽지 깊숙이 들어간다.

 

  “크윽!”

 

  놈은 상처를 감싸 쥐고 신음하며 물러난다. 이도는 숨을 고른다. 정말 싫어했던 태자 수업 때에도 무술수련 만큼은 꼬박꼬박 매진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가망이 없지만, 맥없이 잡혀가주긴 싫었다.

 

  “하아!”

 

  왼 쪽의 한 괴한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온다. 적의 칼이 옆으로 베어 들어온다. 이도는 검을 세워 막아낸다. 위로 내리쳐온다, 가로로 세워 막는다. 아래로 비스듬히 오는 건 적당히 흘려보낸다. 이도는 도박해본다. 적의 왼쪽 사선으로 파고든다. 놈은 당황하며 검을 휘두른다. 다시 한 번 깊숙이 파고들며 검을 놀린다. 검을 쥔 적의 손이 뚝 하고 떨어진다.

 

  “끄아아악!”

 

  놈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다. 쉴 틈이 없다. 한 놈이 깊숙이 들어온 이도를 공격한다. 이도는 뒤로 물러난다. 이번 녀석은 공격의 무게가 다르다. 이도는 힘들게 막으며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난다. 지금이다. 이도는 앞으로 한 발자국 가며 검을 내리치는 척 한다. 놈은 약간 움츠러든다. 그러나 이도의 검은 바닥에 박힌다. 그리고 검으로 흙과 함께 나뭇잎을 놈을 향해 끼얹었다.

 

  “윽!”

 

  녀석은 눈에 흙이 들어갔는지 당황한다. 이도는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는다. 그는 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다.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있군.’

 

  이렇게 여러 명한테 둘러싸였는데 세 명이나 처리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한들 중 조금 계급이 높아 보이는 한 녀석이 동료들을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이도는 긴장했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동방의 태자님은 이걸 아시려는지 몰라.”

 

  “뭐라고?”

 

  그 자식은 이상한 말을 하더니 쿡쿡 웃으며 칼을 꺼내들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그 칼은 빛이 반사되지 않았다. 암흑 그 자체였다. 이도는 눈을 찌푸려서 더 자세히 봤다. 뭔가 진흙 같은 것이 검에 잔뜩 붙어있는 것 같다. 저게 뭐지? 이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술은 본 적이 있으시겠지?”

 

  놈은 또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성냥을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잠시나마 어둠을 몰아내고, 그 놈의 상처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이상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놈은 성냥불을 검에다가 갖다 댔다. 검은 순식간에 불에 감싸졌다. 순식간에 환해져서 이도는 눈을 돌렸다. 놈이 불붙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불은 단번에 사라졌다. 대신 검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실로 청명한 색깔이었다.

 

  이도는 입술을 까득 물었다.

 

  설마 저게 최근에 신대륙에서 발명되었다는 신기술, ‘마법’인가?

 

  이도가 잠시 혼란에 빠졌을 때, 녀석은 푸른 칼을 들고 쇄도해왔다. 이도는 황급히 막는다. 그러나 이변이 일어난다. 이도의 검이 단 한 번의 맞붙음에 두 조각 나버린 것이다. 이도는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그 괴한은 이도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이도는 헉 소리를 내며 몸을 구부렸다. 바닥에 쓰러지자 놈들이 와서는 그를 밟아대기 시작했다. 이도는 속절없이 맞으며 머리만은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로 가렸다. 고통스럽다. 이대로는 죽겠다 싶을 때, 놈들은 이도의 입에 재갈을 채우고 손과 발을 밧줄로 묶어버렸다.

 

  그러고는 이도를 어깨 위에 지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이도는 그저 그들에게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 높이 휙휙 지나가는 떡갈나무 잎과 가지들을 바라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무리한 전쟁에서부터? 바퀴가 고장 난 것부터?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고향이 그리웠다. 부모님이 그리웠다. 선화. 선화는 무사할까?

 

  이도는 흐릿하게 보이는 달을 응시했다. 저 달도 지금 꼴사나운 나를 보고 있을까?

 

  “여기로! 여기로!”

 

  괴한들은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꽤나 지났다. 30분은 지난 듯하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뛰고 있다. 슬슬 몸의 마비도 풀려간다. 별 의미는 없었다.

 

  “멈춰! 이쪽이다.”

 

  그렇게 30분이 더 흘렀을까. 괴한 일당은 드디어 숲을 빠져나왔다. 이도는 그제야 그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했다. 여기로 온 괴한들만 백 명이 넘어 보인다. 누가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이 대자 납치가 매우 중요한 듯하다.

 

  ‘바닷가?’

 

  그들이 있는 곳은 바닷가였다. 과연, 그들은 여러 척의 자그마한 배에 올라타고 있다. 해안에서 떨어져서 기다리고 있는 범선으로 갈 심산이다. 그 순간 이도는 누가 범인인지 깨달았다. 신대륙의 제국 식민지의 소행이다. 신대륙이란 제국 서쪽 대양 너머의 또 다른 대륙을 말한다. 그들은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벌이는데, 제국이 허용하지 않자 최근에는 과격해지는 양상이라고 들었다. 그렇군. 나를 미끼로 제국을 협상테이블로 올릴 생각이구나. 독립전쟁은 부담스러우니까.

 

  “또 다른 대자는? 어디 있나?”

 

  “소식이 없어. 잡으면 신호하기로 했는데.”

 

  “빌어먹을, 놓쳤군. 지체할 수 없어. 일단 출발한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도는 안도했다.

 

  작은 배들은 어느새 범선에 도착했다.

 

  “어이! 사다리를 내려줘!”

 

  그들은 사다리를 통해 작은 배에서 범선으로 올라탔다. 밧줄에 묶인 채 이도는 혼자 남았다. 조금 있다가 그들이 밧줄을 통해 이도를 끌어올렸다. 배 옆을 스쳐지나가며 이도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저 숲 어딘가에 선화가 있어. 부디 끝까지 잘 도망쳐야 해.

 

  이도는 바다를 바라봤다. 지금 한 인간이 위기에 놓였는데도 연안 바닷가는 평온했다. 평화롭다 못해 무심하게까지 여겨졌다. 마치 바로 옆자리에서 사람이 도끼로 머리가 쪼개져 죽었는데도 태연히 커피를 홀짝이는 무심한 인간이다. 별빛에 어그러지고 울렁거리는 바다의 표면은 이도를 니글니글 비웃는 듯하다.

 

  “됐다! 출발해!”

 

  이도는 선상에 처박혔다. 그들은 이도를 질질 끌고 가더니 창고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문 앞에 감시자 한 사람만을 세우고 나머지는 가버렸다. 깜깜했다. 오로지 배가 움직이는 소리만 났다. 창고라서 그런지 퀴퀴한 냄새도 났다. 쥐가 찍찍 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처량하다. 처량해도 너무 처량했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모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적국의 볼모 신세가 되더니, 이제는 웬 부랑배 놈들의 협상 카드 취급이다. 강해져야해, 강해져야해. 모국을 떠나고 여정 길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그 말. 강해져야했다. 더 이상 온실 속 화초로서는, 애로서는 있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적들에게 삼켜지고 말테니까…….

 

  하지만 억울함에 어깨가 떨렸다. 대체 내가 왜 아버지가 저지른 무모한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왜 신은, 운명은 나를 이런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고 간단 말인가. 이제 앞으로 어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한치 앞이 깜깜하다. 그나마 선화가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울분이 가시지는 않았다.

 

  황제도 증오스러웠고 이 납치를 꾀한 놈도 미웠다. 하지만 곧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봤자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아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소설 속의 마법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 건 입뿐이다. 근데 그것이 지금 무슨 쓸모가 있나. 이 밧줄 하나 못 푸는데.

 

  눈물은 그쳤지만,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되었다.

 

  운명은 전에도 그랬듯이 그에게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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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도처에 놓인 그물망 2016 / 10 / 16 710 0 8793   
13 12.소니아를 보다 2016 / 10 / 15 600 0 9697   
12 11.그 날 2016 / 10 / 14 836 0 12356   
11 10.루카를 위하여 2016 / 10 / 13 543 0 7296   
10 09.다시 찾아온 2016 / 10 / 12 1265 0 16436   
9 08.선화의 짖궂음 2016 / 10 / 11 528 0 6245   
8 07.선상의 파티 2016 / 10 / 11 617 0 5057   
7 06.가녀린 손 (1) 2016 / 10 / 10 704 1 7374   
6 05.헬라와 욕조 2016 / 10 / 9 543 0 6228   
5 04.선화와 황제의 문답 2016 / 10 / 8 467 1 9336   
4 03.이도의 펜던트 2016 / 10 / 8 693 1 5708   
3 02.납치선에서 (2) 2016 / 10 / 7 618 1 6595   
2 01.고장난 마차바퀴 2016 / 10 / 6 542 1 8418   
1 00.라벤더와 라즈베리 향 2016 / 10 / 6 720 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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