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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사랑할 수 없는 우리
작가 : 현서
작품등록일 : 2016.10.4

39살의 인아. 실패한 유학 생활의 업적으로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아직도 소박한 사랑을 꿈꾸고 있지만 얼마 전 실연까지 당했다.
그런 가운데 친구 선영의 결혼과 태라의 승진 소식은 인아를 더욱 움추려들게 만든다.
그런 인아에게 명문대생 훈남의 수현이 다가와 한없는 친절을 베푼다.
인아는 수현때문에 설레기도 하고, 잃어버린 청춘을 생각하며 슬프기도 하다.
수현은 왜 인아에게 다가온 것일까?

 
그가 떠난 자리에
작성일 : 16-10-06 11:56     조회 : 847     추천 : 0     분량 : 1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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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영의 결혼식은 좋았다. 신부는 서른아홉이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처럼 고왔고, 발이 넓은 선영이는 친구 선후배를 동원해 축가를 세 개나 준비했다.

 

 여고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김주한 선생님이 이젠 교장 선생님이 되어 주례를 맡아주셨는데, 난 아직도 선영이가 선생님과 연락이 닿으며 주례를 부탁할 만큼 친한 사이라는 게 더욱 놀랐다.

 

 혹 영주라면 모를까, 내가 기억하는 선영이는 선생님들과 친할 만큼 모범생도 우등생도 아니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게다가 신랑의 은사가 주로 맡는 주례를 선생님께 부탁하기 위해 선영은 시부모님의 눈총을 받았다는 얘기가 더욱 놀라웠다. 눈총을 줄지언정 이를 선영의 시부모님이 허락한 건 아마도 선영의 남편이 재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선영이는 우리에게 선생님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고, 선생님과 우리는 결혼식 피로연이 끝나고도 함께 차를 마셨다.

 

 태라와 영주는 선생님과 살아가는 이야기며 여고시절 이야기를 넘나들며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 자리를 지키는 시간이 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영주는 한 남자의 어엿한 아내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역할을 잘 해내며 살고 있었고, 태라는 독신을 선언한 지 오래였고, 대기업까진 아니라도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회사에서 나름 촉망받는 직원이었다. 선영이의 하이라이트는 오늘.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난 영원한 비정규직 학원 강사에 결혼은커녕 이렇다 할 연애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인생이다. 무얼 가지고 옛 은사님 앞에서 당당히 입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여고 시절, 우리 4인방 중에 선생님이 나를 가장 예뻐하셨다고 이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하는데, 난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고 때 우리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선생님에게 학생이란 1년에 적어도 수십 명이 지나가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렇게 선생님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아이들은 아니었기에 이 상황이 더 낯설고 신기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의 겁먹은 설렘과 그 때 영주, 태라, 선영이가 함께 있었던 기억은 난다. 그리고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했던 것까지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론 여고 시절에 대해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날, 난 미국에 뚝 떨어져 있었고, 다시 기억이 나는 건 미국 생활에 적응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이 친구들의 편지를 받고 펑펑 울었다는 것 밖에, 그리고 나에게도 이런 친구란 게 있구나 하면서 다시 살려고 미국 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했다는 것 밖엔. 어떻게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는지,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는데, 기억이 생생해야 맞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를 나의 부모보다 더 반겨준 건 이 친구들이었다. 나에겐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5년이 있지만 중요한 사건은 그 동안의 편지를 통해 다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한국에서 그녀들과 같이 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가끔은 나에게 말하지 않는 이 친구들만의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건 순전히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이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거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함께 하지 못한 5년이란 시간이 나에게 주는 착각일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을 배웅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집이란 나의 피곤함을 받아줄 작은 침대와 지루함을 달래줄 TV가 전부인 곳이지만...

 

 미국에서 돌아와서도 난 줄 곳 혼자 지냈다. 난 당연히 부모님과 인구가 있는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부모님은 내가 오기 전 이미 서울에 내 거처를 장만해 두셨고, 이곳에서 지내며 공부를 계속하든 일을 하든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국엔 IMF가 닥쳤고, 부모님은 환율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고, 난 미련없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어차피 원하던 미국행도 공부도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공부엔 미련이 없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그래도 미국생활 5년에 절로 얻어진 깊지 못한 영어실력으로 영어회화 학원에 취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에서의 삶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태라는 승진을, 선영이는 결혼을, 영주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고, 또 목표를 이뤄내며 살고 있는데, 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하며 나이를 먹는다. 그저 막연한 바람,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은데, 나에게 그것조차 너무 어려운 일이다.

 

 ***

 

 우리 4인방이 다시 모인 건, 선영이 결혼식 후 한 달이 지나서였다.

 선영이의 가뜩이나 마른 몸매가 한 달 사이 더 여의어 보였다. 나로선 한없이 부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좀 늦었지. 미안. 아휴 그 놈의 친척은 왜 이리 많은지. 별로 친해 보이지도 않더만 인사는 꼭꼭 챙겨야 한다네. ”

 

 “아직도 피곤해 보인다. 괜찮은 거야?”

 

 태라의 걱정 어린 말이었지만, 왜 쓸데없이 결혼은 했냐는 질책이 섞인 말투였다.

 

 “곧 적응되겠지. 비행기만 타도 기압 때문에 힘든데, 그냥 다른 별에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헉, 다른 나라도 아니고 다른 별이라니...그렇게 힘들어?”

 

 “뭐든 처음엔 다 그래. 넌 무인도에 혼자 갔다 놔도 끄떡 없을거야.”

 

 언제 어떤 상황이든 가장 따뜻한 말로 우리를 위로하는 건 영주의 몫이다.

 

 “무인도면 차라리 편하지. 내 맘대로 할 순 있잖아. 근데, 여긴 무인도가 아니라 다른 별이라니까. 내가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들이라니까. 외계인이 틀림없어.”

 

 가뜩이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선영이 별난 시집 식구들 사이에서 고충이 꽤나 큰가보다. 선영은 고개를 가로졌더니

 

 “아, 딴 얘기 하자. 근데, 어쩜 신혼여행 잘 다녀왔냐는 말이 한 마디도 없어?”

 

 “그냥, 너라면 어련히 잘 다녀왔을까 싶네. 이벤트 없으면 죽는 애잖아 너. 자랑이 하고 싶은가본데 그 얘긴 안 들을래.”

 

 결혼도 연애도 관심을 꺼버린 지 오랜 태라는 이렇게 단 번에 선영의 입을 막아 버렸다. 선영이는 자신만의 특유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더니, 쇼핑백에서 영양제 상자를 하나, 둘 꺼내 놓는다.

 “너희들한테 이런 거 돌리는 거 아닌데, 미안. 나 혼수하느라 너무 무리했어.”

 

 “하하, 안 그래도 우리 아들, 요즘 수학경시대회 준비하느라고 엄청 고생하는데, 잘 됐다.”

 

 선영이가 선물을 주면서도 민망해하자, 영주는 영양제를 냉큼 집어들며 과장되게 좋아라 했다.

 “야, 그 나이 땐 밤새도 끄떡없어. 아주 상전이 따로 없구나.”

 

 영주의 아들 사랑에 태라가 면박을 주자, 영주도 지지 않고 대꾸를 한다.

 

 “너도 자식 낳아 봐. 그렇게 안 되나.”

 

 영주의 아들은 신의 축복이다. 어렸을 땐 그저 아빠의 잘난 외모를 닮았거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좀 커서 보니 엄마의 머리까지 닮아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영주는 임신을 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신랑은 대학시절 같이 고시 준비를 하던 동기생이었다. 둘은 원래 친구 사이였고, 진호는 고시생 패션으로도 폼이 나는 훈남으로 여학생들에게 비교적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일찍부터 진호를 마음에 두었던 영주는 진호의 리포트를 도맡으며 진호의 친구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친구라는 명목으로 진호 주변에 나타나는 여자들을 관리하며 물리쳤고, 결국 진호 곁에 남을 수 있는 건 영주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영주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진호는 낙방했다.

 

 영주의 축하파티인지, 진호를 위한 위로 자리였는지 둘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셨다. 함께 밤을 보냈고, 영주는 임신을 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영주는 결혼식을 밀어붙였고, 진호는 처자식을 위해 고시를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진호는 갑자기 생긴 처자식 때문에 고시를 포기해야 했지만, 처자식으로 인해 생긴 굴레가 적성에 맞지 않는 고시공부를 강요당했던 굴레보다 가볍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영주는 진호와 결혼할 수 있었고, 진호는 고시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누구도 밑지는 결혼이 아니었다. 결혼이란 절대 행복이나 절대 불행을 가져다주진 않는가 보다.

 

 영주는 아이가 자라면 곧 다시 고시에 도전하려고 했지만, 연년생으로 아이가 생겨 버렸다. 아이들의 재롱이 느는 것만큼 영주의 꿈도 멀어져 갔다.

 

 잘 살고 있는 듯 보였다. 5년 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진호는 직장동료들과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결혼에 대해 하룻밤 실수가 낳은 대참사라는 표현을 자주 했고, 진호를 마음에 두었던 여직원이 이를 만만히 여기고 진호에게 접근해 꽤 심각한 사이로 발전했었다. 그 때 영주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이를 알게 된 여직원은 저 나름의 배신감을 느꼈던지, 영주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직접 알렸다. 영주는 그 충격으로 유산을 했고, 산부인과 입원실에 찾아간 우리 앞에서 당장 이혼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일단 몸부터 추스르라며 이구동성으로 영주를 말렸다. 그게 우리 방식으로 영주의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이었다. 영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고, 절대 이혼 같은 건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아이였으니까...

 

 병원을 나오면서 우리는 영주를 위해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선영이는 당장 ‘그년’을 찾아가 머리털을 다 뽑아 놓고 오자고 했지만, 태라는 ‘그년’에게 ‘행복 추구권 방해’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자고 제안했다.

 

 영주는 ‘그년’에게서 위자료 2천만원을 받아 내었고, 얼마 후, ‘그년’은 회사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우리는 승리의 전사나 된 듯, 잠깐 통쾌함을 느꼈지만, 왠지 뒷맛은 씁쓸해졌다.

 

 “위자료를 더 받았어야 하나.”

 

 선영이 아쉬움에 말했지만, 우리의 씁쓸함이 그게 아니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이겼다고 하지만, 애초에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고, 상처로 얼룩진 승리(?)였다.

 

 ‘그년’이 사라진 후에도 둘의 사이가 예전과 같을 리는 없었다. 방 세 칸짜리 빌라에 살던 영주는 아이들 학원을 핑계 삼아 방 두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커가는 남매를 한 방을 쓰게 할 수 없다고 하며, 방 두 칸을 남탕, 여탕으로 만들며 각방을 쓰는 생활이 2년이나 이어졌다.

 

 ‘그년’도 ‘그년’이지만, 자신의 결혼이 하룻밤 실수가 나은 대참사.

 

 진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물론 진호가 영주를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는 것은 영주도 알고 있다. 둘은 친구였고, 사랑은 영주 혼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호가 이 결혼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한다면 서로를 위해서 헤어지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주는 생각한다.

 

 자신을 진정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건 영주만의 마음일까? 모든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영주는 2년을 고민한 끝에 용기내어 진호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진호는 결혼 후 처음으로 영주 앞에서 울었다. 처자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가 무거웠던거지 영주와의 결혼을 후회한 적 없다고 했다.

 

  4인 가족이생활하기엔 너무나 저렴한 자신의 월급이 딱 자신의 값어치인가 하고 초라함을 느낄 때, 승진 시험에도 물 먹고 마음이 더 추락했을 때, ‘그년’이 추락한 진호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고시 공부에 힘들어하는 진호에게 영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은 사랑 받는 것에 익숙했지 사랑같은 것 알지도 못하고, 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며 진호는 처음으로 무너지는 마음을 영주에게 고백했다.

 

  결혼 후 아이들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살던 영주는 진호의 고백을 듣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진호를 질책하기보다 그동안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 진호가 자신과의 결혼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얼마 후, 영주는 다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해 공부방을 열었다. 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영주는 공부를 가르치는 재주도 숨어있었던지 영주의 공부방은 비교적 수월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게다가 공부 잘하는 아들의 존재가 시너지를 발휘하며, 3년이 지난 지금은 동네에서 꽤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선영이 매운 음식이 당긴다고 해서 우리는 낙지볶음을 먹으러 갔다. 선영이 가장 매운 맛으로 주문하는 바람에 혀가 다 얼얼했다.

 

  “아, 나 이거 먹으면 설사하는데.”

 

  선영은 투정을 하면서도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그냥, 적당한 거 시키지.”

 

  태라도 힘겨운지 선영을 타박한다.

 

  “아참, 현성씨는 잘 있어? 선영이 결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안부도 잊어네.”

 

  가장 여유롭게 낙지 맛을 즐기는 영주가 묻는다. 가슴에 꾹꾹 눌러둔 현성의 이름을 듣자, 코끝이 찡해졌다.

 

  “아, 너무 매워.”

 

  난 대답대신 화장실로 뛰어갔다. 현성이란 이름을 듣자, 한 달 여 참아왔던 그리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젠 실연을 당해도 울지 않는 나이가 되어 버렸나, 그것마저 서러웠는데, 다행히 난 울고 있었다.

 

  빈손으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바람에 눈물 자국을 휴지로 대충 닦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본 친구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연락 두절 끝에 문자 한통으로 이별통보를 받았노라고 하자, 모두 어이없어하긴 마찬가지였다. 옆에 앉은 영주가 내 등을 쓰러 앉아준다. 영주의 손이 따뜻하다.

 

  “야,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남자를 믿냐?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까지 신들도 많은 데 믿을 게 없어서 남자를 믿냐구. 사이비 종교보다 더 못 믿을 게 남자라구.”

 

  선영이 재빨리 상황을 종결지으려 나선다.

 

  “얘는 갓 결혼한 새색시가...”

 

  영주가 타박을 했지만, 선영이는 앞으로도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려는지 당당한 표정이다. 나의 눈물 바람에 분위기는 가라앉고 우리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자리를 파했다. 태라가 굳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노라는 걸, 걷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겨우 사양했다.

 

  미쳐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태라 앞에서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슬픔 쯤은 혼자 닦아내야 할 것 같다. 혼자 걸으면서 현성과의 추억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곁에 있어도 그리웠던 그가 지금 내 곁에 없다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으려면 잊어야 하는데, 막상 그를 잊는다면 마음조차 텅 비어 버릴 것 같아 그것조차 겁이 난다.

 

  태라와 영주와 나는 남자를 믿었었다. 그리고 한 번 씩은 아니, 나는 여러 번 배신을 당해봤지만, 남자를 믿지 않은 선영은 남자에게 배신당한 적이 없다. 선영은 앞으로도 계속 남자를 믿지 않고 배신도 당하지 않을까? 믿지 않아야만 배신당하지 않는 거라면, 그것밖에 답이 없는 거라면 선영이의 가치관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

 

  하루하루는 지루하지만, 한 달, 일 년은 빠르게 흘러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그렇게 느끼는 걸 보니 시간에도 가속도가 붙는 모양이다.

 

  모든 강의가 끝나고 지친 몸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후두둑 비가 내리며 미처 떨어지지 못한 봄꽃 잎들이 함께 낙하한다. 어떻게든 비를 피해보려고 가방을 머리에 이었는데, 포근한 그림자가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수현이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다.

 

  일주일 전, 고급 회화반에 등록해 단 하루 만에 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녀석. 게다가 내로라하는 명문대생에 외모도 준수하다. 잠시 보기만 해도 피로가 사라지는 얼굴이다.

 

  뉘 집 아들인지, 비용을 지불하면서라도 보고 싶은 얼굴인데, 내 수업에 찾아와 강의를 듣고 있으니, 지루한 삶에 약간의 행운을 얻은 거 같다. 게다가 나를 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아니, 이건 아닐거다. 수많은 연예인들도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우연히 비를 피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겠지만, 기분이 꽤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주는 멋진 남자. 아니 녀석.

 

  “밤에 비 올 거라고 했거든요. 일기예보도 안 챙기나 봐. 별로 할 일도 없어 보이 시는데.”

 

  수현의 말투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다. 이건 잘 생긴 남자들이 누리는 특권인가. 나같은 여자가 많은 세상은 참...

 

  “집이 이쪽인가봐.”

 

  “아뇨. 학원 앞에서부터 따라왔어요.”

 

  “오왜?”

 

  그래도 여태껏 태연함을 유지하려 약간은 노력했는데, 따라왔다는 말에 내 목소리가 경련을 일으킨다.

  수현도 당황한다.

 

  “아, 그게, 질문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지. 실망하는 자신이 문득 우습게 느껴진다.

 

  “질문? 다음 시간에 하지... 뭔데?”

 

  “아, 사실은 그게 아니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이거 가져가요.”

 

  수현은 우산을 내 손에 거칠게 주어주며, 뒤돌아 뛰어가 버린다. 우산을 돌려주려 불러봤지만,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다. 나이 많은 여자 나보다, 젊은 남자 지가 비를 좀 맞는 게 낮겠지. 단순한 호의란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아진다.

 

  버스에서 내리며 우산을 펼쳐 들려하니 비가 이미 그쳐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우산을 펴 든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밤공기는 시원했고, 우산 속은 따뜻하다.

 

  이틀 뒤, 수현이 있는 강의실이 부담스레 느껴졌다. 회화 강의 15년 차, 그동안 미남 수강자는 많았지만, 난 강의 시간 만큼은 프로다운 면모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한다.

 

  꿈에 바라던 직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 밥줄 아닌가. 지금의 이 상황은 주책 그 자체이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강의가 끝나고 수현이 내게 다가온다.

 

  “아, 우산? 교무실에 있어. 따라 와.”

 

  일부러 태연한 척 말을 하며 앞 서 걸었다. 교무실에서 우산과 가방을 챙겨 나와 수현에게 우산을 돌려주었다.

 

  “고마웠어.”

 

  “계속 비가 왔으면 나한테 엄청 고마워 했을텐데. 비가 오다 말던데요. 괜히 짐만 됐겠다.”

 

  우산을 받아들고도 수현은 나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그래도 고마웠어.”

 

  “그래도 고마우면 영화 보러 가요.”

 

  뜻밖에 제안이 당황스러웠다. 좋다고 해야 할 지, 거절을 해야할 지, 핑계를 대야할 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난 좀 피곤한데...”

 

  “내일 토요일인데 집에서 쉬면되죠. 어차피 데이트할 것도 아니잖아요.”

 

  수현은 잠깐 주저하는 듯싶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이미 영화표까지 예매해 논 상태였다. 광고를 보고,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토요일 오전에 태라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보려했었는데, 금요일 늦은 밤, 멋진 녀석과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본다는 건, 내 삶에 없던 일이라 어색하지만, 피로를 참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보다는 별로였다.

 

  “음,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네요.”

 

  상영관을 나오며 말을 먼저 꺼낸 건 수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기억날 거 같아요. 이 영화. 우리가 처음 함께 본 영화니까..”

 

  주책없이 수현의 말에 가슴이 쿨렁한다.

 

  “무슨 말이야?”

 

  혹시나 수현이 나의 마음을 눈치 채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감추려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

 

  “그냥, 그렇다구요. 왜 화난 것처럼 말해요?”

 

  영화를 함께 본 이후, 수현은 강의에 나타나지 않았다.

 

  “너 말하는 게 완전 선수 같아. 취향이 아주 다이나믹 한가보구나.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부모님이 아시니?”

 

  내가 너무 과민하게 굴었던가? 느닷없이 다가오는 녀석을 보며, 방망이질 하는 자신의 가슴에 채찍질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돼 버렸다.

 

  “제가 뭘요? 부모님께 말하진 않았지만 눈치는 채고 계실 거예요.”

 

  “우리가 함께 처음 본 영화라 기억에 남을 거라는 게 안전 작업 멘트잖아.”

 

  “작업멘트 아니고 그냥 진심인데.”

 

  나의 공격에도 뻔뻔하게 대꾸하는 녀석에게 난 할 말을 잃었었다. 그러고도 뻔뻔히 집에 바래다준다는 아이를 뿌리치고 집으로 왔다.

 

  처음 함께 본 영화라는 건, 두 번째, 세 번째도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단 얘기다. 남녀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건, 연인이 아니라면 나의 조악한 상상력으로는 달리 생각나는 관계가 없다. 뭐 하자는 거지? 주말에 데이트 할 것도 아니라고 했다.

 

  녀석은 나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는 거 같다. 혹 내가 얼마 전 실연당한 걸 알고 장난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못된 녀석 같지는 않았다. 선영이는 내가 사람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며 늘 구박하지만 말이다.

 

  모성 결핍으로 인한 성격장애가 독특한 취향으로 나타나는 걸까? 녀석의 낯빛에서 그런 궁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수강생 카드를 찾아 전화를 걸려다가 그냥 둔다.

 

  회화반에 등록해 일주일 만에 안 나오는 사람은 꽤 많다.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산을 씌워 주고, 영화를 함께 보고 사라지는 남자는 없었다. 자꾸 그 아이가 신경 쓰인다. 녀석이 내 말에 화가 나 혹 밀당을 하고 있는 거라면 녀석의 작전은 성공인 셈이다.

 

  지루하나 바쁘나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실연을 당한 후에도 시간은 흐르지 않았던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퇴근시간 학원입구에 수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반가움에 큰소리로 녀석을 부를 뻔하다 간신히 참았다.

 

 “왜 여기 있어?”

 

 냉랭한 척 말했지만, 목소리가 방정맞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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