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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차우의 마을 이야기
작가 : 치르비
작품등록일 : 2019.10.9

꿈능력자 차우에게서 벌어지는 기묘하고 이상한 사건들.
믿을 수 있는 것은 친한 친구와 시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알려주는 꿈들 뿐.
과연 그는 평범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2화
작성일 : 19-10-09 14:45     조회 : 243     추천 : 0     분량 : 16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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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우는 잠시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어둠으로 둘러싸여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차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전에는 무엇을 했었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억은 흐릿한 안개처럼 뿌옇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기억을 파헤쳐봤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떠올리기를 포기하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모든 것이 어둠이었고, 발로 밟는 그곳이 땅이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방향이 의미가 없었지만, 차우는 뭔가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걸었다. 그러나 어둠은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차우는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빛줄기조차도.

 

 ‘여기가 어디지?’

 

 다행히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무심코 팔을 움직인 그는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을 내려다보자, 나무껍질이 묻은 조경용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때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심부름을 한 뒤에 다시 마리 할머니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지시에 따라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 가기 전, 마지막으로 잔가지들을 처리하여 겨울에 대비하기 용이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차우는 사틴이 가지치기가 어렵다고 툴툴거리는 것까지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자신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서있었다.

 

 “꿈이구나.”

 

 차우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금방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꿈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한 번 잠에서 깨면 밤이 될 때까지 절대 다시 잠들 수 없는 그가 유일하게 ‘낮에 잘 수 있는’ 순간이었다.

 

 차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꿈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둠으로 가득 찬 꿈속으로 한줄기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차우는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모든 것이 어둠이라 방향이 의미가 없었지만-꿈의 윗부분에 난 작은 구멍에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구멍을 중심으로 점점 균열이 생기며 더 많은 빛이 흘러들어왔고, 작은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차우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한때 구슬피 울던 누군가의 마음과 같이, 그렇게 우수수 무너져 제 몸뚱이로 가리고 있었던 것을 차우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었다.

 

 빛 때문에 잠시 눈을 찌푸린 차우는 이윽고 드러난 풍경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둠으로 가득하던 무한한 공간은 어느새 어떤 방으로 변해있었다. 차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은 총 두 개였는데, 하나는 차우 자신은 창문을 등지고 서있었고 또 하나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침대 옆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 바로 오른편에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고, 그 책상 뒤로 옷장이 하나 있었다. 분명 자신의 방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더 넓고 여유로운 방이었다.

 

 차우는 뒤돌아 창문을 살펴봤다. 밖에서는 깜깜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맞부딪히는 빗줄기로 하여금 바깥의 날씨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같아.’

 

 차우는 창문 유리를 만지며 그리 생각했다. 창문에서 흘러내리는 연약한 빗물, 찬기가 올라오는 창문 유리, 작은 흠집을 제외한다면 매끈하기 그지없는 나무 창틀. 어디선가 허브 냄새가 흘러들어왔고, 숨을 쉴 때마다 입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공기의 맛은 차우를 당황시킬 정도였다. 오감으로 느끼는 꿈속 세상은 실재와 별다를 바가 없을 만큼 현실적이었다. 이토록 현실적인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차우는 그간 많은 꿈을 꿔왔지만, 이토록 현실감 넘치는 꿈을 꾼 적은 없었다.

 

 그가 꿈의 현실성에 감탄하고 있을 사이,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우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그 인물은 언제부턴가 침대 근처에 주저앉은 채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차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로브로 가리고 있어 외모도 성별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몸집이 굉장히 큰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에 그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차우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그’는 차우보다 훨씬 더 컸다.

 

 로브를 뒤집어 쓴 인물은 상당히 다급해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는 몸짓에서부터 다급함이 느껴졌고, 손은 자꾸만 침대 쪽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 인물은 문 너머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망설임 없이 뒤돌아 창문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차우가 서 있는 쪽이었다.

 

 피해야 해. 차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그 인물은 정말 빠르게 창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로 피할 틈도 없이 차우는 그대로 그 인물을 맞이해야만 했다. 어찌할 줄 모르던 차우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차우야?’

 

 눈을 감은 상태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은 갑자기 찾아왔고, 어느 순간부터 차우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 건 그때였다. 웅웅거리며 울리기는 했지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차우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심한 허브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어둠은 그의 시야를 자꾸만 어지럽혔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꿈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차우는 느낄 수 있었다.

 

 “야, 차우!”

 

 사틴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차우는 눈을 번쩍 떴다. 속을 뒤집어놓던 짙은 허브 냄새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시야는 이제 안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멍하니 주변을 살펴봤다. 나무 몇 그루가 높은 담벼락과 평행하게 일렬로 놓여있었고, 드문드문 잘려나간 가지들이 땅바닥에 즐비했다. 자신은 조경용 가위를 든 채 그 가운데에 서있었다. 차우는 고개를 돌려 사틴을 쳐다봤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우는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잠시 후 천천히 손을 든 차우는 그대로 사틴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야! 왜 때려!”

 “현실 맞네.”

 

 사틴의 머리를 때리면서 생긴 얼얼함에 차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넌 내가 무슨 동네북인 줄 아냐?”

 “나 어떻게 된 거야?”

 “가지 치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어. 처음에는 나도 몰랐는데, 몇 번을 불러도 답이 없길래 불러 본거야. 혹시 꿈이라도 꾼 거야?”

 

 사틴의 말에 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꿨어.”

 “오늘 아침?”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가지부터 치자.”

 

 사틴은 연신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차우는 계속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가지를 치던 도중에 갑자기 꿈속으로 들어간 자신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꿈의 생생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꿈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던 것일까?

 

 

 

 ****

 

 

 

 차우에게 있어서 가지치기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작업이었다. 용돈벌이도 할 겸, 가끔씩 다른 집에 가서 가지치기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틴은 가지치기를 내내 애를 먹었다. 가지 하나를 자르는데도 차우에게 심각하게 물어볼 정도로 망설였다.

 

 “차우, 이거도 잘라야 돼?”

 “응. 대신 그 위에 있는 가지는 자르지 않게 조심해서 잘라.”

 

 차우의 말에 사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가지를 잘랐다.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할 건 하네.’

 

 차우는 미소를 지었다.

 

 

 

 ****

 

 

 가지치기가 끝낸 뒤, 차우와 사틴은 주변을 청소하고 마리 할머니를 찾아갔다. 부엌에 난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바로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두 사람이 방문했을 때 그대로였다. 일견 수수해 보이는 디자인이었지만, 먼지 하나 없는 때깔 고운 서랍장-차우는 꽤 유명한 장인에게 주문제작해서 만든 것이라고 들었었다.-과 신성한 동물인 셴이 그려진 매끈한 도자기. 지금은 구하기 힘든 식물들이 쭉 나열되어있었고, 벽에는 고풍스러운 풍경화 한 점이 걸려있었다.

 

 마리 할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최근 날씨를 감안하여 털실로 짜인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 아래로 같은 색상의 펑퍼짐한 두꺼운 치마는 발을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얼굴과 손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영광스럽게 빛나는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박혀있었다.

 

 “할머니. 부탁하신 가지치기, 모두 끝냈습니다.”

 

 거실로 들어간 차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리 할머니는 차를 마시다 말고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봤다.

 

 “뭐야, 벌써?”

 “네.”

 “설마 내가 안 본다고 대충 한 건 아니겠지?”

 

 마리 할머니는 그들을 째려봤다. 사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가서 확인해보셔도 되요.”

 

 사틴의 당당한 태도에도 마리 할머니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차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언제나 사람을 해치는 법이었고, 사틴이 지금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차우는 여러 번 가지치기를 해왔지만 사람의 성향에 따라 가지를 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우 자신은 언제나 가지를 조금씩 쳐내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뭉텅뭉텅 시원하게 자르는 걸 좋아했다. 마리 할머니가 어느 쪽 ‘취향’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하는데······. 일단 늘 하던 대로 조금씩 자르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벼락을 맞을지도 몰랐다.

 

 한참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 할머니는 좀처럼 그 뜻을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거실을 나온 그녀는 부엌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향했다. 사틴과 차우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볼 때, 나무를 살펴보던 마리 할머니가 말했다.

 

 “음······. 공짜라고 해서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다듬어놨군. 이 정도면 이번 겨울은 잘 날 수 있겠어.”

 

 그 말에 차우와 사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도······.”

 “아니, 잠시만. 기다려.”

 

 뒷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던 사틴이 말을 꺼냈지만,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마리 할머니가 말했다.

 

 “아직 너희들한테 부탁할 게 더 남아있어.”

 

 사틴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차우는 굳이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무엇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마리 할머니였다. 그는 혹여나 할머니가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을까 긴장했다.

 

 마리 할머니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녀가 말할 때까지 뒤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사틴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서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마리 할머니가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마리 할머니는 그리 말하면서 뒤돌아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오늘 왜 저러시지?”

 

 그때 사틴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저러시는 거 어디 한 두 번이야. 일단 따라가자.”

 

 역시나 작게 투덜거리는 차우의 말에 사틴은 겨우 표정을 폈다. 어쨌든 짜증을 느끼는 건 본인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멋진 동료가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마리 할머니는 올해 68세였지만 걸음걸이에서는 여전히 젊었을 적만큼이나 힘이 넘쳤다. 넓은 보폭으로 금세 집안으로 들어간 마리 할머니는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아직 차가 남아있는 잔을 치우고, 자리에 앉은 뒤 두 사람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차우와 사틴은 잠시 서로를 멀뚱히 쳐다봤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말 안 들려? 빨리 앉자!”

 

 마리 할머니가 크게 호통을 치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재빨리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에 마리 할머니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 말고 또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고?”

 “네.”

 “어디?”

 “제리 할아버지네 집이요.”

 

 차우가 답했다. 그러자 마리 할머니는 곧장 눈을 치켜떴다.

 

 “그 징그러운 영감탱이한테 간다고?”

 “그······징그럽다는 말은 조금······.”

 

 사틴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징그러운 게 아니면 뭐야. 나이를 그렇게 처먹었는데도 젊어 보이면 징그러운 거지. 게다가 그 몸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지 아니?”

 

 그러면서 마리 할머니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차우와 사틴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마리 할머니를 상대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국 듣지 않으시리라.

 

 “그나저나, 그거 말고. 내가 아까 심부름 시킨 거 기억하지? 내가 뭘 사오라고 시켰지?”

 

 그 말에 차우는 재빨리 머리를 돌렸다. 조경용 가위, 홍차티백 세트.

 

 “조경용 가위하고 홍차티백 세트요.”

 “그래. 조경용 가위는 이번에 가위가 부러져서 부탁한 거였고, 홍차티백 세트는 이틀 후에 내가 열 작은 모임에 쓸 예정이지.”

 “그런데 그게 왜······?”

 

 사틴이 물었다.

 

 “사실 그 홍차티백 세트를 내가 많이 사려던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 자네들한테 부탁할 것도 있고.”

 “어떤 건가요?”

 “재촉하지 말고 내 말 듣기나 해.”

 

 차우의 말에 마리 할머니는 짜증을 내듯 툭 내뱉었다. 차우는 바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 할머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모임, 나하고 몇 년 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한 부부를 위한 거라네. 특히 아내 쪽을 위해서 하는 거야. 혹시 1년 전부터 벌어지는 연쇄 납치사건 알고 있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쇄 납치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다른 마을에서 어떤 청년이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 청년은 가족들과 집에 있었다. 그 누구도 청년이 갑자기 사라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도 그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사건의 첫 번째 피해자였던 청년은 집에 가만히 있었음에도 ‘납치’를 당했다.

 

 처음에 경찰은 이 사건을 실종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납치라고 하기에는 현장이 너무 깨끗했고, 어디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목격자가 한 명 나왔는데, 그는 청년이 사라지기 불과 몇 분 전에 누군가를 따라가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했다. 이후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비슷한 진술이 쏟아지자 이것을 납치 사건으로 바꾸었다.

 

 “그 부부는 납치 사건에서 가장 최근에 납치를 당한 피해자의 가족이야.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벌써 4개월이 다 됐는데도 아들을 찾을 수가 없어서 지금은 거의 포기한 상태이지. 처음에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최대한 사람을 많이 풀어서 이 잡듯이 마을을 뒤졌어. 하지만 결국 나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그 말을 하면서 마리 할머니 눈빛이 미약하게 변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차우는 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무력함. 눈빛이 마리 할머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네. 내가 조사한 정보와 영주 쪽에서 조사한 정보를 가지고 나름대로 추리도 해봤고, 마음이 급해서 그 점술가인가 뭔가 하는 놈들까지 찾아가봤어. 하지만 소용없었지. 내 재력으로도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었어. 두 사람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너희는 알겠니? 나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겠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지만 결국 그 아들을 찾지는 못했지.

 

 그래도 부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 싶었어. 이대로 가만히 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거든. 적어도 위로라도 해주기 위해 계속 내가 여는 모임에 부르고 있었지. 특히 아내 쪽은 아들이 납치된 이후로 계속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어. 내가 모임에 계속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방에서 폐인처럼 생활했을 거야.”

 

 “그래서 저희한테 부탁하실 거라는 게······.”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고, 시간은 점점 촉박해졌다. 거실에 난 큰 창문을 통해 점점 서산너머로 가라앉는 태양이 그들을 재촉했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지만 제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했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자네들도 바쁠 텐데 시간 뺏어서 미안하네. 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네.”

 

 마리 할머니는 다리를 꼰 채,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이 진중함으로 반짝거렸다.

 

 “네로를 만나거든 전해주게나. 그 부부의 아들을 찾아달라고.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너희 모임에 정식으로 신청하는 의뢰야.”

 

 

 

 ****

 

 

 

 “아니, 그게 말이 돼? 할망구도 못 찾은 사람을 우리보고 찾으라고?”

 “마리 할머니는 무슨 생각이신건지······.”

 

 차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사틴의 말을 무시하고 넘겨들었겠지만, 지금은 그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점점 서산 너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바람은 습기 하나 없는 메마르고 찬 기운을 그대로 품은 채 세상을 누볐다. 차우는 옷깃을 바짝 세워 최대한 바람을 막아봤지만, 이미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하지만 마리 할머니께서 정식으로 의뢰를 신청하셨잖아. 우리가 거절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라고. 되든 안 되든 일단 네로 누나한테 말해야 해.”

 

 그 말에 사틴은 짜증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차우의 말은 어찌되었든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신청된 의뢰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의뢰는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한 집 당 하나씩만 신청하기로 되어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원보상 모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것으로서, 모임에서 명시한 규칙이라기보다는 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지키는 암묵적인 룰에 가까웠다. 물론 변수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고 네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마리 할머니의 경우가 그러했다. 네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 절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하지 말고 모두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하여튼 귀찮게 만드시는 데는 선수시라니까.”

 

 사틴이 말했다.

 

 “어쨌든 빨리 가자, 사틴. 제리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시겠다.”

 “이미 늦은 거, 천천히 가자고.”

 “할아버지한테 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냐?”

 

 차우의 말에 사틴은 씩 웃었다.

 

 “할망구 핑계대면 분명 봐주실 거야. 걱정 말아.”

 “어떻게 그 머리는 농땡이 피우는 데만 그렇게 잘 돌아가는지 원······.”

 “이건 농땡이가 아니야! 합법적인 지각일 뿐이지.”

 

 차우는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사틴에게 자신과 같은 기준을 내세운 게 잘못이기는 했다.

 

 ‘그래. 내가 이놈한테 뭘 바라겠어······.’

 “아 그래, 맞아. 그리고 너 아까 꿈꿨다고 했지?”

 

 갑작스럽게 화제가 전환되기는 했지만 차우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쪽잠도 못 자는 놈이 꿈은 정말 더럽게 잘 꿔요.”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꿈이 내 마음대로 꿔지는 것도 아니고.”

 

 차우는 그리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꿈이었는데?”

 

 그 말에 차우는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며 꿈의 정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꿈의 풍경, 누군가의 방, 그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덩치 큰 사람에 대해. 특히 차우는 꿈의 현실성과 로브를 쓴 남자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 꿈이 그렇게 현실적이었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사틴이 물었다.

 

 “응. 내가 꿈을 많이 꿔왔지만, 그렇게 현실감 넘치는 꿈은 처음이었어. 그 방에 있는 창문에 작은 흠집이 나있다는 것까지 기억할 수 있을 정도니까.”

 “뭐가 그렇게 자세해······. 그럼 그 남자는 누군지 알아?”

 

 차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은 못 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대신 덩치가 좀 컸던 건 확실해.”

 “더 기억나는 건?”

 “허브 냄새도 났어.”

 “허브 냄새?”

 

 사틴이 되묻자 차우는 그렇다고 답했다.

 

 “꿈이 끝나기 직전에 심한 허브 냄새를 맡았어. 하지만 어떤 허브인지까지는 모르겠어. 냄새가 막 여러 개가 뒤섞여있었거든. 엄청 심했다니까?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으니까.”

 “난 상상도 안 된다. 꿈속에서도 구역질을 할 수 있는 거야?”

 “일단은 그럴 수 있는 것 같아. 내가 그랬으니까.”

 

 차우는 그리 말하며 턱을 매만졌다.

 사틴은 그를 쳐다봤다. 그는 생각에 깊게 잠기면 버릇처럼 턱을 매만지곤 했다. 사틴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잖아.”

 “하지만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 뭘 하려고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걸. 내가 뭘 보려고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일어났으니까.”

 “네 꿈의 정확도가 얼마나 높은지는 내가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아. 그때마다 너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어떤 징조를 느꼈어. 내가 그거 덕분에 피해간 위험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러니까 정말로 네가 말한 대로 꿈에서 본 게 벌어진다면, 분명 그 전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네가 눈치 챌 수 있는 징조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사틴은 그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꿈은 그에게 정말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했다. 차우의 꿈은 다른 모든 꿈들과 다르게, 주변에 어떤 큰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마다 조용히 경고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차우가 꿈을 기억하기 시작한 건 아주 어렸을 적부터였다. 꿈은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차우가 스스로 원한다면 꿈속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었고,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할 수도 있었으며, 꿈이 가진 마법의 힘으로 무섭고 강력한 존재로 둔갑할 수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 꿈은 놀이와 유희로 가득한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꿈이 본격적으로 예지몽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을 때, 꿈이 가진 모든 환상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처음으로 예지한 사건은 형이 창문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악몽으로 생각했으나, 꿈에서 본 대로 모든 일이 벌어지자 어린 차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뒤로 차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은 틈만 나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했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꿈이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꿈은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정보의 원천지였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차우는 어린 마음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까지 목격하곤 했다.

 

 그걸 깨달을 즈음부터 차우는 꿈을 드문드문 꾸게 되었다. 그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꿈이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무엇을 볼지 몰라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자신이 본 그대로 벌어진다는 건 정신건강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차우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꿈을 억누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만큼 꿈을 자주 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 꿈이 과거의 것인지 미래의 것인지 잘 모르겠어. 나는 전혀 모르는 곳이었으니까.”

 “정말로 본 적 없는 곳이었어?”

 

 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 항상 미래만을 보여주는 것은 않았다. 두 사람은 차우의 꿈이 가끔 과거의 어느 사건을 그대로 재현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좀 곤란하기는 하네······. 어딘지도 모르고, 그 사람이 뭘 하려는지도 모르니 말이야.”

 “게다가 이번 건 좀 이상해. 뭔가······확실하지가 않아. 아침에 꿨던 꿈도 그랬고.”

 

 사틴이 아침에 꿨던 꿈에 대해 좀 더 캐묻자, 차우가 천천히 말했다.

 

 “아침에는 내가 중간에 깨서 다 보지는 못했어. 기억나는 거라곤 어두운 밤인데다가 숲이었는데, 내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뿐이야. 숲이 워낙 우거진데다가, 그 사람이 들고 있는 등불도 겨우 앞길 밝힐 정도로 약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도 로브를 쓰고 있었어.”

 “아까 가지치기 하다가 꾼 꿈에서처럼?”

 “응. 머리부터 발끝까지.”

 “혹시 같은 사람이 아닐까?”

 

 사틴이 말했다.

 

 “네가 연속적으로 꿈을 꾼 것도 그렇고, 등장한 인물도 비슷한 옷차림을 했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네. 아무튼 서있는 상태에서 꿈속으로 들어간 것도, 연속으로 꿈을 꾼 것도 이번에 처음이야.”

 

 차우는 뒤에 더 말을 이으려다가 말았다. 사틴을 보자, 그 역시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사틴이 말했다.

 

 “마치 너한테 뭔가를 다급하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그러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

 

 

 

 그쯤에서 대화를 멈춘 두 사람은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태양은 이미 반쯤 몸을 숨긴 상태였다. 아무리 변명이 그럴싸해도 할아버지가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으리라.

 

 제리 할아버지네 집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마을 끝자락에 있었다. 마리 할머니네 집과 제리 할아버지네 집은 거의 정반대편에 있을 만큼 멀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성향이 그대로 반영되어있었다. 마리 할머니는 숲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반해, 제리 할아버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숲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숲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할아버지의 운치 있는 말이 여전히 차우의 귓가를 떠날 줄 몰랐다.

 

 한참 골목길을 따라 걷던 그들은 이윽고 큰길가로 나왔다.

 

 “얼마나 남았어?”

 

 사틴의 말에 차우가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확인했다.

 

 “거의 다 도착했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대로 오른쪽 길로 꺾어졌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은 두 사람은 커다란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차우와 사틴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차우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나왔다.

 

 “이제야 오는 구나. 어서 오거라.”

 

 문을 열어준 이는 차우와 사틴을 웃도는 큰 몸집을 자랑했다. 구릿빛 피부에 큰 키, 그리고 떡 벌어진 체격은 지로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길 만큼 굉장했다. 그러나 그런 육체와 별개로 얼굴에는 이미 새하얗게 샌 풍성한 머리카락과 수염이 있었고, 주름살은 얼굴 곳곳에 살며시 박혀 있었다. 차우는 단번에 그가 제리 할아버지임을 알아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해하마. 지나가던 애들한테 들었단다. 듣자하니 그 마귀할멈한테 갔다 오는 길이라지? 늦어도 어쩔 수 없지. 이해하네.”

 

 그러자 사틴이 차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차우는 사틴을 향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내 말 맞지?’

 ‘그냥 좀 가만히 있어.’

 “어쨌든 안으로 들어 오거라.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날씨가 추워지는구나.”

 

 제리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그런 옷 하나만 걸쳐서는······.”

 

 사틴은 그리 말하며 제리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현재 제리 할아버지는 가죽으로 된 조끼와 바지만을 입고 있었다. 조끼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 그 자체였고, 때문에 잘 다듬어진 우람하고 단단한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위로 불끈 튀어나와 잔잔하게 갈라지는 핏줄은 그의 건강이 막강함을 알렸다. 조끼와 같은 재질임에도, 바지는 굳건한 근육질의 다리 때문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 해보였다.

 

 ‘마리 할머니께서 질색하시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다.’

 

 차우는 제리 할아버지의 몸을 살펴보며 그리 생각했다. 어쨌든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은 본능적으로 어떤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제리 할아버지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더니 곧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쭉 펴며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이정도 날씨는 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니지! 물론 요즘 감기가 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 옷 잘 입으셔야죠! 이 날씨에 무슨 몸자랑이세요!”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차우의 모습에 제리 할아버지는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잠시 후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큼지막한 손으로 차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그럼 차우 말대로 좀 있다가 제대로 입으마. 사실 노크소리 듣고 방에 있다가 바로 나온 거거든. 자, 어쨌든 들어오려무나. 할 일이 좀 많기는 하지만 금방 끝날 거란다.”

 

 

 

 ****

 

 

 

 두 사람은 제리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제리 할아버지네 집은 마리 할머니와는 다르게 무척 수수했다. 재력 있는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치품, 도자기와 그림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뿐이었다. 제리 할아버지가 보기와는 다르게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건 이미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뭐해. 딱 봐도 집이 넓어보여서 청소할 때가 많아 보이는데.”

 

 사틴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차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윽고 거실로 들어간 제리 할아버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한 가지씩 일을 지시했다. 그렇게 사틴은 2층 복도를 청소하게 되었고, 차우는 부엌을 정리하게 되었다. 사틴은 자신이 더 어려운 일을 한다고 제리 할아버지한테 따졌다.

 

 “일 바꿔주세요!”

 “누가 더 어렵거나 말거나는 없단다. 차우야, 부엌일도 좀 힘들거야. 내가 최근에 청소를 잘 안 했거든.”

 

 하지만 얼마 후에 부엌의 상태를 확인한 차우는 제리 할아버지가 이미 청소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물론 전반적으로 물건이 좀 어질러지고 때가 묻어있기는 했었지만, 당장 청소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차우는 안으로 들어가 찬장을 확인했다. 상태는 완벽했다. 식기는 모두 제 짝에 맞추어 말끔히 정리된 채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싱크대를 확인하자, 말린 잎 몇 개가 배수구 근처에 조금 묻어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래도 하는 시늉 정도는 해야지.’

 

 어쨌든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하기는 해야 할 터였다. 차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고민했다. 우선 그는 물을 뿌려 싱크대에 묻은 작은 잎들을 모두 걷어냈다. 그 뒤에 수도꼭지에 걸려있던 걸레를 가져와 찬장과 싱크대 주변을 닦았고, 근처 창고에 있던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할아버지는 할 것도 없는데 왜 청소하시라고 한 거지?”

 

 그렇게 한참 열심히 바닥을 닦던 그는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대걸레질을 잠시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캐모마일?’

 

 차우는 그것을 주었다. 건허브였지만, 줄기째 말린 덕에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뭐하니?”

 

 그때, 제리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아, 할아버지. 여기 캐모마일이 떨어져 있어서요.”

 “세상에. 그게 왜 떨어져있었니?”

 

 차우의 말에 제리 할아버지는 다급하게 캐모마일을 가져갔다. 그는 말린 캐모마일을 툭툭 턴 뒤 유심히 쳐다봤다.

 

 “혹시 누가 주신 건가요?”

 “내가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다고 말하니까 어제 지로가 나한테 선물로 주더구나.”

 “지로 형이요?”

 “그래. 어디서 질 좋은 허브를 구했다고 하길래 보니까 진짜로 그렇더구나. 그래서 냉큼 받았지.”

 

 차우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청소는 다 끝난 거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놨습니다. 그런데 이미 청소가 다 되어있던 것 같던데······.”

 

 제리 할아버지는 정말로 그러느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차우를 쳐다봤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이라서 차우는 부엌의 상태를 차근차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제리 할아버지는 차우의 설명을 듣다가 곧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전에 식사하고 나서 청소를 했었지!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미안하구나, 차우야. 이 할아버지가 늙어서 그런지 요즘 기억력이 가물가물하구나.”

 

 차우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늙었다는 말과 제리 할아버지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찾는다면 세월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간 주름살 진 얼굴과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과 수염뿐이었다.

 

 “그렇다면 부엌 일 말고 사틴 좀 도와주렴. 혼자서 낑낑 거리고 있는 것 같더구나.”

 “알겠습니다.”

 

 

 

 

 ****

 

 

 

 

 꿈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누운 차우는 단박에 깨달았다. 불규칙적으로 차우의 정신으로 방문하는 꿈은 배경을 만들고, 인물을 세웠으며, 상황을 꾸몄다. 차우는 그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는 무거운 몸뚱이 없이 오로지 의식만으로 꿈속을 떠돌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을 가늠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차우는 자신이 꿨던 꿈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의식은 어느새 숲 한가운데를 떠돌고 있었고, 그 앞에는 아침에 꿨던 꿈과 같이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등불을 든 채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차우는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걸어가는 인물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으로만 하염없이 걸어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차우가 당장 알 수 있는 거라고는 단지 덩치가 크다는 것뿐이었다. 더 추측을 해보자면, 어깨 역시도 넓었다. 그렇다면 남자일까? 바로 그때, 앞서 걸어가던 인물이 우뚝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차우가 뭘 할 틈도 없이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로브 속은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만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욕망’

 

 뿌리 깊은 욕망이었다. 차우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깊고 뜨거우며, 영혼을 불살라버릴 만큼 맹렬한 힘이었다. 의식만으로 꿈을 떠도는 차우였지만, 그는 마치 제 몸으로 그걸 느끼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처럼 강력한 욕망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것이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어둠으로 둘러싸인 그 인물은 천천히 차우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차우가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의식이 그 자리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마침내 그를 덮어버렸다. 차우는 꿈이 끝나기 직전, 다시 한 번 진한 허브 냄새를 맡았다.

 

 차우는 번쩍 눈을 떴다.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벌렁거리며 뛰었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어서 차우는 한동안 누워서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아직 어두운 방안을 휘휘 둘러봤다. 오로지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서 달빛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바깥에서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이 메마르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 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안전했다.

 

 ‘빨리 네로 누나를 만나러 가야겠어.’

 

 뭔가가 불안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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