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나의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
오늘도 역시 나의 이곳의 모습은 반짝였고, 따뜻했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꽃향기와 풀냄새가 공기 속에 넘쳤다. 바람은 그 공기를 곳곳으로 보내주었고, 나는 그 모든 것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꽁꽁 언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곳이 분명했다. 무뚝뚝한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은 것 보면 이곳의 능력은 엄청난 것이 확실했다.
눈앞에 문이 보였다. 저 문 뒤쪽의 상황은 여기와 다를 게 확실하기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은호가 궁금했다. 저곳에서 은호는 오늘 어떻게 지낼지가 궁금했다.
문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다. 순간 당황했다. 어제와 다른 모습에 문을 잘못 열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여기가 맞았다. 눈이었다.
나는 좀 전의 나의 세계에서의 모습하고 완전히 다른 이곳의 모습에 마음이 빼앗겼다. 흰 세상이 신기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세계에서 말하는 일요일이고, 게다가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조용했고, 덜 붐볐다. 지금 이 순간 이쪽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맞아 떨어져서 최고의 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도 즐거워했다.
‘눈을 다 좋아하는가보네.’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나도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신나하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사람들의 얼굴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조심조심 걷고, 내리는 눈을 손으로 잡아보고 한쪽에서는 눈을 뭉쳐서 둥글게 만들기도 했다.
“오늘은 눈사람 만들만큼 눈이 내렸어.”
‘눈사람?’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말에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눈사람이라...’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오늘의 은호를 만나러 갔다. 오늘 은호는 넘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아마 은호도 밖에서 눈을 볼 예정인 것 같다.
‘은호도 눈을 좋아하겠지?’
나는 은호의 집으로 향했다. 은호의 집은 커튼 때문인지 컴컴했다.
‘아직도 자나?’
나는 거실에 서서 은호를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은호는 아직 방에서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용하던 공간에 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참을 울리던 벨소리가 멈추고 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은호는 방금 잠에서 깬 듯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김은호. 눈 와. 엄청 많이 내렸어.”
정민이었다. 정민이의 목소리에도 신이 나 있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집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겠다.”
은호는 아까보다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민이와는 다른 은호의 말과 목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뭐 안 좋아할 수도 있겠지.’
“김은호, 진짜 눈 구경 안 갈래? 눈사람 만들만큼 왔다니까?”
“눈사람은... 그런 건 애들이나 만드는 거야.”
은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로 정민이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은호의 반응에 실망한 듯한 정민이는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은호는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일어나는 구나’
문이 열리고 은호가 보였다. 추운지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있었다. 방문 입구에서 컴컴한 거실을 멍하니 보고 있다. 아직도 무언가를 결정 못한 듯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결정을 내렸는지 천천히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주위가 전부 하얀색이었다. 나는 은호 옆에 가서 섰다. 은호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감동한 것 같은데,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은호의 눈빛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은호의 마음은 은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은호는 정말 한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보면 은호는 눈을 좋아하고, 눈사람이라는 것을 만들게 확실한데, 아까 정민이와의 전화에서는 아니라고 했다. 또 궁금한 게 생겨버렸다. 그러나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냥 은호를 지켜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은호는 눈이 내린 바깥을 한참 본 후, 욕실로 가서 씻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은호는 밖에 나갈 준비를 완벽히 하고 방에서 나왔다. 두터운 외투, 모자, 목도리 그리고 장갑까지.
‘밖에 안 나간다더니’
은호는 하얗게 변한 길 위에 섰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한발 한발 꼭꼭 눌러가며 걸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뒤돌아봤다. 은호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은호는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쓱 닦았다. 그리고는 다시 뒤돌아 가던 길을 아까처럼 천천히 꾹꾹 눌러가며 걸었다.
은호는 걷다가 갑자기 어딘가로 향했다. 나도 은호를 따라갔다. 은호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눈으로 공 모양 두 개를 쌓은 얼굴이었다.
‘아, 눈사람’
은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과 슬픔이 스쳤다. 분명히 봤다. 은호의 얼굴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보고 말았다.
은호는 쌓인 눈 쪽으로 가서 조금씩 뭉치기 시작했다. 망설이기도 했지만, 은호는 눈을 꽤 크게 뭉쳤다. 둥근 눈 뭉치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망설이고 있었다. 눈뭉치 하나를 이미 세워져있는 눈사람 옆에 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들고는 한참을 서 있었다. 결국 은호는 두 번째 눈뭉치도 바닥에다 두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쌓아야 눈사람이잖아’
나는 은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다시 은호를 따라 갔다.
‘눈도 좋아하는 것 같고, 눈사람도 만들고 싶어 하고. 하면 되는데, 왜 싫다고 했을까?’
흰색으로 바뀐 세상을 은호와 걷고 있으니 신기했다. 이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눈이라는 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곧 이 말을 취소해야했다. 앞쪽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눈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눈도 어느 정도껏 와야지.”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며, 눈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온 뒤에 얼어버리면 온통 빙판길이 될 텐데. 벌써 걱정이야”
‘빙판길’
나는 은호의 옆에서 벗어나 은호의 앞에 마주보고 섰다. 은호가 걷는 길을 우선 내가 먼저 걸어야했다. 내가 걷는 걸음은 표시는 나지 않아도 바닥에 영향을 줄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나의 걸음이 은호를 위한 변수였다.
뒤따라오는 은호를 봐야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신기해하겠지만, 나는 나의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은호는 아무 일 없이 집에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