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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입술은 안돼요
작가 : 시나뉴
작품등록일 : 2019.10.4

- 운명이란 아주 징글징글한 단어다.
지구상에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단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사랑은 하고 싶은데 자신의 ‘치명적’ 결점 때문에 할 수 없게 된다면
운명이란 게 낭만적이기 보단 웬수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받아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차이는 연애를 반복해야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이는 연애만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운명의 ‘진리’를 ‘감전키스’를 하는 남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제 15화
작성일 : 19-10-04 22:34     조회 : 220     추천 : 0     분량 : 1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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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 한복판은 옷이 아닌 사람 구경 하러 가는 곳이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소리로 뒤섞여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도 크게 외쳐야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 거리는 한국의 정취를 잃어 간지 오래였다.

 물건 파는 사람들은 한국말은 잊은 지 오래였고 중국어 또는 일본어로만 호객행위를 했다.

 그 말을 알아듣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차지했고, 오히려 한국 땅에서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한 사람들이 이방인들처럼 돌아다녔다.

 윤아는 이 낯선 거리에서 옆에는 수의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서로 죽고 못 살만한 그와 그녀를 자신의 눈에 담고 걸어가는 한 커플.

 깍지 낀 손에 반짝이는 두 개의 커플링에 윤아는 저절로 눈이 갔다.

 거리 곳곳 국적을 불문하고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같은 것 한 쌍을 눈에 띄게 지니고 있었다. 커플 티, 커플 시계, 커플 핸드폰 케이스 등등....

 비싸고 안 비싸고를 떠나서 같은 것을 함께 나눈 게 윤아는 부럽기만 했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라고 선전하는 듯 보이는 물건들은 커플을 공식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매개체였고 둘이 함께였다는 유일한 증거품이기도 했다.

 그 증거품이 나중에 족쇄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한 추억을 담은 기념품이 하나 있었으면 하였다. 윤아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더욱 볼품없어 보이고 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는 같이 걸어도 서로 다른 곳을 보는 존재인가 보다.

 여자인 윤아는 자신과 비슷한 커플들을 보며 다른 여자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했다.

 남자인 수는 손은 윤아를 잡고도 눈은 엉덩이가 살짝 드러나는 핫팬츠를 입은 늘씬한 외국인 미녀에게 저절로 눈이 갔다. 이건 본능이었다. 여자가 예쁘고, 멋있고, 반짝이는 것에 눈이 가는 것처럼 남자도 예쁘고, 섹시한 것에 눈이 가는 건 막을 수 없는 거였다.

 반짝이는 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황빛 조명을 받으면서도 은빛 광채를 발하는 목걸이 말이었다. 윤아는 저절로 허전한 목에 손이 갔다. 생각해보니 그에게 아무것도 받은 게 없었다. 받은 게 있긴 했었다. 하지만 입에 들어가면 사라지고, 눈으로 보면 마는 것 들 뿐이라 두 사람이 커플이라는 증거는 남는 게 없었다.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카톡 프로필도 마찬가지다.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라도 찍으려 하면 수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한다는 핑계로 거부 했다. 이 둘이 손을 붙잡고 걷지 않는다면 이 둘이 연인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윤아의 자근자근 밟아 놓았던 의심의 싹이 단단한 믿음의 땅을 뚫고 나왔다.

 둘이 연인이란 걸 입으로 밝히지 않는 한 모를 텐데.... 밖에서 싱글인 척 행세 하고 나니는 거 아닐까.... 윤아는 이건 아니 뗀 굴뚝에도 연기 난다는 마음으로 무조건 의심하는 의부증 증세는 아니었다. 매일 같이 직장에서 바쁘다고 하던 그의 말, 진짜일까?

 전원이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되었던 수많은 시간들 동안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수많은 의문 부호가 비처럼 내려 의심의 싹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윤아의 머릿속에 지웠던 하나의 말이 또렷이 울려 퍼졌다.

 남자는 여자를 정말 좋아하면 훔쳐서라도 해다 바치는 종족이라는 제호의 말.

 속으로 그만하라고 화내보지만 그 말은 계속 찜찜하게 윤아를 괴롭혔다.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건가, 소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일 뿐인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윤아는 자신이 정말 나약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 마음이 말 한마디로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윤아는 허무함을 느꼈다.

 윤아가 복잡다사 한 심경이란 걸 짐작도 못 할 수는 외국 미녀의 탱탱한 뒤 태가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다시 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은 그의 옆에 있으나 정신은 자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수많은 물음에 대답하느라 그곳에 없었다. 수는 초점이 없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한 눈 판 것에 대해 열 받아서 그러나? 불안함으로 조심스러워진 수는 살짝 윤아의 어깨를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가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주고 나서야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윤아의 정신이 돌아왔다.

 

 “무슨 생각해?”

 “저... 오빠.”

 

 나를 정말 사랑해?

 이 간단한 말이 입 안에서 맴 돌기만 하지 가시처럼 박혀 떨어지지가 않았다.

 사랑해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혹시나 라는 의심이 공포로 변해 온갖 말도 안 되는 대답들을 만들어냈다.

 아니, 너랑은 그냥 엔조이야.

 그런 걸 왜 물어, 질리게.

 머릿속에 있는 수가 미간을 세 줄로 좁히고 차갑게 얼린 표정으로 윤아를 노려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는 실제로 자기 앞에 서 있는 그가 있는데도 머릿속 수의 모습에 압도되어 버렸다. 이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고 지레짐작 하는 거랑 이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거랑은 천지차이다.

 윤아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수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뱃속을 손톱을 날카롭게 갈아 잡아 뒤트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만 때도 큰일을 칠 것 같이 눈앞이 아득해져 윤아에게 제대로 말도 안 하고 쥬얼리샵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작스런 수의

 잠깐이란 말과 함께 그는 급하게 쥬얼리샵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돌발행동을 보인 수로 인해 윤아는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다 이내 입 꼬리가 기대감으로 살짝 올라갔다.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목에 은빛을 내는 커플의 상징을 걸어준다고 여겼다. 윤아는 투명한 쇼윈도를 기웃거리며 수가 어떻게 전해줄지 잔뜩 기대하며 기다렸다. 한결 개운해진 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윤아는 수의 손을 주의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은 비어 있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손끝에 무언가 딸려 나오지 않을까 윤아는 기대하며 보았다. 하지만 수는 삐져나온 바지 주머니를 꾹꾹 눌러 넣기만 했을 뿐 손끝에 먼지만 딸려올 뿐이었다. 그의 손에서 공동 화장실에 비치 된 싸구려 오이 비누 냄새가 났다.

 그 냄새로 윤아는 수가 목걸이를 사러 샵으로 뛰어 들어간 게 아니라 화장실에서 쏟아내기 위해 갔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큰 기대감은 풍선처럼 커졌다가 혼자 오버해서 터져버렸다. 너덜너덜해진 풍선의 파편들이 윤아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아예 가지지 않았다면 이리 허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때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기적인 데이트 코스는 약간의 거리 배회 후 김밥 천국에서 끼니를 채우는 거였다.

 푸짐하게 시켜도 음식 하나의 가격이 오 천원을 넘지 않아 든든히 배를 채워도 부담스럽지 않는 가격이었다. 엄청 맛있다고는 말 못해도 맛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음식이라 어느 지역, 어느 지점을 가도 맛은 항상 비슷비슷 했다. 수가 추구하는 평범하고 아기자기한 사랑의 입맛과 딱 맞는 밥집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윤아는 김밥천국에서 대충 위장을 채우듯이 먹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괜히 신경전 벌이다가 못 먹은 레스토랑에서의 분위기 좋은 식사를 받아내고자 했다. 날 사랑하냐고 묻지도 못할 콩알만 한 베짱에서 어떻게 이런 오기를 먹게 되었는지 윤아도 몰랐다. 다만 배신당한 기대감이 윤아를 화나게 만들었다.

 평소 때 같으면 꾹 참고 그냥 따랐을 텐데 괜히 뒤틀리게 되었다.

 

 “오늘은 딴 데 가자.”

 “왜? 여기 떡볶이 죽이잖아. 양도 많이 주고.”

 “오빤, 나한테 돈 쓰는 게 아까워?”

 “뭔 말을 그렇게 하냐. 비싼데서 먹고 싶음 그러고 싶다 하면 되지. 알았어, 사주면 될 거 아냐.”

 

 속물스럽게 보일까봐 꾹꾹 참아왔던 물음 하나가 터져 나왔다.

 이 남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왔지만 윤아도 어느 순간 그런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바쁘지 않을 때만 만나주는 이 사람.

 싼 값에 연애의 달콤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닐까. 그동안 온몸으로 거부하려 했던 의구심이 치밀면서 억울함과 분노가 함께 뒤섞여 용오름처럼 올라왔다.

 수는 실망감으로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남자 입장에서 이거 해달라, 저거 사달라는 여자는 솔직히 별로였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별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채 우러나기도 전에 앞서 나간다면 해주고 싶은 생각도 싹 사라졌다. 마치 연애가 아니라 키다리 아저씨로 삼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었다.

 윤아와 수는 각자의 입장으로 상대에 대해 불만이었고 화가 났다.

 윤아는 자신의 말을 곡해하는 수에게 실망이 커 그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

 이대로 자신을 여자에게 돈 안 쓰는 쫌팽이로 남기고 가 버리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의 팔을 뿌리쳤다.

 

 “누가 비싼 거 먹구 싶대!”

 “그럼 뭐!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한데!”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난 돈이 아니라 오빠 마음이 알고 싶은 거라구.”

 “그래, 성의만큼 보여준다니까! 당장 레스토랑 가자고, 비싼 옷, 가방. 말만 해. 다 사줄 테니까.”

 “그 정도밖에 생각 못해? 완전 실망이야!”

 “나보다 더할까? 너도 결국 똑같구나. 다른 여자들이랑.”

 

 면상에서다 똥 한바가지를 던진 것 같았다. 기분도 더럽고, 온 몸이 짜증 범벅이었다.

 진실 게임을 통해 말한 수의 수많은 여자들이 책자처럼 펼쳐졌다.

 자신은 본 적도 없는데 그만 아는 여자들과 비교당하는 기분 진짜 욕이 나왔다.

 윤아는 자신의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이집 떡볶이가 암만 맛있어두. 오늘은 체할 것 같다. 집에 갈래!”

 

 윤아 화났다는 걸 일부로 티라도 내듯 쾅쾅 발소리를 내며 가버렸다.

 

 “그래 가라! 속이 콧구멍 만해선. 그러니까 목젖에 털이나지!”

 

 멈칫. 여우에게 털은 자신의 무기이자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털은 머리카락과 속눈썹 빼고는 제거해야 할 미모의 적이었다. 얼굴 모공을 뚫고 뽀송뽀송하게 난 솜털, 화장 안 먹게 하고 모공이 커보이게 만드는 주범이다. 눈썹은 또 어떤가. 조금만 방심하면 눈두덩이까지 털이 나 있어 굉장히 지저분해 보인다.

 겨드랑이 털, 다리 털. 이 두 부위는 털과의 전쟁을 치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목털이라니?! 남자에게 날 법 한 털 오라기를 여자 목에 났다고 하다니!

 아무리 화가 났어도 여자에게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윤아는 화가 뻗쳤다.

 

 “지금 뭐라 했어?”

 “꾹 참고 말 안 했는데. 너 웃을 때마다 목젖 털까지 흔들리는 거 엄청 신경 쓰였거든.”

 “거짓말 마!”

 

 하다하다 별 소리를 다 듣겠다. 윤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윤아에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면 방법은 하나,

 맞다는 걸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수는 윤아의 목젖에 난 털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

 윤아는 따끔한 목을 부여잡고 눈물이 찔끔 흘렸다.

 수의 맞댄 손가락에 눈썹만한 목털이 들려 있었다. 증거를 윤아 앞에 보란 듯이 흔들더니 후 불어 바람에 날린다. 먼지처럼 휙 날아가는 털을 보며 윤아는 충격에 입이 헤 벌어졌다.

 

 “여자가 거기에 털 난거 첨 본다. 나 만나는데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니냐?”

 “보기 싫음 안 보면 되잖아!”

 

 윤아는 쪽이 잔뜩 팔려 죽을 것 같았다. 인지하지 못한 결점을 애인한테서 처절하게 벌거벗겨졌을 때의 기분이란! 윤아도 화가 나니 마음에 없는 소리가 나왔다.

 수는 의외의 말에 흠칫 놀랬다.

 보지 말자는 말에 극도로 겁먹어 매달렸던 윤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여기기 힘들었다.

 그만큼 윤아는 참아왔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폭발해 버렸다. 더 이상 있다가는 더 안 좋은 꼴을 보일 것 같았다. 멀어지려는 윤아의 발걸음이 무언가에 걸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윤아는 갑자기 목이 턱 막혀 기침을 콜록 콜록 해댔다.

 인상을 팍 쓰며 목을 매만지는데 가느다란 체인이 걸려 있었다.

 수가 뒤에서 윤아의 목걸이를 걸어 버린 거였다.

 도망 못 가게 하려고 이젠 하다하다 줄까지 걸어 버렸나. 그것의 정체가 목걸이인줄 모른 윤아는 수를 홱 노려보았다.

 

 “눈 좀 곱게 떠라. 미운 곳 하나 더 생김 카바가 힘들다.”

 

 수는 찡긋 웃으며 윤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윤아는 그때서야 고개를 숙였다. 길고 가는 목에서는 은빛의 목걸이가 은은한 빛을 내었다. 쇼윈도 안에 갇혀 어떻게 보면 슬프게, 어떻게 보면 고고하게 있던 목걸이가 윤아의 목에 걸렸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기대하던 것이 나타났다.

 기쁨이 놀라움보다 앞서 윤아의 얼굴은 화색이 아닌 뚱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훨씬 낫다. 예쁘네, 우리 애인.”

 “뭐야, 진짜! 사람 자꾸 놀리고....”

 “그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음 말을 하라고. 내가 다른 남자들 보다 촉이 좀 발달해서 알아들은 거지.”

 “화내서 미안해.”

 

 누군가 보면 목걸이 하나에 마음이 풀린 속물적인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 앞에 속물이면 어떻고 허물이면 어떠리..

 헤어질 듯 싸우다가 결국은 서로를 꼭 껴안으며 화해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폭 안기는 윤아의 머리카락에서 상큼한 샴푸냄새가 났다. 수는 한껏 숨을 들이켜 보았다.

 강하지 않는 은은한 파우더 향이 코끝을 간질거리는 게 기분 좋았다.

 여자가 아름다워지기 위해 화장을 하지만 미모가 더해질수록 향기는 독해지기 마련이었다.

 독한 냄새는 처음엔 가장 먼저 들어오고 사람을 확 잡아당기나 오래 맡기에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은 한번에 사람의 마음을 잡지 못하지만 오래 간다.

 수에게 윤아는 항상 은은했다. 그 냄새가 좋았고, 그런 그녀가 좋았다.

 오랜만에 그의 품 안에 안기는 윤아도 미지근한 그의 품 안이 설레었다. 제호는 불편할 정도로 온몸이 뜨거워 감기가 걸린 것처럼 항상 몸이 뜨겁고 아팠다.

 하지만 수의 손은 차갑게 식혀주고, 가슴은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윤아는 발끝을 세우고 통통 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둑하고 안락한 침대에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가 고르게 울려 퍼졌다.

 기억하지 못하는 암전의 시간 속에서 그 사람의 체온이 어깨와 허리를 감싸고, 숨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면서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지는 꿀 같은 잠을 이뤘다. 적어도 제호는 말이었다.

 혼자인 게 익숙해진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오는 따스한 온기도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난영은 제호를 사랑하지만 옆에 있는 건 불편했다. 그녀의 침대엔 항상 난영 혼자 잠들기를 서른 해가 넘도록 반복했다. 중간 중간 다른 이가 옆에 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도 불편해서 뜬 눈으로 밤을 지냈다. 난영이 이렇듯 다른 이의 존재를 불편해 하는 건 마음껏 편해지지 못해서였다. 깊이 잠들었다가 혹시나 코를 골거나 침을 흘리거나 긴장이 너무 풀린 나머지 방귀라도 새어 나올까봐 등등.... 별 걱정이 다 되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건 모든 여자의 욕망 아닐까.

 하지만 예쁘기만 해 보이는 건 피곤한 거다.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해 정신이 몽롱해 죽겠는데 머리가 구둣발로 짓밟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귓속을 후벼 파고 TV에서 나오는 영화 소리가 쉼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TV에서는 근육질의 벗어 붙인 남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수십 대 일로 신기에 가까운 액션을 보였다. 발과 손으로 싸우는 것인지 입으로 싸우는 것인지....

 몸에 맞는 둔탁한 소리보다 으악! 아! 괴성이 더 들려 정신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난영은 조심스럽게 몸을 제호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하지만 제호는 잠결에도 엄마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아기처럼 난영의 허리를 단단하게 옭아매었다. 깍지를 낀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고는 한참 만에 몸을 겨우 틀 정도로 빠져나왔다.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 진 리모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난영의 몸이 제호에게서 완전히 빠지지 않아 손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겨우 손이 닿아 리모콘을 집어 티비를 꺼버렸다. 그러자 깊은 숙면에 취하던 제호가 왕자님의 키스를 받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눈을 번쩍 떠버렸다.

 

 “난 영화 계속 안 틈 잠이 안와.”

 “하여튼 희한해. 나랑 결혼하기 전엔 고쳐.”

 

 난영은 다시 티비를 틀었다. 피범벅을 하고 사람을 난자 하는 장면이 나왔다.

 새벽이라 텅 빈 위가 뒤틀리면서 쓴 신물이 올라오며 속이 안 좋아졌다.

 제호와 난영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영화 채널 대신 다른 채널로 돌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티비에서는 한밤의 티비 연예가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초저녁 둘 다 몸이 나른하고 지쳐 일찍 잠들었었다. 난영도 잠깐 잠들다가 선잠을 자다 깨서는 오랫동안 정신 사나운 소리를 들으며 불편해 해서 시간이 더디게만 흘렀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잠이 홀홀 깬 제호와 난영은 티비를 보기로 했다.

 티비에선 키스 하고 싶은 남자 순위가 해당 후보의 이미지들과 함께 소개 되었다.

 1위로는 이제호가 당당히 올랐다. 제호는 난영을 힐끗 보면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이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제호의 리즈 시절. 하얀 피부에 근육이 딱 잡힌 몸매에 타는 듯 빨간 입술이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처럼 부각 되어 보였다. 지금과 그리 달라보이지는 않지만 더 풋풋하고 싱그러운 맛이 티비 속 그에게서 더 뿜어져 나왔다.

 나도 가만히 있어도 빛을 발하는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제호는 티비 속 자신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브릿지 영상이 영화, 드라마에서 제호의 애절, 달달한 키스씬들을 쭉 보여주었다. 말만 키스씬이지 딥해 보이는 뽀뽀씬들이었다.

 제호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는 뽀뽀 방법을 발견하였다.

 강하게 상대 여배우를 끌어당겨 절박하게 입술을 부볐다.

 그러면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지 않아도 키스씬이 완성 되었다. 하지만 이런 눈속임은 애들 보는 드라마에서나 가능 했지 지금같이 예민한 감독들이 리얼을 외쳐대는 요즘에는 씨도 안 먹힐 짓이었다. 난영은 그의 연기를 보며 미간이 미묘하게 살짝 접히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난영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입술을 거쳤다는 사실이 점점 눈앞에 각인 되면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던 뜨거운 팔....

 그 모든 게 이미 누군가의 것이었고, 결혼을 해서도 누군가의 입술과 팔에 빼앗겨 버린다고 생각하니 싸움의 단초가 될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호씨,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배우 그만 둘래?”

 “무슨 소리야, 그게.”

 “공부나 사업하고 싶음 말만해. 내가 다 돈 대줄게.”

 “배우는 내 목숨이야. 나보고 죽으란 소리야?”

 “난 윤아씨까지 끌어들여서 딴 여자랑 키스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막말로 이상한 감정 생기지 말란 법 없잖아?”

 “그렇게 따지면 난영씬! 이 남자 저 남자 옷 올려붙이고 가슴 만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난 사람 살리는 일이고, 제호씬...”

 “아무 여자랑 입 맞추는 딴따라다, 이거야?”

 “누가 그렇대? 암튼 이대론 찝찝하다 이거지.”

 “찝찝하면, 그만둬! 누가 강제로 잡았어?!”

 

 두 사람은 공통적인 것이 차이점이 되어 싸웠다.

 둘 다 다른 사람의 몸을 두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다른 사람이 우러러 보고, 선망하는 직업을 가졌으며 돈도 웬만한 직장인이 만질 수 없는 금액을 벌었다. 하지만 이런 공통점에서 딱 두 가지의 차이가 이들은 오밤중아 아등바등 싸우게 만들었다. 첫째, 비 연예인과 연예인이라는 점. 둘째,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였다.

 그 차이가 제호에게 연인 끼리 절대 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리게 만들었다.

 ‘헤어지자.’

 한번 깨져 버린 분위기는 다시 붙이기 힘들고, 한번 뱉은 말은 후회를 하며 머리를 때려본들 돌아오지 않았다. 제호는 뒤늦게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을 빌려고 했다.

 하지만 난영의 차가운 반응이 먼저였다. 맨 몸에 하나만 걸친 이불을 확 열어젖히고 이불에서 나와 개어놓은 옷을 빠르게 입었다. 옷을 찢을 듯 거칠게 입은 난영의 손에는 얼린 칼 같은 서릿발이 뚝뚝 묻어나 제호가 말을 걸 틈이 없었다.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바보 같은 자신을 탓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뒤로 돌아가 뱉어버린 말을 주워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대로 흘렀다.

 제호는 죄 지은 강아지마냥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난영을 잡으며 설득해보려고 해보지만 앙칼진 그녀의 눈초리에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런데 그때, 끓는 기름에 물을 퍼붓는 사건이 일어나 버렸다.

 긴급속보로 제호의 스캔들 소식이 티비를 장식했다.

 난영도 윗옷을 걸치다 TV에 시선을 뺏겼다.

 촬영은 한밤의 연예 측이 잠복을 한 장면이 긴박한 편집으로 보여졌다.

 제작진의 차는 잘빠진 제호의 애마 엉덩이를 졸졸 쫓아갔다.

 제호는 눈알을 굴리며 빠르게 상황을 짐작해 보았다.

 언제 자신을 미행했는지에 대한 당황함과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황당함이 뒤섞여 제호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내 다음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아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멍해졌다.

 제호가 윤아를 미행하다가 창문에 고개를 넣는 사이 끌어당긴 채 출발해버려 차에 두 발이 버둥거린 채 납치 당해 버리는 모습이 가감 없이 생생하게 찍혔다.

 제호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 지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재고, 돌다리도 여러 번 두들겨 보는 성격인 제호가 근거리에서 쫓아오는 차의 정체를 못 알아보다니.

 윤아, 그 여자가 있기 전에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호가 모르는 사이 윤아가 그의 삶에 들어가 조금씩 좀 먹고 있었다.

 출처를 영화 스텝 제보라 밝힌 리포터가 사진 한 장을 소개했다.

 멀리서 눈치를 보며 빠르게 찍은 듯 사진이 선명치 못한 피사체들이 나타났다.

 제호의 대기실 앞에서 그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나오고, 윤아가 얼빠진 얼굴로 헬멧을 옆에 낀 채 나오는 사진을 연달아 보여 주었다.

 리포터와 편집은 제호가 약혼녀 여의사를 두고 양다리 걸친 것처럼 몰아갔다.

 제호는 억울해 미치겠어 발을 동동 굴렀다. 해명하지 않아도 난영은 알 것이다.

 윤아에게 마음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키스를 하면 감전시키는 빌어먹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난영의 눈빛엔 의심과 불신이 가득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 대신 자신의 촉을 믿는다. 난영의 촉에 거슬리는 사진은 첫 번 째가 아니라 두 번 째였다. 헬멧에 살짝 드러난 윤아의 살짝 상기된 뺨에 부끄러움으로 촉촉해진 눈빛. 저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난지 모르겠지만 제호와 윤아, 둘 사이에 도구적인 일만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

 

 “저거 아니야, 잠깐 내 말 좀...”

 

 티비 안에서는 긴장 하나 안 하고 술술 잘 말하던 제호가 티비 밖에서는 어버버 거리며 제대로 얘기도 못 꺼냈다. 난영은 그런 그의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크한 얼굴로 조곤조곤 대화를 해주었다면 이 정도까지 난영이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런 상황에 제호의 이성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못했고, 난영에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제호는 흥분할수록 혀가 꼬여 해명이 점점 이상해져갔다. 표정이 점점 흙빛으로 구겨져 가던 난영은 제호의 어깨를 밀치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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