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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입술은 안돼요
작가 : 시나뉴
작품등록일 : 2019.10.4

- 운명이란 아주 징글징글한 단어다.
지구상에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단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사랑은 하고 싶은데 자신의 ‘치명적’ 결점 때문에 할 수 없게 된다면
운명이란 게 낭만적이기 보단 웬수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받아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차이는 연애를 반복해야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이는 연애만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운명의 ‘진리’를 ‘감전키스’를 하는 남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제 7화
작성일 : 19-10-04 22:19     조회 : 214     추천 : 0     분량 : 1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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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호는 대기실을 불안하게 뱅글뱅글 돌았다.

 밖에선 고성이 오고 갔다.

 그 고성의 정체는 대기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대표와 대치중인 감독의 실랑이었다.

 나대표는 비굴함을 한껏 담은 목소리로 사정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제가....”

 “내가 직접 얘기 한다니까. 좀 비키시라고!”

 

 밖의 소란을 듣고만 있는 제호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나대표 말대로 근근이 CF나 찍으며 지금 가진 걸 유지하며 살 걸 그랬다. 괜히 더 가지려고 했다가 모두 다 들통 나 모두 다 빼앗기게 생겼다.

 촬영이 딜레이 되는 것에 잔뜩 불만을 가진 여배우가 배우의자에 앉아 대기하다가 참다못해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예요?!”

 

 나대표는 거의 울 듯 한 얼굴로 쩔쩔맸다. 자신이 만든 스타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이때껏 군 말 없이 잘 촬영하다가 키스씬 날이 딱 되자 갑자기 대기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시간을 끌라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없던 혈압이 뒷목을 잡게 될 지경이었다.

 세트장 곳곳을 제 집 마냥 청 테이프와 망치 같은 살벌한 도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

 헬멧을 뒤집어 쓴 택배 기사가 잔뜩 낯설어하며 들어왔다.

 이상한 나라에 처음 발을 들인 엘리스마냥 세트장을 두리번거리며 시선을 뺏기다가 바쁘게 소품을 옮기는 직원과 부딪힐 뻔까지 했다. 며칠 밤을 새서 까칠한 직원이 눈에 레이저 쏠 것 같이 노려보더니 제 갈길 가버렸다. 헬멧 속사람은 확실히 가죽 잠바가 어울리는 상남자는 아니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더욱 꽉 잡았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할 정도로 우물쭈물 하다가 소란스러운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막으려는 자와 들어가려는 자, 그냥 짜증내는 자가 한데 뒤섞여 불협화음을 냈다.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문 뒤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이 전해줘야 할 것이 문 뒤에 있을 거라 예감이 들었다.

 

 “저...”

 

 택배기사와 어울리지 않는 고운 미성이 카랑카랑한 여배우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장땡이었다. 서로가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서 모기가 발바닥 긁고 지나가는 듯 소리를 내면 어쩔 수 없이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저..저기...”

 

 주저하던 택배기사는 호흡곤란으로 머리가 띵하였다. 한줌 숨이 계속 도는 헬멧 안에서 뜨겁게 돌아 비지땀이 줄줄 났다. 개미가 따끔 따금 얼굴과 목덜미를 깨무는 것 같이 짜증이 치밀었다.

 

 “저기요!!”

 

 그는 뜨끔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 목소리를 냈다. 보기만 해도 말이 곱게 안 나가는 단 한 남자 말고는 한 번도 마음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답지 않게 한 행동이 진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몰랐다.

 싸우던 이들은 행동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쏟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투박한 목소지로 “이제호씨, 택배 왔는데요.” 라고 했다.

 여자가 억지로 남자 목소리를 내는 것 마냥 어색하고 청아한 목소리에 강제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제호는 얼마나 뱅글뱅글 돌았는지 현기증이 나 의자를 잡고 비틀거렸다.

 벽면이 일그러져 한 자리에 있어야 할 쓰레기통과 옷걸이가 서로 다른 곳에 있다가 시간차를 두고 원위치에 섰다. 회전목마를 탄 듯 한 시야가 멈추자 고막을 쉴 새 없이 때리던 고성이 사라져 있었다. 촬영장에 들어와 처음으로 느끼는 안락함도 잠시, 문이 열리고 기사가 밀리듯 들어왔다. 그는 당황했다. 헬멧은 난영만이 쓰고 자신에게 왔던 것이다. 그것도 약혼 발표를 한 뒤 헬멧을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제호는 촬영장까지 자신을 찾아온 택배기사의 저의에 대해 경계부터 갖았다. 자신이 무엇을 시킨게 있나 더듬어 생각하다가 이 헬멧을 쓰고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한명 밖에 없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 우거지상이었던 제호는 얼굴 바로 밑에서 조명을 비춘 듯 환하게 웃으며 광채를 발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헬멧을 벗고 땀이 난 이마를 소매로 닦는 기사... 아니,

 윤아의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많이 늦진 않았죠?”

 “진짜 택배기사처럼 기다리다 사람 피 말리게 하네. 빨리 하자.”

 

 그는 지금 한시가 급했다. 빨리 윤아와의 키스로 입 안을 중화 시킨 다음 여배우와 키스씬에 들어가야 했다. 제호는 빨리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겁먹은 윤아의 눈망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제호의 모습은 하루는 족히 굶은 늑대마냥 야수성을 뿜어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포식자 앞에 선 양이 된 윤아는 무서워하고 싶지

 제호가 다가가자 윤아가 뒤로 주춤 몸을 뺐다.

 

 “잠깐만요. 아직 맘의 준비가...”

 “밖에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촬영 딜레이 되면 날아가는 돈이 얼만데.”

 “그건 아저씨 사정이고. 전 연기자가 아니잖아요.”

 

 ‘또 아저씨라고?!’ 아저씨란 말에 뚜껑이 열린 제호는 부글부글 끓어오는 걸 애써 참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손에 삽을 쥘 수밖에 없었다. 제호는 지금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고, 윤아도 급해서 오긴 했지만 그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제호는 끊어져가는 인내심을 겨우 부여잡고 기다려주었다. 윤아는 박스에서 페트병에 담긴 소주를 꺼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랑 키스를 나눈다는 건 윤아에게 자신이 담긴 거울을 맨손으로 깨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사랑하는 상대가 없었을 때 그러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한다는 것 자체가 죄책감에 심장이 찢기는 거 같았다.

 제일 싫은 남자와의 키스가 아니면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윤아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 쓰린 가슴을 달래기 위해 윤아는 소주를 생수처럼 벌컥벌컥 마셔댔다.

 혀에 닿는 순간 확 퍼지는 쓴 맛이 목구멍 뒤로 넘어가면서 식도를 뜨듯하게 데워주웠다.

 한 모금만 삼켜도 엄청난 통증에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지는 액체를 사정없이 넘기는 윤아의 모습에 제호는 경악 했다. 뇌에 치약을 짜 바른 것처럼 머리가 화끈거렸고 눈앞의 상황이 꼭 꿈 속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실수를 해도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꿈 같이 될 것 같았다.

 발개진 얼굴에 알코올에 절여져 풀린 눈을 한 윤아가 제호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해요. 빨리”

 

 제호는 혀를 쯧쯧 차며 품에 숨겨두었던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윤아는 계약서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보더니 살짝 꼬인 혀로 말했다.

 

 “뭐예요, 이게?”

 “뭐든 서류로 남겨야 안심이 돼서. 별 내용 없으니 사인해.”

 

 서명을 하기 전에 내용을 한 번 확인해보는 건 상식이었다. 하지만 모두 상식적이면 이 세상에 사기꾼들은 무엇을 먹고 살겠나. 제호는 술 취한 여자한테 자기에게 유리한 계약서를 내미는 게 사기꾼이나 하는 짓 같아 마음에 살짝 걸렸다. 하지만 양심 따윈 잊어버리고 작품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배우로서 반드시 재기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그의 눈앞과 양심을 가렸다. 제호의 의도를 꿈엔들 상상하지 못할 만큼 순수했던 윤아는 가리키는 서명란에 가물가물하는 눈으로 지렁이 기어가듯 찍 그었다.

 제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기분 좋은 티 안 내려고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는 윤아에게 다가가다가 술 냄새를 풍기는 윤아로 인해 인상을 찡그렸다.

 술이란 건 본인한테는 쌉싸름한 향이지만 남이 맡기엔 한약재만큼이나 쓰디썼다.

 이런 역한 냄새를 맡으면서까지 이 여자와 키스를 해야 하나... 제호는 찝찔한 생각에 망설여졌다. 발그레한 얼굴에 촉촉한 눈빛. 살짝 내민 입술을 따라 올려다보는 고개.

 제호가 바라본 윤아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다.

 발그레한 소녀는 냄새가 어떻든 남자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흔들리기 전에 제호의 이성 센터가 위험을 감지해 경고음을 요란하게 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난 메소드 연기판 아니야.”

 “네?”

 “키스하는데 실제 감정을 담지 않는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키스를 하고 아무리 사랑스런 눈길을 보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해서가 아니라는 성과 못을 확실히 박았다. 윤아도 그의 말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꼬여가는 혀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도 아저씨 사랑 안 해요. 오빨 사랑해요. 우리 수 오...”

 

 윤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제호의 입술이 먹어버렸다.

 처음에는 씁쓸한 맛이 입 안에 확 퍼져 역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알코올이 혀끝을 알딸딸하게 마비시켰다.

 운명적인 키스가 있다면 이런 것일 것이다.

 사탕으로 입을 달콤하게 만들지 않아도, 서로의 타액만으로도 달콤하고....

 손의 위치, 각도, 숨결 등 서로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블랙홀처럼 상대의 입술에 빨려 드는 것 같은 키스......

 스타 버스트.

 오래된 별들이 강력한 대폭발로 새롭고 무수한 별들을 쏟아내는 걸 말한다.

 제호는 머릿속에 우주가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이성이란 오랜 별들이 형용할 수 없는 대폭발을 일으켜 지금 본능이란 무수한 별들을 쏟아냈다. 윤아도 그가 본 같은 별을 보았다.

 하얀 벽, 거울, 빨간 의자... 곳곳에 두 사람의 열기가 스며들었다.

 윤아와 제호의 숨결이 대기실 안을 빡빡하게 가득 채웠다.

 하지만 단 하나 남은 이성을 별의 놓치지 않고 제호는 간신히 윤아를 떼어냈다.

 그녀는 술 때문인지 키스 때문인지 터질 듯 벌게진 볼을 손부채질로 식혀댔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윤아의 얼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가..가볼게요.”

 

 그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친 윤아는 급하게 자리를 떠 숨 막히는 어색한 공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몸은 한 반자씩 늦게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 손끝이 뻣뻣해지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인형처럼 되어버렸다.

 제호도 달뜬 숨을 정리하면서 윤아를 보지 않는 듯 하다가 가자미눈으로 힐끗 거렸다. 그녀는 헬멧을 쓰면서 나가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져 마찰음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저절로 손이 뻗어진 제호는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였다. 윤아는 그의 손을 보지 못했는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발딱 일어나더니 헬멧을 머리를 구겨 썼다.

 헬멧 쓴 머리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고개가 자꾸 옆으로 쏠렸다. 윤아는 가분수 같은 머리를 한 손으로 겨우 부여잡고 휘청휘청 하면서 대기실을 나갔다.

 

 

 

 

 

 

 

 아이러니라는 말에는 재미있는 어원이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 에어런이란 인물이 있었다. 에어런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과 영리함을 갖추었지만 자신을 낮추고, 어리숙한 척을 했다.

 반면, 알라존이란 인물은 아는 거는 남들의 반도 안 되면서 잘난 척에 허풍을 떨었다.

 알라존은 남들보다 못하다 여긴 에어런을 툭 하면 “에어런스럽다”놀렸다.

 가장 똑똑한 척 하던 바보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보라 여겼던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뒷통수 제대로 맞은 것이었다.

 제호는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여겼다. 내가 원하는 건 손에 그러쥘 수 있으며 운명 같은 건 노력만으로 쉽게 부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찾겠다고 자신이 위험해질건 생각도 안하는 무대포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키스 하지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룰에 갇혀 있는 윤아가 이해도 안 되었고, 정말 에어런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러니라는 말은 에어런이 아닌 알라존을 비꼬기 위해 단어다.

 제호는 윤아를 비꼬았지만 결국 이 화살은 자신에게 향하게 될 것이다.

 화살촉이 바로 눈앞에서 위협하지 않는 한 그는 아이러니를 절대 알아채지 못 할 테지만 말이었다.

 이들의 운명은 정말 아이러니 하였다.

 톱스타와 별 볼일 없는 여대생.

 별과 모래 알맹이의 차이. 차이가 너무나 커서 서로의 존재도 절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하늘 아래 단 두 사람만이 키스를 하면 상대를 감전 안 시켰다.

 둘이 함께라면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둘이 운명이려니.... 하고 그냥 둘이 사랑하며 지낸다면 모두 다 해피엔딩일 것이었다. 싸움도, 고민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다른 상대를 사랑했다.

 윤아의 마음은 수에게로, 제호의 마음은 난영에게로.....

 엇갈린 운명과 사랑은 싸음과 고민을 증폭시켰지만 그런 복잡한 아이러니 따위 윤아와 제호에게는 사치였다. 지금 제호에게 중요한 건 키스씬을 완벽하게 마치는 것뿐이었다.

 제호는 여배우의 볼을 우악스럽게 잡고 분홍빛 혀가 촉수처럼 오고 가는 끈적한 키스를 하였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격렬한 눈길을 여배우에게 보낸 제호는 다시 깊게 입술을 빨아들어 놓아주지 않았다. 이들은 누가 보아도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한부 연인. 한번 손을 놓게 되면 다시는 못 만날 수 있는 간절한 사이로 보였다.

 컷! 오케이!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며 이들의 키스에 집중을 하던 감독이 그만해도 괜찮다는 명이 떨어 졌다. 컷이라는 소리는 이들의 애절한 감정을 순식간에 가위질 쳐버렸다.

 꽃에 꿰이는 벌처럼 제호와 여배우 각각에게 매니저와 코디가 달라붙어 메이크업을 손봐주고 휴지로 입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닦아주었다. 제호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자 코디가 손거울을 대령했다. 제호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잘생기게 나왔나 점검하였다. 그건 여배우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생이 얼마 안남은 시한부 사랑을 퍼부었던 두 사람은 사라졌고 거울 속 자신이 제일 잘난 배우만 남게 되었다.

 배우들은 연기 한 커트 끝날 때마다 모니터를 보고 확인을 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사람에 따라 보는 것이 달랐다.

 촬영감독이라면 프레임 안의 미장센이라던가 카메라 동선 등을 체크한다.

 스크립터라면 배우가 어디로 들어오고 어디로 나갔나, 전 컷과 이어 붙을 때 소품 위치가 달라진 게 없는지 집중할 것이다.

 배우의 눈에 보이는 건 내용이라든가 동선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었다.

 내가 얼마나 몰입해서 키스를 잘 했나, 멋있게 잘 울었나, 콧물은 안 흘렸나....

 자신이 화면 안에서 얼마나 빛났는가를 확인하며 제호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새벽 6시.

 숨은 쉬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죽은 듯 자고 있던 수를 깨운 건 침대 곁 서랍 위에 놓은 핸드폰이었다. 충전기에서 밥을 먹이고 있던 핸드폰은 귓전을 채찍질 했다.

 아침을 부드럽게 깨우는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음악이 아닌 쇳소리 비슷한 헤비메탈이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고문을 당하던 수는 상체를 집지도 않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오늘 전쟁터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저절로 지어졌다. 납을 얹은 듯 무거운 엉덩이를 이 악물고 들어 올려 안락한 침대를 내려왔다.

 찬물을 전신에 적셔 정신을 차리고 칼 같이 잡힌 화이트 셔츠를 입고, 증권가의 상징인 빨간 넥타이를 맸다. 빨간 넥타이는 증권가 상한가 칠 때 붉은 화살표와 닮았다. 증권맨들 사이에 빨간 넥타이를 매면 자신이 투자한 주식이 상한가를 친다는 미신이 있었다. 반대로 초록 넥타이는 사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신이라 하지만 억 단위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 금기를 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는 특히 맹신을 했다. 인도를 걸어가 때도 녹색 벽돌들 사이에 빨간 줄만 밟으며 걸어갔다. 녹색을 밟는 즉시 하한가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길 가는 것부터 쉽지가 않았다. 녹색 벽돌을 밟으면 낭떠러지 에 떨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바짝 차려 걷다보니 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킥킥 비웃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는 몰랐다.

 하이힐 신고 걷는 여자처럼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걸 코앞에 거울을 비춰주지 않는 이상 모를 수밖에.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렸는데 남들 시선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주변이 어떻든 수는 제 갈 길만 갔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턱 가로막았다. 신경이 곤두세워진 수는 뜻밖의 장애물에 눈이 곱게 떠지지 않았는데 의외의 걸림돌에 눈이 커졌다. 어디서 밤을 새다 왔는지 눈이 반쯤 감긴 윤아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섰다. 윤아는 저번에 한 번 가봤던 남자친구의 직장을 바로 찾지 못하고 헤맸다. 한번 가본 길은 두 세 번은 가봐야 겨우 기억할 정도로 그녀는 길치였다. 하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방향감각을 뺏은 대신 두 가지는 남겨두었다.

 무작정 가보면 나올 거라는 천하 태평함 하나.

 왠지 이쪽으로 가면 나올 것 같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촉이 둘.

 윤아는 알딸딸한 취기와 밤을 새서 꼭 마약을 한 사람처럼 아스팔트 위가 아닌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게 한참을 걷던 윤아는 멀리서 펭귄처럼 뒤뚱대며 걷는 수를 단박에 발견했다. 기쁜 마음에 냅다 차도로 뛰어 그에게 향했다.

 평소 꽉 잡고 있던 도덕관념도 놓아버렸는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차를 사이를 지나갔다. 전방을 주시하고 재빨리 브레이크를 잡은 운전자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윤아는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신세계를 경험했을 것이었다.

 이런 곡절이 있을 거라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던 수는 윤아의 등장에 그저 놀라기만 했다.

 

 “여긴 어떻게...”

 

 그녀가 다니는 학교 근처라고만 알려주었지 한 번도 회사가 어디라고 얘기해 준적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침 출근길에 여자 친구와의 만남은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수는 들이키는 아침 숨 속에서 매연과 담배보다 더 거슬리는 냄새를 잡아내었다.

 아침을 시작하는 냄새와 동떨어진 술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만들 정도로 윤아에게서 풍겨져 나왔다. 수는 가뜩이나 오늘 예민했다. 오전에 바이어와의 미팅이 잡혀 있고, 환율이 천원 밑으로 떨어져 주식이 1초 사이에 수천억대의 돈이 휴지조각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폭설 내린데 눈사태 난 것 마냥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런데 철없는 여자친구가 아침부터 술 마시고 앞길을 막으니 없던 혈압이 솟구칠 정도였다.

 

 “냄새나? 쫌 밖에 안 마셨는데.”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내일 보자, 내일.”

 

 윤아는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몸을 베베 꼬았다.

 하지만 그의 눈엔 다 술주정으로 밖에 안 보였다. 귀찮다는 감정이 한껏 담긴 손을 회회 저으며 비키라 하지만 윤아는 눈치 없이 다가가 그의 두 볼을 잡았다.

 

 “키스하자, 지금 당장.”

 “지금? 그런 건 술 깨고 나중에 하는 거야.”

 “안 돼, 지금 해야 돼. 우리의 키스엔 내일은 없단 말이야. 해줘, 해달라고!”

 

 제호와 키스를 한 지 하루 안에 다른 남자와 해야 감전을 안 시킬 수 있었다.

 밤새 헤매다 보니까 이미 꽤 많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써 보냈다. 수와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했다.

 시간의 굴레에 씌워진 윤아는 그의 사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빨리 그와 키스를 해 떠나가려는 사랑을 다시 붙잡을 생각뿐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조르는 바람에 수는 흔들려 녹색 벽돌을 밟게 됐다. 녹색의 하한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뒷목이 시큰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났다. 하필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금기를 어기다니... 활가 불끈 치미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만 뿜어내고 말았다.

 

 “에이, 진짜! 회사 앞까지 찾아와서 뭐하는 거야! 가!!”

 

 그는 두 번 째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처음에는 연기였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사랑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양파 껍데기 벗기듯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다. 다정한 얼굴만 보여주었다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맨 얼굴에 그는 당황했다.

 수는 사랑과 프라이버시는 별개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사생활까지 옭아매고 일일이 간섭하려 드는 건 과하다고 여겼다. 더 이상 윤아에게 시간을 빼앗기다가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할 것 같았다.

 하한가의 불안한 예감을 애써 잊으려는 듯 수는 “괜찮아, 한번인데 뭐.” 주문을 걸려 그녀를 빗겨 가버렸다. 매일 같이 보는 회사의 정문이 나타나자 그는 안도의 한습을 쉬었다.

 빨리 생존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 같은 길거리를 벗어나고자 발걸음을 빨리 했는데 그는 기함을 했다. 입구 앞에 수십 마리의 검은 비둘기가 구구 거리며 돌아다녔다.

 비둘기가 앞에서 날면 재수 없다는 미신이 있었다. 수는 비둘기가 무서웠다.

 검은 깃털에 날카로운 부리로 음식물 쓰레기든 토사물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 뒤룩뒤룩 살친 몸뚱아리. 웬만한 강아지만한 몸집으로 떼 지어 다니며 길 위를 으스대는 건달 같은 존재들.

 씻지도 않아 한 번의 날갯짓에 수백만 마리의 박테리아를 뿌리고 아무데서나 설사를 흩뿌리는 무법조(鳥)들!!

 비둘기는 더러운 새라는 선입견이 수를 미신에 휘둘리는 남자로 만들었다.

 그는 뒤돌아 계속 곁눈질 하면서 새들을 피해 곁길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비둘기는 통행료를 받으려는 양아치 마냥 수가 가려는 길을 따라 가 막으면서 바닥의 개미를 파먹었다.

 빵부스러기 하나 없던 수는 통행료를 지불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비둘기 심기 건드리지 않게 게걸음으로 가면서 길을 비껴주길 굽신 거리면서 한 발짝 씩 건넜다.

 그런데!

 누군가 뒤에서 확 안는 기분이 들더니 수가 의도치 않게 비둘기들 품으로 들어갔다.

 비둘기들은 둔탁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푸드득 그의 앞을 날아올랐다. 수십 마리가 몰고 온 ‘재수 없음’이 수를 덮쳤다.

 

 “해줘~~ 해달라구~ 키스 해줘~~”

 

 수의 금기를 깨버린 건 그의 연인 윤아였다. 사람이 촉박해지면 남의 사정 따윈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직장 문제 때문에 날카로워진 그의 사정은 헤아리지 못하고, 윤아는 키스를 안 해서 그가 멀어졌다는 초조함에 다시 한 번 잡고 늘어졌다.

 두 번 째 실수. 증권에서 실수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실수는 곧 끝을 의미했다. 돈을 잃고, 직업을 잃고, 안락한 인생도 끝나는 것이다. 실수란 건 하기 전에가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할까봐 겁이 나고, 하면 인생이 끝날 거 같고..... 오만가지 안 좋은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모 대기업의 인수 합병 문제로 외국 자본이 30초도 안되어 무더기로 빠져 나갔다. 멍하니 핀트가 나가 있던 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말아 그가 산 주식이 곤두박질을 쳐 반 토막이 나게 생겼다. 뒤늦게 상장주들의 녹색▽표시를 발견하고 손을 써보지만 이미 억 단위를 손해보고 난 뒤였다. 이 화를 참고 견디면 자기가 죽을 것 같았다.

 수는 발광하듯 소리를 지르며 괜히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캔병을 구겨 집어던지며 터질 것 같은 화를 조금 발산했다. 증권가는 돈에 매달린 인간의 진면모를 잘 볼 수 있는 장이었다. 그 면모는 증권사 곳곳에 위치한 찌그러진 쓰레기통에 담겨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오전의 충격은 수에게 아직 여파를 남겼다. 눈은 모니터를 향하고 마우스는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넋은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증권사 천장 위를 귀신처럼 떠돌아 다녔다.

 반면 빠른 손놀림으로 손해 보기 전에 주식을 팔아버려 기분 좋았던 동료는 긴장감으로 잔뜩 쪼여 있던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했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흥미로운 단어를 일일이 클릭해보며 자극적인 기사 말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지는 소식에 혼이 나간 수를 툭툭 쳐서 불렀다.

 

 “야, 여기 골 때리는 거 있다. 어떤 여자가 키스 하면 남잘 감전 시킨데, 여 봐봐.”

 

 떠돌던 수의 영혼이 제 육신에 들어갈 정도로 ‘감전’ 이라는 말은 획기적이었다.

 외계인과 소통을 한다는 빵상 아줌마나 축지법을 쓴다는 허경영 급의 그저 튀고 싶어 거짓말을 진짜처럼 하는 사람의 소동이라고 여겼다. 사람이란 게 거짓말이란 걸 알면서도 그 거짓말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그건 수도 마찬가지여서 잠 깨려고 든 커피를 마시며 동료 쪽으로 의자를 끌었다. 주위를 세심히 보지 못한 수는 책상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커피가 하드 디스크를 덮쳐 검은 국물을 뚝뚝 흘려 기계를 감전시켜버렸다. 주황 스파크가 팝콘 튀듯 번쩍거리더니 희뿌연 연기가 그의 책상을 가득 메우게 했다.

 스프링필터가 터지며 증권사를 차갑게 적셨다. 다들 손 우산을 만들고 도망가기 바쁜데 수는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가도록 꼼짝 않고 모니터 앞을 지켰다.

 디스크에서 에러가 나면서 바닥을 치는 상장주를 사들이고 말았다.

 수는 이제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해탈이라도 한 듯 불 앞에서 가만히 있었다.

 운이라고 함은 이미 정해져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운을 뜻한다.

 그는 이 모든 악재가 녹색을 가까이 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포기를 해버렸다.

 우리는 불행을 맞닥뜨린다면 ‘운이 없었다.’ 라는 말로 위로하며 넘어가 버린다.

 진짜 운이 없어서일까?

 실패할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고 정신만 바짝 차렸더라면 억 단위 손해를 천단위로 죽일 수도 있었다. 허둥대다가 책상 모서리에 찧지만 않았어도 컴퓨터가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행과 불행은 하늘이 아닌 내가 정하는 거였다.

 

 

 

 

 전쟁 같은 하루가 끝났다.

 회사 앞 벤치에 앉은 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집에 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잘릴 수도 있다는 공포와 압박. 담을 수 없는 실수가 인생을 뒤집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실수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나버려 목숨 줄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수는 볼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빠졌던 정신을 빠지려 노력했다.

 손바닥을 타고 오는 얼얼함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떤 사람을 기억하게 했다.

 그때, 셔츠 포켓에 꽂아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심장을 울렸다.

 모든 게 귀찮아져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으나 천근의 납덩어리를 매단 듯 한 손가락 움직여 문자를 확인했다.

 

 미안해, 오빠. 화풀어, 제발...

 

 진심은 울거나 소리치는 것만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문장으로 마음을 전달할 때 오히려 우는 표정이나 느낌표를 과하게 넣으면 놀리는 느낌이 든다. 담백하게 짧은 문장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게 상대에게 진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수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엔 허둥대고 순진무구한 모습이 재미있었다. 함께 하면 웃게 되고, 스트레스가 물에 녹는 설탕처럼 스르륵 풀렸다.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다시 일상에 집중해야 할 때 그녀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전화가 오는 게 일의 집중에 방해가 되고 귀찮았다.

 수는 멀티가 힘든 스타일이었다. 오롯이 하나에만 정신을 쏟을 때 일이 완벽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일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목구멍 근처에서 찰랑 찰랑 거렸고, 생각 없이 웃게 해주던 윤아가 고팠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지.....

 실수를 저지르면 좋은 게 딱 하나 있다. 저지르기 전 있던 공포와 두려움이 깨지고, 주관이 깨져 자신을 객관적이게 바라보게 한다.

 그는 아침에 과도하게 화낸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천천히 밀려왔다.

 전혀 이해가 안 될 것 같았던 그녀의 행동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에 치여 만나주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원망이 술을 푸게 만들었고 술김이 우리가 사귀는 건 맞는 지 화가나 찾아 왔겠지...

 수도 의문스러웠다. 윤아와의 관계가 사귀는 것이 맞는가? 확실히 그녀는 이때껏 사귀었던 여자들과 느낌이 달랐다. 이십대만 하더라도 하루라도 안보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금방 헤어져 집에 가는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져 중간에 버스를 내려 다시 달려가기도 했다. 뜨겁게 타올랐고, 온몸을 뒤덮은 불덩어리는 길어도 이년 안에 사그라들었다.

 삼십대의 연애는 확실히 달랐다. 내일이 없을 만큼 온 마음과 온 몸을 태우는 연애는 안 되었다. 사랑의 엑셀레이터를 밟기 전에 자꾸 현실과 일이 걸려 브레이크를 찔끔 찔끔 누르게 되었다. 사랑 보다 일이 우선이고 감성보다 이성이 먼저 눈을 뜨는 삼십 대라는 걸 인지하자 수는 입맛이 썼다. 자신도 윤아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랑에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열정을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핸드폰에 윤아의 번호를 띄우고 종료 버튼과 통화 버튼 사이에서 갈등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그녀와의 관계는 계속 지속 될 것이었다.

 즐겁고 활력을 얻는 대신 귀찮음도 같이 얻을 수도 있다. 종료 버튼을 누른다면 이 관계는 끝나 예전처럼 자유롭고 혼자만의 즐거움을 얻는 대신 그녀가 주는 즐거움은 끝나고 말았다.

 두 가지밖에 안 되는 선택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뇌는 용량이 초과 되어 작은 일에도 관자놀이가 시큰 시큰 거렸다. 지금은 핸드폰이고 뭐고 접어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머리를 나무 기둥에 기대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정수리를 타고 나무의 싱그러움이 들어와 조금씩 통증이 덜어졌다. 지금은 생각하기도 귀찮다. 그냥 눈을 질끈 감는 게 최선 이었다.

 

 

 

 

 

 

 

 갈 곳이 없다. 실연을 당하고 갈 곳이 없다는 게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서글펐다.

 윤아는 겨우 네모난 방에서 상처로 피가 철철 흐르는 몸 하나를 숨길 수 있었다.

 오늘따라 수경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고파졌다.

 남자친구에게 차여 울면서 닭발을 뜯는 윤아 대신 수경은 더 화내고 더 욕을 해줬다.

 윤아가 민망해질 만큼 큰 소리로 말이었다. 친구가 대신 욕해준 덕에 윤아는 마음이 풀렸다.

 남자는 없어도 실연당해도 대신 열 받아 해줄 친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소주잔을 짠 부딪치면서 윤아는 둘의 우정이 영원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우정이란 건 언제 깨질지 모를 거울 같은 존재였고, 윤아는 죽음이 갈라놓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거울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내렸다. 머리는 울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눈과 소통이 안 되었나 보다. 달래줄 이도, 닦아줄 이도 없는데 눈물만 계속 나왔다 젠장.

 

 “수경아,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이란 건... 인생이란 건 바뀌는 게 아닌가 봐.

 내 운명은 하늘 높이 떠 있어 아예 손도 못 닿는데 있고... 사랑은 끝났으니까.“

 

 거울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또르르 흐르면서 윤아 대신 거울이 대신 눈물을 흘려주었다. 거울 속 우는 아이는 아무도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가느다란 긴 손가락으로 거울을 닦았다. 뜨거운 눈에서 나와 차가운 거울로 식은 미지근한 눈물의 미끈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눈물 자국이 희미한 길을 남겨두고 지워지고, 얼룩덜룩한 거울을 보며 윤아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운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 이제 안 울 거라도 다짐도 해봤다.

 하지만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도 감정은 바람처럼 바뀌어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근데 난 왜 그렇게 안 바뀌는 거야? 대체 왜 나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헤어질 거면 이유라도 알려주던가. 면박만 주고 차는 건 또 뭔데.“

 

 윤아는 억울했다. 수에게 뿐만이 아니라 전 남자친구들도. 이렇게 빗어낸 하늘마저도 원망스러웠다. 하늘이 장난으로 자신을 만들 리 없을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하늘은 윤아의 생각보다 인정이 넘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장난스레 세상에 던져 어떻게,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지켜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같았다. 정말 하늘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잡히는 건 거울 뿐이니 순간의 화를 못 참고 벽에 집어 던졌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서리처럼 요란하게 떨어졌다. 물건을 던져 깨뜨리면 화도 산산조각이 난다. 바로 왜 깼을까 하는 후호와 저걸 어떻게 치우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똑 또도 똑똑.

 경쾌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별의 아픔으로 파생된 엄청난 공복감으로 저질러 버린 야식 족발 대짜가 도착했나보다. 윤아는 그렇게 단정하고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한 채 열어주었는데 족발 대신 꽃다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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