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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입술은 안돼요
작가 : 시나뉴
작품등록일 : 2019.10.4

- 운명이란 아주 징글징글한 단어다.
지구상에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단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사랑은 하고 싶은데 자신의 ‘치명적’ 결점 때문에 할 수 없게 된다면
운명이란 게 낭만적이기 보단 웬수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받아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차이는 연애를 반복해야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이는 연애만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운명의 ‘진리’를 ‘감전키스’를 하는 남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제 5화
작성일 : 19-10-04 22:15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9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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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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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반하장을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건가.

 윤아는 분함에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졌다. 그에 대해 곱씹고 곱씹어 보아도 나오는 건 욕이고, 들어가는 건 이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떨려했던 감정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연기하고, 웃고 슬퍼하는 것에 열광하는 팬들이 있을 텐데 여러 사람에게 미소를 주며 다정했던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다. 윤아는 제호의 광적인 팬은 아니었다.

 아닌 사람이 봐도 실망감이 이런데 광팬이 이 사람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들고 감정 낭비를 쓰레기마냥 여기는 걸 안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그의 거짓 가식을 벗겨 버리고 싶은 마음이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이 기분 나쁜 그의 성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걸으면서 살짝 헐렁했던 바지가 허벅지에 딱 닿게 되었는데 미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윤아는 주머니에 꽂아놓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거칠게 받았다.

 

 "여보세요!"

 

 인상은 팍 찡그리며 신경질적이게 전화를 받던 윤아는 다시 누구냐고 물어야만 했다.

 수화기 건너편은 다정함을 듬뿍 올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환각 같았던 온기가 다시 되살아났다. 하도 못 들어 어물대었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졌다.

 추상화로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살아나 남자다운 날선 이목구비가 떠올랐다.

 윤아가 사막 한 가운데서 한 방울의 물처럼 간절히 원한 수가 먼저 전화를 왔다.

 그의 목소리가 환상이 아닌 수화기 너머 실제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윤아는 변검처럼 얼굴을 싹 바꾸어 확 웃었다.

 발은 탭댄스를 추고 입에서는 비명이 3단 고음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안 기쁜 척 가라 앉혔다. 아무리 일 때문에 바빴다고 하지만 그만을 기다리며 열병에 시달린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해서였다. 윤아는 힘들고 괴로웠던 감정을 한껏 담아 답을 했다.

 

 "어..오빠."

 

 

 

 

 

 

 

 

 

 윤아는 오랜만에 만난 그를 보면 눈물부터 날 줄 알았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고 그 거대한 품에 달려들어 눈물로 흠뻑 적실 거라 여겼다.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보니 눈물은커녕 감격도 가뭄이 온 듯 싹 말라 버렸다.

 오히려 자신의 의자를 빼준 그의 배려가 낯설게 느껴졌다. 잘 지냈냐고 묻는 수의 말에 윤아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공간과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주변의 커플들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가운데 놓고 두 손을 꼭 잡고 코앞에서 대화를 하는 연인도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쿡쿡 장난스레 쪽지를 주고받는 풋풋한 사이도 보였다.

 아만 둘러보아도 자신들 같이 어색한 커플은 보이지 않았다. 윤아는 당황스러웠다.

 그리워하는 상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그때 품었던 감정들이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 것일까. 수만 만나면 자신을 괴롭혀 왔던 불안과 초조, 걱정, 고통 등이 한꺼번에 날아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치 떨어진 엄마를 기다리려고 내일 밤낮을 울며 기다리다가 막상 보면 못 알아보고 낯설어 하는 것과 같았다.

 수는 지금 눈앞에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졌지만 그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인으로 그녀를 대했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윤아에게 먼저 내밀었다. 그의 눈빛은 전혀 서먹 거리지 않았다. 다정이 한껏 베인 미소로 그녀를 챙겼다.

 겨울바람을 맞은 두꺼운 옷을 벗길 수 있는 건 얼음도 녹여버릴 따뜻한 태양뿐이다.

 그의 태양 같은 손길에 그녀가 여러 겹으로 겹친 서먹함과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둘은 카페에 있는 어느 연인처럼 두 손을 맞잡고 서로를 눈동자에 담았다.

 수는 오랜만에 비친 자신의 연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앙증맞은 윤아의 입술 한 모금을 마시고 싶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는데 윤아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스를 피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그녀의 사랑법 이기도 했다. 그런 윤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수는 씁쓸한 아쉬움만 느끼며 볼에 뽀뽀를 하는 걸로 마무리 하고는 떨어졌다.

 키스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불안했다. 이미 깨져버린 이별의 파편 조각의 결과 모양을 윤아는 여러 번의 사랑을 통해 알고 있었다.

 수와의 사랑도 전처를 밟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계속 피하고, 얼버무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톨의 용기도 없었지만 벼룩의 즙을 짜내는 심정으로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를 맞서려고 했다.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오빠, 나 뭐 물어봐도 돼?"

 "뭐든 물어봐. 앙."

 

 수는 윤아의 손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둘의 관계가 밀접해 질수록 못 보던 수의 진면모가 점점 드러났다. 이진법 안에 갇혀서 삭막할 줄 알았는데 그는 꽤 유머를 좋아했다. 친한 사람에겐 SNS에 돌아다니는 유머를 해 반응을 강요하기도 하는 남자였다. 특히 수는 말장난 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물건을 돌려줘 라고 하면 돌려달라고 한 사람 몸을 돌렸다.

 강아지 보고 귀엽다고 쓰다듬으면 자신의 귀를 가리고 귀 없지? 하고 강아지 흉내를 냈다.

 애정이 없으면 주먹이 먼저 올라가는 농담을 그는 좋다고 해댔다.

 수의 장난에 그만 웃음이 쿡 튀어 나올 것 같은데 꾹 참았다.

 

 "키스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키스?"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꼭 키슬 해야 되나 싶어. 입에 세균이 얼마나 많은데.

 난 키스가 서로의 세균을 교환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생각해. 굳이 키스를 안 하더라도 서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음 충분히.... 몸이 열리지 않을까?"

 "음, 니 생각에도 일리가 있긴 한데."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 한 문장, 한 문장 주저주저 하면서 뱉어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손길, 포옹, 이마에 지그시 누르고 떨어지는 뽀뽀도 괜찮았다. 키스만 빼면 모든 다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수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그의 입에서 일리라는 말이 나온 것 보면 그녀의 제안에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윤아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화색이 돌았다.

 

 "난 키스가 서로 맞는 짝인지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해."

 

 일리 있는 말 뒤에 붙는 문장이 윤아는 이해가 안 되어 재차 물었다.

 

 "응?"

 "생물시간에 선생님이 말해줬던 거야. 인간이 유전학적으로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키스래."

 "그걸 믿어?"

 "경험상 맞더라. 키스 할 때 느낌이 별로인 여잔 아무리 예뻐도 얼마 못 가더라고."

 

 기대가 정수리까지 날아올랐다가 발바닥으로 고공낙하를 했다.

 키스라는 건 남자고 여자고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행위였다.

 연애가 완전히 여무는 시작이 키스였고, 완성이었다. 그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연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윤아의 손등에 턱을 괴고 촉촉하면서 깊은 눈길을 보냈다.

 

 "궁금해."

 "뭐가?"

 "너가 나와 잘 맞는지, 아닌지. 하지만 꾹 참고 기다려줄게. 니가 준비 될 때까지."

 

 제일 맛있는 것은 참고 참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 때 먹을 때야말로 진정한 맛을 느끼는 법이었다. 이로 으깨질 때 툭 터지는 즙이 혀를 감싸여 온 세포를 바짝 세워 목구멍 뒤로 넘어갈 때의 환상적인 느낌! 이것은 기다리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카타르시스였다.

 수는 연애의 맛을 잘 알았다. 연애란 기다림의 묘미였다. 곰 같은 순진함이 매력인 윤아와 연애하면서 다른 때보다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천천히, 느긋하게.

 연애가 무르익어 저절로 터질 때까지 수는 기다릴 각오가 되었다.

 윤아는 처음으로 ‘기다린다’ 라는 말이 이리 부담스러운 것일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리로 이자가 붙는 고금리 사채를 쓴 채무감 이었다. 명치가 급체한 것 마냥 딱 얹혀서는 무겁게 짓눌러 있었다. 따끔거리는 위의 통증을 느꼈지만 윤아는 차마 내색은 할 수 없어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누군가의 노래 제목처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제호의 침실은 난영과 은밀함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 안엔 카메라도 없고 마이크도 없었다. 가식적으로 웃을 필요도 없고, 억지로 좋은 말만 하지 않아도 되었다. 힘들고, 화나고, 짜증나고... 제호의 온갖 것들을 쏟아내어도 받아줄 난영이 있었다. 그는 난영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는 손거울을 보며 마스크팩을 팽팽하게 당겨 붙였다.

 

 "아저씨?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피부 나이 체크해봤더니 아직 이십대 후반이라더만."

 

 그가 살면서 처음들은 모욕이었다. 어딜 가든 제호는 오빠 소리를 자연스럽게 들었다.

 자기보다 한참 많은 누나들에게도 그는 항상 오빠였다. ‘오빠’ 소리는 그가 밥숟가락 놓는 그 순간까지 깨지지 않는 불문율이어야 했다. 그런데 윤아가 제호보고 아저씨라고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아저씨의 이미지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거리고 배가 나왔으며 편협한 사고를 가진 꼰대였다. 자신은 그런 꼰대와는 북극과 남극처럼 먼 일이라고 제호는 확신했다.

 잠깐. 꼰대라는 말을 요즘 애들이 썼던가? 제호는 절망의 회오리가 둔부를 휩쓸고 가버렸다.

 꼰대라는 말을 쓰는 자신이 진짜 꼰대라는 걸 깨달았다. 꼰대라는 단어를 요즘 애들은 뭐라고 하지? 그런 단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낙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저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분노하며 부정하였다.

 

 "아저씨 소리 듣고 발끈하면 진짜 아저씨라는데."

 "난영씨도 내가 아저씨 같아 보여?"

 "팩할 때 얼굴 찡그리면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 된다. 누워."

 

 아저씨만 되어도 끔찍한데 할아버지는 상상이 아예 안 되었다. 그 말은 그를 꼬리 내린 강아지로 만들었다. 고분고분하게 다시 무릎에 눕자 난영은 제호의 삐뚤어진 팩을 바르게 펴줬다.

 흔히 죽음의 5단계로 불리는 분노-부정-타협-절망-수용은 꼭 시한부 인생에게만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생을 통해 부정해온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이 다섯 단계를 밟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계란 한판 서른이 딱 될 때 여자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나이와 맞닥뜨려 많은 고뇌에 휩싸이게 되었다. 서른이라는 숫자에 이유 없이 화가 난다. 그 화는 주변을 향해 쏘아졌다. 갑자기 히스테리 해졌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 오단계의 첫 발을 뗀 것이었다.

 남이 보면 아직 이십대 초반으로 본다며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피부에 좋다는 비싼 화장품은 월급의 절반 이상을 들여서라도 사 바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아왔다고 타협하다가 일 또는 연애가 잘 풀리지 않으면 바닥없는 절망의 추락을 맛보는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뭐했나.... 자학을 하면서 말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바닥이 있었다. 지지고 설 땅이 있다면 안정감을 찾고 현재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이 서른이라는 사실도.... 더 이상 노력만으로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도,.... 피하고만 싶던 것들이 다 인정되게 되었다.

 하지만 제호에게 아직 그런 관용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밟아가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았다.

 

 "기집애가 아주 하는 말마다 밉상이야."

 

 그는 머릿속에 맴도는 윤아의 모습을 얄밉게 흉내 냈다.

 

 "사람 치고 갔으면 사과부터 해야 될 거 아니예욧! 지는 사람 면상에다 대놓고 악플을 달았으면서. 이거 내가 사과 받아야 되는 거잖아. 확 고소를 해버려 그냥?"

 

 난영은 제호의 말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이 세상에 두 사람만이 키스할 수 있다고 하면 어린 애라도 이 둘이 운명이란 걸 알 것이었다.

 하지만 난영은 그녀의 운명인 그를 사랑해 버렸기에 둘이 계속 으르렁 거리길 바랐다.

 사랑과 운명은 정비례 하지 않는다.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꼭 운명일 순 없다.

 운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난영은 사랑과 운명이 반비례 한다고 믿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제호의 마음이 운명을 꺾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난영은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데 자존심상 새침하게 꾹 참았다.

 

 "톱스타답게 아량도 정상으로 베풀어. 그래야 다루기가 쉽지."

 "하, 참자. 영화만 생각 하는 거야, 영화만. 그런데 계속 안 하겠다고 버티면 어떡하지?"

 

 여자가 여자에 대해 평가할 때는 닌자와 같다. 적의는 웃는 해사한 얼굴 뒤에 숨겨 절대 드러내지 않다가 바늘로 뒷목 급소를 톡 밀어 넣어 한방에 치명타를 노린다. 그리고 자신이 한 증거를 드러내지 않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간다. 난영은 제호를 치켜 올려 윤아를 깎아내림으로 그와 그녀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시켜주었다.

 

 

 

 

 

 

 

 피크닉하기 딱 좋은 날씨가 캠퍼스 주위를 감쌌다.

 그녀의 아지트도 찬란한 햇빛을 받아 벤치가 구리거울처럼 황색으로 반짝 빛났다.

 손수 싼 김밥과 샌드위치, 음료수를 벤치에 쭉 늘어뜨려 놓고선 들뜬 시선으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정말 상대적이었다. 시험기간 때 인터넷 좀 하다 보면 한 두 시간이 후딱 갔는데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다섯 번은 족히 본 것 같은데도 아직 1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도 상대적이었다. 기다림을 당하는 상대에겐 1시간이 1분 마냥 바쁘고 빠르게 지나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반면, 기다리는 사람은 1분이 1시간의 생명을 태우는 것 마냥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게 지옥이었다.

 계속 시계를 바라보면서 1분이 빨리 지나가 숫자가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다림을 이어갔다. 그런데 벤치가 덜컹 거리며 누군가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왔다.

 윤아는 더 이상 필 수 없을 만큼 만개한 미소를 띠우며 옆을 보았다.

 큰 눈 잠자리 같은 선글라스에 윤아의 얼굴이 쌍라이트처럼 들어왔다. 자기 얼굴에 놀란 윤아는 살짝 주춤하다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제호가 떡하니 앉아 있는 걸 보고 두 번 놀랐다. 윤아는 널뛰기를 한 심장을 부여잡아 겨우 진정시켰다.

 

 "뭐예요?"

 "남친한테 줄 거야? 정성이 갸륵하네."

 

 힐끗 쭉 늘어놓은 도시락을 바라보던 제호는 마스크를 내리더니 김밥 하나를 입 안에 쏙 넣었다.

 

 "이거 임자 있거든요!"

 

 앙칼진 고양이 같이 털을 신경을 바짝 세운 윤아가 짜증내며 도시락 통을 두 손으로 막았다.

 몇 번 씹다가 꿀꺽 삼킨 제호는 윤아가 너무 과하게 화를 내니까 무안해져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그거 하나 먹었다고 쩨쩨하게... 니 남친도 참 불쌍하다. 이 맛대가리 없는 거 입에 넣고 억지로 웃어주면서 맛있다 해줘야 되잖아."

 

 그런 사람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이 사람한테는 곱게 안 나가게 되는 그런 사람.

 제호에게 윤아가 그랬다. 다른 사람에겐 싫어 침이라도 뱉고 싶어도 웃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한 없이 늘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게 말해도 될 걸 윤아에겐 왠지 배알이 꼴려 한번은 비틀어 말하게 되었다. 이러니 윤아도 제호에 대해 점점 호감이 떨어지고 도끼눈이 떠질 수밖에 없었다.

 

 "쳇- 누가 먹으라고 했나? 허락도 없이 맘대로 집어 먹어놓곤. 웃기는 아저씨야. 증말."

 "그놈의 아저씨 소리 진짜. 차라리 이제호라고 이름을 부르던가, 아님"

 

 난영이 아저씨라는 말에 발끈하면 진짜 아저씨라고 했는데도 제호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참지 못하고 또 질러버렸다. 화내면 지는 거라는 생각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그는 미소 지었다.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막 땅을 뚫고 생명의 싹을 내민 봄처럼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이 미소는 그의 전매특허 미소였다. 대한민국 절반 이상의 여자들이 이 미소에 흠뻑 빠져 늪인 줄 알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세월에 약간 빛을 바래긴 했지만 그 힘을 잃지 않았을 거라고 제호는 확신했다.

 

 "오빠라 하던가."

 "오빠?"

 

 윤아는 기가 차 코웃음이 다 났다.

 

 "허- 나보다 띠동갑 위면서 오빠소릴 바래요?"

 "띠..띠동갑? 너 그렇게 어렸냐?"

 "아저씨 데뷔할 때 저 초등학교 1학년이었구요. 아저씨 빵 터진 드라마 뭐냐 정열속으로?

 그거 할 때 저 중딩이었거든요?"

 

 하나하나 따지고 드니까 제호는 꼭 원조교제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저씨란 걸.

 하지만 아저씨 축에선 꽤 괜찮고 매력이 있는 남자라고 제호는 자신을 다독여 보았다.

 갑자기 자신감이 팍 죽으면서 윤아의 허락도 없이 키스 뺑소니를 한 것이 미안해졌다.

 신호등에서 키스하기 전에 해도 되냐고 먼저 물어 볼 걸 그랬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의 생각에 머물러 무안해진 제호는 버릇처럼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윤아는 그의 입술에 눈길이 가면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입술이 자신의 입술과 포개졌다는 사실이 모자이크처럼 모아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호는 자길 왜 그렇게 보나 별 의미 없이 시선을 던졌는데 하도 눈빛이 깊어 상대방 심장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윤아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무안함을 피했다.

 

 "근데 여긴 왜 오셨어요?"

 "너 만나러 왔지.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

 "전 말 다 했거든요? 싫다고요."

 

 윤아는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듯 스타카토로 딱딱 끊어 말했다. 그 말투가 더 열 받게 해 제호로부터 뜨거운 콧김이 나오게 만들었다. 열기가 뇌의 구석구석을 마사지 되더니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팔짱을 딱 낀 제호는 윤아를 흘겨보았다.

 

 "동영상에서 두 번째 남친이 그랬던가?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냐고.

 지금 남친도 자꾸 빼다 보면 그렇게 될 텐데. 나만 있음 다 해결되잖아. 뭘 그렇게 빼?"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키슬해요?"

 "왜 못해? 그냥 하면 돼지."

 "그거야 아저씬 연기자니까 그렇죠. 연기자랑 비연기자랑 같아요?"

 "그런가? 그럼 잠깐 동안 날 니 남친이라고 생각해."

 "아저씬 우리 오빠가 아닌데 오빠라고 백번 외친다고 오빠가 되요?

 사랑하질 않는데 사랑 한다 천 번 외친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도와드릴 수 있음 참 좋겠지만, 이것만은 안 되겠네요."

 

 어떤 모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존재 한다.

 비 연기자와 연기자.

 연기자는 비 연기자와 다를 게 하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영역엔 확실히 비 연기자가 이해 못하는 생각과 세계가 존재했다.

 연기자의 세계에 익숙한 제호는 윤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윤아에게도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의 영역 밖의 사람이었다.

 사랑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남자와 사랑은 연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

 서로를 이해조차 할 수 없는데 운명이라고 한들 어떻게 가까워 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디딘 땅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윤아는 핸드폰 시계를 보고는 실망의 한숨이 나왔다. 짜증나는 감정을 가득 가득 담아 거칠게 도시락 뚜껑을 짝 맞춰 닫고는 챙겨 일어났다.

 

 "어디가, 남친 기다리던 중 아냐?"

 "안 와요. 점심시간 지났어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게 된 윤아는 카페에서 수와 약속 하나를 만들었다.

 점심시간만큼은 둘 만의 비밀 장소에서 나누기.

 하지만 번번이 그는 약속을 자주 여겼다. 윤아는 그가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서 일거라며 욱신거리는 가슴을 속였다. 바람 맞은 여자는 옷깃이라도 건드리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제호는 아까 윤아로 인해 상처 받았던 앙금이 가슴에 매캐하게 남아 있었다.

 제호는 이 여자 앞에선 왜 이렇게 옹졸한 중2가 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악착 같이 따라 붙어 심기를 건드렸다.

 

 "벌써 애정이 식었구만. 못 온다 전화 한 통 없는 거 보면."

 "아니거든요! 바빠서 전화 할 시간도 없는 거라구요."

 "이그- 이렇게 순진한 아가씰 봤나. 남잔 아무리 바빠도 담배 필 시간이랑 여자한테 문자 보낼 시간 정돈 있거든. 원래 맘이 떠나면 시간 쓸 여유까지 아깝게 느껴지는 거야."

 

 겨우 겨우 심장을 속여 진정시켰는데 그의 말에 다시 전기 충격기 받은 심장처럼 뛰었다.

 사랑에 미칠 땐 차라리 바보가 되고 싶었다. 바보처럼 보고도 알지 못하고, 촉이 와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 그런데 윤아는 머리가 지나치게 똑똑했다.

 걸음을 뚝 멈춘 윤아는 제호를 홱 노려보더니 도시락 통을 턱 안겼다.

 

 "똥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남자들이 다 아저씨 같진 않거든요? 난 할 말 없으니까 이거나 먹구 떨어져요!"

 

 흐르는 눈물을 그가 봐 동정이라도 할까봐 빠르게 발을 옮겼다. 이런 기분에 동정이라도 받는 것까지 더해지면 딱 세상 마감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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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 20화 -마지막화- 2019 / 10 / 4 216 0 4063   
20 제 19화 2019 / 10 / 4 215 0 7463   
19 제 18화 2019 / 10 / 4 234 0 6128   
18 제 17화 2019 / 10 / 4 245 0 7370   
17 제16화 2019 / 10 / 4 211 0 7262   
16 제 15화 2019 / 10 / 4 220 0 11253   
15 제 14화 2019 / 10 / 4 233 0 6496   
14 제 13화 2019 / 10 / 4 227 0 9002   
13 제 12화 2019 / 10 / 4 230 0 6690   
12 제 11화 2019 / 10 / 4 205 0 8270   
11 제 10화 2019 / 10 / 4 253 0 7873   
10 제 9화 2019 / 10 / 4 232 0 7234   
9 제 8화 2019 / 10 / 4 213 0 8443   
8 제 7화 2019 / 10 / 4 215 0 15261   
7 제 6화 2019 / 10 / 4 238 0 13988   
6 제 5화 2019 / 10 / 4 228 0 9941   
5 제 4화 2019 / 10 / 4 199 0 10728   
4 제 3화 2019 / 10 / 4 187 0 9490   
3 제 3화 2019 / 10 / 4 226 0 12584   
2 제 1화 2019 / 10 / 4 206 0 14361   
1 프롤로그 2019 / 10 / 4 378 0 10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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