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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입술은 안돼요
작가 : 시나뉴
작품등록일 : 2019.10.4

- 운명이란 아주 징글징글한 단어다.
지구상에 남자가 반, 여자가 반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단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사랑은 하고 싶은데 자신의 ‘치명적’ 결점 때문에 할 수 없게 된다면
운명이란 게 낭만적이기 보단 웬수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받아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차이는 연애를 반복해야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이는 연애만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운명의 ‘진리’를 ‘감전키스’를 하는 남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제 1화
작성일 : 19-10-04 22:09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14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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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와 블랙이 예술처럼 배치되어 있는 가구와 벽면 형태가 군더더기 싫어하는 남주인공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벽면에 조명에 취한 듯 한껏 우수에 찬 얼굴을 담아낸 사진이 금테 액자에 걸려 벽면 가득 장식을 했다.

 한 곳엔 드높은 액자의 성벽을 넘기 위해 쌓아 올린 듯 한 수 많은 선물 꾸러미가 방치되어 있었다.

 남주인공은 우수에 젖은 눈빛, 조각 같은 얼굴과 훤칠하고 완벽한 바디라인으로 추리닝만 걸쳤는데도 연예인의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의 이름은 제호다.

 제호는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헬멧을 뒤집어쓰고 큰 점퍼를 입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택배기사가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서 있었다. 헬멧의 주위에 톡 쏘는 알코올 냄새가 폐부에 훅 들어와 소독을 하고 날숨으로 빠져나갔다. 독자가 보기엔 왠지 살인마를 집에 드리는 것 마냥 꺼려지는 인물이나

 제호는 익숙한 사람인 듯 아무 의심 없이 뒤돌아 런어웨이 하듯 소파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헬멧은 택배 상자를 열더니 포도주 주둥이를 다부지게 잡아들었다.

 그러나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제호는 정체 모를 이의 위협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같은 시각, 윤아는 이십 사년 인생에서 가장 격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때 까지 꽤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갈지 실업계로 갈지, 대학을 갈지 말지, 어디로 무슨 학과로 갈지....

 성인이 되기 전에 꽤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심사숙고 끝에 한 발짝 내밀었다.

 다른 한 쪽의 기회는 런닝 머신을 따고 다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달아나 버렸다.

 이번에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이번 선택의 기로에서 한 쪽으로 기울어 발 한쪽만 삐끗 내민다면 다른 한 쪽은 영영 닿을 수도 없게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녀가 선택 하려는 건 사랑과 몸의 경계선에 있었다.

 윤아는 다시는 지금과 같이 답답하게 살지 않겠다고 했다.

 절정의 도덕군자 노릇도 다신 안 할 것이고, 열심히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머리와 야심, 규율이 말하는 틀은 개나 줘 버릴 거다.

 이제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태초의 DNA가 시킨다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사랑을 하는 게 아닌 받기만 할 거고 운명을 찾는 게 아닌 찾아오게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운명이란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그 운명을 기다리다 이십대 청춘이라는 걸 흘려보내는 바보 같은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윤아는 사랑 없이도 몸이 움직이는 ‘요즘 식 연애’주의자가 되 보려고 처음 만난 남자와 호텔까지 왔다.

 그녀가 생각하는 요즘 식 연애란 약간의 호감만 있어도 사귀어보고 사랑이 아니라도 같이 섹스하고, 그러다 실리면 깨지는 그런 관계였다. 전 남자친구 세철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젠틀하게 생긴 그는 윤아의 동영상을 보고 연락한 남자였다.

 동영상을 보고 반했단다. 그는 운명을 찾기 위한 그녀의 용기와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아 본 윤아에 대해 연민이 들었다. 평생 키스 한 번 못해도 사랑을 표현할 방법은 수 만 가지라고 했다. 남잔 누군가 대사를 짜 준 것 마냥 윤아를 사랑해 줄 이유를 달콤하게 내뱉었다.

 이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바람둥이인가, 내가 이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걸까.... 그런 잡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침대로 옮겨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동영상에서 말한 감전 키스를 몸소 경험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윤아는 술의 입을 빌러 그의 입술을 받아들었다.

 둘은 같은 포도주를 마셔 키스가 첫 맛은 달콤했고 끝 맛은 지독히도 씁쓸했다.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며 기절해버렸다. 넘어질 때 와인 잔을 쳐 떨어뜨려 버렸다.

 양탄자엔 포도주가 흘렀고, 크리스털 잔 파편이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그는 흰자가 살짝 뒤집어 진 채 미동이 없었다.

 윤아는 자신의 키스에 기절한 남자가 언제 깨어날지 감각적으로 알았다.

 꽤 걸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무료하게 TV를 시청했다. 누가 이 상황만 딱 잘라 언뜻 보면 윤아가 이름 모를 남자를 해친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남자는 숨을 들이켜고 사래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쓸어보며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괜찮아요?"

 "네. 정신이 번쩍 드네요. 동영상에서 말하던 게 진짠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데. 두 번 확인하다간 사람 잡겠는데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말하시더라고요.“

 

 사실 윤아는 남자가 말하는 상황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동영상을 본 꽤 많은 남자들이 윤아에게 호기심 반 연민 반으로 연락을 해왔고, 그녀도 ‘요즘 식 연애’를 해보려고 만났다.

 하지만 다짐과는 다르게 몸과 마음은 계속 거부를 해 키스 이후로는 관계가 발전되지 않았다.

 윤아는 오늘만은 기필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자시을 휘휘 감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리겠다고 여겼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요?"

 

 남자는 윤아의 귓불을 입술로 애무했다. 갑작스럽게 와 닿는 축축한 혀끝이 꼭 산낙지가 휘감는 것처럼 끈적거리고 소름끼치는 촉감을 전달했다.

 윤아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이 올라오는 걸 애써 잊으려고 하였다.

 나는 기분 좋다.... 흥분된다.... 속으로 주문 외우듯 하며 느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윤아는 남자의 손 끝 하나에도 허리가 휘는 여자가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은 그녀의 몸을 더욱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고, 흥분은커녕 촉수가 공격하는 것 마냥 징그럽고 혐오감이 올라왔다. 꾹꾹 참아 내리다가 남자의 혀가 귓구멍에 들어가자 벌떡 일어났다. 우선 씻자며 윤아는 남자를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화장대로 튀어가 티슈를 여러 개 뽑더니 귀를 빡빡 닦아내었다. 윤아는 거울을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먹으로 깨부수고 싶을 정도로 거울 속 자신을 보기가 싫었다.

 싫은 얼굴을 하고 있는 비친 자신에게 윤아는 주문을 걸 듯 말을 걸었다.

 

 "오늘은 착해지지 말자, 성윤아. 그냥 널 놔버리는 거야."

 

 윤아는 심호흡을 하며 오늘만은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한 번만 해내면 두 번 째는 일도 아닐 거란 걸 윤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벽을 깨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녀도 답답했다.

 윤아는 계속 거울 속에 갇힌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아만 멀리 도망가고, 숨어 보아도 거울을 보면 언제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거울을 깨고 갇혀 있는 자신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항상 1cm에서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손만 뻗치면 되는 거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오늘만은 기필코 이 거울을 박살내어 버릴테다.

 주먹을 꽉 지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핸드백에서 생수병에 담긴 소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헬멧은 걱정 반 기대 반을 저버리고 와인 병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제호가 누워 있는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헬멧은 점퍼를 벗어 소파에 걸어놓는데 글래머한 몸매가 드러난다.

 헬멧을 벗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데,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미모의 여자자였다, 그녀는 피부가 꽤 검었다. 하얀 제호 옆에 있어 유달리 검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쌍꺼풀이 깊어 보이는 진한 눈매와 은장도를 닮은 듯 찌를 듯 예리한 코에 크면서 살짝 도톰한 입술. 할리우드나 발리우드 보다는 이집트 벽화 쪽에서 많이 본 듯 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의 얼굴이 아닌 어딘가 한국적인 느낌을 주어 살면서 외국인이라는 놀림은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느끼기에 이름도 기여한 점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영롱한 난초를 뜻하는 흔한 옛날 식 이름을 가졌다. 난영.

 난영은 와인 병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자신의 갈증 난 목을 축이기 위해 가져왔던 것이었다. 애주가인건 분명했으나 그리 와인을 즐겨하는 타입은 아닌 듯 했다.

 코르크 따개를 안 가져 왔는지 와인 코크를 이로 잡아 뽑았다.

 분명 누군가 선물로 준 걸 제호의 얘길 들어주려면 술이 필요했기에 그냥 집어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난영은 병째 잡고 꿀꺽꿀꺽 마셨다.

 

 "누차 말하지만, 난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카운셀런 더더욱 아니에요."

 "알아요. 하지만 선생님 말고 누구한테 이런 소릴 하겠어요. 내 병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난영이 제호의 ‘유일한 사람’ 이 되었던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레지던트를 수료하고 ‘난영 병원’ 을 만든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것을 맛봤다. 항상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병원에서 수료하고 뜻한 바가 있어서 대학 병원을 나왔다.

 난영의 꿈은 악착같이 밟아온 엘리트 코스보다 소박했다.

 큰 병원 가는 게 한 시간은 더 족히 걸리는 경기도 지역에서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당장 수술 하지 않으면 위급한 것을 배 좀 아프다 말 걸로 알고 소화제 찾다가 손 쓸 수도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대학병원에 실려 오는 경우를 안타깝게 여겨서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병원의 원장이 된 난영은 개업한 지 일주일 만에 철저히 짓밟히고 무참히 깨졌다.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가 갑작스런 부도로 회색 시멘트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홍보물을 아만 뿌려도 드문 드문 사는 사람들은 아파도 게보린과 파스 한 짝으로 버티는지 오지 않았다. 얼마 안 가 투자금은 밑천을 드러냈고, 월세 내는 게 빠듯해 간호사도 두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문 앞에 달아 놓은 종이 울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종이 딸랑 울렸다. 깜빡 깜빡 졸고 있던 난영은 처음 들어보는 종소리에 놀라 기쁜 마음으로 나갔다. 그 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이 기쁨이라는 걸 말이다. 그녀에게 기쁨을 준 상대는 선글라스에 검은 마스크까지 써서 얼굴에 드러나는 피부의 면적을 최소한도로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뿜어내는 포스를 숨기지는 못했다.

 그가 수 많은 병원 중 그녀에게 찾아간 건 손님이 지독히도 없어서였다.

 간호사도 두지 못할 형편의 하우스 푸어가 아닌 병원 푸어인 난영에게 돈만 쥐어준다면 안정적인 치료와 비밀보장까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제호는 난영 병원의 첫 손님이란 인연으로 지금까지 주치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는 손거울을 보며 휴지로 눈물을 꼼꼼히 닦았다.

 눈물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 거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걸 보니 제호는 나르시스가 강한 듯 보였다. 난영은 포도주를 테이블에 놓고서는 편하게 양반다리를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시나리오를 하나 받았어요..."

 

 제호는 겨우 잠재웠던 감정이 울컥 북받쳐 울먹거렸다. 난영은 자연스럽게 서랍 위 티슈를 몇 장 빼서 내밀었다. 제호는 티슈를 받아들고 코를 팽 풀었다.

 

 "읽기만 해도..."

 

 제호는 잠깐 말을 못 잊더니 아프게 심장 쪽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여기가 먹먹해지는 사랑얘긴데, 이렇게 펑펑 운 시나리온 처음이었어요.

 이번에도 놓치면 평생,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 같아요."

 "제호씨 키스 못하잖아요."

 

 난영은 바로 돌직구로 제호의 치부를 찔러버렸다.

 맞다. 그는 윤아와 마찬가지로 키스를 하면 여자를 감전 시켰다.

 하지만 윤아처럼 대놓고 자신의 치부를 밝히지 못했다. 스타는 수많은 장점 중 약간의 허당 끼가 있어야 매력이 커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키스를 못한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은 매력이 아닌 반감만 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제호는 철저히 자신을 숨겼고, 자신의 병에 대해 알기 위해 난영에게만 정체를 밝힌 것이었다.

 제호는 밉지 않게 난영을 흘겨보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문제에요. 시나리오 상에 딥키스가 네 번이나 있다고요. 키스를 하면 여자가 감전 당하다니...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병에 걸릴 수 있죠? 그것도 내가?"

 "병이 아니라 SLI신드롬이라 했잖아요."

 

 제호의 주치의가 된 이후, 난영은 병명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키스를 하면 상대가 감전된다니... 처음 들어보는 증상이라 많은 연구와 기존의 논문을 A부터Z까지 다 체크해봐야 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인체가 정말 신비한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사람의 몸에는 미약하나마 전기가 흐른다. 다들 중학교 때 생물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시냅스라는 곳에서 신경전달물질을 보낸다는 것 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시냅스가 물질을 전달할 때 0.05 볼트 정도의 미약한 전기 한다.

 그건 누구나 마찬 가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전자가 많았다. 그에 비해 – 전자는 지나치게 없었다.

 난영은 수많은 논문 중에 이 증상이 SLI 신드롬이라는 병명일 거라 여겼다.

 전자의 불균형이 강력한 전기를 만들어 상대 여성이 누구든 감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병명이 말도 안된다는 학설이 많았다. 뇌하수체의 시냅스에서 상대를 감전시킬 정도의 전기를 내보낸다면 이미 사람의 머리는 터져 살 수 가없다는 거였다.

 제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아갈수록 돌덩이를 내뱉듯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은 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는 질환.

 그래서 어떤 약이든 수술이든 할 수 없어 평생을 안고 갈 저주처럼 따라붙는 것이 제호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처연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이런 작품 들어오면 그냥 흘러 보내고 나랑 연이 아니 거니 하고 말았어요.

 그러다보니 지금 들어오는 거라곤 뻔한 액션 영화에 이십대 애들이나 하는 로코물 뿐이고...."

 

 제호는 다시 손거울을 보았다. 눈 밑에 실금같이 난 주름을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이제 30대 후반이에요. 여자는 현금이고, 남자는 어음이라더니, 이대로 있다간 부도어음 받게 생겼어요."

 

 

 

 남자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 한 장으로 엉덩이만 가린 채 나왔다.

 탄탄한 복근과 이두근. 살짝 그을린 피부가 주황빛 호텔 불빛에 반짝였다.

 그는 어떤 여자라도 반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자신감은 당당하게 벌린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우연을 가장해 수건을 바닥에 떨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그의 페로몬을 봐줄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윤아는 오늘도 거울을 깨지 못하고 멀리 멀어졌을 뿐이었다.

 

 

 

 

 

 "이젠 체력이 달려서 와이어 연기도 못하겠고, 제 티켓이 십대에게 먹히지도 않아요.

 빨리 이미지 변신을 해야 되요. 배우로서 입지를 세길 만한 작품으로. 그게 이거 같아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분수를 아는 것. 그걸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 그걸 모르고 더 이상 없는 계단을 밟으려고 무리하게 발을 뻗다가 균형을 못 잡고 굴러 떨어져 여기 저기 부러지고 깨졌다. 제호는 배우를 시작하면서 한 번도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스타가 된 것이 모두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었고, 그 운이 다 해 인기가 사그라질까봐 불안했다. 주변에서 최고라고 치켜세워주는 말도 믿지 않았다. 내가 연기를 잘 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 자신의 실력에 대해 모르고 끝없이 의심했기에 제호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자기 제호가 난영의 손을 잡아끌어 안았다. 그녀는 손등을 화끈하게 감싼 그의 체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정신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아귀는 사우나 같았다.

 데일 것처럼 뜨겁고, 장마철마냥 습했다.

 

 "선생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이 병만 나을 수 있음 뭐든지 할게요.

 치료과정이 고통스럽고, 돈이 얼마나 깨져도 상관없어요."

 

 그의 거인 같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난영은 손바닥이 저려 왔지만 그의 간곡함이 담겨져 쉽게 아프다며 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호는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눈빛만으로도 메두사의 머리를 본 것마냥 두 눈을 석고처럼 고정시켜버렸고, 심장을 파먹는 것 같았다.

 연예인의 눈빛은 보통 사내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가 있었다.

 눈동자는 본능적으로 이성의 눈을 꿰뚫어 보았고, 마음까지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었다. 여자의 가슴을 뛰게 하고 오금은 저릿하게, 등골은 짜릿하게 만들 줄 알았다.

 난영도 그의 눈빛에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당황스러움 보태어져 심장은 천리마처럼 뛰어댔고 빨라진 혈류를 타고 얼굴까지 올라와 귀가 다 빨개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키스를 하거나 사랑을 속삭여야 적합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생님, 전 이 배역이 꼭 필요해요."

 

 배역에 눈이 멀어 그녀와 로맨스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교 캠퍼스는 꽤 넓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마 4년 내내 이 학교를 다닌다 하더라도 자신의 비밀의 아지트를 발견하고 졸업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일 것이다.

 윤아는 그런 행운을 꽤 일찍 발견 했다. 애성 학당이 있는 낡은 건물 뒤편에 큰 숲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숲 가운데에 작은 벤치가 놓였다.

 숲은 엄밀히 말하자면 학교 내 소유지가 아니었다. 학교가 숲의 반 정도는 샀는데 돈이 모자라 반은 산림청이 관리를 했다. 숲 옆에는 무한 경쟁과 스트레스, 자동차와 매연이 가득한 직장인들의 일터가 있었다. 이 학교 졸업자들도 그곳에 첫 직장을 뿌리 내릴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학교의 숲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일터 건너편에 숲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다들 자기 할 일에 급급해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강의에 늦지 않기 위해, 직장에 늦지 않기 위해 큰 길로만 다녀서다.

 윤아는 누구나 다 아는 길로만 다니는 것에 싫증을 느꼈고, 일부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길을 구석구석 파헤쳤다. 다른 친구들은 방학이 되면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 떠날 계획에 떠들썩했으나 윤아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하루하루 캠퍼스 이곳저곳을 다니며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기쁨에 매일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 숲 속의 벤치는 참으로 희한한 곳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잎이 쏘아대는 청량한 공기가 온몸을 적시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곳에 앉아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치유가 되었다. 초록의 산소가 윤아의 몸을 살포시 감싸고 힘들지 않았냐고 토닥여 주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아는 대학 생활의 꽤 많은 시간을 이곳, 자신만의 아지트에서 보냈다. 또 다시 틀을 깨지 못해 자책감이 목젖을 덜렁 덜렁 치고 딱 땅에 머리를 박고 싶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은 유달리 맑고 푸르고, 외롭게만 보였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 그건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그건 봄을 맞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만물은 푸른빛으로 변해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은 파하하 웃으며 향기를 만발했다.

 윤아는 푸른 싱그러움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꽃향기는 차갑게 식은 마음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녀에겐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서였다. 윤아의 겨울은 아직도 추워져 시베리안 한 벌판에 그 모진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같았다.

 그때, 봄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뚜벅 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봄을 깨웠다.

 봄은 때론 따스함보다 혹독한 추위를 먼저 이끌고 올 경우도 있었다.

 윤아의 마음에 회오리 폭풍이 쳤다. 혼자 이 거대한 숲의 공기를 독차지 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와 나눠마신다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났다. 눈이 저절로 모로 떠졌다가 의외의 인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다. 여대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슈트를 빼입은 남자가 왔다.

 쌍꺼풀이 없고 코와 광대뼈가 우뚝 솟은 게 날카로워 보이지만 남자다운 인상을 풍겼다.

 피부도 살짝 검어 화이트칼라가 더욱 환하게 빛을 바랬다. 그는 무게 있게 다가와 나비처럼 살포시 벤치 끝에 앉았다. 윤아는 실례인지 알면서도 남자를 빤히 보았다.

 남자라면 어느 정도 알고, 겪어봤던 윤아였지만 왜 그렇게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생기는지 힐끔 힐끔 쳐다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이름은 독자에게 살짝 밝히자면 이름은 장수. 성은 장이요, 이름은 수였다.

 수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한 시간 밖에 안 하는 점심시간에도 손에는 이코노미지를 놓지 않으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째깍 째깍 일분일초가 허투루 흘러가는 것만큼 아까운 게 없다고 여겼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무언가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가슴이 무겁고 초조했다. 볼이 보이지 않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수가 옆을 보았다가 윤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처음 보는 여자가 영롱한 눈빛이 살짝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흰자를 확 뒤집더니 자는 척을 했다. 윤아는 돌발 상황에 대처가 약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면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거나 좀 더 용기를 내 금남의 장소인 여대의 숲속에 웬일이냐고 묻는 걸로 관심을 은근히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해도 대낮에 갑자기 자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났다는 것에 장담했다.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수는 황당하여 코웃음이 다 났다.

 별 관심 없는 처음 보는 여자가 빤히 본 것도 모자라서 자는 척하는 걸 보며 수는 그녀에 대해 이런 첫 인상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에 있어선 너무 순진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미련하다고.....

 윤아는 다른 사람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었다. 좋게 말하면 배려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남 눈치를 봐 줏대가 없었다.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나에 대해 온갖 촉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항상 자신감이 없던 것이다. 뒤통수에 와 닿는 수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창피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고 올라왔고 울고만 싶었다. 오랜만에 심장을 뛰게 만든 남자 앞에서 안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처음 보는 살짝 이상한 여자한테 시선을 오래 둘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겨우 한 시간이었고, 소화가 채 되지도 전에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한 조각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구겨 넣고 수는 가버렸다.

 

 

 

 

 기억이란 건 참 신비한 기능 중 하나였다. 수학 공식, 영어 단어 하난 백 번 수천 번을 보아도 안 외워지는데 몇 분 동안 잠깐 본 남자의 형상은 사진을 찍어 바로 앞에서 흔들어 대는 것처럼 선명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슈트 핏.

 먹으면서도 잡지에 집중하느라 세로로 모아진 미간에 흐르는 세 물결의 주름.

 입가에 살짝 묻은 하얀 샌드위치 소스, 그걸 닫는 엄지손가락.

 해리포터 속 예언자 신문처럼 사진이 움직여 끊임없이 반복 되었다.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 할 때도 그의 생각에 계속 리플레이 되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은 항상 큰 아쉬움을 가져왔다. 그를 떠올릴수록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것에 속앓이는 커져갔고 갖고 싶은 걸 못 가진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지경이었다. 윤아는 혹시나 그가 다시 올까 싶어 수업이 없어도 학교로 향했다.

 이제 둘 만의 비밀 장소가 된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윤아는 또 다시 돌발 상황이 생겨 어버버 거릴까봐 콤팩트를 보며 연습도 했다.

 

 "성윤아라고 해요. 저랑 커피 한잔 안 할래요?"

 

 말 한 마디에도 목소리 톤과 억양, 높낮이에 따라 들리는 느낌이 다르다.

 어떻게 해서든 두 번째 인상만은 확실히, 좋게 남길 수 있게끔 첫 마디부터 신경 써야 했다.

 목을 가다듬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말을 연습하였다.

 목젖을 치는 긴장감에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다가 좀 더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을 때 왔으면 한다는 양면적인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긴장 되어 한숨은 잔방귀를 뀌듯 계속 나왔고,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번졌을까 걱정 되서 콤팩트 안 거울을 계속 보게 되었다.

 기다리다 지쳐 그냥 가고 싶은 생각이 슬슬 짜증처럼 올라왔다.

 몸이 힘드니까 사람에 대한 열망이 2인자로 밀려나 버린 것이었다.

 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긴장감을 풀어주는 약, 소주를 한 모금 딱 마시고 벤치 밑에 내려놓았다. 알싸한 맛이 입 안에 확 퍼지면서 체증 같았던 긴장감이 감질나게 내려갔다.

 자꾸 손이 가고 또 손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벤치 아래에는 빈 소주병 세 개가 나뒹굴게 되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술이 취하질 않네."

 

 술 취한 사람이 한 병 더 까고 싶어 대는 뻔 한 핑계가 아니라 진짜 취하질 않았다.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졌고, 살짝 주춤하던 기색을 보이던 심장박동은 여전히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 지금 상태로 영어 단어 외우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병이 비워질 정도로 안 오는 거 보면 오늘은 안 오려나 보다 하는 체념이 점점 커졌다.

 허탈함과 씁쓸함이 밀려왔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기다림의 시간은 흙투성이가 된 금 마냥 엄청 아깝게 느껴졌다. 그 텅 빈 헛헛함을 쌉싸름한 알코올로 씻겨주어야 했다.

 윤아는 빈 병을 챙겨들고 술 사러 가려고 했는데,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가 났다.

 소리에도 이름이 있다. 매일 매일 기다리던 버스가 온다는 것을 길모퉁이를 돌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엔진 소리였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는 구두 소리, 우당탕 뛰는 동생의 발소리.

 기다리던 것이 오는 것은 발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올수록 따뜻한 온기가 윤아의 왼팔을 점점 뜨겁게 만들었다.

 그다.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던 그가 사뿐히 벤치에 앉았다.

 윤아는 반색을 하다가 손에 들린 술병의 존재가 기억나 허겁지겁 숨겼다.

 돌발 상황에 약했던 그녀의 손은 어김없이 바람 앞의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뻣뻣하게 굳어갔다. 둔한 손 끝 때문에 병 하나가 뎅그르르르- 이슬처럼 맑은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심리로 병 넘어지는 소리를 억지 헛기침으로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자 수는 다시 이코노미지로 눈을 돌렸다.

 윤아는 시뻘게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돌아보지 않았다. 새 소리와 바람 소리 속에 저걱 저걱.... 음식 씹는 소리가 4분의 4박자 간격으로 났다. 고고한 귀족처럼 씹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턱에서 나는 게 더 멋있게 느껴졌다. 윤아는 씹는 소리에 맞춰 왈츠를 춰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30분 만에 왈츠 같았던 그의 식사 소리는 끝나고 다 먹은 봉지를 구기면서 무도회가 종료 되었다.

 그는 또 왔던 방향으로 다시 떠나가려고 했다. 지금 가면 또 언제 볼까. 아예 안 올 수도 있는데.... 온갖 망설임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없던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졸업할 때 고백을 많이 하는게 아닌가.

 오늘 아니면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우유부단의 극치였던 윤아도 순간의 용기를 헐크처럼 끌어낼 수 있었다.

 

 "저리요.."

 

 심장이 엑셀을 밟아대었고, 혈액이 평소보다 빠르게 돌면서 위에서 고여 있던 알코올들을 빠르게 순환시켰다. 알코올은 혀를 뻣뻣하게 만들어 발음이 트위스트 추는 것처럼 잔뜩 꼬여 버렸다. 순간적으로 눈앞의 상황이 꿈꾸는 것처럼 멍하고, 아른거렸다. 윤아는 이건 현실이다... 이건 꿈이 아니다...를 되 뇌이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바로 되 뇌이며 말했다.

 

 "서류나라..라고 하는... 커..커히... 코리.."

 

 윤아가 잘 말하려 할수록 혀가 꽈배기 마냥 더욱 꼬여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말더듬이처럼 더듬고 흥분되어 호흡은 더욱 가빠져 말은 점점 횡설수설,

 지금 윤아의 모습은 전형적인 낮술 취객이었다. 낮에 술 먹고 시비 거는 사람을 볼 때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얼굴이 궁금하다면 지금 수의 얼굴을 보면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음악이 있다면 이때 울려 퍼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수는 한 아름 봄을 안고 왔다가 눈바람을 일으키며 겨울을 두고 가버렸다.

 무릎에 머리를 박아대며 자책하던 윤아는 온갖 욕들을 쏟아내었다. 자신이 한 수 많은 뻘 짓 중에 이것만큼 창피한 짓이 없다고 생각했다. 쥐구멍이 아니라 아예 소멸 되어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세게 부딪혔다.

 먼지면 스쳐지듯 부딪히지도 않았을 텐데 술이 빡 깰 정도로 아팠다.

 고통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다.

 쌍 시옷 발음이 저절로 될 정도로 머리가 띵 하고 아픈게 아직 먼지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픔으로 알 수 있었다. 윤아는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올려다보았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컨디션이란 글자가 박힌 병이었고, 병을 감싼 듬직해 보이는 손이 익숙했다. 샌드위치를 잡고, 봉지를 구기던 마디 마디가 굵었던 큰 손.

 봄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를 위한 숙취 해소제를 들고 멋쩍게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고갤 들어서."

 

 그는 강인해 보는 생김새와 다르게 미소는 겨울철 얼음을 녹일 만큼 해사로 왔고, 긴 손가락으로 윤아가 병에 맞은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땐 다정스럽기 그지 없었다.

 수의 손가락이 윤아의 머리카락 속을 한 올 한 올 헤쳐 살짝 혹이 난 두피를 매만졌다.

 피아노를 치듯 톡톡 두드리는 손끝이 닿을수록 공기 중에 떠다니던 청량감이 느껴졌다.

 아픔이 순식간에 퍼지는 화한 느낌에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윤아는 손끝으로 받는 진정한 삼림욕을 다녀 온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이것이 꿈인지 생신지. 꿈이라면 해골이 될지언정 절대 깨지 않았으면 했다.

 

 "괜찮아요?"

 

 찬 물에 움츠러 있다가 뜨거운 육수에 팍 풀어진 국수 면발이 된 기분이었다.

 노곤 노곤해진 기분처럼 입이 벌려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카라멜 마키야또 같은 달콤 울렁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커피는 술 좀 깨고 마시죠. 성윤아씨.“

 

 그래서 감기약 맛 나는 커피가 그렇게 인가가 있나 보다.

 머리가 띵 해질 정도로 달짝지근 한 그 맛에 윤아는 그만 빠져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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