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도 한 마리가 죽었다. 움직이지 않는 금붕어를 하수구에 버렸다. 사람이 죽어 버리면 주위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홀가분해한다. 금붕어의 죽음은 좀 다르다. 다른 금붕어들이 죽은 금붕어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금붕어를 키우는 주인마저 그렇다. 매일 밤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금붕어도 사람도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항해를 할 뿐이지만 금붕어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과 다르다. 사람이 죽고 나면, 움직이지 않고 잠을 자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서 이불을 꼭 덮어주고 싶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죽어버린 사람은 늘 추워 보인다. 금붕어는 죽으면 죽은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매일 시작하는 아침에 무의미하게 일어나서 같은 일을 반복하며 건조하게 보낸다고 하지만 죽고 나면 그런 것도 할 수 없다. 무미건조하게 지내도 죽지 않고 있기에 휴대전화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볼 수 있다.
남들이 시작하는 아침에 나는 잠이 든다. 그건 말하기 좀 창피한 일이지만 어둠이 껴 버린 부옇고 짙은 밤이 좋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여러 가지 색을 볼 수 있다. 특히 밤하늘을 수놓는 청록색의 젖은 어둠을 볼 수 있다. 하루에 15분? 나는 젖은 어둠을 멍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밤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후우, 담배를 한 모금 빨아서 연기를 뱉어내면 내가 볼 수 있을 정도의 캔버스의 젖은 어둠에 연기가 그림을 그린다. 연기는 돼지 모양이었다가 금세 젖은 어둠에 녹아든다. 그 모습이 좋아서 매일 밤하늘 속으로 연기를 뱉어낸다. 15분 정도가 적당하다. 나는 적당한 게 좋다. 적당하다는 건 깊게 빠질 일도 없으며 사탕 하나 정도를 먹는 것과 비슷하다. 사탕 하나 먹는다고 이 세계가 해서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의 죽음에는 ‘적당히’가 없다. 그래서 죽음이 싫으면서 피할 수 없으니 좋아해야 한다. 나는 ‘적당히‘가 좋은데 ‘적당히‘가 없는 죽음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얼마 전에 사는 곳 앞에 장례식장이 생겼다. 1년을 공사를 했다. 호텔처럼 보이는 곳이 들어서자마자 매일 그곳에 죽은 사람이 들어온다. 새로 생긴 장례식 앞을 지나쳐야 일하는 곳에 갈 수 있다. 매일 그곳에 잠시 들러 오늘은 누가 죽었나보다, 57세인데 벌써 죽었다. 57세의 남자가 어젯밤에 죽었다. 죽을 나이가 아니지만 그 남자는 죽었다. 이 도시에서는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