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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히드레아 향기가 풍기는 섬
작가 : 광선
작품등록일 : 2019.9.12

식물학자 은제린이 새로운 향수 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꽃, 히드레아가 피는 섬으로 가서 그 나라 왕과 펼치는 사랑이야기.

 
3화
작성일 : 19-09-25 14:09     조회 : 204     추천 : 0     분량 : 2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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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아론과 대화를 나눈 지 꼭 사흘 뒤에 나는 끝없이 펼쳐진 배 위 난간에 서 있었다.

 철없는 강여민은 흥미진진한 모험 같다고 흥분해서 자신이 가고 싶다고 하며 나를 부러워했지만, 배가 난파당할 위험이 있다는 고과장의 말 한마디에 냉정을 차리고 건투를 빈다고 했으며, 고과장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자소 가득한 말로 난파의 두려움에 떠는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 날밤 최율과의 통화에서 그는 섬 같은 곳에는 왜 가냐고, 처량한 늑대 마냥 울부짖었고, 옆에서 듣던 시어머니도 임신했다고 해서 어떻게 서든지 피하라고 당부하셨지만, 미국본사에서도 12명이나 가는데, 나 한사람 가지 않는 것이 양심에 찔리고, 무엇보다 그 임신했다는 변명이 달갑지 않아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유스피아 섬을 향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배 위의 지금의 나!

 

 흔들의자처럼 편안하게 요동치는 배에 몸을 싣고 눈을 감자, 속세를 벗어난 느긋한 평온히 느껴진다. 이런 평화스런 느낌이 너무 마음에 들어 좀 전까지도 공포에 허우적 되던 나의 어리석은 생각들이 물거품 되어 날아가 버렸다.

 흰 구름과 푸른 하늘. 파란 물결이 한데 어우러진 바다 위 여객선에 몸을 실은 채, 유스피아 섬이 얼마나 멋지고 환상적인 곳일지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아직도 멀었나요?”

 

  갑판 난간에 서서 바람을 쐬다가 문득 뒤로 시선을 돌렸을 때, 우리가 갈 유스피아섬의 통역을 맡아줄 라미가 지나가고 있어 그의 팔을 붙잡고 말을 건넸다.

 

  “후후. 아직 멀었어요. 비행기로 가면 빠르지만, 이 곳 사람들을 태울 정도의 비행기가 착륙할 곳이 섬에 없어서 배로 가기로 했으니, 아마 적어도 일주일정도는 걸릴 거예요. 아직 출발하고 5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제린.”

 

 살며시 웃으며 멕시코계 혼혈아 라미는 설레이는 나의 마음에 기어이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일주일이라고? 어째서 미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제린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나요? 지금 회사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던데요”

 

 라미 말에 소외감이 들고, 낯선 이방인이라는 존재감에 괜시리 서글퍼진다. 그들과는 격리된 낙오자 같은 기분이랄지.

 

  “어차피 저야 그들과는 달리 초행이고, 실제로 무슨 일이 가능한지도 아직 미지수인 걸요. 그냥 내 뒤치다꺼리할까 걱정하던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요?”

 

 갑자기 누군가 내 말에 끼어 들었는데, 결코 라미는 아닌지라,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환하게 미소지으며 낯익은 얼굴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앗, 아론?”

 

 배에 오르면서도 아는 얼굴이라고는 아론밖에 없어서 열심히 찾고 있었는데, 계속 보지 못하고 있다가, 어디서 이렇게 짜잔하고 나타난 건지. 그리고 편안한 얼굴이지만, 잘생기지는 않은 라미를 보다가 아론을 봐서 그런지 아론의 외모가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건장한 체격에 나이는 28살 정도로 보이고 부드러운 갈색 빛깔의 피부를 지녔으며 강한 눈빛이 안경에 가려진 나의 눈에 바로 와 닿았고, 조금 당황해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회의는 끝났나 보군요.”

 

 라미가 아론과 인사를 나누고 있어 난 다시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을 바라보려 몸을 돌려 버렸다. 시시콜콜한 말을 주고 받은 뒤 곧 라미가 낮잠을 잔다는 말을 하고 나에게도 가볍게 작별을 고하고 이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뻐요.”

 

 난간에 기댄 나의 옆에 같이 나란히 기댄 아론이 이상하게 처음 만난 날과 달리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 동안은 갑자기 온 탓에 미쳐 내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는데, 이 곳에 익숙해지며 이제야 아론의 출중한 용모가 눈에 들어오게 된 모양이다.

 

  바람에 따라 살랑거리는 머릿결을 넘기면서 드러난 길게 뻗은 속눈썹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꽃 미남이라고 자부하는 최율이와는 달리 매끄럽고 탄력 있는 구릿빛 피부와 단단한 근육을 지닌 이국적인 아론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아마 배라는 작은 공간에 갇힌 남녀라는 설정이 더욱 부채질을 가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아론같은 남자는 모든 여자들이 갖는 이상적인 존재로써 멋있을 뿐이지, 실제로 자신의 옆에 있다면 너무 과한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금쪽같은 약혼자 최율을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요? 추운가요?”

  “예???”

 

  옆에서 몰래 훔쳐보다 아론의 커다랗고 푸른 눈과 마주치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삑사리가 나버렸다. 아론의 멋진 모습을 떨쳐내며 억지로 최율의 모습을 상상하려 했던 탓에 고개를 젖던 장면을 들켰고, 아론은 내가 추워서 몸을 떤 것으로 착각한 듯 싶다.

 

  “아, 실은 제겐 잔소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얄미운 약혼자가 있거든요.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 예전보다 배로 듣게 될 거라서 그걸 상상했더니, 치가 떨리네요. 미국에 오는 것도 싫어한 걸 겨우 설득했는데, 또 이런 미지의 섬을 탐험하러 간다고 했더니 난리가 이만저만 아니었거든요. 전 그 잔소리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거든요.”

 

 아론에게 은근슬쩍 약혼자가 버젓이 있는 나임을 알려서 내가 조금 호의를 보내도 그건 단지 외국인에 대한 친절로 알고 다른 뜻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려고 일부러 최율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짜 무서워요. 분명 한국에 가서도 몇 달은 귀에 잔소리가 둥지를 틀거에요.”

 

  “후후. 거참 유감이군요.”

 

  “그렇죠? 저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기를 꺾다니. 제가 가엽죠?”

 

  “아, 그 얘기가 아니라, 제린에게 약혼자가 있는 것 말 에요.”

 

  “예??”

 

  아론의 말에 놀라서 간신히 진정시킨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아론! 잠깐만 이리와봐!”

 

  아론과 함께 일하는 동료 체스터가 그를 부르자,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띄고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중에 더 많은 대화를 하자고 하며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다행히 어색해지려는 찰나 잘 빠져나가서 퍽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지만, 아론이 살짝 건드린 어깨는 화상을 당한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은제린! 상대는 동료 외국인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그가 내게 관심이 있다해도 그건 단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일거야.’

 

  문득 이런 생각에 도달하니까, 내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 우울해져 버렸다. 그냥 아론의 순수한 호의를 가볍게 넘어가기로 하고 마음을 바로 잡았다. 최율과의 교제는 그런 대로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처럼 곁에 있으며 나를 돌봐주었기에 그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고, 마치 가족처럼 되었기에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뜨거운 사랑이었냐고 한다면 답은 아니오 가 되어버린다.

 

  모두들 그런 사랑을 꿈꾸리라 여겨지지만, 뜨겁고 열정적이며 온몸이 사랑으로 타오르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살아가기 바쁜 요즘 시대에서는. 그렇지만, 그런 시대이기에 ‘ 한번쯤은’ 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 이런 건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상대와 인생을 오순도순 살아가기 마련이다.

 

  배를 타고 드넓은 바다로 나오는 항해는 지루함과의 싸움이라는 것이 살에 와 닿았다. 육지에서의 한 시간이 바다 위에서는 5시간처럼 길게 느껴졌고, 그 점을 잘 아는지 아론은 내가 무력함과 나태에 휩싸이려고 할 즈음에 슈퍼맨처럼 짜잔하고 나타나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배타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죠?”

 

  “아, 아론? 또 갑자기 나타났네요. 후후”

 

 배 위에서 생활한지 사흘이 흐른 밤이었다. 갑판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밤이라는 어둠의 왕이 멋진 왕관을 쓰고 바다를 건너다, 보석을 흘렸는지 세상이 전부 빛으로 감싸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제린도 바다의 밤하늘을 보고 반해버렸군요.”

 

  “아마 늙는 한이 있어도 이 곳에서의 밤하늘은 평생 잊지 못할꺼에요.”

 

 하늘에 수 놓여진 별들이 바다 위에 잔잔히 일어나는 물결 위에 반사되어 온 세상이 작은 빛에 휘감겨 소리 없는 음악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침묵의 노래를.

 

  밤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릴 적에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인어공주에 보면 목소리를 잃고 멋진 왕자님을 만난 인어공주가 멋진 호수로 둘이 배를 타고 가는데, 키스를 어떻게 서든지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녀를 도와주려고 세바스찬이라는 가재가 여러 동물들과 함께 분위기 있는 노래를 부르며 서서히 호숫가에 드리워진 버들나뭇가지 사이로 그들을 살며시 비밀스런 장소에 넣는 모습.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곳도 그곳 못지 않게 매우 멋진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꿈에서나 볼 것 같은 장면이 이렇게 내 눈앞에 펼쳐져 환상적이며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동적이다.

 

  “제린. ”

 

 밤하늘과 바다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나를 돌아보며 살며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아론의 눈빛은 강렬하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눈부셨다. 나의 마음과 온 몸은 예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더욱 깊게 최면에 걸려드는 듯 했다.

 

  “제린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비록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난 지금 내 곁에 있는 제린만을 생각하겠어요. 제린이 날 좋아하지 않는 다고 해도 당신을 좋아할 수 있는 나의 심장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린. 나를 거부하지 말아줘요. ”

 

 그 동안 바다라는 갇혀진 공간 속에서 아론과 나눈 추억은 분명 3일간의 짧은 일이 아니라 내 평생의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아론의 모든 것이 나를 환상으로 안내해 주었으며 쉽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지금 아론의 말을 듣고도 난 거절의 의사도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그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답 없는 나의 입술 위로 그의 부드럽고 탐스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분명 지금 나는 어딘가 고장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혼자가 있고, 게다가 이성적이며 차가운 성격인데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쉽게 상대를 받아들이고 있다니.

 

 지금까지 살아오며 분명 이런 경험은 생소한 일이었고, 낯선 자신이 느껴졌지만,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확실하게 붙잡고 싶었다. 아론과의 황홀한 입맞춤은 최율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왔다. 머리 안에 가득했던 최율의 자취가 하나둘 사라져감을 느끼면서도 아론의 사랑을 차마 떨쳐내지 못함에 괴로워할 겨를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깐 바다 위의 밤하늘이라는 마약에 홀려 정신이 은제린이라는 여자에게서 빠져 나와 또 다른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꿈같은 밤은 서서히 깊어 갔고, 그 날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아론의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혼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머리 안에 강렬한 불꽃이 일며 허겁지겁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론은 깊은 잠에 빠져 나의 자취가 없어진 것을 금새 알아채지 못한 듯 싶다. 두근거리는 심장 너머로 죄를 지었다는 불안감과 약혼자에 대한 미안함에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었는지. 그렇다. 이건 확실히 마녀의 마법에 순간 빠져버린 탓이랴.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후회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갑자기 닥친 사랑에 미쳐 나의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충격의 눈물이었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내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서며 오로지 그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두려움이 일어났다. 아론이라면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에 입에 침이 말랐다.

 

  “제린, 있어요? ”

 

  밝고 명랑한 음성이 자신은 라미임을 알렸고, 난 안도의 한숨을 쉼과 동시에 얼른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기상청과 연락했는데요, 곧 폭풍이 몰려온다고 해서, 모두들 각방에서 안전에 주의하며 있으라고 해서요. 아마 30분 정도 지나면 다가올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머무는 시간은 3시간 정도라고 하니까, 잠잠해지면 중앙회의실로 와요.”

 

  급한 듯 라미는 나에게 주의를 일러주고 곧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폭풍이라. 갑자기 웃음이 지어져 버렸다. 아론과의 뜻밖의 관계에 놀라했다가 대자연의 무서움에 맞서게 되는 상황이 특이한 경험으로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매일 쳇바퀴 돌듯 보내온 날들 중에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멋진 남자와의 배 위에서의 하룻밤과 나를 위협하는 커다란 태풍. 이런 것들이 나를 덮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통사람인 나에게는 힘겹고 무겁고 괴로운 일인 것 같다.

 

  문을 닫고 일단 라미가 쥐어준 주의서를 읽어 내려 간 뒤 필요한 도구를 가방에 넣고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침대 밑으로 들어가 납작하게 엎드렸다. 조용히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하지만, 태풍의 두려움보다 아론과의 사이가 더 걱정되었다. 다행히 태풍 때문에 아론을 바로 만나지 않고 생각할 겨를이 생긴 것에 오히려 감사했다. 한시간이 지난 듯 했지만, 배는 어떤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거짓 정보였나? 그냥 일어날까?’

 

 라고 생각하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느낌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복도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거짓정보가 확실하다고 말하며 오가는 발소리가 들려 안도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갑판에 서서 푸른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뭐야? 저렇게 맑은데, 무슨 태풍이라는 거야?’

 

  주변을 둘러보며 아론을 찾고 있었다. 사실은 어떻게 서든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단 찾아내고 나서 그를 피해 다니려는 심사였지만, 이상하게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안도와 함께 또 한편으로는 그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봤으면서 다시 그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려고 했다. 겨우겨우 마음을 다스리며 갑판 끝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웅성거림이 시작되며 성급히 갑판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로 계단 쪽은 아우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보니, 무서운 속도로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검고 커다란 고래가 빛을 타고 빠르게 다가오며 푸른 하늘을 잡아먹는 듯 했다.

 

 두려움에 온 몸이 떨리며 어서 빨리 이 곳에서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많은 사람들이 놀라 허겁지겁 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다 넘어지고 다친 사람들이 생겨나서 입구 쪽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갑판에 남은 13명정도는 모두들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막힌 갑판을 뚫으려고 다친 사람은 아랑곳 않고 짓밟으며 자신만은 이 위험 속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었다. 도저히 안전한 곳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한 곳에 머물러 공포에 휩싸여 오돌오돌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벌써 코앞까지 다가온 태풍에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누가, 누가 나좀 살려...’

 

 눈물에 범벅이 된 채 누군가가 날 도와주길 만을 간절히 바랄 뿐 더 이상 내겐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태풍이 배로 다가와 나와 함께 갑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바람을 타고 몸이 날아오르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는지 머리가 멍하며 서서히 기억을 잃어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꿈속을 헤매며 나의 인생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인생이라는 영사기를 누군가가 역으로 바꿔놓은 듯 했다.

 

  빠르게 현재에서 과거로 내달리고 있었다. 아론과 나눈 사랑을 기점으로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과 최율이를 만나게 된 장면과 부모님을 잃고 혼자 고난을 이겨내려 오로지 공부에만 빠져버린 불우한 학창시절이 커다란 스크린에 비춰졌다. 그리고는 한 곳에 머물러졌다. 그곳으로 나는 서서히 걸어가 작은 극장처럼 아늑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넌 누구니?”

 

 작고 귀여운 조그마한 아이가 놀이터에서 흙을 만지며 놀고 있었고, 20살 정도의 젊은 여자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넌 누구니?”

 

 젊은 여자는 다시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넸지만, 그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의 말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얘야, 내 말이 안 들리니?”

 

 그러자, 그 아이는 다른 쪽으로 뛰어 갔다. 그곳은 커다란 나무 밑이었고, 그 어린아이는 무릎을 끌어안고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는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고, 젊은 여자는 울고 있는 듯 했다.

 

  “나를 용서해 주겠니? 제린아. 널 버릴 생각은 없었어. 난 너무 어리고 두려워. 책임지기에 난 너무 어려. 미안해. 제린아.”

 

 그 여자의 말소리가 저 멀리 사라지며 화면 안의 영상도 없어져 버렸고, 다시 새롭게 시작된 화면에서는 커다란 아론의 얼굴만이 비춰졌다.

 

  “제린! 은제린! 눈을 떠요? 제린!”

 

 그리고 깊은 잠을 자듯 편안한 기억을 안고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눈을 떴을 때였다. 나의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머리를 강하게 치고 갔다.

 

  “아론!”

  “후, 제린. 이제야 눈을 떴군요.”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배 조각과 둥둥 떠다니는 물품들이 보일 뿐, 사람은 아론이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멍한 상태가 되었고. 그런 나를 꽉 껴안고 기뻐하는 아론만이 있었다.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난 죽지 않았으며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모래가 깔려진 육지라는 것이었다.

 

  아론은 내가 깨어난 것에 기뻐하며 허기진 나를 위해 부지런히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길고 매끈한 나무 막대기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묶여진 창이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 만치 익숙해 보인 것은 머리를 다친 나의 착각만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거의 순식간에 닥친 여러 가지 일로 나의 머리는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아 일단은 안정히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조용히 나무 밑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깨어진 배 조각들로 보아 태풍이 꽤 강했고, 갑판에 있던 물건들이 떠다니는 것으로 보아 위만 날아간 듯하고, 배 밑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곳은 원래 프로젝트 팀이 오기로 했던 유스피아 섬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배 근처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무인도로 추정되었다.

 

  잠시 뒤에 조금씩 갈피를 잡아가는 내게 아론이 한 손엔 창을 들고 다른 손엔 고기 3마리를 들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의 앞에 내려놓고 내 뒤에 놓여진 나무 틈에 작은 가지를 꺾어와 모닥불처럼 쌓아놓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피웠다. 그리고 작은 나무에 고기를 끼어 넣고 고기를 불 쪽으로 세워 꼬챙이 끝을 모래에 깊이 박았다. TV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익숙하게 움직이는 아론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그는 나를 보고 싱긋 미소를 건넸다.

 

  “너무 상심 말아요. 내가 그 동안 겪은 일에 비하면 지금은 별것도 아니에요. 배는 그렇게 크게 부서지지 않았을 거예요. 제린 방에 갔는데, 제린은 없고 태풍은 서서히 다가와 혹시나 싶어 갑판에 갔다가 다행히 제린을 목격했죠. 태풍에 휩싸여 빨려 가는 제린의 손목을 빠르게 잡지 않았다면 제린과 멀어져 어디 낯선 바다 위에 둥둥 떠다녔겠죠. 물론 안타깝게도 갑판에 있던 3명내지 4명은 생사를 알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제린과 함께 폭풍 속으로 들어간 뒤 이 무인도 근처로 떨어졌죠. 저기 널려 있던 것도 우리와 함께 온 것이에요.”

 

  아론은 정신이 혼미한 나를 위해 차근차근히 지금 여기에 있는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해 주었다. 아론덕분에 난 살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던 것일까? 문득 아론이 나와 달리 커다란 존재로 느껴졌다.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아론 덕분에 무인도에 단 둘이 있어도 전혀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심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도에서의 남녀가 단둘. 게다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미 한 몸이 된 상태가 아니었던가? 더 이상 그와 연결되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생각들은 거품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낯선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심장이 떨렸다.

 

  겨우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 샌가 아론은 커다란 야자수 나뭇잎을 모아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거의 다 만들어져 있어서 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굉장히 익숙하고 베테랑으로 느껴지는 솜씨였다. 촘촘하고 꼼꼼히 짜여진 천막에 비도 들어오지 않을 듯 했다. 어떻게 해서 저렇게 잘 만들었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모래뿐이었는데, 제법 편안하게 느껴지는 천막이었다.

 

  “본사에서도 우리가 난파된 것을 바로 알았을 테고, 이곳에서 연기를 계속 피워되면 분명 구조될꺼에요. 다행인 것은 이 무인도는 유스피아 섬으로 가는 길에 놓여진 곳이어서 지나칠 염려는 없죠.”

 

  아론과 함께 그가 만든 보금자리에 들어와 좀 전에 구워놓은 생선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현대시대에서 원시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렇게 만난 지 얼마 안돼는 남자와 단둘만 무인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최율은 기절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생겨났다. 이렇게 비참함 속에서도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대단하지 않는지.

 

  “아론은 유스피아 섬을 잘 알고 있나요?”

 

  “예?”

 

  “어떻게 유스피아 섬에 가려면 이 무인도를 지나야 한다는 걸 알았죠?”

 

  “하하. 똑똑한 제린을 무시할 수가 없겠군요. 예. 유스피아 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되도록 제린을 유스피아 섬에 데려가고 싶지 않군요. ”

 

  “처음에는 저랑 같이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하하. 그랬죠. 그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제린과 함께 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유스피아 섬은......”

 

  더 이상 아론은 말을 잇지 않고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유스피아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이곳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일단은 본사에서 또 다른 구조배가 우리를 발견하여 안전하게 유스피아 섬까지 데려다 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론도 다행히 서로를 잘 알기 전에 갑자기 일어났던 사고, 그 하룻밤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던 우리 사이에 대해서. 그리고 죄책감에 그의 감정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곁에 머물며 잠들 때까지 나를 돌봐주는 그의 존재가 따뜻하게 느껴졌지만, 아론은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옆에서 들리는 숨결만이 그를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옆에서 곤히 잠들었던 아론의 자취는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기에 그가 있음을 알고 있다. 숲에서 열매라도 따는 듯 싶었고, 내가 불안해 할 것 같아서 곁에 멀리 떨어지지 않는 듯 했다.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맞이하도록 했다. 보금자리에서 나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비로소 내가 얼마나 대단한 곳에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았던 이곳의 나무들은 울창하고 거대했으며 어려움 없이 곧게 뻗어 있었다. 매우 아름다웠다. 식물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이런 정글에 오고 싶어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곳을 관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운수 좋게도 그 어떤 계획 없이 울창한 숲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나라와는 달리 열대림인 이 곳의 나무들은 책 속에서만 보던 희귀종이었으므로 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나무 하나 하나를 관찰해 갔고, 그런 사이에 기분이 좋아졌다.

 

  “뭐해요?”

  “우와, 깜짝이야. 언제 왔어요 아론?”

 

 조심히 나뭇잎을 따고 있던 내 귀에 속삭이는 아론 말에 놀라 뒤로 넘어졌더니, 그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난 심통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를 날카롭게 보고 있다가, 일어나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러자 미안한 듯이 아론이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당겨 일으켜 주었고, 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제린도 너무해요. 내 말에 그렇게 심하게 놀라다니. 실례라고요. ”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어 보여서 나도 같이 웃어 버렸다. 하루하루를 그와 함께 보낼수록 나의 머리 안은 한가지의 말이 확연히 떠올랐다.

 

  ‘진짜 멋진 남자구나’ 하고.

 

 물론 최율이도 꽤 괜찮은 녀석임은 확실했지만, 여자는 낭만과 자상함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인지 그 부분에 있어서 민감하게 작용했다. 아론과 나와의 사이는 친구이상이었지만,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서로가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에 그리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환경에서 즐겁게 살아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인지 오래 사귄 연인 같은 끈적임이나 달라붙는 식의 행동은 거의 없었다. 단지 다정한 말이나 행동들이 대신할 뿐이었다.

 

  “이 곳에서 그럼 아침을 할까요? 바나나랑 망고가 있기에 따왔어요.”

 

 아론은 발 밑에 가득한 과일을 내 앞으로 내밀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서 과일로 배를 채웠다.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고 시원한 풀숲의 시원함이 우리들을 감싸서 신선하고 좋았다. 매일 딱딱한 식빵에 의존했던 아침과는 달리 무공해 과일과 푸른 자연에 둘러싸인 아침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아늑함으로 충만해왔다. 아론도 연구소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타잔같이 자연스레 정글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묘한 매력을 뿜었다.

 

  “참, 섬 안쪽에 보면 작은 폭포수가 있는데, 가지 않을래요?“

 

  기쁜 듯 미소지으며 어린아이처럼 나를 비밀기지로 데려가는 모습에 저절로 나까지 미소가 지어졌다. 실제로 타잔과 제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섬은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숲이 가운데 우거져 있어서 숲 쪽은 전혀 어떤 형태로 되어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았기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있으며 희귀한 곤충이나 위험한 설치류도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염려되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아론과 함께 있어 즐겁게 무인도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만일 혼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은 질긴 생명력을 타고난지라 쉽사리 죽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부랑자같이 꾀재재한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을 것이다.

 

  아론이 데리고 온 깊은 숲 안의 계곡은 15분 정도 헤맨 끝에 발견하였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에 나뭇가지틈새를 비집고 가야 했으므로 시간이 조금 걸리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그냥 평범한 도로였다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폭포로 시선을 돌려보니 어느 샌가 아론은 셔츠를 벗고 반바지의 차림으로 계곡 안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수많은 물방울 튀기며 자신의 힘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숲 안쪽이어서 그런지 해변가와는 달리 숲속에 사는 새들의 소리도 들려 마치 도인들만 사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시원한 광경을 목격하니 지금까지 있었던 불안한 생각과 머리 안을 가득 메웠던 잡념들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뭐해요? 제린도 어서 들어와요! 시원해서 기분이 캡이에요!”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잠수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얼굴에 수많은 물줄기들이 곡선을 타고 내려왔고, 눈조차 뜨지 못한 아론은 얼굴과 머리에 묻은 물기를 손바닥을 펴 쓸어 내렸다.

 

  “후하! 하하. 제린 아직도 거기에 서 있었어요?”

 

  아론의 모습을 보고 나도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아무 거리낌없이 계곡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의 몸에 팍하며 모든 물들의 감촉이 전해져 시원함과 상쾌함에 온 몸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푸우 진짜 기분 좋네요. 물도 제법 찬 걸요.”

 

  “그럼요. 계곡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물이고, 땅 밑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바다처럼 태양이 내리쬐는 물과는 차원이 틀려요. 대지의 눈물이죠.”

 

  물을 싫어하거나 그렇다고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실은 수영할지 몰랐다. 그래서 지금도 일단 내 키와 계곡의 깊이를 제고 뛰어든 것이어서 지금 나는 커다란 돌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지만, 아론은 돌고래처럼 물 속 깊이 들어갔다 나오고, 다시 이쪽저쪽 왔다갔다하면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멀뚱히 있는 나에게 접근해서는 왜 그러고 있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만의 계곡의 물놀이를 즐기고 나서 다시 아론과 함께 해변가 쪽으로 가려고 숲 안을 걷고 있었다. 아론은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지 나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고, 그의 다른 손에는 좀 전에 벗어놓은 셔츠가 들려 있었다.

 

  “사실 전 섬에서 태어났어요. ”

 

  “예? 그럼...”

 

  “섬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친척들은 다들 육지로 떠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쓸쓸히 지낼까 두려워 육지로 저마저 보낸 거죠. 그리고 나중에는 부모님마저 도시로 나오시게 되었죠.”

 

  “그럼, 이런 곳이 고향같겠네요.”

 

  “예. 너무 편안해서 마치 엄마 품 같아요. 다른 이에겐 두려운 곳이겠지만요”

 

 아론은 여전히 나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걸으며 나에게 보폭을 맞추고 있어 걷는 것에 조차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귀를 부드럽게 해주는 새소리도 평온의 세상으로 인도했다.

 

  “무슨 섬이죠? 설마 유스피아 섬은 아니겠죠?”

 

  “하하. 어떻게 알았어요?”

 

  “예? 정말이에요? 하지만, 유스피아 섬은 왕권나라가 아니었나요?”

 

  “맞아요. 왕권나라로 현재 왕이 있죠. 나라를 떠나고 들어오는 건 어느 나라든지 가능하잖아요. 물론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만요. ”

 

  그의 말을 들으니 더욱 유스피아 섬에 가고 싶어졌다. 그는 그 뒤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고향인 유스피아 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곳처럼 숲이 있지만, 여기와는 달리 커다랗고 잘 다듬어진 정원이 있어 그곳에서 항상 놀았다고 했으며, 그곳에서만 피는 꽃의 향기가 섬 안에 가득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하얀 색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궁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왕과 왕의 시중이 살며 숲 가장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 곳을 벗어나면 곧 마을들이 있고, 모두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가려나 보다. 아름다운 석양이 바다와 하늘을 채색했으며 모래벌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저녁을 먹었다. 오늘 요리는 꽃게구이였다. 비싸고 고급식사인 랍스타도 전혀 부럽지 않을 만큼 매우 맛있었다.

 

  언제쯤 이 섬에 배가 오게 될지 그 날을 기다리며 아론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떤 날은 바다에 들어가 조개도 잡고 산호초도 구경했으며, 어떤 날은 숲 속으로 들어가 버섯을 채취하고 진귀한 곤충을 보며 서로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너무 더운 날에는 계곡으로 풍덩 빠져들기도 했다. 가장 심심한 날은 비가 오는 날인데, 그 날은 아론과 커다란 잎사귀의 끝을 양쪽에서 잡아 머리 위로 쓰고 해변가를 걸어가기도 했다. 물은 계곡 물이나 나무 속에 있는 물을 받아 마셨고, 벌레에게 물리거나 상처가 났을 경우에는 아론이 건네준 약초를 빻아서 바르기도 했다.

 

 초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이 일주일이 지나자 몸에 익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도 더욱 돈독하고 끈끈해져 갔다. 그래서 아론이 잠시 볼일을 해결하기 위해 해변 반대쪽으로 갔을 때에도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인도의 크기는 한국의 제주도에 비하면 매우 작았고, 한국의 섬과 비교하자면 울릉도정도의 크기였다. 멀리서 보면 확실히 작게 보이겠지만, 가까이 에서 섬 주변을 걷는다면 굉장히 넓은 크기였고, 더욱 울릉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 밭과 집과 학교가 있지만, 이 곳은 아무도 살지 않고, 단지 숲만이 있기 때문에 더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번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론이 오지 않아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극심한 길치인 나로서는 그만 길을 잃는 불상사가 생겨버렸다.

 

 점점 밤은 깊어가고 숲의 밤은 해변가의 밤보다 일찍 찾아오기 때문에 독을 가진 파충류나 벌레가 나를 위협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론도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바로 숲 쪽으로 들어와 헤매었다고 했다. 결국은 귀가 밝은 내가 폭포의 소리를 듣고 계곡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나를 찾으러 계곡으로 온 아론이 나를 발견하여 서로는 안심의 포옹을 깊게 나누었다. 몇 십년을 떨어져 지낸 이산가족과 같은 기쁨에 눈물이 눈가에서 뽀로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걱정했어요, 제린. 다음부터는 마음대로 숲에 들어가지 말아요. 낮과 달리 밤에 활동하는 녀석들은 무서운 존재라고요. 그리고 당신 같은 외지사람들은 매일 들어온 숲이라도 숲의 나무들이 빠르게 자라기 때문에 길을 잃고 영원히 이 곳에 갇힐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굶어 죽거나 독사를 당하게 되요.”

 

  나를 걱정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로 더 심하게 말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론의 말을 듣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내가 멋대로 숲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겁을 주다니, 조금은 입이 실룩거렸지만,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는 아론의 마음을 알기에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다. 비가 오면 숲 쪽에 들어가도 어둡고 커다란 나뭇잎에 빗방울이 뭉쳐졌다 잎이 무거워지면 한번에 쏟아지는 일이 많았고, 그러면 바로 홀딱 젖기 때문에 옷의 여벌이 없는 우리로써는 꽤나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옷이 더러워지는 듯 싶으면 계곡 안으로 옷을 입고 들어갔다 나와 햇볕에 몸과 함께 말리면 깨끗해 졌으므로 항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워낙에 옷을 입고 자는 습관이 없어서 처음에는 옷의 까슬한 느낌이 살에 닿아 괴로웠고, 샤워할 때도 아론과 함께 계곡에 들어가야 했으므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아론이 10분 정도 잠깐 산책하고 온다고 하고 나의 난처함을 해결해 주었다.

 

  ‘진짜 멋진 남자야. 이런 남자를 진작에 만났다면 나의 인생도 바뀌어 있었겠지?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최율을 난 버릴 수 없어. 그 애가 날 먼저 떠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를 외면하지 않을 꺼야.’

 

  아론을 사랑 하냐고 지금 묻는 다면 난 울어 버릴 것이다. 왜냐면 차마 대답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단지 해선 안될 것이라고 명령해버리고는 이내 도망가 버린다. 아주 멀리.

 

  “이런, 비가 오늘은 그칠 것 같지 않은 걸요.”

 

  조용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아론의 걱정스런 말투에 다시 현실로 이끌려 왔다. 보금자리에서 하늘을 빼꼼히 올려다보니,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바다를 강타하고 있었다. 벌써 오후가 되어 가는데도 그칠 기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음식은 그 동안 모아놓은 과일이나 약초가 있어서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비가 계속해서 내리면 이따금씩 바닷가 해변위로 성큼 올라오기 때문에 수위가 걱정되었다. 보금자리마저 그들에게 빼앗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걱정 말아요. 낼은 분명 멋진 무지개가 저 바다위로 펼쳐질 때니까요.”

 

 나의 말을 듣고 아론도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길 기도하며 그 날밤은 선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소란스런 소리가 단잠에서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금자리에서 나오니 해변가에 믿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떤 원주민 같은 아몬드 피부의 여인이 나체로 해변에 서 있었고, 그녀와 마주선 아론이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꽤 심각한 얼굴이었고, 아론의 목소리도 조금은 성난 듯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바다로 둘러 싸여 있는 섬에 갑자기 땅에서 솟았는지 불쑥 나타난 나체의 여인이 궁금하기만 했으며 저렇게 보는 나도 얼굴이 닳아 오를 정도인데, 아무렇지 않게 그녀와 마주선 아론에 심통이 나기도 했다. 일단은 그녀의 알몸을 가려주려고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섰다. 뭐라고 이야기하던 아론도 나의 갑작스런 출몰에 놀랐는지, 말을 하다 끊어버린 듯했다. 둘이 하는 말은 영어가 아니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자를 이렇게 나체로 서 있게 해선 안되잖아요, 아론.”

 

 내가 조금은 화가 나서 그에게 쏘아 붙자, 그도 조금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하며 뒷모습을 보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뭔가 있는 것 같고, 조금 수그러진 아론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나를 밀쳐내고 여전히 나체로 아론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붙어 있었고, 아론은 무서운 눈매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떨구고는 그녀와 함께 내 앞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난 알 수가 없었고, 배신당한 기분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해명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지. 젊은 여자가 오니까, 주근깨 투성이의 안경쟁이인 나는 이제 쳐다도 보지 않는다는 건가?

 

 육지였다면 분명 나는 멋진 아론에게는 접근도 못했을 것이다. 확인사살을 당하자, 마음 한쪽이 매우 쓰라렸다. 보금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아론의 여자였던 걸까? 어디서 오게 된 걸까? 혹시 유스피아 섬에서 이 곳으로 표류되어 온 건가? 쓸데없는 망상들은 거품처럼 피어올라 나를 휘감겨왔다. 그리고 얼마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뜨거운 햇살이 하늘의 정 가운데를 차지할 즈음 아론이 모습을 드러냈고, 한 손에는 낯익은 꼬챙이와 다른 손에는 싱싱한 생선들이 쥐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제린. 오래 기다렸죠?”

 

  “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그 여자는 어디로 온 거죠? ”

 

  “미안해요. 지금 좀 정신이 없죠? 일단 불을 피고 생선을 구울께요.”

 

  ‘지금 생선이 문제인가? 무슨 연유로 그 여자가 이 무인도에 와서 그것도 아론과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아니, 그보다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뭐지? 아론이 무슨 내 남편이라도 되는 냥 화를 내다니. ’

 

  아론은 아무 말 없이 생선을 작은 꼬챙이에 꽂고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아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유스피아 섬에 사는 왕의 시녀로, 이름은 샤린이에요. 유스피아 섬에서 수영을 가장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녀라서 수영솜씨를 뽐내다가 갑자기 닥친 거센 파도와 함께 휩쓸렸고, 잠시 좌표를 잃어 이 섬에 오게 됐다는 군요. 원체 섬나라 사람이라 다시 유스피아 섬으로 갈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이미 많이 지친 것 같아서 우리랑 함께 회사 배를 기다리자고 설득하고 있었어요. 막무가내로 가겠다고 해서 일단은 계곡근처에서 쉬라고 말했죠.”

 

  예전처럼 아론은 천천히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똑같은 분위기를 전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유스피아 섬의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섹시하고 예쁘고 나체로 지내는 건지 그것에 그리 신경 안 쓰는 두 사람도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아론이 유스피아 태생이라는 걸 쉽게 아는 군요.”

 

  “아, 그건 샤린이 유스피아 섬사람이라는 걸 알고 인사를 건넸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니 모래에 쓰러져 있었어요. 수영해서 오느라 많이 지친 모양이에요. 일단 과일과 물을 마시게 하긴 했지만 요. ”

 

  “그렇군요. ”

 

  ‘아론은 나에게만 친절했던 것이 아니었군요.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괜한 오해를 했던 것이다. 아론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나와 단 둘이 있어서 나에게만 잘해주는 줄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생선을 구우면서도 아론은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숲 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생선을 가져다주면 좋을 것을.

 

  “혹시 그녀가 다시 바다로 나갈지도 모르니, 그녀에게 가봐요.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이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예. 제린도 어서 식사해요. 그리고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데, 너무 걱정 말아요. 샤린도 이리로 데려올께요.”

 

  분명 그녀도 나와 만나는 것이 꺼려질 것이다. 유스피아 섬사람들이 육지로 나오려면 배로 일주일은 가야하고, 내가 겪은 것처럼 중간에 폭우라도 만나면 목숨마저 위태롭기 때문에 거의 섬 안에서 생활했을 테니, 나 같은 이방인이 달가울 리가 없겠지. 조금은 어색하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 사람들이 유스피아 섬에 도착해서도 그들 주민들이 걱정되었다. 어떤 식으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일지. 아론과 나만의 섬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나의 극심한 질투와 분노는 서서히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이리로 아론이 데려왔을 때의 모습도 너무 밉게 느껴졌다.

 

  아론의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 여자의 직감은 틀리지 않은 듯 했다. 아론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듯 느껴진 것은 아침에 분명 그녀는 아론을 떠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론과 단 둘이 있고 싶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의 팔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걸로 보아, 그건 확실했다. 게다가 그 나체는 여전히 육지의 예의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낯뜨겁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샤린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발만 본 것 같다.

 

  둘은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웃기도 했고,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해서 난 더욱 비참해져 갔다. 이 곳에 내가 왜 있는지 무안해지기까지 했다. 마치 두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것으로도 느껴졌다. 잠시 후, 나이가 어린 탓인지, 피곤한 탓인지 샤린은 먼저 잠들었고, 난 도저히 샤린과 아론의 속삭임을 듣을 수 없어 해변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내 쪽으로 걸어오는 아론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고, 바다의 조금씩 밀렸다 쓸려 가는 파도 소리가 나의 적막함을 달래었다.

 

  “제린. 왜, 여기 있어요? 아까도 말이 없고요.”

 

  “그냥 바다냄새가 좋아서요.”

 

  “후후. 이제 제린도 섬사람이 다 된거 알아요?”

 

  “글쎄요. 섬나라 말도 못하는데, 무슨 섬사람이에요.”

 

  “앗, 혹시 삐진거에요? 샤린하고 유스피아어로 이야기해서요?”

 

  “치, 혹시 모르죠. 둘이서 절 흉봤을 지도요.”

 

 조금은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이며 입가를 옆으로 벌리자,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하하. 그랬을지도 모르죠.”

  “예?”

 

  아론은 한술 더 떠서 나를 놀리고 있었고, 나도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제린의 미소, 오늘 처음 보내요. 계속해서 어떤 표정 짓고 있었는지 알아요? 마치 못 먹을 것 먹은 냥 뾰루통에 했었다고요. 설마, 질투한 거예요?”

 

  아론은 내가 지었다고 추정되는 표정을 지워 보이며 심술이 가득한 느낌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난 더욱 화가 나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질투라뇨? 나체로 있는 여자에게 흑심을 품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제린도 그렇게 있을려구요?”

 

  “아론! 말이 심하잖아요. ”

 

  “하하. 그렇게 정색할 것 없잖아요. 농담인 것 알잖아요. 유스피아 섬에서도 나체로 있는 여자는 거의 없어요. 샤린은 내가 그런 것에 익숙한 걸 알고..”

 

  갑자기 꺼내 놓은 말에 나의 동공이 확대되고 있었다. 나체로 있는 여자에게 익숙하다는 것은 무슨 할렘같은 곳의 교주라도 된다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카사노바 출신인 건가? 지금까지의 아론을 봤을 때, 그를 싫어할 여자는커녕 안기지 못해 안달 날 정도의 여자들이 줄을 섰을 것으로 판단되었고, 확실히 두 번째 추론이 맞는 것 같다.

 

  “앗, 오해 말아요. 제린. 그렇게 흘겨보고 경계할 것 없다고요. 유스피아 섬에 있을 때, 조금 부유해서 여자시녀들이 많았거든요. 부모님이 귀족집안이어서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여자시녀들이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갈아 입히고 그래서 여자나체에 익숙한 거예요. ”

 

  TV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으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런 믿지 못할 경험까지 하고 있고, 이 섬까지 수영 왔다는 여자도 제정신이라고 생각되어지지는 않았으므로 난 묵묵히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육지의 예의와는 격리된 섬사람이 어떻게 도시생활에 익숙해졌는지 그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아론은 여전히 아론이었다. 아름답고 멋진 남자였으며, 샤린은 그에게 단지 시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나의 자만이고 스스로의 성숙을 깔아 내리면서 까지 얻어낸 변명이었을 테지만, 아론에게 있어 나의 존재도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건 분명했다.

 

 어쨌든 아론과 샤린과 나는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한 무인도에서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샤린은 나의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아론과 같이 다녔고, 아론은 내가 그녀의 나체의 어색해 함을 알고 그녀에게 짚으로 짠 옷을 입혔으며 샤린과 나는 아무런 의사소통없이 찜찜한 관계를 존속하고 있었다. 이 섬에 오게 된지 보름이 되었고, 샤린이 온 지는 5일정도 흐른 어느 저녁이었다. 붉게 태양을 삼키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 속에서 뭔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달도 아니었고, 별도 아니었고, 단지 태양 앞을 가로막고 있어 굉장히 검은 색을 띄었다.

 

  “아론! 저기 뭔가가 있어요!”

 

  샤린과 저녁을 준비하던 아론도 나의 말에 놀라 급히 내 쪽으로 달려 왔고, 샤린은 눈을 부릅뜨고 거짓말이 분명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앗, 저건 우리 배 같은데요! 빨리 연기를 피워야 겠어요.”

 

 나도 아론을 도와 숲에서 마른 가지를 가져와 연기를 피워 오르는 일을 도와주웠다. 그리고 서서히 검은 물체는 정체를 드러내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몸을 드러낸 배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듯했다. 보름만에 보는 배였다.

 

  “제린! 아론! 잘 있었어요?”

 

 배가 해변가 근처로 다다를 무렵,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라미가 눈물을 훔치며 우리를 큰소리로 외쳐 불렀고, 그에 나는 회답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고. 그렇게 하여 긴 무인도 생활을 이것으로 끝을 알렸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서든지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모양이다. 아무리 섬에 익숙한 아론이 있다고 해도 낯선 체험을 심신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라미가 나를 부축하고, 다른 회사 동료들이 섬의 모래를 밟으며 무인도에는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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