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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까마귀 혀
작가 : 아브락사스
작품등록일 : 2019.9.16

이 글은 고속도로에서 사는 까마귀(견인기사)들의 본성과 투쟁을 그린 것이다.

 
커피믹스
작성일 : 19-09-23 17:43     조회 : 214     추천 : 0     분량 : 1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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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식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경들이 삼삼오오 식탁에 둘러앉아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까마귀 07은 교통계장의 장황한 소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의경들에게 인사를 했다.

 - 배고프고 술 생각나면 언제든지 이 형한테 전화해라.

 까마귀 07의 말에 의경들이 우우 함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까마귀 07은 회식 내내 교통계 직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삼겹살을 굽고 눈치껏 술을 따랐다. 삼겹살이 추가로 들어올 무렵 재래시장 앞에서 보았던 의경이 다가와 술을 권했다.

 - 이거 받아 마시면 음주운전인데........

 까마귀 07이 잔을 받아들며 웃었다.

 - 까마귀 형님, 오늘 음주 단속 없습니다.

 의경이 귓속말을 했다.

 - 알았어. 너만 믿을게.

 - 오늘 딱지 안 끊었으니까 나중에 술 한 잔 사주십시오.

 여전히 귓속말이었다.

 - 알았어. 언제든지 전화해.

 까마귀 07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의경에게 주었다.

 

 회식이 끝나고 교통계 직원 서너 명과 2차로 간 지하 단란주점에서 아가씨들만 불러주고 나오려고 했지만 계장이 놓아주지 않았다. 분위기를 맞춰주려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양주를 마셨다.

 술이 꽤 취한 채로 소나타를 운전해서 사무실로 돌아오긴 했지만 레커차를 끌고 고속도로로 올라가기에는 좀 피곤하게 느껴졌다. 까마귀 07은 눈을 좀 붙이고 나서 고속도로로 올라가려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 까마귀 제로, 여기 까마귀 05

 - 여기 까마귀 제로. 말씀하세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수연은 달려와 무전을 받았다.

 - 이천까지만 따라가 보겠습니다.

 까마귀 05가 다시 무전을 해왔다. 음성에서도 까마귀 05는 포텐셔가 수상해 보여서 미행 중이라고 무전으로 알려왔었다. 그러니까 이제 일죽을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까마귀들은 일죽에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니까 일죽까지가 구역인 셈이었다. 평소엔 거의 무전도 없는 까마귀 05가 불쑥 구역을 넘어 가겠다는데도 수연으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까마귀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운행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수연의 일이었다. 까마귀들의 운행을 통제할 권한은 수연에게 없었다.

 

 - 네, 안전운행하세요.

 송화기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던 수연은 마지못해 답신을 보냈다.

 -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까마귀 05가 다시 무전해왔다.

 수연은 송화기를 내려놓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경험이 많거나 직관이 뛰어난 레커기사들은 감 혹은 느낌으로 사고나 고장을 예견하고 주행 중인 차의 뒤를 쫓곤 한다고 들었다.

 

 예감이 항상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사고차나 고장차를 잡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출내기 까마귀 05가 수상해 보이는 차 운운하며 뒤쫓는다고 하니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그 감을 핑계로 종종 자취를 감추곤 했다. 무전권 밖으로 이탈을 해도 뭐라고 할 수 없게 만드는‘감을 따라 가는 행위’가 수연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까마귀 05여서 더욱 그랬다.

 까마귀들 가운데 유일하게 수연과 까마귀 07의 부정한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도 불신 또는 미움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무슨, 이천까지 간다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구역이나 잘 지키고 있지. 기름은 어디서 주어오나. 도대체 남들 일할 때 뭐하나 몰라. 입사한지가 언젠데 지금껏 사고차 하나 못 잡아. 일주일에 고장차 한두 대 주워오는 주제에 무슨 미행까지 한다고. 흉내 낼 걸 흉내 내야지. 수연은 건성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서 마음속으로는 까마귀 05를 타박했다.

 어쩌면 수연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까마귀 05를 불러들인 까마귀 07에 대한 반발이고 미움일지 몰랐다.

 

 까마귀 05를 다시 만난 건 수연이 까마귀 레커로 출근한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수연은 이미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살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는 인가나 건물이라고는 없었다. 때문에 버스정류장까지 가려면 차들이 씽씽 달리는 위험한 국도변-인도가 없어서-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러고도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연이 아예 회사에서 눌러 살다시피 한 건 아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새벽 서너 시 혹은 네 다섯 시에도 누군가 대기하고 있다가 무전이든 신고 전화든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늙은 부모님에게는 그의 레커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숙소에서 지낸다고 둘러댔다.

 

 가끔씩 택시를 타고 혹은 까마귀 07의 레커를 얻어 타고 집에서 가져온 짐이 하나 둘씩 쌓여갔다. 속옷과 겉옷, 이불, 베개 따위를 넣어둘 곳이 필요했다. 까마귀 07은 사장실을 방으로 꾸몄다. 본래 보일러가 들어오는 방이어서 책상과 소파를 들어내고 침대와 장롱과 화장대만 들여놓으면 되는 거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회사를 지키는 성주신, 아니 성사신이 되어 가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얼굴 볼일 없을 줄 알았던 까마귀 05가 떡하니 회사로 찾아온 것이었다.

 

 어, 흥수 아냐! 흥수가 오는데!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까마귀 07이 의뭉스럽게 외치더니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비슷한 연배라는 것 말고도 흥수는 건재상에서 함께 일할 때도 이유 없이 불편한 데가 있었다. 막연히 드는 거부감이 아니어도 흥수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흥수뿐만 아니라 까마귀 07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까마귀 07, 그러니까 당시 황 부장이 건재상 창고에 딸린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으니 그가 유부남인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수연은 건재상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고 우연이라도 만나게 될까봐 전전긍긍해왔다. 유부남을 사귄 죄가 크고 무거웠다.

 

 까마귀 07과 애인, 아니 그렇고 그런 불륜관계라는 게 금방 들통 날 텐데. 수연은 흥수가 반갑기는커녕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까마귀 07은 그런 건 안 중에도 없는 듯했다.

 

 수연은 까마귀 07이 시키는 대로 책상 서랍에서 1005호 레커차 열쇠와 삐삐를 꺼내 흥수에게 건넸다. 흥수가 내민 특수면허증은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역시 넌 능력이 있다. 금방 면허를 딴 거 보면. 까마귀 07은 흥수의 새 면허증을 들여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제의 기사들이 다시 뭉쳤군. 건재를 실어 나르던 기사들이 이제는 레커를 모는군. 수연은 찜찜한 마음으로 커피믹서를 종이컵에 쏟아 붓고 수저로 저었다. 흙탕물. 비 오는 날 진흙 구덩이에 고인 흙탕물을 젓고 있는 느낌이었다.

 

 수연은 반쯤 남은 커피잔을 들고 책상 옆 창가로 다가섰다. 보안등 불빛이 사고차들 위로 화산재처럼 쌓이고 있었다.

 *

 

 

 

 

 

 까마귀 05는 감을 믿고 승용차를 뒤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동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었다. 만남의 광장으로 들어갔다. 새벽시간이어서 휴게소는 한산했다.

 우동을 사먹었다. 멸치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입안을 헹구려고 스텐컵에 물을 받아 마셨다. 레커에 오르기 전 오줌을 싸고 싶었다. 담배를 빼어 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텅 빈 화장실을 보자 갑작스레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갔다. 레커 뒤에 누워 자위를 하는 것과는 다를 것 같았다.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여자 냄새를 맡아본 것은 레커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닐 때였다. 차오른 욕정이 발길을 여인숙으로 끌고 갔다. 오랜만에 여자와 하고 싶었다.

 화가 난 것처럼 무뚝뚝한 여인숙 주인여자에게 화대를 지불했다. 얼마 후 사십대 초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의 얼굴에 죽은 여동생의 얼굴이 겹쳐졌다. 닮지도 않았고 나이가 비슷하지도 않은데 그랬다.

 

 여동생이 생각났다. 열 두어 살 무렵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여동생의 몸을 팔았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동네아이들은 그에게 먼저 돈을 주고 나서야 이불 속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어서 그냥 배를 타고 삽입을 하는 것으로 그만이었지만 여동생은 아파했다. 하지만 어린 여동생은 잘 견뎌주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와서 쌀만 몇 되 팔아놓고 가버리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의붓아버지를 데려오기 전에만 해도 그랬다.

 

 굶주리고 헐벗어도 차라리 의붓아버지가 없을 때가 나았다. 의붓아버지가 구렁이처럼 여동생을 물고 이불 속으로 끌고 들어가도 어머니는 늘 술에 취해서 미친년처럼 웃어댔다. 결국 여동생은 열다섯 어느 날 의붓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하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새처럼 날아올랐다. 하지만 여동생은 수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날개가 없던 탓이었다.

 

 여동생을 닮은 여자는 아랫도리만 벗고 까마귀 05 옆에 누웠다. 여자가 벗어던져 놓은 청바지 속에 분홍색 팬티가 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옷 벗어요. 안 할 거예요. 여자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흥수는 웃지도 않고, 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한 팔을 괴고 누워 무성한 여자의 음모를 만졌다. 거웃은 보송보송하고 깨끗했다. 방금 씻어 말린 것이 분명했다. 아직 초저녁이어서 자기가 첫 손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욕망은 누그러들었다. 사는 게 힘들지. 이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는 여동생에게 하듯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여자에게 쥐어 주고 여인숙을 나왔다.

 

 좌변기에 앉아서 자위를 하는데 자꾸 여동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술취한 어머니의 웃음소리인지 몰랐다. 웃음소리는 독방이 되어 그를 에워쌌다. 의붓아버지의 웃음소리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청송 교도소의 독방, 아니 먹방이 되었다.

 

 그는 의붓아버지의 웃음소리에 삼 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 의붓아버지의 웃음소리로 만들어진 청송 먹방은 괴롭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자위는 창살 사이로 조각조각 스며드는 빛이 되어 몸을 감쌌다. 그러나 빛은 채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예리한 유리조각이 되었다. 통증 같은 목소리가 날아와 상처에 부딪혔다. 낯익은 목소리. 영철이었다.

 

 고무신. 수갑. 포승줄. 이런 것들로 몸을, 마음을 결박당한 채 열 두 개의 철대문을 차례로 지나가고 있었다. 비스듬히 드러누운 햇살에 고무신이 빠졌다. 첨벙 첨벙. 낡은 고무신 바닥으로 스며든 더러운 햇볕이 질척거렸다.

 

 취사반 소속의 죄수들이 리어카에 밥통과 국통을 싣고 지나갔다. 한 사람은 앞에서 끌고 다른 한 사람은 밀고. 사동 입구에서 멈춘 그들은 힐끔 흥수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사동 소지에게 밥통과 국통을 넘겨주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배식. 철문 안에서 사동 소지의 외침이 들렸다.

 

 청송에 비하면 경주는 천국이라고 들어온 탓에 흥수는 이제 지긋지긋한 징역 고생이 끝난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 씨발, 좀 비켜봐. 잠 좀 자자.

 흥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위악을 부리며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참견하는 사람이 없었다.

 - 야, 이 새끼 흥수잖아. 흥수 맞지.

 접견을 갔다 돌아온 영철이가 외쳤다. 덕분에 살벌하게 파도치던 방 공기가 해후의 냄새로 뒤바뀌었다.

 - 앉자. 너무 변해서 몰라볼 뻔했다. 새끼, 나는 한 사십 먹은 아저씬 줄 알았다.

 

 영철은 의붓아버지를 칼로 난자해서 죽인 흥수가 청송에 있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영철은 조용한 야수,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는 흥수가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예전의 무력하고 착하던 흥수가 아니었다. 말은 없었지만 어쩌다 부딪치기라도 하면 살기등등한 눈빛과 광기 번득이는 얼굴로 죽일 듯 상대방을 노려봤다. 때문에 방안 사람들도 적지 않은 위협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건달인 자기가 전방을 신청하기에는 쪽팔렸고 흥수를 전방 보내는 것도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영철은 중학교 시절 단짝에 대한 우정을 되새기며 참았다. 덕택에 까칠하기로 소문난 영철은 흥수가 취사장으로 배정 받아 3상으로 방을 옮기기까지 한 달 남짓 건달로서도 방장으로서도 체면을 적잖이 구겨야 했다.

 

 행복한 취사장 냄새가 났다. 밥 냄새와는 다른, 국 냄새와도 다른, 취사장냄새는 행복이었다. 출소 1년여를 남겨 놓고 맡은 취사반장 노릇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 축복은 출소와 함께 당국이 회수해 가버렸다.

 

 여운처럼 맴도는 취사장냄새 탓이었다. 까마귀 05의 몸속을 떠돌던 분노와 욕망, 영혼의 실체가 탄환처럼 튀어나왔다. 절정은 짧고 무덤덤했다. 누군가 화장실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함부로 침을 뱉고 오줌을 쌌다. 까마귀 05는 정액으로 얼룩진 화장실문을 버려둔 채 밖으로 나왔다.

 

 - 까마귀 제로, 여기 까마귀 05.

 일죽 톨게이트가 가까워오자 무전이 터졌다.

 - 여기 까마귀 제로. 까마귀 05, 말씀하세요?

 사무실에서 수연이 무전을 받았다.

 - 여기 까마귀05, 지금 일죽을 지나고 있습니다. 분기점까지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흥수는 송화기를 거치대에 걸고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서 느긋이 달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승용차 한 대가 쏜살 같이 앞질러 갔다. 아까 상행에서 뒤쫓았던 그 승용차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몇 시간, 아니 두어 시간, 전에 서울로 올라갔던 차가 이 시각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나! 순식간에 승용차는 저만치 멀어졌다. 커브를 돌며 시야에서 사라지려던 승용차의 미등이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까마귀 05는 가속페달에 힘을 주었다.

 

 *

 

 

 

 

 

 까마귀 07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또 한 잔의 커피를 탔다. 벌써 네 잔째였다. 수연은 커피를 들고 있다가 마시지 않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간단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생각들이 수연의 혈액 속에 회한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건재상은 수연에게 예상치 못한 소용돌이였던가!

 건재상 경리로 일하면서 까마귀 07, 아니 황 부장이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장부 정리나 재고 파악을 하다가 늦어져서 어쩔 수 없이 황 부장의 차를 얻어 타야 했다. 하지만 차츰 황 부장의 차를 타고 퇴근하는 게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쉬는 날에는 낯선 도시로 가서 영화도 보고 낯선 거리를 걸어 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처자식 있는 유부남이라는 빗장을 단단하게 걸어두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느슨해져버렸다.

 막상 빗장이 풀리자 소용돌이를 향해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황 부장이 안겨주는 안개꽃, 장미꽃, 국화꽃, 튜울립, 따위를 집 앞 쓰레기통 속에 수도 없이 내던져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족들이 그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될까봐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계속 그를 만났고 밀회를 즐겼다. 그의 아내나 아이들에겐 미안했지만 양심을 애써 덮어버렸다.

 어느 날 그가 건재상을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수연아, 내가 얼마 전에 까마귀 레커를 인수했어. 수연은 황 부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일 거야. 무슨 돈으로, 무슨 능력으로 레커회사를 인수할 수 있겠어. 그가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사십 만 원이 조금 넘었다.

 

 건재상 사장이 목재 창고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낡은 주택을 무상으로 제공해 준 덕택에 돈을 좀 모으긴 모았을지는 모르지만 월급을 평생 한 푼도 안 쓰고 모은다 해도 레커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랐다.

 

 황 부장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시내 유명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하는 주방장이라는 것밖에. 그런데 하루는 스프를 태워먹고 스테이크를 태워먹다가 쫓겨났다는 소릴 들었다.

 

 남의 장사 망칠일 있어. 이러는 건 아니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가르쳐서 요리사 만들어줬는데, 무슨 억하심사냐고 이게.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 뭐가 서운해서 그러는데. 미쳤어. 미쳤냐고. 집까지 찾아온 레스토랑 여사장은 세상사람 전부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황 부장의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있었다. 우는 건지도 모르지만 수연이 보기엔 웃는 것처럼 보였다. 수연이 달려들어 레스토랑 여주인을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황 부장 아내에겐 정신과의사들도 밝혀내지 못한 병도 아닌 불치병이 있었는데 바로 그 병도 아닌 병이 재발한 것이었다. 말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오로지 잠만 자는 괴상하고 희한한 병이었다.

 

 병이 재발할 때마다 황 부장은 아내를 데리고 유명하다는 곳,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고 했다. 하다못해 귀신 쫓기로 유명한 교회를 찾아 간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귀신아, 이 사악한 귀신아 이 사람의 몸에서 나가라. 그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휘청거리며 쓰러졌지만 황 부장의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나를 보세요. 자, 여길 쳐다보세요. 목사가 황 부장의 아내에게 몇 차례 자신을 쳐다보라고 채근했다. 그러나 황 부장의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이분은 귀신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후에 찾아간 대학병원의 유명한 정신과의사는 진단불가라는 진단 아닌 진단을 내렸다. 또 다른 병원의 정신과의사는 아주 난감한 얼굴로 병이 아니라고 말했다. 병이 아니니 처방도 없었고 약도 없었다.

 황부장의 아내는 병이 아닌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가게를 망쳐놓으려 작정한 거 아니에요. 난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피식피식 웃기만 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레스토랑 여사장이 목재 배달을 갔다 돌아온 황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제 아내가 사장님한테 무슨 다른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제 아내는 자기를 요리사로 키워준 사장님께 늘 고마워했습니다. 다만 제 아내한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그 병이 도지면 제 아내는 자기 의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지금까지 보신 그대로 제 아내는 착한 사람입니다.

 황 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레스토랑 여사장을 달랬다.

 

 황부장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설거지를 돕는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 레스토랑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처가에서 병구완을 받던 아내를 수년 만에 다시 만나 거였고 병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집에서 살림이나 살라고 했지만 아내는 끝내 돈을 벌겠다며 나섰다 했다.

 그런데 레스토랑 여사장 보기에 그의 아내가 꽤 성실하고 요리에 대한 감각도 있어 보여 하나씩 가르쳤고 마침내 요리사가 그만두자 그녀에게 요리를 맡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아내는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황 부장의 말에 의하면 아내의 지병이 도진 것이라 했다.

 

 수연은 황 부장을 위로하려고 창고로 갔었다. 황 부장은 엑스포를 입에 문 채 마당에 세워놓은 각목 다발을 창고 안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더 말려야 하는데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수연은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품에 안았다. 그에게서는 나무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 탓이었다. 수연은 그를 사랑한다고 믿어버렸다. 사랑도 아닌 사랑이었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난 뒤였다. 황 부장의 장인이 목재 창고에 딸린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꿈을 꿨는데 아가 아프더라. 칠순이 넘은 장인이 안타깝게 그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황 부장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경이로움에 빠져 장인을 바라보았다. 황 부장은 아내의 옷가지 몇 점을 가방에 챙겨 장인에게 넘겨주었다. 아내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아이들이 소리 없이 울었다. 황 부장의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있었다.

 

 수연은 죄책감을 떨쳐버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사무실 현관문 옆에 나란히 자리 잡은 책상 두 개. 책상은 낡고 흉물스러웠다. 애당초 중고를 샀거나 어디선가 주워왔을 터였다. 책상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무전기. 새벽 형광등 불빛 아래서 무전기는 더욱 무뚝뚝하고 단단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것도 표면의 칠이 탁하게 변색된 것이 새것 같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책꽂이는 어지러웠다. 책꽂이 자체도 칸막이가 무너지고 철사가 휘어지는 등 낡았지만 서류철과 장부들이 무질서하게 삐뚤빼뚤 마구 헝클어져 있어 더욱 그래 보였다. 그나마 질서 있게 키순으로 서 있는 것은 1992년도 전화번호부와 손때 묻은 다이어리, 연두색 표지의 세월, 하얀색 표지의 배꼽, 노란색 표지의 소설동의보감 따위의 책뿐이었다. 책만큼은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아직 손때가 타지 않은 새것이어서 그런가? 누구 것이지! 전에 이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람 중의 하나! 이전 사장! 경리! 수연은 아주 잠깐 책 주인이 누굴 지 아주 잠깐 궁금했다.

 

 업무일지 옆에 아무렇게 펼쳐져 있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은 더 누렇고 더 바스러질 듯 보였다.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알 수는 없지만 퀴퀴한 종이 냄새가 나는 듯 했고 책장을 넘기면 먼지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수연은 우연히 마주친 그 책을 읽고는 있지만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유명한 소설이어서 글자를 헤아리듯 읽어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난독증에 걸린 듯 이야기가 읽히지 않았다. 의미 없는 글자들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 여기 까마귀 05, 동서울분기점 기준 106k 지점. 지원 바람. 지원 바람.

 까마귀 05가 다급하게 무전을 날렸다.

 - 여기 까마귀 09. 출동 중이다, 오버.

 - 여기 까마귀 11. 출동 중이다, 오버.

 침묵에 빠져 있던 무전기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수연은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식은 커피에서 담배진내 혹은 지린내 같은 냄새가 났다. 어쩌면 커피로 절은 입에서 나는 냄새일지 몰랐다.

 

 까마귀 05가 처음으로 사고차를 잡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까마귀 05는 사고차를 버려 둔 채 차 안에 타고 있던 여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까마귀 09와 11 그리고 03이 사고 현장으로 가고 있긴 했지만 사고차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지가 무슨 응급구조대라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냐. 까마귀 07도 방에서 나오더니 한 마디 했다. 까마귀 05의 하는 짓이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 살리겠다고 가는 걸 대놓고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까마귀 09와 까마귀 03이 각각 사고차를 한 대씩 차고지에 떼어놓고 간 뒤에야 사고차를 버리고 가버린 까마귀 05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미 날이 훤히 샌 뒤였다. 까마귀 09와 03은 사고처리를 하고 오느라 늦었다지만 까마귀 05가 늦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넌, 사고차도 내팽개치고 어디 갔다가 오냐!

 까마귀 07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 죄송합니다.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여자분 보호자가 필요.......

 까마귀 05가 대답했다.

 - 야, 까마귀 05! 니가 레커기사지 응급구조대냐! 니가 타고 다니는 거 레커차야 새끼야. 응급차가 아니라고. 그리고 병원에 데려다 줬으면 그만이지 보호자까지 자처해. 너 제정신이냐.

 - 죄송합니다. 사고차가 고속도로 한 복판에 있어서 당장 꺼내지 않으면 이 차 추돌로 여자마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내다 보니까 출혈이 심하더라고요.

 

 조금만 늦었다면 2차 추돌로 여자가 죽었을지 모른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까마귀 09가 레커를 노견에 세우고 내리는데 달려오던 화물차가 고속도로 한 복판에 서 있는 사고차를 들이박고 10여 미터나 밀고 나갔던 것이다. 운전사는 부상조차 당하지 않았지만 트럭은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까마귀 03이 와서 트럭을 달았고 까마귀 09는 먼저 사고 난 벤츠를 달았다. 벤츠 운전자는 그 자리서 즉사했다.

 

 - 그래, 사람 목숨이 더 중하지.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까마귀 07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화가 묻어 있었다.

 -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돈보다 먼저인 게 있는 거 아니겠어. 당연히 사람 목숨이 먼저여야지. 나라고 뭐 사람 죽어나가는 걸 보는 게 좋겠냐. 그렇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이건 돈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자칫 잘 못하다간 좋은 일하고 사람 목숨 값 물어줄 수 있다. 니가 잘 못 구조해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하면 어쩔 거냐. 구조에도 전문가가 있고 절차가 있고 지식이나 방법이 있는 거다. 그럴 땐 이 차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삼각대를 세우고 뭐 그래야지. 우리가 그런 양심까지 발휘해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아무튼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거든. 사람 구조는 구조대한테 맡겨. 차량 구조는 우리가 하고.

 

 - 명심하겠습니다.

 까마귀 05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실컷 잔소리를 듣고 야단을 맞았는데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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