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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남녀주인공의 이야기를 엮어보려 노력했습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흔들림 14
작성일 : 19-09-23 09:38     조회 : 341     추천 : 0     분량 : 17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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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진우 씨가 운전하는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국도로 접어들더니 거기서 또 샛길로 빠져나갔다. 직선도로에서 시작해서 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한참을 오른쪽, 왼쪽으로 완만하게 구부러지는 길을 달렸다. 이런 곳에도 경찰서가 있구나 싶은 지점에 차가 멈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동네 면사무소라는 생각이 들 외양이었다. 건물 한쪽 귀퉁이에 경찰복을 입은 마스코트 포스터가 붙어 있어 경찰업무와 관련된 곳이라는 걸 겨우 알 수 있었다.

 “아우, 뻐근해. 꽤 멀리 왔는걸요.”

 하나가 차에서 내려 한껏 기지개를 켠다. 나도 덩달아 이리저리 몸을 돌려봤다. 오랜만에 이런 한적한 곳에 오니 좋긴 하다.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러 온 건 아니지만 코에 닿는 풀 냄새, 나무 냄새가 저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러게. 차로 한참을 달렸어.”

 “어째 건물이 한 채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게 낯설다. 보통 경찰서는 사람 많은 주거지역 한 가운데 위치하지 않나?”

 진우 씨가 말을 받는다.

 “그나마 여기가 마을 중심부입니다. 집들이 워낙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어 딱히 어느 한 집 근처에 자리하지 않게 위치 선정을 했어요. 그래도 차로 조금만 나가면 마을 슈퍼랑 약국도 찾을 수 있어요.”

 “참 생경하네요. 5분만 걸어가면 바로 대형마트가 보이는 곳에 살다 슈퍼를 찾기 위해 차로 가야 하는 곳에 오다니요.”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있으면 주위가 어둑해질 것이다. 보아하니 야간등도 찾기 힘들다. 컴컴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거 금세 저녁이겠는데요. 여기는 가로등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밤이면 칠흑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깜깜해지거든요. 빨리 서두르는 게 낫겠네요.”

 진우 씨가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오늘 무슨 날인가? 아는 얼굴이 둘이나 나타나고.”

 그 말에 한편으로 가슴이 놓였다. 둘이라고 했으니 상현 씨가 이리로 온 게 맞긴 맞나 보다.

 “상현 씨가 여기로 왔나 봐.”

 “그러게. 다행이네.”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설마 무슨 나쁜 일이 이미 벌어진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평화로워 보이지 않아?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진우 씨가 친숙한 얼굴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하나와 나는 그 뒤에 서서 멀뚱히 주변을 둘러봤다. 전형적인 시골 경찰서, 아니 딱히 말해서 파출소 같은 모습이다. 대여섯 개 업무용 탁자가 줄을 맞춰 놓였다. 안쪽에 보이는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널찍한 탁자는 직급이 높은 사람의 것이리라. 그 자리는 지금 비어있고 방금 진우 씨와 인사를 나눈 직원이 우리를 향해 궁금한 시선을 보낸다. 양쪽 모서리를 남겨두고 가운데 뒤 아래까지 머리가 벗겨진 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남자다.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면 흔한 시골농부로 보기 딱 좋을 타입이었다.

 “예, 여기는 같이 온 동행입니다.”

 “사모님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신지?”

 사모님? 우릴 천기장 와이프나 가족으로 생각한 건가? 진우 씨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게 설명하긴 사연이 길어서요. 상현이 여기 왔지요? 어디 있습니까?”

 “어, 온 지 꽤 됐지. 지금 취조실에 있어. 별 일 아니라고 하던데 이분들도 관련됐나 보지?”

 “설명은 있다가 드리겠습니다. 하나 씨, 은정 씨 이리로 절 따라 오세요.”

 하나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직원에게 대강 목례만 하고 그대로 진우 씨를 따라 지나쳤다. 문을 하나 열고 나가자 바로 앞에 몇 개의 나눠진 방들이 보였다. 취조실이라고 따로 만들어진 곳은 없었다. 대충 급조해서 방을 나누고 그 중 하나를 취조실로 쓰는 모양새였다. 취조실이라고 쓰인 문패조차 붙어있지 않았다. 그나마 나눠진 방 중 하나에 숙직실이라는 엉성한 표지판이 문에 매달려 있었다. 어째 취조실보다 숙직실이 더욱 중요한 곳이라는 것처럼.

 ‘준비 됐나요,’ 라는 신호라도 보내듯이 진우 씨가 우릴 한 번 더 돌아보더니 취조실로 쓰이는 방의 문을 열었다.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한쪽 벽면은 일방향 거울로 뒤덮인 전문적인 취조실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완전 기대를 저버렸다. 그냥 방 하나에 탁자 하나와 의자 네 개, 구석 한쪽에 놓인 또 다른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취조실이 아니라 창고 같다고 할까. 탁자 한쪽 편에 상현 씨가 앉았고 그 건너편에 천기장이 앉아 있었다. 무슨 험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유로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놀랬는지 시선을 떼지 못한다.

 상현 씨는 우릴 보고 그다지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약간 의외라는 정도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내가 여기 있을 줄 바로 알았어?”

 진우 씨가 혀를 찬다.

 “참, 나. 그 반응하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신경도 안 쓰이지?”

 “걱정은 왜? 내가 토막 살인이라도 저지를까 봐?”

 또박또박 ‘토막 살인,’ 이라고 발음하는 상현 씨를 그 앞에 앉은 천기장이 멀뚱히 쳐다본다. 이 사람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나름 고민했어. 네가 어디로 향할까 하고. 결국 이곳을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더군. 손님까지 대동하고 움직이는데 네가 남의 시선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잖아?”

 ‘손님,’ 이라는 단어가 어째 비아냥거리듯 들린다. 진우 씨도 천기장이라는 자가 달갑지 않겠지. 천기장이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상현 씨를 빤히 바라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이 사람들이 왜 여기로 온 거죠? 같이 취조 받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설마, 저랑 하나 관계로, 그게, 혹시, 우리 집사람이 간통죄로 고소라도 한 겁니까?”

 간통죄 폐지된 게 언젠데. 하나를 앞에 두고 자기 와이프한테 들킬 걱정만 하는 천기장이 괘씸했다. 상현 씨가 혼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해코지를 하게 놔둘 수도 없고 답답하긴 하다.

 “천, 진, 환 씨.”

 상현 씨가 갑자기 천기장의 이름을 또박또박 읊어댄다. 묵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인다. 사뭇 진지해진 그의 태도에 천기장이 자세를 똑바로 한다. 경직된 자세로 상현 씨를 마주한다.

 “여기는 경찰서입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잡혀오는 곳이죠. 본인은 가슴에 찔리는 일을 한 적이 없나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한테 참고인 자격으로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저기, 상현아.”

 “수사대상이 되는 사건에 관련되어 진술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참고인이라고 하지요.”

 진우 씨가 뭐라고 하려는데 상현 씨가 바로 그 말을 잘라버리고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간다. 천기장을 향해 상체를 바짝 붙이며 고개를 들이미는데 내가 천기장이 아닌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사람을 거북스럽게 만드는 자세다.

 “그러다 종종 참고인이 피고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다 보니 말이죠.”

 천기장의 안색이 눈에 띨 정도로 창백해진다.

 “제가 피고인이 될 수도 있어요? 아니, 도대체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건지∙∙∙∙∙∙.”

 천기장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진다. 속으로 고소하다 싶었다. 제대로 당해보라지. 한편으론 이렇게 끌려온 그가 안 됐지만 실컷 혼이 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천진환 씨는 현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네, 네, 그렇지요. 아내와 예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그의 얼굴. 슬쩍 하나를 보니 그저 발끝만 바라보고 있다.

 “아니, 아내와 예쁜 딸이 있는 분이 말이죠. 그렇게 함부로 여자를 대해도 되는 겁니까?”

 상현 씨는 일부러 그러는지 더욱 또박또박 마디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말을 잇는다. 상현 씨가 더욱 고자세를 취할수록 천기장의 자세는 점점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다.

 “여자를 함부로 대한다구요?”

 “예쁜 딸이 있다고 하셨으니 더 잘 아시겠네요. 나중에 그 딸이 커서 천진환 씨 같은 남자를 만나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본인 심정은 어떻겠어요?”

 “저기, 자꾸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시는데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여자들한테도 잘 해요. 우리 집사람이 요리를 하고 나면 제가 꼬박꼬박 설거지도 합니다.”

 “이봐요! 천, 진, 환 씨!”

 상현 씨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그거야 자기 집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 자기 아내랑 딸이 소중한 줄 알면 다른 여자들한테도 잘해야지 그저 자기 가족만 위하는 겁니까?”

 “그게,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천진환 씨 때문에 피눈물 흘리는 여자가 있어요. 아시겠습니까? 나중에 진환 씨 딸이 커서 남자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되면 진환 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남자를 그냥 두고 보기만 할 건가요?”

 “아니, 제 딸은 왜 자꾸 끌어들이십니까?”

 “그러니까 당신 딸이 소중하면 그만큼 세상 모든 여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거 아닙니까?”

 상현 씨가 억지 논리로 윽박지르는 상황이 억울하겠지만 그렇게 당하는 천기장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건 흡사 말리러 온 게 아니라 구경하러 왔다고 해야 할까. 진우 씨가 상현 씨를 말리려고 나선다면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 상현 씨를 제외하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다. 하나는 어떤 기분일까? 설마 그렇게 당해놓고 천기장을 불쌍히 여기는 건 아니겠지?

 “저, 여자를 함부로 대한 적 없는데요. 회사에서도 여직원들에게 나이스해서 인기가 많은 편입니다.”

 천기장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여기 이 자리에서 그 미소에 따라 웃는 사람은 없다.

 “그러시겠죠. 시작은 그렇게 해놓고 이제 필요 없다 싶으면 바로 버리셨겠죠.”

 상현 씨가 하나를 슬쩍 힐끔거리다 다시 천기장을 본다. 하나가 안색을 무표정하게 유지하고 있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기 힘들다.

 “하, 거, 참,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버리다니요. 사람이 무슨 쓰레기도 아니고.”

 탕! 번뜩, 정신이 확 들었다. 상현 씨가 탁자 위를 세게 내리쳤다.

 “자기가 필요할 땐 집적거리다 다 썼다 싶으면 아무 미련 없이 버리는 게, 그게, 사람을 쓰레기처럼 대한 거 아니고 뭡니까. 그렇겠지요. 자기 평판을 좋게 만들려면 겉으로는 아주 잘 대해주셨겠지요. 그러다 나한테 넘어왔다 싶으면 태도를 확 바꾸셨을 거고요.”

 천기장이 넌지시 하나를 향해 시선을 준다.

 “아니, 누구한테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일방적으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그 편을 드는 건 합당치 않다고 보네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입장은 무슨∙∙∙∙∙∙.”

 다시 한 번 탁자를 내리치려는 상현 씨의 어깨를 진우 씨가 잡아 멈춘다. 상현 씨가 의아하게 진우 씨를 올려다보는 사이 진우 씨가 천천히 의자를 끌어당겨 상현 씨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천진환 씨. 일단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이 친구가 성격이 급해서요, 두서없이 장황하게 말만 늘어놓고 있네요.”

 “내가 언제∙∙∙∙∙∙.”

 진우 씨가 툭, 툭, 상현 씨의 어깨를 건드려 말을 막은 후 자기 할 말을 이어간다.

 “법률을 잘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형법에 따르면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게 되어 있지요.”

 그건 꼭 법률을 몰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갑자기 여기로 끌려와서 이해 안 되는 말이나 듣고 얼마나 답답할지 진환 씨의 기분 십분 이해합니다. 저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우리 피차 서로 바쁜 시간 허비해가며 상대방 기분 해치지 말고 협조 잘 해서 좋게 끝냅시다.”

 진우 씨의 말투는 차분하고 어쩐지 사람을 달래는 어조다. 이게 혹시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는 피의자를 취조할 때 쓰는 좋은 형사, 나쁜 형사 심문방식 어쩌고 하는 건가?

 “진환 씨는 감옥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감옥이요? 감옥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습니다. 여태 모범시민으로 죄 한 번 지은 적 없이 살아왔어요.”

 “그렇군요. 그런 좋은 분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전과자 낙인이 찍히고 그 업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경우를 자주 봤지요. 한, 번, 의, 실, 수, 로 말이지요.”

 방금 그 문장을 듣는 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진우 씨가 나긋한 어투로 그런 말을 꺼내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이건 뭐 어린 아이한테 사탕 주면서 돈 내놓으라고 하는 거랑 다름없잖아.

 “한 번의 실수요?”

 “네에. 누구나 시작은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전과가 하나씩 쌓여갑니다. 한 번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엔 속도가 붙어 순식간에 늘어나지요.”

 천기장이 불편한지 몸을 비튼다. 입술이 말라붙어 혀를 달싹거린다.

 “그건 제 경우와 비교하면 안 되지요. 전과자가 될 일을 한 적 없습니다.”

 이번엔 진우 씨가 천기장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다.

 “그렇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세요?”

 “어, 어, 그러니까, 살면서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감옥 갈 일을 한 적 없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말씀 한 번 잘 하셨네요. 진환 씨가 말한 대로 살면서 죄 안 짓고 사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 감옥에 가는 사람이 있고 안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건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지 아시는지요?”

 천기장의 말문이 막혔다. 골똘히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님 그저 할 말이 없는지 공연히 손을 들어 입을 건드렸다 머리를 긁어보기도 하고 다리를 떨어대며 땀을 흘린다. 내가 천기장 입장이라면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공연히 가슴이 벌렁거릴 것 같다. 이건 죄 없는 사람도 죄 있게 만들도록 몰아가는 태세다. 내가 저 자리에 앉지 않은 게 감사했다.

 “그거야, 저, 판사가 법정에서∙∙∙∙∙∙.”

 진우 씨가 뒤로 몸을 빼더니 양손을 들어 머리 뒤로 깍지를 낀다.

 “법이라는 게 문장을 하나 빼고 하나 더하면 무게가 확 달라집니다. 어쨌든 판사도 법정에서 일하며 나라 밥 먹는 공무원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공무원인 경찰이 공소하는 사실에 무게를 둬서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상현 씨 얼굴 위로 기묘한 표정이 어린다. 내 짐작이 맞다면, ‘어라, 이 친구 봐라’, 라며 은근히 진우 씨가 연출해가는 상황을 즐기는 입장이랄까. 굳어있던 태도가 조금 전보다 사뭇 느슨해졌다.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현장에서 호흡을 맞춰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본능적으로 서로 밀고 당기며 팀워크를 이뤄가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우리가 진환 씨 범죄 사실을 가중해서 진술서를 작성하면 법정에서 나름 참작이 될 겁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범죄자로 만드실 이유가 있나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공손한 말투로 천기장이 묻는다. 언제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지? 흥분해서 날뛰던 상현 씨보다 낭랑하게 말을 이어가는 진우 씨가 더 무서워졌다. 역시 사람은 천의 얼굴을 가졌나 보다. 상황에 따라 완전 딴 가면을 쓰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니까.

 “그러니까 이해가 되도록 지금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우 씨의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되었던 것인지 탕! 상현 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일어선다. 두 번째라서 처음보다 덜 놀랐지만 깜짝,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천진환 씨! 지금 정신 차리고 똑바로 들으세요.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면 이렇게 대하지도 않습니다.”

 “잘, 잘 듣고 있어요. 그렇게 소리 높이지 않으셔도 되거든요.”

 “상해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상해죄요? 그거야∙∙∙∙∙∙.”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라는 듯 천기장의 말을 무시하며 상현 씨가 말을 이어간다.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다쳐서 상처를 입으면 상해죄가 성립됩니다. 그건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모두 포함하지요.”

 정신적 피해? 정말 마음이 다쳐도 상해죄에 포함되는 건가? 말 자체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게 들리는데 현직 경찰이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나름 솔깃하기도 하다.

 “공하나 씨 아시지요?”

 천기장이 하나를 힐끔거린다. 하나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네, 뭐, 같은 직장에 다닙니다.”

 “그리고요?”

 “그리고라니요?”

 “단순한 직장 동료 사이가 아닌 걸로 아는데요. 두 분이 사적으로 만난 게 얼마나 되었죠?”

 천기장이 목을 긁어댄다. 당연히 이제부터 긴장하고 말조심 하셔야겠지.

 “어, 음, 그게 저 하나가, 아니 공하나 씨가 나름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비행기를 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야 그쪽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습니까?”

 “서비스업에 속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감정 노동자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항상 고객이 최우선이고 비행기에 오르는 승객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떼버리고 일해야 합니다. 이 일이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가 아주 심합니다. 저희 부서 팀장이 항상 하는 얘기가 사장이 우리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월급을 준다. 그러니 월급 주는 고객에게 감사하며 그냥 대하지 말고 ‘모셔라’, 라고 합니다. 탑승객을 섬기고 모시라고 하니 말 다했지요.”

 천기장이 방금 꺼낸 말에는 하나도 공감을 하는지 고개를 살짝 주억거린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마사지업도 고객 말 한 마디에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비행기 타는 일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끼리 마음이 맞게 되고 서로 힘들 때 가장 위로가 될 수 있지요.”

 천기장이 다음 말을 꺼내기 전 슬쩍 주변 눈치를 살핀다.

 “저야 항상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다 보니, 하나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천기장의 말에 다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끼어들지 않는다. 천기장이 다소 안심한 목소리 톤으로 계속 이어간다.

 “서로 힘든 부분을 다독여주고 위로도 받고 하다 보니 친해지면서, 허, 그게 남녀 사이가 그렇지 않습니까? 정이 생기면서 살을 맞대는 상황까지 발전하기도 하지요.”

 하나가 천기장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제지하려 나선다.

 “그만해요.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이랑 대화를 나눌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항상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니까.”

 천기장이 그런 하나의 말에 열을 낸다.

 “이봐요, 공하나 씨. 힘들다고 울며불며 하소연 하길래 불쌍하게 봐줬더니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은혜? 은혜는 무슨 옆집 개나 주시던가. 지금 염치라고 했는데 말 한 번 잘 꺼냈네. 염치가 있는 댁은 사람 갖고 놀면서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안 들었나 보지?”

 “아니, 이 여자가 말이면 다 해도 되는 줄 아나. 어디 딱 까놓고 얘기해볼까. 당신도 내가 결혼했고 애까지 딸린 유부남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게다가 사내 연애는 회사에 알려지면 양쪽 당사자 모두에게 좋을 일이 없어서 숨기는 게 불문율인데 그렇게 티를 내며 매달리니까 내가 그만 좋다고 한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와이프까지 옆에 있는데 사람을 스토킹 해?”

 “야! 그때 명동에서 만난 건 우연이라고! 내가 이제 너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따라다닐 거 같아! 아니라고! 착각 좀 작작 하라고!”

 탕! 안 그래도 이때쯤 한 번 두드려줄 것 같았는데 상현 씨가 타이밍 좋게 책상 위를 때린다. 하나와 천기장이 동시에 말을 멈춘다. 상현 씨가 하나 옆으로 다가가서 양쪽 어깨를 잡더니 살짝 뒤로 당긴다.

 “하나 씨는 잠시 뒤로 물러나 계시죠. 굳이 이런 작자와 상대해서 하나 씨 기분 더럽힐 필요가 없어요.”

 “어, 이거 뭐야?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야?”

 이제 상현 씨가 천기장을 상대한다.

 “이보세요, 천진환 씨. 지금 당신에겐 하나 씨가 어떻고 하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본인 문제를 직시하셔야죠.”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천기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상현 씨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현재 처한 상황이 이러저러하게 시작됐고 그렇게 해서 현 시점까지 이렇게 오게 됐다는 것 잘 알겠는데요,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 천진환 씨 본인이 어려움에 처한 걸 모르시겠습니까? 애까지 딸린 기혼자는 천진환 씨고 지금 정황이 천진환 씨한테 불리해요.”

 갑자기 상현 씨가 말을 멈추고 진우 씨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두 분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죠.”

 “네?”

 “어?”

 ‘자리를 비켜주시죠’, 라는 말이 문장 자체는 제안을 하는 형식을 띄나 은근한 압력을 품고 있다. 그 말을 따라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진우 씨를 보니 진우 씨도 딱히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우 씨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묻는다.

 “우리 보고 나가달라고?”

 천기장이 얼른 그런 상현 씨의 제안에 반기를 든다.

 “아, 굳이 나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모두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한 명이라도 더 증인이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진우 씨 없이 상현 씨만 상대하려면 천기장 본인도 불편하겠지. 지금 좋은 경찰 역할은 진우 씨가 맡고 있고 나쁜 경찰이 상현 씨니까.

 “방금 오갔던 말들처럼 이제부터 사적인 진술이 많이 나올 테니까 아무래도 당사자들인 천진환 씨와 하나 씨만 있는 게 본인들도 덜 불편할 것 같아 그럽니다. 진우야, 나 섣부른 행동 절대로 안 할 테니까 동료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믿고 나가주면 좋겠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라도 나가줬을 것이다. 진우 씨가 딱히 그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얼른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천기장이 당황한 얼굴로 밖으로 나서는 우리 두 사람을 보지만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경찰서 밖은 제대로 된 조명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건물에서 조금만 멀어지니까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진우 씨와 둘이서만 이 캄캄한 공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문득 실감났다. 차가운 밤공기가 살에 닿자 무심코 팔을 쓸어내렸다. 그런 나를 보고 진우 씨가 위에 걸쳤던 웃옷을 벗어 내 몸 위로 덮어준다.

 “이런 시골은 낮엔 덥더라도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쌀쌀해져요. 특히 공기의 흐름을 막아주는 건물이 없이 탁 트여있어 온도 차이가 심한 편이죠.”

 “저 안 덮어주셔도 괜찮아요. 진우 씨도 추울 텐데.”

 “밤 근무에 익숙해서 말이죠. 이 정도 추위쯤은 별 거 아닙니다.”

 “저녁 늦게까지 여기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여벌옷이라도 챙겨왔을 텐데요.”

 “이게 다 쓸데없이 일 저지르고 다니는 상현이 놈 때문입니다.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몇 사람이 피해를 보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덕분에 한적한 시골에 와서 이렇게 상쾌한 공기도 마셔보고 하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저는 은근히 좋은데요.”

 진우 씨가 대답 없이 미소를 보인다. 그의 웃는 모습이 좋다. 하루 종일 그 미소만 보고 있으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내 모습이 보기 좋을까? 대놓고 묻기도 그렇고 그 마음을 살짝 들여다보고 싶은데 그의 일기장이라도 훔칠 수 있다면 모를까 달리 방법이 없다. 딱 눈만 마주치면 바로 상대방의 생각을 스캔해서 읽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삶이 간편해질까. 누군가의 마음속을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맨날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을 텐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요?”

 “예? 아, 네. 여긴 참 다른 세상이구나, 라고 감탄하고 있었어요. 한편으론 제 자신이 주변 세상에만 빠져 살아서 그곳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네요. 진우 씨는 여기 근무할 때 어땠어요?”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답답했어요.”

 “답답해요?”

 “네. 외진 곳에 달랑 건물 한 채 놓여있는 지서에 와서 사람 볼 일도 별로 없고, 사건이라고 해봤자 집에서 기르던 가축이 도망갔다고 찾아달라는 둥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일만 다루다 보니 지금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우울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막상 여길 떠나고 나서 얼마나 좋은 곳이었고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참 소중했다는 걸 깨달았지요. 상현이도 여기서 알게 됐고 같이 근무했던 분들도 다들 너무 잘해주셨거든요. 서울로 발령을 받고 거처를 옮기고 나니까 이곳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꼭 그런 얘기 있잖아요.”

 괜히 쑥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큰 도시를 동경하던 시골 소녀가 어렵게 상경해서 직접 그곳에서의 삶을 겪어보고 다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뭐 그럭저럭 맞는 얘기 같아요. 시골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진우 씨와 같이 웃음을 나눴다. 가슴 한 모퉁이가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구석에서 시작된 그 온기가 서서히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몸 바깥은 냉기로 가득한데 어떻게 이렇게 안에서 열이 뿜어져 나올까.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그렇게 반응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다음 사진 모임은 어디서 하죠?”

 “아직 결정이 안 났을 거예요. 동호회 위원들이 모임을 갖기 전 회의를 하거든요. 그에 따라 때와 장소가 결정되고 공지가 나요.”

 “동호회 위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위원이 되기 위한 구비조건이 있어요. 얼마간 동호회 회원 기간을 거쳐야 하고 그 기간 동안 동호회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해요. 아무래도 얼굴만 내비치고 활동은 제대로 하지 않는 회원에게 위원 자리를 주진 않겠죠.”

 “은정 씨는 위원 활동 해본 적 있어요?”

 “아뇨. 시켜준다고 해도 사양이에요. 워낙 말 주변도 없고 낯가림도 심해서 그런 건 전혀 자신이 없어요.”

 “은정 씨 서비스업에 종사하잖아요. 사람 다루는 일 잘 하실 것 같은데.”

 “그건 직업이니까요. 항상 고객에게 잘 하자고 다짐하면서 출근해요. 그런데도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많죠. 제 천성은 아닌 것 같아요. 저 좋다고 나가는 모임에서 굳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진 않네요. 진우 씨는 하시고 싶은 생각 있어요?”

 “저도 그다지 그런 역할이 끌리진 않네요. 저보다 상현이가 그런 역할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하나도 그런 일 잘 할 듯해요. 사람 잘 챙기고 모임 주선하는 일에 앞장서고 그런 역할.”

 “어째 비슷한 두 사람이 만났네요.”

 “그러게요.”

 ‘그럼 우리도 성격이 비슷한 편이죠?’, 라고 묻고 싶은데 차마 문장을 입에서 떼진 못했다.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은데 진우 씨는 어떨까?

 “음, 저기, 은정 씨.”

 “예?”

 진우 씨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살짝 사이를 둔다. 뭘 망설이는 걸까?

 “말씀하세요.”

 “하, 그게.”

 덩치 큰 남자가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엽다. 머리카락 한쪽이 바람에 날려 뭉친다. 제대로 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손이 올라가서 건드리고 있는 걸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번뜩 자각했다. ‘아, 이를 어째.’ 왜 이 사람 앞에서는 몸이 머리보다 앞서서 용감해지는 걸까?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걸 설명하려니 그게 더 우스워 보일 것 같고 도무지 어떻게 무마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기 바람 때문에 머리가 흐트러졌어요.”

 “만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만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장만 놓고 보면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진우 씨가 얼굴을 붉힐 때까지. 그러고 나니 그 의미가 묘하게 전달됐다.

 “풋.”

 이 웃음은 몸이 용감해진 건 아니고 단순한 생리반응이다. 그의 말이 웃겼으니까.

 “아니,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의 얼굴이 귀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손을 들어 흔든다. 이런 상황에서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모른 척 해주며 넘어가주는 게 맞으리라. 딸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리 부모님을 원망해야 할지 난 예의가 부족했다. 더 크게 웃어버렸다. 큰 소리를 내고 나서 숨을 들이쉬고 나니까 진우 씨의 난감해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제가 이상해 보이나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행동은 오히려 제가 하고 있어요.

 “전혀요. 죄송해요.”

 “뭐가요?”

 “제 마음대로 손을 대놓고 진우 씨 당황하니까 그 앞에서 웃어버리고. 원래 그런 염치없는 여자 아닌데.”

 “저도 원래 이런 실없는 소리 하는 남자 아닌데 말이죠.”

 큭. 그렇게 큰 소리로 웃고 난 후에도 내 속에 아직 웃음이 남아있었는지 또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 한다. 다행히 이번엔 진우 씨도 같이 웃어줘서 덜 무안했다. 그런 김에 더 편하게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누군가 옆에서 맞춰서 웃어주면 더욱 웃음의 강도가 세지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소리가 잦아들고 나니까 얼마나 나를 실없는 여자로 볼까 은근 걱정이 된다.

 “방금 전에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하셨어요?”

 진우 씨가 이번에도 주저하다 머리를 슬쩍 쓸어서 넘긴다. 그러더니 내 앞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한쪽 눈을 감았다 뜬다. 내게 윙크한 건가?

 “이번엔 만져주실 만큼 흐트러지지 않았나요?”

 “네. 나쁘지 않아요. 제가 만져드릴 만큼은 아니네요.”

 입술에 미소가 걸린 채로 그가 묻는다.

 “그게, 저, 은정 씨는 사진 모임에 나가서 사진을 찍으면 집중이 잘 되세요?”

 “집중이요? 그게 그때마다 달라요. 음, 장소가 어디인지도 영향을 주지요. 주변 사람들 컨디션에 좌우될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같이 동행한 사람들이 기분이 좋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면 그게 사진에도 영향을 끼치던데요.”

 “그렇죠? 아무래도 모임이라는 게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돌아다니게 되니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할 순 없을 겁니다.”

 다시 주저하는 그. 그가 꺼내려는 이야기를 들어주려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가 편하게 뒷말을 이을 수 있도록.

 “사진 찍으러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요. 그렇다고 혼자 가기는 어째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말이죠. 흠, 흠.”

 설마, 나랑?

 “은정 씨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사진 찍으러 가실래요?”

 내가 진우 씨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조금 전까지 눈만 마주치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해놓고 이제는 아무리 쳐다봐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가면이라도 얼굴에 쓸 수 있기를 하는 바람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한데.”

 “뭔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이래 봬도 쉬운 여자에요.”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꺼내놓고 어리숙하게 웃었는데 그는 그 다음 말을 꺼내기 힘들어한다.

 “일몰과 일출을 찍었으면 하거든요.”

 “저도 일몰과 일출 장면 찍는 것 무지 좋아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일몰과 일출은 그 자체만으로 보기 좋아서 어떻게 대강 찍어도 웬만큼 필름값을 하는 작품이 나온다네요. 저는 좋아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그가 왜 주저했는지 그제야 감이 왔다. 일몰과 일출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사진을 찍으려면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그렇다면 진우 씨와 둘이서, 그, 그러니까, 일몰 때 맞춰 가서, 흠, 일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스케줄이 되겠지. 휴. 요, 약, 하, 자, 면, 그와 둘이서 밤을 보내고 돌아와야 한다. ‘밤을 보낸다.’ 왜 사람들은 밤을 보낸다고 하면 이상한 생각부터 할까? 밤이라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말란 법은 없는데. 하기야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나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까. 진우 씨가 멋쩍게 땅만 바라본다.

 “좋다고 하셨어요.”

 머릿속이 비어간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진우 씨를 알게 되면서 발생하게 된 큰 두 가지 문제. 첫 번째. 몸이 제 멋대로 용감해진다. 생각해볼 여유를 주지 않고 몸이 함부로 움직여서 사람을 아주 곤란하게 만든다. 두 번째. 언어구사능력이 현저히 줄어든다.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 말이 나오질 않는다. 침묵이 이어질 때 느끼게 되는 그 어색함이라니. 문장을 만들자, 만들어. 지금 이런 상황에서 폼 나게 거절하려면 어떤 말을 하면 되지? 아니 거절하고 싶은 거야? 그와 둘이서 야경 찍으러 가는 게 어때서? 사진 찍고 오는 거잖아? 왜 필요하지도 않은 걱정을 미리 해서 진우 씨가 힘들게 꺼낸 제의를 밀어내려 하지? 아,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잖아.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얼마나 무안하겠어. 얼른 입을 열라고.

 “음, 저는, 좋다고 한 건, 그러니까, 일몰과 일출이 좋고, 저는 좋은 사람이고, 지금 여기 있는 게 좋아서 말이죠.”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몸이 조금씩 들썩거린다. 슬금슬금, 또 용감해지려 한다. 이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들어 엄지척을 해버렸다. 그렇지, 역시나 첫 번째 문제,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다. 이쯤 되면 이제 거의 포기할 지경이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밤바람이 분다. 살 위로 소름이 돋는다. 아직 겨울은 제대로 다가오지 않았는데 밤공기가 이렇게 차다. 그 사람이 가만히 나를 본다. 반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완전히 드러날 때보다 여운을 가져서 그런지 얼핏 위엄을 가진 임금님 같다. 임금님? 이은정, 너 완전히 이성을 잃어가는구나. 그 사람이 살포시 내 엄지손가락을 감싸 준다. 숨이 턱, 막혔다.

 “방금 전 만져주셨던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나도 ‘만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할까? 어, 어? 그가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쥔 채로 손을 들어올린다. 그의 입술이 엄지손가락 끝에 닿는다. 갑자기 이런 순간, 생뚱맞게 마사지 공부할 때 읽었던 생물학 책 내용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의 손과 입술이 인체에서 감각 세포가 가장 많이 밀집된 곳이라고 했다. 그만큼 예민하다는 것.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위 두 곳이 부딪혔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나를 최대한 배려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손가락 위를 더듬는다. 그 나긋한 몸짓으로 혀가 손톱 위를 훑어가자 몸이 떨릴 만큼 저릿했다. 그만하라며 손가락을 빼고 싶은 마음과 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문득 진우 씨 앞에서 나의 이성과 상관없이 용감해지는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덜컹. 경찰서 문이 열리고 하나가 뛰쳐나온다. 상현 씨가 뒤에서 따라오더니 다급하게 하나의 팔을 붙잡는다.

 “하나 씨! 진정해요. 알았어요, 이제 그만 할 테니까 내 말 들어요. 다 끝낼게요. 이제 그만 한다구요.”

 하나의 얼굴 위로 눈물자국이 보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우 씨가 얼른 내 손을 내려놓는다. 나도 멋쩍어서 괜히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나가 소리 내어 운다. 그런 하나를 상현 씨가 뒤에서 안는다. 진우 씨가 걱정스런 안색으로 그들 곁으로 다가가서 괜찮냐며 묻는다. 나도 진우 씨를 따라가서 울고 있는 하나를 챙겨줘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이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진 것만 같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엄지손가락을 감싸 쥐던 그의 손. 손가락 끝에 닿던 그의 입술. 몸 전체로 퍼져나가던 전율. 하나를 챙겨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앞서는 건 방금 느꼈던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음미하며 간직하고 싶다는 것.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 동물인가 보다. 그 달콤함이 너무 간절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위한 마음마저도 밀어내게 하다니. 이 사람 정말 나쁘다. 나를 이렇게 못된 여자로 만든다. 그렇지만 손끝에 닿던 그의 입술은 다시 느껴보고 싶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듯이. 스스로 되물으면서. 정말 그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의 입술이 내 손에 닿긴 했을까? 나만의 상상은 아니었겠지? 겨우 발을 뗀다. 그렇게 다가가면서도 보이는 건 하나가 아니라 그의 등이다. 맨 처음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의 등. 사람의 감정은 이상하다. 그저 좋으면 좋던가 아니면 싫던가 해야 하는데 지금 그의 등을 바라보며 드는 감정은 하나가 아니다. 그가 무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를 간절히 원한다. 나한테 오지 않았으면 싶으면서도 빨리 달려왔으면 좋겠다. 그 등을 잡아당기고 싶은데 밀쳐야 할 것도 같다. 모르겠다. 이 사람, 정말 미스터리다. 그리고 내 마음은, 오답이 넘친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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