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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까마귀 혀
작가 : 아브락사스
작품등록일 : 2019.9.16

이 글은 고속도로에서 사는 까마귀(견인기사)들의 본성과 투쟁을 그린 것이다.

 
언제나 그 시간
작성일 : 19-09-21 17:32     조회 : 216     추천 : 0     분량 : 1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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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까마귀 07이 분기점에서 까마귀11을 다시 만난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와서 분기점에서 대기하다가 일죽까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분기점으로 왔다. 분기점에서 오창으로 이동한 뒤에 한 시간 대기하고 다시 진천으로 이동해서 삼십 분 대기하고. 그런 식으로 이동하다보면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대여섯 시간이 걸렸다.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이동과 대기를 하고 있다고 까마귀 07은 스스로 믿었다.

 

 까마귀의 베이스캠프 격인 간이휴게소에 들어서자 까마귀 11을 보자고 한 말이 생각났다. 까마귀 07은 조수석에 놓아둔 까만 봉지를 흘끔 쳐다보았다. 고속도로로 올라오기 전 마트에 들러 소주와 캔 맥주를 샀었다. 안주는 새우깡이 전부였다.

 

 레커에서 내린 까마귀 07은 간이 휴게소 구석에 서 있는 까마귀 11의 레커로 다가갔다.

 - 열하나, 벌써 불 끄고 자빠져 자냐!

 까마귀07은 11호 조수석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짐짓 농담조로 소리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차량통행도 뜸해진 새벽 시간이었다.

 - .......

 까마귀 11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운전석 위에 커피포터와 그것을 쌌던 보자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등받이 위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들이 걸쳐져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등받이 뒤에서 커피아줌마가 얼굴을 드러냈다. 까만 모자 틈으로 파마머리가 흘러내려와 있었고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광채가 났다. 하지만 쉰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나이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 아, 저리 비켜요. 내려가게.

 커피 아주머니가 내려오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열하나, 옷 입고 내 차로 와라. 술이나 한 잔 하자.

 까마귀 07이 문을 닫고 내려섰는데 커피아주머니가 보란 듯이 승용차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승용차 문이 열렸다. 커피아주머니는 승용차에 올라타기 전에 까마귀 07을 흘끔 뒤돌아봤다.

 

 - 우리가 여기 이 좁은 차 안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사고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때론 그런 생각하지. 어떤 놈이 사고 안 내나 하고. 그런다고 사고가 나! 우리가 죽으라고 빈다고 죽어! 아니지! 그냥 사고가 나는 거야. 인마.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우리는 그냥 운명일 뿐이야. 그냥 사는 거라고. 우리한테는 아무런 힘도 없어. 좆도.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게 현명한 거야.

 까마귀 07은 잔을 비우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까마귀 11에게 내밀었다. 소주를 반쯤 따르고 나머지는 맥주로 채웠다. 까마귀 11은 종이컵 전두리로 흘러내리는 거품을 핥다가 이내 단숨에 들이켰다. 까마귀 11은 새우깡 하나를 입에 문 채 까마귀 07에게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까마귀 07은 잔을 받아 입술만 적이고 콘슬 뚜껑 위에 내려놓았다.

 

 까마귀 11이 드러내놓고 힘들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활달해진 것 같은데 가만 보면 눈동자가 마르고 얼굴이 조금씩 건조해지는 게 보였다. 단순히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정신이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까마귀 07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까마귀 11이 잘 견뎌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자동차가 굴러 가고 있는 한 교통사고가 나게 되어 있어. 정해진 철로로 달리는 기차도 사고가 나는데 하물며 네 바퀴 자동차야 말해 뭐하겠냐. 사고 나고 죽고. 그러면 우리는 재빨리 가서 치워주는 거야. 레카 생활 좀 하다 보면 곧 사고가 날 것 같은 예감도 들고, 그래서 뒤따라 가보면 용케 사고가 날 때도 있지. 그때는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죄책감! 그런 건 책에나 나와 있는 거다. 따지고 보면 사고차를 달기 위해 쫒아가는 우리에겐 아무런 죄가 없어. 우리가 사고를 막을 방법도 없고. 다 운명일 뿐이야. 운명.......

 까마귀 07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운명론에 갇힌 사람이었던가, 생각하면서도 운명을 강조했다. 까마귀 11의 마음과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을지 모르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운명뿐인 것 같았다.

 

 - 승낙이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우린 그저 사고차를 달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했을 뿐이야. 좀 치열하긴 하지만 레카가 원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험하잖아. 우리도 언제 어떻게 무슨 일로 죽을지 몰라. 누구나 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라고. 며칠 전에도 목천에서 사고차 달겠다고 왔다 갔다 하는 레커기사를 달려오던 승용차가 그대로 받아버렸잖아. 못 본 거지. 승용차 기사는 무죄야. 그냥 달렸을 뿐이야. 견인 고리에 맞아서 대가리 깨져 죽은 레커기사도 있고. 이승낙의 죽음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일 뿐이야. 운명.

 까마귀 07은 다시 운명을 강조했다.

 

 - 우리 할머니가 그랬습니다. 개로 태어나면 짖고, 여우로 태어나면 우우 울고, 사슴으로 태어나면 쫒기고, 호랑이로 태어나면 포효 한다고. 팔자는 그런 거라서 바꿀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것도 자기 팔자소관이라는 거죠.

 - 그래. 이제 더는 승낙이 일로 괴로워마라. 잊어버려.

 까마귀 07은 마지막 잔을 비웠다.

 - 승낙이 그 새끼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 그래 너도 나도 이승낙은 이제 지워버리자. 마음에서 깨끗이........

 - 개새끼, 잘 죽었지.

 까마귀 11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빈 술잔을 핥았다.

 

 

 ***

 

 

 

 

 

 우리 애들이 사장님 얼굴은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 레커가 교통신호 다 지켜가며 일하기는 힘들잖아. 안 그래.

 회사까지 찾아온 교통계장이 소파에 기대앉아 껄껄거렸다. 고속도로 순찰대원 조밥을 통해 알게 된 교통계장이 마흔 명이 넘는 소속 의경들을 인사시키겠다며 까마귀 07을 회식자리에 초대한 것이다.

 

 딴은 그랬다. 시내에서 사고 신고를 받고 긴급출동을 하다보면 교통법규를 어기기 마련인데, 교통경찰이나 의경이 잡으면 사고차를 달 수 없었다. 레커라고 무슨 특례나 특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통이든 의경이든 잡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의경들과 안면을 트고 나면 보통 때도 신호위반이나 주정차위반 같은 가벼운 교통법규는 눈감아주었다. 긴급출동 땐 알아서 길을 터주고, 구난 혹은 견인해 갈 수 있도록 협조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신속하게 장애물을 치워주고 교통체증을 풀어주는 자연스런 협력관계로 비칠 테니 눈치 볼 것이 없었다.

 

 으레 그렇듯 수연은 금일봉을 준비해 일어서는 교통계장에게 내밀었다. 교통계장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서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환하게 웃었다. 수연도 활짝 웃어보였지만 올 때마다 번번이 그래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속이 쓰렸다.

 

 까마귀레커에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조밥 말고도 교통계 직원이라며 찾아온 사람만도 벌써 세 명이었다. 까마귀 07이 있든 없든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시간을 죽치고 갔다. 심지어 소파에 누워 자고 갈 때도 있었다. 시간 때우러 오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수연은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봉투를 챙겨줬다. 까마귀 07의 지시라서 안 할 수도 없었다. 매번 이러면 우리가 못 오잖아요. 혹은 뭐 이런 걸......., 라고 말 하면서도 그들은 아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못이기는 척 받아 넣는데 명수였다.

 

 그래서 수연은 그들을 박명수 김명수 이명수 최명수 이런 식으로 구분해 불렀다. 어제 명수 왔다갔어. 수연이 애매하게 말하면 까마귀 07이 박 명수! 라고 짐작 가는대로 물었다. 아니 이명수. 수연이 대답하면 누가 왔다갔는지 까마귀 07이 알아챘다.

 

 - 명수들은 그렇다 치지만 세무공무원한테도 봉투를 챙겨줘야 해! 담당이 되었으면 된 거지 공무원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인사는 왜 하는데! 숫제 대놓고 수금 다니는 거지. 그리고 개인택시조합장한테까지도 봉투를 챙겨줘야만 하는 거야! 형부 아는 사람 말고 개인택시한테 연락 받는 건 아직 하나도 없어. 이 사람 저사람 다 퍼주고 우린 뭐 먹고 살아! 직원들 월급도 제 때 못 주는 형편인데.

 월급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자기 엄마한테 빌려다가 봉투를 만들어온 수연은 까마귀 07에게 대놓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 나라고 좋기야 하겠냐. 레커회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어. 세상이 다 그런 걸 어쩌겠냐.

 까마귀 07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 우린 뺐긴 거만큼 더 받으면 돼.

 까마귀 07의 환수 방법 또한 그럴 듯하게 들렸다.

 - 일이 있어야 더 받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기름 값은 어디서 나와! 삼광주유소에서 결제 해달라고 몇 번이나 전화 왔어. 이번 달에 결제 안 해주면 레커차고 승용차고 기름 안 넣어준데. 정말로 기름 안 넣어주면 어떻게 해. 승용차야 안 타면 그만이지만 레커차를 세워놓을 수는 없잖아.

 사고차는커녕 고장차도 잡지 못하고 공치는 날이 허다하다보니 까마귀 07의 말이 공허할 뿐이었다.

 

 - 수연아, 겨울까지만 버티자. 그때 가면 뿌린 만큼 거두겠지. 레커는 겨울이 대목이란다. 빙판지고 눈이 쏟아지면 사고차를 이삭 줍듯이 줍고 다닌단다.

 - 삼광주유소에다 겨울까지 기다려 달랄 수는 없잖아. 그 사람들이 기다려주지도 않을 테고.

 - 엄마한테 부탁해봐. 겨울엔 꼭 갚는다고.

 수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한테 계 들어 1번으로 타다 쓰고도 몇 달째 곗돈을 안 냈다. 계주인 엄마가 곗돈을 물어넣고 있는데 무슨 염치로 또다시 돈 부탁을 하나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수연도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몰랐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시간 혹은 되돌릴 기회가 될 겨울을........

 

 ***

 

 

 

 

 

 

 까마귀 07은 레커차가 아닌 소나타에 올라탔다. 모처럼 만이었다. 하지만 시동을 켜놓고 잠시 망설였다. 회식장소로 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그는 재래시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차피 회식장소로 가는 길에 있었다. 한 번 간다간다 하면서도 걸음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이들 얼굴도 좀 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 눈치도 좀 살펴보고 싶었다.

 적신호를 받고 교차로에 서 있는데 의경이 재래시장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게 보였다. 주정차단속 중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재래시장 앞이 한산했다.

 

 - 이곳에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까마귀 07이 재래시장 입구로 진입하자 의경이 다가왔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 안 되긴 뭐가 안 돼, 인마.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그는 시동을 끄고 내리면서 장난처럼 웃었다. 아버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순대집 사장과 재래시장 터줏대감인 잡화점 사장이 가게 앞에 서서 까마귀 07을 지켜보고 있었다. 까마귀 07은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친구들이니 그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의경이 단호하게 그러나 자신감 없는 얼굴로 까마귀 07을 쳐다봤다. 의경은 법보다 건달을 더 두려워할 나이였다.

 - 너희들 조금 있다가 회식 있지! 몰라! 나도 금방 볼일 보고 나와서 거기로 갈 거야.

 까마귀 07은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쭐해진 얼굴로 방앗간을 향해 걸음을 뗐다. 당국에서는 교통 혼잡을 핑계로 의경을 상주시키고 주차단속을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주차단속을 못 마땅해 했다. 주차에 불편을 느낀 손님들이 그냥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입구에서 장사를 하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기분 좋은 웃음을 띠고 까마귀 07을 바라봤다.

 

 - 금방 갔다 올 거니까 형 차나 잘 지키고 있어.

 까마귀 07은 아버지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어색해서 의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능청을 떨었다.

 - .......

 의경은 어떤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까마귀 07의 아버지는 방앗간 맞은편 선술집 앞 평상에 앉아서 비슷한 연배의 시장 사람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실패자인 아버지는 벌써 술이 취해 눈빛은 흐리멍덩했고 목소리는 쓸데없이 컸다.

 김대중 선생이 간첩이라면 노벨평화상 후보로 뽑았겠어. 우리나라 실정은 우리나라 밖에서 봐야 객관적으로 보인다고. 김대중 선생을 간첩으로 만든 것은 독재정권의 악랄한 조작이란 말이야. 그놈들이야 말로 정권을 찬탈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들한테 총부리를 겨누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는데, 그놈들 말을 믿으면 되겠어! 김대중 선생이야말로 민주화의 산 증인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큰아들이 꾸벅 인사를 해도 본척만척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까마귀 07에게 아버지는 독재자에 독설가였을 뿐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환해서 책을 엎어놓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서 달을 올려다보던 그는 근질근질한 몸을 풀려고 허공을 향해 발차기를 하다가 실수로 화분을 넘어트렸다. 퍽, 소리가 제법 컸다.

 자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저 씹어 먹을 놈의 새끼, 라며 낮고 날카롭게 으르렁댔다. 처자빠져 자지 않고, 한밤중에 나와서 무슨 지랄염병이냐.

 어둠으로 가득 찬 안방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야수의 울음처럼 질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목덜미를 물리고 말 것 같은.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의 발자국 소리에 이미 화가 나 있었을지 모른다. 숨죽이며 노를 저어 마침내 어느 이름 모를 해변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는데 소동을 피웠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저 씹어 먹을 새끼가. 문득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그날 밤의 어둠. 칠흑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 어머니를 때리는 끈적끈적한 파도소리.

 사람이 그렇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슬퍼해야할지 아니면 다행스러워해야 할지.

 거기에 비해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신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버지가 시장 사람들과 어울려 맥주나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어머니는 혼자서 깨를 볶고 기름을 짜고 고추방아기계를 돌렸다. 동생이 군에서 제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앗간 일은 대부분 어머니 몫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얼마 전 군에서 제대한 동생이 착유기에 넣을 참깨를 볶고 있었다. 볶음 솥에서 참깨를 조금 집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으깨 잘 볶아졌는지 살펴보던 동생이 까마귀 07에게 미소를 지었다.

 동생의 머리는 아직도 군인처럼 짧았다.

 

 모처럼 동생의 얼굴을 보자 휴가 나왔을 때 함께 밥 먹고 노래방에 갔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수연도 함께 있었는데 둘은 동갑네기여서 인지 금방 친해졌다.

 수연은 동생과 함께 브루스를 추며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깔깔대고 웃었다. 누가 먼저 춤을 추자고 손을 내밀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손을 먼저 놓은 것은 동생이었다. 수연이가 깔깔대고 웃자 동생은 머리를 긁으며 손을 놓았고 다시 노래를 선곡했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 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수연은 노래 중간에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서로 어색해 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까마귀 07은 했었다. 아무런 질투심도 없이.

 

 - 어머니 저 왔어요.

 까마귀 07이 방앗간 안쪽에 있는 수돗가로 가서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 밥은 챙겨먹고 다니냐?

 쪼그려 앉아 들깨를 씻고 있던 어머니가 까마귀 07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 요새 밥 못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 없어서 못 먹냐. 있어도 챙겨 먹을 정신이 없으니까 그렇지.

 - 수연이가 잘 챙겨줘요.

 - 바쁜데 여긴 뭐 하러 와.

 어머니는 수연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걸리는 얼굴이었다.

 애가 둘인데다 아내까지 있는 사람이 시집도 안 간 어린 처녀 데려다 놓고 사는 꼴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던 탓이었다. 게다가 수연네 집에는 총각 행세를 하는 모양이어서 더욱 그랬다.

 

 - 자주 들러야 되는데....... 애들만 맡겨놓고 죄송해요. 겨울 되면 집 얻어서 애들 데려 갈게요. 힘들어도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 애들 데려가려고 애쓰지 말고 너나 잘 살아라.

 - 데려 가야죠. 어머니가 무슨 죄에요.

 - 부모는 다 죄인이다.

 - ........

 - 그리고 참, 엊그제 큰외삼촌이 다녀갔다. 말은 볼일 보러 왔다가 들렀다고 했지만 일부러 다니러 온 것 같더구나. 산 팔아먹지 않게 너를 잘 타일러 놓으라고 그러기에 싫은 소리 좀 했다. 중필이가 어떤 앤데 그까짓 산 가지고 애를 의심 하느냐고. 부모가 잘못 돼서 대학 중퇴했는데, 그렇다고 애를 그렇게 얕보면 되는 거냐고. 그럴 거면 뭐 하러 중필이 앞으로 명의를 했냐고. 괜히 애 의심하지 말고 얼른 파가라고 했더니 농담이었다고 하더라만 엄마는 기분이 나빴다.

 - 어머니도 참, 외삼촌이 그 땅을 좀 어렵게 찾았어요. 십 년 동안 재판해서 찾은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지 별 다른 뜻은 없을 거예요.

 까마귀 07이 말했다.

 - 하긴 외삼촌이 처음부터 너 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서 너한테 해놓는 거라고 그러긴 했다. 너를 믿으면서도 불안한 거겠지. 외할아버지가 모아 놓은 그 많던 재산을 다 도둑맞았는데 겨우 산 하나밖에 못 찾았으니........ 군산 사람치고 네 외할아버지 땅을 안 밟고 산 사람이 없고, 없는 사람이든 있는 사람이든 네 외할아버지 덕을 안 본 사람이 없었다.

 아들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고 어머니는 안 하던 이야길 다 했다. 드문 일이었다.

 

 외할아버지가 헌신적으로 의술을 베풀어 왔다는 것.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토지와 여러 개의 정미소, 크고 작은 선박 등등을 지닌 군산 갑부였다는 것. 어머니한테는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오던 소리였다. 밤낮없이 헌신을 하고도 그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마저 쉰을 넘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으니 그 해답은 영영 알 길이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찍은 유일한 사진 속의 외할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전설이 실제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까마귀 07에게 외할아버지는 그냥 신화나 전설일 뿐이었다.

 

 - 네 아버지도 다 죽은 사람한테 주사 한 번 잘못 놔주는 바람에 징역까지 살았지만 우리는 근본이 있는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인정에 못 이겨 왕진까지 가서 심한 하혈로 이미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산모에게 주사를 놓은 것이 잘못 돼서 징역 살았다는 말은 어머니에게 종종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을 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이기도 한 한 남자가 그렇게 형편없는 족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몰랐다.

 - 알아요. 어머니, 제 걱정은 마세요.

 - .......

 - 어머니, 말 나온 김에 산 팔아서 호강 한 번 할까요!

 까마귀 07이 농담을 던졌다.

 - 쓸데없이,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마라. 괜한 오해 산다. 그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신 산인데 네가 팔아먹을 자신 있냐!

 - 어머니, 저를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 내가 너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냐. 세상없어도 너만은 믿는다.

 어머니는 채에 받쳐진 들깨를 다른 함지박에 다시 쏟아 부었다. 막 들깨를 건진 함지박에는 흙이 한 바가지나 들어 있었다.

 - 한 말 사서 세 되 덜어 씻었는데 흙이 이렇게 많이 나오니....... 무게를 늘이려고 이렇게 흙을 집어넣는 거란다.

 어머니는 함지박 밑에 가라앉은 흙을 수돗물로 헹궈냈다.

 어느 새 다가와 있던 아버지는 취중인데도 모자지간의 대화를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했다. 아버지도 아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큰딸 지혜는 방앗간 옆 쪽방에서 동갑내기 보리밥집 딸과 소꿉놀이를 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지혜는 고개만 돌려 까마귀 07을 힐끔 쳐다보고는 그만이었다. 아빠! 작은 딸 지현이가 까마귀 07을 발견하고 방에서 뛰어나왔다. 하지만 한 발짝을 남겨놓고 아빠 앞에 멈춰 서서 손가락을 깨물었다. 까마귀 07이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제야 지현이가 까마귀 11의 다리에 매달렸다.

 

 큰딸 지혜보다는 지현이가 엄마 없는 설움과 외로움을 많이 탔다. 지혜는 젖도 떼기 전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란데다 딸을 키우는 게 소원이었던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부모가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쾌활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섯 살에 난생처음 엄마 품에서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게 된 지혜는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어 있었고 외로워 보였다.

 - ........

 까마귀 07은 지현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까마귀 07의 아버지가 운영해 오던 하양양말주식회사가 부도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낯선 도시로 야반도주해 정착 할 때까지 아직 누구도 지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인 까마귀 07조차도.

 

 양복에 흰 양말을 신는 것은 패션에 무지한 탓입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어느 패션디자이너의 말 한마디에 아버지가 시장에 내놓았던 흰 양말이 트럭에 실려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하얀 양말 생산만을 고집했다. 머지않아 다시 하얀 양말이 팔릴 거라고 아버지는 굳게 믿고 버텼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부도수표뿐이었다.

 

 최종적으로 부도가 났던 그날 밤 늦게 야반도주를 앞두고 가족회의가 열렸다. 어디로 갈지, 가면 어떻게 살지. 평소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가족회의 중에도 지혜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갖은 애교를 피우며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천방지축인 까마귀 07의 큰딸, 지혜는 부모님이 데려 가기로 했다. 지혜 엄마의 지병이 도져서 병구완 받으러 친정에 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혜를 데려갈 수밖에 없기도 했다.

 

 사실 아내의 지병 탓에 까마귀 07 부부는 함께 산 날보다 헤어져 지내는 때가 더 많았다.

 맨 처음 남영동 대입학원에서 재수생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스무 살 언저리의 그녀는 밝고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다. 까마귀 07보다는 두어 살 많았지만 오히려 두어 살 더 어려 보일만큼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이었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너무 명랑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다 말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가 덜컥 임신이 되었는데 낙태하지 않겠다고 버틴 탓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대학생인 부부에겐 경제력이 전혀 없었다. 아내는 시댁에 머물면서 시집살이와 양육을, 남편은 부모의 지원을 받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지혜가 돌이 되기 전 아내의 병이 처음 도졌다. 까마귀 07은 아내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 아니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출석일수가 모자라 유급을 할 정도였다는 아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사랑, 혹은 욕망에 눈이 멀었던 탓이었다.

 

 가족은, 특히 그의 아버지는 까마귀 07에게 이혼을 강권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자취방으로 아내를 데려왔다. 생후 8개월밖에 안 된 지혜는 부모에게 맡겨둔 채.

 

 부모의 지원이 끊기자 그는 스스로 돈벌이에 나섰다. 동대문에 가서 학생증을 맡기고 양말, 칫솔 따위를 받아와 상가와 가정집을 돌며 팔았다. 어깨에 둘러메고 다니던 크고 묵직한 가방이 가벼워졌을 때는 이미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재래시장에 들러 아내에게 구워줄 고등어 한 마리와 김치찌개에 넣을 돼지고기 반근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행상 아르바이트로는 겨우 입에 풀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신문지국에 들어가서야 방세와 쌀값을 벌 수 있었고, 그나마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희망도 미래도 없는 파국 상태였다.

 꿈속에서 아가 아프더라. 어떻게 알았는지 장인이 아내를 데리러 왔다. 지쳐있던 까마귀 07은 순순히 아내를 장인 손에 보냈다.

 

 아내를 보내 놓고 혼자 집으로 갔다. 아직 채 두 돌도 안 된 지혜가 저만치서부터 아빠를 알아보고 깡충깡충 뛰며 반가워했다. 그의 어머니는 젖먹이 때 떨어졌는데도 무정한 애비를 알아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패션디자이너의 말 한마디로 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복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직격탄을 맞은 양말 공장에서 멈춰선 기계들을 청소하고 기름을 치거나 반품으로 되돌아온 산더미 같은 하얀 양말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도 언젠가 다시 하양 양말을 생산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정말이지 패션디자이너 말 한 마디로 대한민국 남자들 모두가 하얀 양말을 벗어던질 줄은 몰랐다. 심지어 트레이닝을 입더라도 하양 양말 대신 유색 양말만 고집했고 차츰 고착화 되어버리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쩌다 아버지 몰래 대구까지 가서 아내를 보고 오곤 했다.

 바람을 쐬어준다는 핑계로 처가에서 아내를 데리고 나와 여관에 가서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시켰다. 아내를 씻겨 주기만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던 자신의 욕망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자 차츰 마음도 멀어져 아내를 찾는 일이 뜸해졌다. 먹고사는 일이 힘들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야반도주 끝에 이 도시로 도망 와 숨어 살고 있는데 병이 나은 아내로부터 소식이 왔다. 둘째 지현이가 벌써 세 살이 넘었을 때였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내와 지현이를 이 도시로 데려왔다. 운전면허를 따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생활은 꾸려 갈 수 있었던 것이다.

 

 - 외삼촌한테 네가 사업한다는 소리는 안 했으니 그리 알아라. 그러잖아도 소심해 터져서 좌불안석인데 사서 걱정하다가 지레 병날까봐 겁난다.

 애들한테 지폐를 나눠주고 방앗간을 나오는데 어머니가 등 뒤에 대고 일러주었다. 지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소꿉놀이에 열중하고 있고 지현이는 서운하고 섭섭한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잘하셨어요, 어머니.

 까마귀 07은 고개를 돌리고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들깨를 옮기느라 흡족해 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까마귀 07에게 손을 흔들어 준 건 지현이었다. 지현은 방앗간 앞 길목까지 나와서 까마귀 07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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