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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여명(黎明)의 숲
작가 : 마산바다
작품등록일 : 2016.9.24

진실이란 무엇일까? 있기나 한 걸까? 사실을 많이 모으면 그많큼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칼라사진이 흑백사진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 진실을 찾기 어렵다면, 진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진실이나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마음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둔 징검다리나 사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명예욕이 빚어낸 욕망의 숲을 만내게 되고, 진실의 상대성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혼란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과정을 그린 액자소설 구성의 미스테리소설.

 
어둠 속에서 (1)
작성일 : 16-10-01 16:09     조회 : 673     추천 : 0     분량 : 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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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떠 있었다.

 

 ... ...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남원군 은지면 석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누이가 둘 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하는 부잣집이었다.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어릴적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어머니 권씨는 함양 태생으로 ‘함양댁’이라 불렸다.

 1956년에는 은지초등학교를, 1959년에는 은지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고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입학 시험이 가까워 오자 강주열은 1960년 초에 서울로 올라가 YMCA 고교 입시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다가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당시 아버지의 병환으로 급격하게 가계가 기울어 학비가 무료인 철도고등학교에 응시한 것인데 낙방한 것이다. 이무렵 형 강은열의 친구로 평소 많이 따르던 하영웅이 '기우는 가계를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권유에 설득되어, 마산상고에 응시한 것이다.

 김주열은 마산상고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왔다가 합격자 발표를 보기위해 형 김은열과 함께 마산으로 갔다. 발표일은 3월 14일로 공시되었으나 3·15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를 16일로 연기하였다. 김주열이 3·15선거 당시 마산에 남아 있었던 연유다.

 김주열은 3월 15일 하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15일날 남원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는데, 첫차를 타지 못하면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기 때문에 다음날인 16일 첫차를 탈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과 비리,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3인조, 5인조 방법은 물론 사전 투표와 선거 통지표 가려 주기 등 모든 부정과 비리가 동원되었다.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야당이었던 민주당 당원이었다.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 김주열과 김광열에게 난리가 났다고 전해준다. 이에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두 형제 중 김주열이 돌아오지 않아 행방 불명 처리되었다. 강주열이 사망한 장소는 5.16이후 행해진 혁명재판을 통해 박상표이 지휘한 직격 최루탄에 맞고 시청 앞 100미터 지점 도로상으로 나왔으나, 현재 3.15병원자리에 있던 남전(남조선전기 마산지점)앞 도로상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에, 어머니 김씨가 마산으로 달려가 준열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했다. 언론사에 호소하고,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수소문하였고, 마산시청 뒤 우물에 김주열의 시신을 버렸다는 소문이 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양수기로 물을 퍼올리기도 하는 등 주열은 마산사람들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3월16일 이후 25일간 주열을 미친듯이 찾아헤매던 어머니는 미루어 두었던 집안일을 처리하려고 4월 11일 고향 남원의 첫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어머니가 귀향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 11시경에 마산의 중앙 부두에 미국제 최류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오르고, 이 주검이 강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 좌익 폭등으로 내몰려 공포 속에서 침묵하던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4월혁명의 봉화, 마산의 2차 의거가 시작된 것이다.

 4월 11일 마산 2차 의거는 부산, 광주 등지로 퍼져나갔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정치 깡패들이 이 시위대를 급습해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4월 19일 서울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4·19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4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4월 11일 시신 인양으로 4·19혁명을 이끌어낸 강주열은 4월 14일 고향 선산인 농원시 은지면 운비산 자락에 묻혔으며, 1995년 4월 11일 마산상고에서는 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강주열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근현대인물사전전)

 

 여러 번 읽어본 기초자료였지만,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다. 온라인 상에서는 나름대로 권위있는 사전으로 평판이 있는 사이트라고는 하지만, 내려오기 전 살펴 본 당시의 신문기사, 국회진상조사단기록, 5.16 이후의 혁명재판 공판기록과 다른 것이 어림잡아 보아도 열개는 되어 보였다. 무엇보다 사망장소가 확실치가 않다. 김주열이 시청앞 100m 지점에 있었다면 시위 최전방 시위대 속에 있었던 것이 되고, 남전 앞에서 사망했다면 최전방이 아니라 시위대 중간에 있었던 것이 된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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