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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여행의 목적
작가 : 랑글렛
작품등록일 : 2019.9.2

임도훈. 33세. 직장을 잃고 소일거리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 어느날 명품 브랜드 지사장의 불륜여행을 대신해 3박 4일 하와이 위장여행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여자, 지성을 보고 반하게 된다.

유지성. 31세. G랜드 그룹의 임원이자 백화점 사장. 세한그룹의 임원과 약혼 뒤 쇼윈도 부부로 지내던 중, 원치 않는 결혼을 하면서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한 남자. 도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3박 4일 하와이 여행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의 시작. 그 이후의 이야기.

 
11화. 모든 것이 제자리로
작성일 : 19-09-15 14:51     조회 : 204     추천 : 0     분량 : 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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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국장에 도착한 지성은 멍하니 서서 해진을 기다렸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짐을 챙기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머릿속은 온통 도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조금 후에 해진이 나타났음에도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서있었다.

 

 “유지성씨?”

 

 해진이 멍 때리고 서있는 지성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해진을 향해 돌아섰다.

 

 “아, 네…….”

 

 그녀는 해진을 보고서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온 정신을 딴 데 집중하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가기 전에, 반지 착용해야하지 않을까요?”

 

 원래라면 그녀가 먼저 말했을 것을 해진이 말했다. 그녀는 주섬주섬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끼웠다. 이안이 선물한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빼야할까. 그녀는 망설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빼야한다면 의미 없는 결혼반지를 빼내버리고 싶었다.

 

 *

 

 그들은 먼저 지성의 부모가 있는 외가로 향했다. 순서상 본가에 먼저 들리는 게 맞았지만 해진의 부모는 해외로 출장 중이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서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가짜 일정을 꾸렸다. 지성은 해진에게 부모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를 미리 일러두었다. 짜인 시나리오대로만 하면 어떤 불편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이 저택에 도착했다. 지성의 어머니 세진이 밖으로 나와서 그들을 반겼다.

 

 “여행 갔다 오더니 안색이 더 좋아졌네?”

 

 세진은 특유의 가식적 웃음을 흘리며 해진을 영접했다. 해진 또한 남편다운 자세를 유지하며 반응했다.

 

 “잘 갔다 왔니?”

 

 “네,”

 

 세진의 말에 그녀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진은 그녀에게 그 이상 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아버지이자 G랜드 그룹의 총수인 유회장이 현관으로 다가와 얼굴을 비췄다. 그는 해진에게 안부를 물으며 살갑게 대했다. 지성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세진이 과일 따위를 내왔다.

 

 “여행은 괜찮았고?”

 

 “예, 좋았습니다.”

 

 “특별한 소식 있나?”

 

 유회장의 물음에 해진이 그녀의 눈치를 봤다. 특별한 소식은 임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대사를 읊었다.

 

 “제가 몸이 안 좋았어요.”

 

 그녀의 말에 유회장은 못마땅한 듯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거기까지 가서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유회장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분위기가 험해지기 직전, 해진이 나머지 시나리오를 읽었다.

 

 “둘째 날까진 알차게 보냈습니다. 여기저기 관광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마지막 날에 이 사람이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쉬었을 뿐입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해진의 해명에도 유회장의 표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밑으로 내리깔았다.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 무서웠다. 그가 화가 나 있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버지지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언제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그에 대해 불평할 수는 없었다. 그게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최태호 그놈은 잘 만났나?”

 

 유회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도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최태호가 아니었다.

 

 “네. 이미 협의는 끝난 사항이기 때문에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뭐, 어차피 계약은 기업 간에 하는 거니까 상관없지만, 지사장이라는 놈이 그런 사고를 쳤으니, 원.”

 

 유회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최태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일인지에 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침 해진이 그에게 물었다.

 

 “출국하는 길에 사진이 찍혔는데, 하필 이 놈이 연예인 유부녀를 건들었지 뭐야. 파견직 지사장인데다가 워낙 브랜드 가치가 중요한 기업이니까, 아마 퇴사하는 식으로 조치가 나올 것 같네.”

 

 그녀는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해진의 휴대폰을 곁눈질 했다. ‘최태호’라고 이름을 검색하자 많은 양의 기사가 쏟아졌다. 선글라스를 쓴 연예인 H와 손을 맞잡은 채 공항 밖에 서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최태호는 당연히 그녀가 알 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네요. 이쪽 사정이 저희한테 피해만 가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우리가 피해볼게 뭐가 있겠나. 하여튼 젊은 놈들은 문제야.”

 

 그녀는 최태호의 이른바 ‘불륜 행각’을 두고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삼일 동안 최태호라고 여겼던 인물이 실은 진짜 최태호가 아니어서 기뻐야 할지, 슬퍼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팔찌 예쁘네? 어디서 산거야?”

 

 세진이 그녀의 팔목에 걸려있는 팔찌를 보고서 말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소매를 내려 감췄다.

 

 “해진 씨가 선물해줬어요.”

 

 옆에 있던 해진이 당황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의 눈을 피했다.

 

 “아…… 지나가던 길에 괜찮은 가게가 있기에, 들어가서 구입했습니다. 개인이 영업하는 곳이라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수공예인가보네? 예쁘다…… 나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죄송합니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음번에 꼭 선물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하는 소리야. 바쁜데 뭘 그런 거까지 신경을 써.”

 

 지성의 부모님과 해진의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지성은 그런 가식적인 대화에 진절머리가 났다. 보통은 참고 들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저는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쉬도록 할게요.”

 

 지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황한 해진이 그녀를 따라 같이 일어섰다.

 

 “장모님, 죄송한데 이 사람이 몸이 안 좋아서 집에 가서 휴식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세진이 그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아랑곳 않고 현관으로 이동했다. 해진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편하지 않을 것이었다. 후환이 두렵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지성이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세진이 잡아 세웠다. 그리고 나서 따로 빈방으로 데려갔다. 지성은 무표정하게 세진을 쳐다봤다. 세진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임신은?”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죠.”

 

 “너 몸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지? 늦을수록 안 좋으니까 빨리 해결지어.”

 

 지성은 거의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임신도 임신인데, 중요한 건 아들이어야 해.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 너희 아버지 홧병 나는 거 보기 싫으면.”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납득이 되지 않는 요구를 하고는 했다. 첫 번 째는 그녀가 어렸을 적,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되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분명히 농담이었지만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그룹의 후계자를 여자가 이어받는 다는 것을 염려해서 나온 말이었으리라. 두 번째는 그녀의 결혼이었다. 지금, 해진과 함께 식을 올린 이 정략결혼을 주선한 게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평소랑 많이 다르네요. 힘들어 보이는 데, 각자 집으로 가서 쉬는 걸로 하죠.”

 

 밖으로 나온 해진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들은 김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다시 올라탔다. 해진은 가는 길에 내려서 다른 차를 타겠다고 말했다. 아마 내연녀와 같이 사는 집으로 갈 것이 뻔했다. 해진이 내린 후, 차는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 그와 함께한 3일 동안 생각나지 않았던 담배가 몹시도 고팠다. 한 모금을 깊게 빨아서 내뱉었다. 몸 깊숙이 편안함이 느껴졌다. 다시 입에 물려고 하는 데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루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추억 돋는다! 한국에서도 잘 지내길 바라!”

 “Remember! I wish you all the best in Korea!"”

 

 메시지에 뒤이어 여러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술집에서 잔뜩 취한 채 그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는 사진, 이안의 별장에서 파티를 하던 중 찍은 사진, 언제 찍었는지 모를 그와 그녀가 소파에 앉아 껴안고 있는 사진 등이었다. 그녀는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오래전일인 것도 아닌데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답장 없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 지금 당장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가 너무나 그리워졌기 때문이었다.

 

 

 *

 

 

 도훈은 결재 서류를 들고서 최태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오는 길에 연예인 H의 불륜사건에 대한 떠들썩한 기사를 접한 후였다. 그는 기사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지성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기사를 봤다면, 그가 실제 최태호가 아니란 것은 당연히 알 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한 남자에게 철저히 속았다는 것에 화가 났을까, 그래도 좋은 추억이었다고 위안삼아 넘겼을까. 이러나저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최태호 대표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최태호 대표님은 오늘 아침 퇴사하셨습니다.”

 

 그가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묻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스캔들의 영향이 있으리라고 미리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빠른 조치가 취해졌을 줄이야.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반드시 전해드려야 할 게 있는데요…… 받아야 할 것도 있고요.”

 

 그는 일부러 직원을 향해 결재 서류를 보이게 들었다. 그러자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분 후 공항에서 최태호를 만날 때 보았던 덩치 큰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가만히 있어도 위협적일 듯한 신체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자는 그에게서 빼앗듯이 결재 서류를 가져갔다. 그리고선 무심하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는 곧바로 봉투 안을 확인했다.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최태호가 약속한 금액은 오백만 원이었다.

 

 “카드도 주시죠.”

 

 그는 고분고분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근데…… 약속한 금액이 아닌데요.”

 

 그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키 마저 장신이었던 지라, 얼굴을 쳐다보려면 고개를 거의 수직으로 꺾어야 했다.

 

 “약속된 금액이 맞습니다.”

 

 남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그때 말씀하시길 오백만 원을 주기로 했었습니다.”

 

 “전해들은 바 없습니다. 컴플레인은 최태호씨게 직접 하시길 바랍니다.”

 

 맙소사. 남자는 퇴사했다는 최태호를 이미 자신과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소름이 끼쳤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네…… 알겠습니다.”

 

 남자의 근엄한 표정은 이미 그에게 어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별다른 대응도 불평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에게 환상을 안겨주었던 블랙카드도 떠나갔고, 남은 것은 원래 그가 받기로 했던 금액에 훨씬 못 미치는 백만 원이 전부였다. 그의 친구와 조카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돈 다발을 내밀려 했던 계획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

 

 “삼촌!”

 

 “야!, 왔냐? 새끼 얼굴 탄 거 봐라?”

 

 도훈은 그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 옥상으로 올라갔다. 평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찬혁과 성식이 그를 요란스럽게 반겼다. 그는 찬혁을 한 번 꽉 끌어안고 나서 평상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왜 그래? 신나게 놀다온 거 아니야?”

 

 그는 성식이 먹다 남긴 맥주 캔을 들어 남은 양을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삼촌, 선물은?”

 

 찬혁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찬혁아…… 미안하다…… 삼촌이 시간이 없었어.”

 

 그는 엎드리며 얼굴을 가렸다.

 

 “선물도 없고, 기분은 안 좋아 보이고. 돈은…… 제대로 받은 거 맞지?”

 

 도훈은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댄 채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성식이 얼른 봉투 안을 확인했다. 돈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오백이라고 안했어? 너 또 당했냐?”

 

 “아…… 모르겠다.”

 

 그가 얼굴을 감싼 채 신음을 냈다. 찬혁이 낯익은 상황인 듯 주섬주섬 장난감을 바구니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니 팔자다. 팔자가 그냥 돈 못 받을 팔자인거야. 야, 그냥 좋게 생각해. 백만 원이라도 받은 게 어디냐?”

 

 성식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치며 다독였다. 성식은 돈 봉투를 자신의 바지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이건 밀린 월세로 내가 가져간다.”

 

 “그래, 그래. 가져가라, 가져가.”

 

 그가 돌아 누우며 맥주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렸다. 성식이 분위기를 감지한 듯 찬혁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찬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장난감 바구니를 들고 계단으로 갔다.

 

 “너 CRO 임원인지 뭔지 가이드 하러 갔다고 했지? 아까 아침에 거기 사장이랑 연예인이랑 스캔들 나서 난리 났던데. 그거랑 상관있는 거야?”

 

 “최태호? 내가 그 놈 뒤치다꺼리 하러 간 거다.”

 

 성식이 빈정거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련하겠어. 난 바로 예상했다. 넌 원래 재수가 없는 놈이니까.”

 

 성식이 자꾸 놀리듯이 말을 하자 그는 신경질이 났다. 사실 돈을 덜 받은 것에는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여행의 후유증, 짧은 사랑의 후유증으로 인해 몹시 우울해졌을 뿐이었다.

 

 “그만해라. 기분 안 좋으니까.”

 

 “너 돈도 제대로 안 주는 그 여행사에서 일할 때 내가 말했잖아. 절대 밀린 월급 다 못 받으니까 그냥 빨리 나오라고. 근데 니가 고집부리고 계속 버티다가 어떻게 됐냐? 사장은 돈 들고튀고, 고객들은 죄 없는 너한테 와서 지랄하고. 계약처리도 제대로 안 해놔서 경력입증도 애먹고. 그것만 있나? 그 이후로 이런저런 잡일하면서도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일한 게 한두 번이냐? 넌 그냥 돈이랑 인연이 없는 거야.”

 

 성식은 멈추지 않고 주저리 떠들어댔다.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보니 대응할 가치고 없는 잔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밤하늘을 멀거니 쳐다봤다. 첫날엔 그녀와 나란히 누워서 불꽃놀이를 바라봤었지……. 그는 추억함과 동기에 망연자실했다. 성식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옆으로 와서 누웠다.

 

 “이제 뭐할 거냐? 면접, 알바 반복이냐?”

 

 “별 수 있나. 그게 인생이지.”

 

 “맥주 더 줘?”

 

 “그래……. 오늘은 좀 취하자.”

 

 그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성식이 그에게 새 캔 맥주를 건넸다. 그는 뚜껑을 딴 맥주를 쭉 들이켰다.

 

 *

 

 찬혁이 자고 있는 방, 그는 어둠 속에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같이 일자리 구직 사이트를 뒤지며 마땅한 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좋은 일자리는 면접과 스펙에서 완전히 밀리고, 변변찮은 곳은 봉급이 너무 낮았다. 제법 괜찮은 곳을 찾아 경력직으로 지원을 넣어도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가 희망하는 여행업은 업계 자체가 불황에 처해있었다. 간편한 어플의 등장으로 굳이 여행사를 들러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경제 불황으로 결혼 인구가 대폭 줄어들며 허니문 전문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여행 인구는 증가했는데, 고객 수는 오히려 감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는 골머리를 앓으며 머리를 감쌌다. 꼭 여행업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일자리면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이미 필연적으로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는 잠시, 보던 창을 내려놓고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 파일을 클릭했다. 루시가 보내 준 사진이었다. 지성이 취해서 그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멀거니 사진을 응시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뭘 하고 있을까. 그녀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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