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7가지 덕목이 무엇인가.
-용기(courage).
기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자신의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고, 공포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고결(Nobility).
기사는 자신의 욕구를 철저히 조절할 줄 알며, 욕망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는 고결함을 가진다.
-자비(mercy).
기사는 냉정함을 가지되, 그것의 일면엔 따사로운 자비를 갖춤으로써 자신의 주인의 명예를 드높인다.
-공정(justice).
기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한 윤리의식과 많은 것을 볼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짐으로써, 공정이란 날카로운 검 날을 신중히 사용한다.
-관용(Generosity).
기사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며 냉정할 줄 알되, 굶주리는 시민과 고아들에겐 넓디넓은 관용을 베품으로써 인간성을 드높인다.
-신념(Faith).
기사는 많은 의견을 넓은 폭으로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되, 그것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믿고자 하는 신념을 철저히 관철한다.
-희망(Hope).
기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닥친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그 곳이 아무리 칠흑 같은 암흑 속이라 할지라도 모두를 구원해줄 한줄기 빛을 찾아 정처 없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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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炎) 991년 청(靑) 월 23일]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여왕을 알현하는 알현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처참히 짓이겨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시체 하며, 곳곳에 흩뿌려져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검붉은 혈흔까지. 저마다 검과 창, 혹은 농기구를 든 채로 광기 서린 눈을 번득이고 있는 남녀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환희 섞인 비명을 목청껏 질러대었다.
“여왕, 여왕! 드디어, 단죄의 시간이다!!”
불의 여왕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품은 눈을 도르륵 굴려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수많은 자신의 백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한 피 냄새와 귀청을 찢을듯한 소란이 정적 뿐이었던 알현실을 가득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그 특유의 자애로움과 여유로운 표정마저 잃지 않은 채였다.
“이게 정녕 최선의 선택입니까.”
여왕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 목소리에 그 어떠한 긴박함이나 공포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사랑스러운 손주에게 어떤 간식을 먹고 싶냐며 너스레를 떨듯, 한없이 차분하고도 따뜻한 음성이었다.
“..용서를 빌진 않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여왕이시여.”
숨 막히는 긴장감 가운데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시끌벅적한 인파 안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눈빛을 유지하던 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큰 남자는 인파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와, 먹먹함이 깃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여왕의 앞에 우두커니 섰다. 피가 묻은 남자의 손에는 끄트머리에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은빛의 삽이 들려 있었다.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나의 무덤지기.”
여왕의 말에는 일말의 비난도, 분노도, 원망도, 질책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느때와 같이 자신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신하를 대할 때와 같은 들뜬 어조였다.
“동정입니까.”
남자가 물었다.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아닙니다.”
여왕이 미소 지었다.
“원망입니까.”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닙니다.”
여왕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난.. 입니까.”
남자는 가까스로 울컥울컥 올라오던 감정을 삼켰다.
“그것 또한 아닙니다.”
여왕은 웃었다.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영원히 불탈것만 같은 정열을 담은 표정이었다. 한없는 자애가 담긴 여왕의 붉은 눈이 남자의 눈을 마주보았다. 올라가던 입꼬리는 티 없이 순수한 행복을 얼굴 위에 그려냈고, 벅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사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왕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눈을 살며시 감았다. 마치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미련 없는 체념을 단아한 얼굴에 담으며.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을 감았다. 끝내 뒤엉킨 울분을 삼켜내지 못했는지, 남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남자는 제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은빛 삽을 쥔 손을 천천히 치켜 올렸다.
“불의 여왕 아샬리아에게, 축복 있으리.”
이윽고 은빛 삽이 공기를 찢어 가르는 소리가 울리고, 빠르게 내리쳐진 삽은 여왕의 가녀린 목을 가볍게 베어냈다. 동시에 붉은 선혈이 터지며 여왕의 머리가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눈의 초점이 풀린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여왕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아아, 자비로우신 여왕님. 모두에게 사랑받던 여왕님. 그런 모두를 사랑하던 여왕님. 이제 당신은 그 멍청한 사랑 때문에 파멸하게 되었군요.
“으으, 으아아아아아!!”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환호였을까,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맹목적인 자비를 베푼 여왕에 대한 분노였을까. 남자의 처절한 음성은 혈흔과 고깃덩이가 즐비한 알현실 안을 미친 듯이 울려댔다.
그렇게 남자가 토해내는 울음 섞인 비명을 끝으로, 찬란했던 불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염(炎) 991년 청(靑) 월 23일, 세상을 강타한 대격변이 시작된지 이틀이 지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