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군]
검붉은 형체가 말을 전달했다.
[너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군]
“좀 닥쳐 봐, 싸이코패스 씨. 내가 지금 곧 뒤질 예정이라 시간이 없으니까. 어이, 건축가. 이 세계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 고대 세상이라고? 내가 과거로 온 거라고?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차원게이트를 열었을 때 발생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련해 놓은 대비책이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최악의 경우겠지.”
“대놓고 말하는 걸 보면 저 싸이코패스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그게 뭔데?”
효령이 물을 때, 건축가의 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였다.
“파투에게…미안했다고…전해 줘…이해해달라고까지는…못 하겠지만…”
그녀의 빛이 나는 몸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허공으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파투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효령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글자’들이었다.
다만, 효령이 사는 시대에 쓰이는 세계 각국의 글자들이 아닌, 이 시대에 쓰이는 고대어 문자들이었다.
효령은 코웃음을 쳤다.
“만성 고질병을 주고 그 대신 빨간약도 주는군. 군대야?”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건축가를 감싸고 있는 검붉은 빛의 덩어리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건축가가 괴로워하며 입에서 피를 토하였다.
“크윽…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27차원의 존재여. 너의 구속이 더 앞당겨질 뿐.”
[뭐라고]
이미 지난 600년간 수없이 많은 형태의 죽음을 보아온 효령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인, 건축가 역시 곧 죽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효령은 바닥에 앉은 채 짐짓 냉정한 어투로 말하였다.
“갈 때 가더라도 알아듣게 설명은 하고 가야 될 책임이 있지 않겠어? 당신 뻘짓 덕에 후손들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그렇겠구나.”
건축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게이트를 열기 전부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발동되는 포박주술을 이 공간 전체에 걸어두었다.”
[너를 죽이면 그만이지]
“주술은 이미 실행되었다. 나를 죽이면 주술의 시동이 더 활발해질 뿐이다.”
“그 주술이 저 ‘글자’들인가?”
효령이 물었다.
“그래. 저 ‘글자’들이 곧 나다. 인간인 나를 태워서 만들어낸 것.”
건축가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개의 글자들이 잠시 허공을 휘저으며 부유하였다.
그러더니, 글자들끼리 뭉쳐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거대한 글자의 덩어리는 검은 구멍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리고 마치 그물이 한 순간 확 펴지는 것처럼 넓게 펴지면서 검은 구멍을 덮었다.
그리고 검은 구멍과 함께 글자들이 소멸하였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게이트를 열기 전 원래 그러했을 벽의 모습이었다.
다른 세 방향의 벽과 마찬가지의 모습.
효령이 엄지를 치켜세운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말하였다.
“자알 했어! 덕분에 활기찬 미래가 존재하겠군, 수호자들이 개고생하는 미래가.”
또 다시 건축가의 몸으로부터 글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보니, 글자들을 쏟아낼수록 건축가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글자들을 쏟아내고 본체는 소멸하는 것인가.
이미 상당히 투명화가 진행된 건축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게이트는 닫혔다. 더 이상 누군가 이 쪽 차원으로 건너올 수는 없어. 다만 너를 돌려보낼 수도 없게 되었으니, 너는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겠지. 나를 완전히 소멸시켜서라도.”
쏟아져 나온 글자들은 이번에는 덩어리가 아닌 길다란 띠 같은 모양으로 뭉쳤다.
글자의 띠는 빠르게 날아가, 검붉은 형체를 밧줄처럼 칭칭 감아 죄었다.
검붉은 형체가 그 글자의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글자의 띠는 더욱 강하게 그를 죄었다.
“오…이렇게 해서 봉인된 건가?”
바닥에 앉아 있는 효령이, 마치 이 장소와 아무 상관없는 제 3의 관람객인 양 말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효령의 머리에 검붉은 형체의 외침이 전달되었다.
[하등한 3차원의 존재 따위가! 가소롭다!]
그와 동시에 검붉은 형체를 옭아매고 있던 글자의 띠가 한순간에 부서져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형체는 기분이 나빠진 듯, 아까보다 더욱 강하게 일렁였다.
[이 따위 하급 저차원의 주술로 나를 상대하려 했다니 우습군. 겨우 이게 네가 말한 방책이라면 지금 바로 죽여버려도 관계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던 글자의 잔해들은 다시 허공에서 원래의 글자들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아까처럼 글자의 띠가 되어 또 다시 검붉은 형체에게 감겨들었다.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검붉은 형체 역시 다시 지체없이 글자의 띠를 산산조각내며 부숴뜨렸다.
아니, 부숴뜨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글자들이 아까처럼 산산조각나지 않았다.
약간의 글자들이 깨져 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자들은 여전히 띠를 이룬 채로 포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저울은 기울어 있는 것을. 그래 봐야 시간의 문제다]
검붉은 형체가 거세게 일렁였다.
글자들이 조금씩, 하지만 계속해서 깨져나갔다.
건축가는 계속해서 점점 더 투명해져 갔다.
이대로 가면 검붉은 형체의 말대로, 결국 건축가의 힘이 다해 글자의 띠가 깨져나갈 것임이 분명했다.
“이건 뭐, 답도 없군.”
효령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건축가. 뭐 대단한 비책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이대로라면 무한반복인 거야? 아니면, 네 생명이 다 소진되면 봉인이 실패하는 건가?”
건축가의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매우 투명해져서 그 너머에 있는 벽이 뚜렷이 보일 정도였다.
“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고 하면 땡인가?”
효령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벌이지 말았어야지.”
효령은 ‘으이차’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자들이 곧 너라고 했지? 아무래도 그 글자가, 그러니까 니가 나를 여기 데려온 건 우연이 아니라, 날 써먹고 싶었던 것 같군.”
효령이 하나 남은 팔을 들어, 자신이 들어왔던 문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제까지 방 안에 있던 효령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차이라면, 상처 없는 멀쩡한 몸에 푸른 빛을 두른 대검을 들고 있다는 것.
이제는 거의 투명하게 사라져 가던 건축가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파투!”
“땡! 또 접니다요. 미래에서 온 정체불명의 멋쟁이 신사. 아, 지금 모습은 멋쟁이는 아니군. 정정.”
대검을 든 남자, 효령의 본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곧바로 건축가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그리고 건축가에게 대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무슨?!”
건축가가 당황할 때 효령의 푸른 대검이 건축가를 가두고 있는 검붉은 빛에 충돌하면서 섬광이 사방으로 퍼졌다.
건축가는 눈이 부셔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녀는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두고 있던 검붉은 빛의 덩어리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어딜 감히 방해하는 것이냐]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효령의 머리 속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처음 문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검붉은 빛살이 검붉은 형체로부터 효령의 본체를 향하여 쏘아졌다.
그러나 효령에게 쏘아진 빛살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효령의 몸에 맞기 직전 파앗 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소멸되었다.
“싸이코패스 아저씨, 뻘짓하지 말고 내 말 들어.”
효령의 본체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어차피 우리는 가위바위보에서 둘 다 가위밖에 못 내는 등신들이야. 너도 나를 어쩔 수 없고, 나도 너를 어쩔 수 없어. 건축가를 가둔 덩어리는 내가 깨 줬지. 그건 너 자신이 아니라, 너와 별개인 에너지 덩어리니까. 될지 안될지 몰랐는데, 해 보니까 되네?”
[너는, 대체 누구냐]
“왜 모르지? 이쯤 되면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나도 깨달았는데.”
효령이 오른손에 든 검을 들어 검붉은 형체를 가리켰다.
“너잖아, 나는. 내가 너고, 너는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