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도미우라 왕국.
SC #59. 1928년 9월. 상해 홍커우 공원
상해 홍커우 공원에 원봉이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 모처럼 혼자 아무런 생각 없이 먹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들을 쳐다보고 있다.
납치되었다 풀려 나올 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여옥의 얼굴이 떠오른다.
원봉 : 왜 기옥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었을까?
잊어 달라던 말 때문일까? 동의도 없이 묘활주를 먹인 건 잘못한 짓일까? 10년 넘게 하루도 잊은 적 없는 이름이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잊혀 지더라도 억울해 말자.
섭섭은 잠깐이고 죽으면 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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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봉은 억지로 씩 웃어본다. 기옥이 원봉에게 했던 말들을 실천해 가는 것을 보면서 원봉은 거저 기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모처럼 원봉이 잘 가꾸어진 공원 여기저기를 거닐 때 공원 한편 크게 자란 단풍나무 아래 노천 이발사가 손님 머리를 깎고 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익숙한 조선말이 반가워서 가까이 다가간다. 이발사도 손님도 조선인인 모양이다.
을수 : 내가 욕지도에서 2,000여명의 일본인들 전용이발사였소.
자그마한 키에 통통한 몸집의 친근감이 가는 얼굴이다.
손님 : 욕지도가 어디 있는 디?
을수 : 남해 통영에서 배타고 한 시간 반 쯤 가면 되요.
삼천포에서는 한 시간 쯤 걸리고...
손님 : 그 섬이 제주도만큼 크남?
을수 : 아니 십분의 일도 안 되지요?
손님 : 예이! 거짓말 그 작은 섬에
일본 놈들이 뭐 한다고 2,000명이나 산다냐?
을수 : 조선족들도 이만명이나 살아요!
손님 : 이 사람이 뻥치시긴.
욕지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그 이발사 말로는 일본 놈들이 그 섬에 어업기지를 건설하고 조선 어부 가족들을 데려와 일시키고 이런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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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로 돈을 착취하지만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있어 섬을 나오지도 못하고 갇혀서 20년 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섬에는 명월관이란 기생학교도 있고 안방술집도 12개나 있으며 200명이 넘는 조선 관기들을 속여 데려와 강제로 몸을 팔게 한다고 하였다.
을수 : 명월 관 게이샤들은 겁나게 예쁘지요.
이제 원봉도 을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손님 옆 빈 의자에 앉는다.
을수 : 손님도 머리 깍으시려구?
을수가 원봉에게 중국어로 말을 던진다.
원봉 : 네... 저도 조선족이에요.
을수 : 오늘 동포들 많이 보네. 나가 잘 깎아 드리지.
을수는 관중이 한명 더 늘자 신이 나서 이야기는 계속 하였다.
명월 관 게이샤들은 사실 조선 왕실 궁중의 무희들이었는데
지금 욕지도 주인인 도미우라가 그 무희 50명을 속여 데려와 일본여자로 둔갑시켜 놓고 비싼 값을 받으며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을수 : 내가 10살 때 일본 놈들이 조선 관기들을 끌고 와서
배에서 내리는 것을, 구경 가는 삼촌을 따라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단 말이여.
명월 관 게이샤들은 규율이 엄격해서 조선말을 하면 아주 모질게 매질을 당하며 일본말만하고 일본식으로 기생교육을 받는다 했다.
끌려 온지도 이십년이 넘어 이제 예쁘던 게이샤들도 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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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에서도 쫓겨나 안방술집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몸을 팔게 하고 있다 한다. 도미우라는 또 어디에선가 어린 조선 여자들을 데려와 똑같이 교육시켜 명월 관 기생들이 예쁘고 풍류에도 뛰어나다 소문나
일본. 조선. 만주. 중국의 이름난 거상들이 일부러 먼 욕지도 까지 수산물을 사러 온다는 것 이었다. 술집12개는 일본인 전용으로 술파는 것보다는 일본 놈들 성욕 해소가 주 업무라 한다.
도미우라는 섬이라는 특수 환경을 이유로 조선인의 임금을 전표로 계산해주고 식료품을 육지로부터 가져와 아주 비싸게 유통시켜 조선족들은 지급받은 임금으로 식량을 구입하면 오히려 빚이 질 지경 이고. 욕지도에 거주 하는 일본 놈들도 성적욕구를 해소하려면
받은 봉급을 고스란히 도미우라에게 다시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을수 : 도미우라 집 지하 금고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가 쌓여있답니다. 생각들 해 보슈 .....
30년 동안 긁어모은 돈이 얼마나 되겠는가?
남해 일대 수산물들을 싹쓸이해서 팔지요,
조선인 어부들 임금 착취 하지요.
명월 관 돌려 거상들 돈 빼먹지요.
안방술집 돌려 저희 일본 놈들 돈까지 모두 빨아 먹어버렸으니
도미우라 라는 놈은 정말 야차 같은 놈 이예요.
일본 본국에 정해진 돈을 보내고도 어마무시하게 남는 돈을
금괴로 바꿔 금고에 숨겨 놓았다는 것은
욕지도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 입니다.
이야기 도중에 먼저 머리를 깎던 사람이 일어나고 을수는 손님의 몸을 구부리게 해 놓고 돼지털로 만든 솔로 정성스레 머리카락을 털어준다.
을수 : 자 이리 앉으시오. 어떻게 깎아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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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봉 : 너무 짧게는 깎지 마시고 적당히..
을수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을수 : 일본 이발사 밑에서 잔일을 하다.
나이 서른이 되던 해 사는 게 갑갑하고 넓은 세상 보고 싶어
조선인 대표인 구태 삼촌의 도움으로
작년 이맘때 고기 사러 들어온 중국 상선에 몰래 숨어서
이렇게 상해까지 오게 되었소이다.
배운 것이 머리 깎는 기술 밖에 없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요.
거짓말이라 여기기엔 이야기가 너무 구체적이다. 만약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도미우라의 금고에 어마어마한 금괴가 있을 테고..
200여명의 조선여인들이 성노예로 살고 있다면.. 그들을 탈출 시키는 일은 우리 특전대가 꼭 해야 할 일 아니겠나? 현제 상해임시정부의 부족한 독립운동 자금도 한 방에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를 깎은 후 바쁜 걸음으로 아지트로 돌아온 원봉은 특전대원들을 소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