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기타
나의 25년의 삶
작가 : 정희정
작품등록일 : 2019.9.6

제가 장애인으로 25년을 살아 왓던 저의 자서전입니다.

 
나의 25년의 삶....
작성일 : 19-09-06 23:04     조회 : 324     추천 : 0     분량 : 1064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난 25년을 살아오면서 참 많은 역경과 고난이 항상 함께하고 있고, 지금도 역경과 고난이 항상 함께하고 있지만, 그 뒤엔 행복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1부

 난 평범한 가정에서 좀 특별하게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나였다. 엄마는 날 가졌을 때 차를 타고 서울에 사시는 큰엄마 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하필 엄마의 양수가 터져버린 것이다. 근데 우리 엄마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엄마가 말하기에는 “임신 말기 때 소변이랑 같이 나오는 피” 인줄 아셨다고 한다. 그다음 날 대구로 오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날 낳았다. 그것도 봉고차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6개월이 흐른 뒤.....

 

 나에게 첫 번째 고난이 다가왔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크나큰 고난이었다. 내가 열병으로 인해 뇌병변 장애가 된 것 이였다. 쉽게 말해 뇌성마비라고 보면 되는데...

 뇌성마비는 말 그대로 뇌에서 마비가 온 것이고, 나는 뇌가 죄 뇌, 우 뇌가 있는데, 그것이 없고, 한 개로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모두 절망에 빠졌는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께서 우리 가족들 보고 “희정이 시설에 보내자 안 보내면 우리 가족들만 힘들어지고, 마음만 무겁고, 죄책감만 들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근데 거기서 엄마는 안된다고 울고만 있고 아빠도, 언니도 안된다고 하는데, 우리 이모가 엄마보고 “언니 희정이 시설로 보내자. 언니만 힘들어져 희정이한테만 매달리면 다른 가족들도 힘들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시설에 보낼 수가 있어.”

 그래서 나는 무사히 시설로 안 가도 되었다. 우리 가족들한테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근데 엄마가 날 특수학교로 보내셨다. 특수학교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인데 거기서도 다섯 개 특수학교로 나뉘어 진다. 시각, 청각, 발달, 정신병, 지체로 나뉘어 진다. 시각은, 말 그대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 청각은, 귀가 안 들리는 사람. 발달은, 정신연령이 자기 나이보다 어리고 한 가지 일에 꽂히면 그것만 하는 사람. 예) 23살인데 7살 지능을 가진 사람, 또는 피아노를 배우면 그것만 하는 사람을 말함. 정신병은, 발달장애인과는 다르게 자기 옆에 있는 가족이나 형제조차 못 알아보는 사람을

 정신병이라고 함. 지체는, 혼자서 거동이 불편하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나는 보건학교라는 지체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근데 그것도 아니였다... 난 학교를 너무 쉽게 여겼던 것 같다. 그냥 친구들이랑 노는 놀이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모든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은 정말 지옥과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글씨를 한 개도 몰랐고, 또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일명 깡다구 있는 초등 교사 중 제일 무서운 선생님께서 우리 반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지옥과 같았다고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학부모께서 유별나다고 생각나면 그 반은 무서운 선생님께서 담임을했었던 것이었다. 우리 반 어머니들이 좀 유별나서 무서운 담임 선생님이 오신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반 아이들만 죽어났다. 그때는 우리 반 어머니들을 원망했다. 어린마음에...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가장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없었다면 난 지금도 글씨를 몰랐을 것이다. 선생님 열정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를 시기 질투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친구들에 비해 활발하고, 사교성도 많았고, 붙임성도 좋았기 때문에 특히 남자친구들의 시기 질투가 끊이지 않았다. 여자친구들은 날 많이 좋아하고 의지했다. 그렇게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 하나 했는데...

 

 나에게 두 번째 고난이 찾아 왔다. 때는 내가 열병으로 인하여 장애가 된 후부터 나는 항상 약을 먹어야 했다. 태어나서 6개월 후부터 먹은 약을 초등학생이 될 때 까지 먹고 있으니, 몸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약은 아직까지 아기 때 먹은 약을 그대로 먹고 있으니,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근데 나는 초등 과정 때 한번도 결석을 해본 적이 없는 나인데 결국 어려서 먹은 약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그것도 두 달 동안이나 말이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했다. 난 아무리 아파도 결석도 안 하고, 지각도 안 하고, 조퇴도

 한 적 없는 나인데 고작 경련 때문에, 결석을 한다는게 억울하고 분했다.

 

 병원에 있을 때 난 참 나 자신을 많이 원망하고 또 원망한 것 같았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때는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를 부인했을까?”라고 초등학생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넌 그때 왜 니가 가지고 있는 장애를 부인했니?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니가 가지고 있는 장애를 부인하는 게 더 부끄러운 거야”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장애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항상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져! 절망 따위는 개나 줘버려! 그리고 항상 누군가를 아낌없이 사랑해줘 그럼 그 사랑이 너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어”라고 말 하고 싶다.

 

 내가 설교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5학년 때 아프고 난 뒤 난 조금은 더 성숙 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어린이회장으로 출마했는데, 내 친구를 압도적으로 이겨 전교 어린이회장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초등부 학생들을 모두 장악했다. 그리고 난 무사히 초등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수가 있었다. 그때 졸업식 날에 받은 상장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상장은 3년 개근상이었다.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상장

 중에 하나었다. 왜냐하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파서 결석을 많이 해서 개근상을 못 받을 줄 알았다. 근데 내가 개근상을 받다니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초등 과정 졸업은 있지 못할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근데 우리 학교에서 웃긴 점은, 졸업을 하면 다른 학교로 가기 마련인데 우리 학교는 12년 동안 같은 친구들과 같이 함께, 졸업을 한다는 점이었다.

 

 2부

 초등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중학교 과정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중학교 과정은 초등 과정보다 더 험난했다. 난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충격적이었다. 수학은 제곱에다, 영어는 못 알아들을 문법, 문장에다,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나 빠져나올 수있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빨리 졸업을 하는 방법 뿐 이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6년을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거기다 시험도 쳐야 하고, 또 반은 두 반으로 나뉘어지고... 원래 초등 과정 때만 해도 12명 모두 한 반이었는데 중학교부터는 두 반으로 나뉘어졌다. 난 친구들과 떨어져 있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중학교를 들어와서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던 나를 원래의 내 위치로 해 준 선생님 한 분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난 처음엔 공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냥 활발하고, 격동적인 아이였다. 음... 뭐라 할까? 예전 영화 <써니> 라는 영화가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강소라가 <하춘화>라는 인물을 연기했었는데 내가 딱 하춘화였던 것이었다. 정말 주먹만 안 썼을 뿐이지 일진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일진 중에 왕이나 다름없었고 나를 따르는 왼팔 오른팔이 있었다. 우린 일명 미녀삼총사 라고 불렸다. 참 이때만 해도 나의 삶은 완전히 여자 깡패였던 것이었다.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내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된다.

 

 아, 또 내 설교가 너무 길었구나... 아무튼, 나의 설교는 이쯤에서 하고 다시 본문으로 가자면...

 

 중학교 신입생 소개를 하고 교실에서 국어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국어 선생님께서 교실 문을 여시고 들어오는 순간 뒤에서 후광이 빛났다. “후광이 빛났다”라는 말을 이럴 때 쓰이는 말인지 꿈에도 몰랐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고 난 뒤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 “애들아, 안녕? 반가워! 난 오늘부터 중학교 국어를 맞게 된 국어 선생님이야~ 선생님 이름은 박! 장! 우! 선생님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라고 말씀하신 후에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 반 여학생들은 국어 선생님을 넉 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내 앞으로 오시더니 “희정아 선생님 얼굴에 뭐 묻었니? 왜 이렇게 넉 을 놓고 보고 있어?”라고 하시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게졌다... 근데 우리 반에서 날 싫어하는 남자애가 “희정이 샘 좋아해요”라고 말을 했다. 그때 난 너무 부끄러워 얼굴은 더

 빨게졌고, 나를 싫어하는 남자친구들은 나를 비웃었고, 여자친구들은 날 위로해주고, 당사자인 선생님께서는 나한테 오셔서 친구들보고 하시는 말씀이 “자! 자! 조용 친구를 놀리면 안 되지! 그리고 “희정아 난 너의 솔직한 그런 마음이 좋아 앞으로도 선생님 많이 좋아해도 되! 선생님도 희정이 많이 좋아해 줄게!”라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은 고장이 난 거 같이 심장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렸다. 기분이 묘했다. 사랑에 빠진 기분이랄까? 왜 그 유명한 대사,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이 대사가 생각나면서 한 편으로는 뭐라고 말로는 말 못 할 그런 기분이었다. 난 나 혼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국어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그런 제자가 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다짐하고 마음 깊이 새겼다. 뭐 난 국어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진 완전 날라리에다 일진이었다. 그러나 국어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내 삶은 180도 아니, 360도로 바뀌어 버렸다. 난 국어 선생님이 없었으면 이렇게 글도 못 쓰고 흥청망청 날라리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 그 뒤론 어떻게 된 나면, 6년 동안 국어 시험을 보면 1등은 따놓은 단상이었지.

 그리고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6년간 반장을 했었지. 그리고 국어 선생님께서는 나 말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잘 살고 계시지.

 

 여기까지는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야! 왜 고등학교 이야기는 없나고? 고등학교 이야기까지

 적으면 지루하거든. 왜냐고, 고등학교 이야기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이거든.

 그래서 이야기를 안 하는 거뿐이야. 오해하지 말아 주길 바래.

 그리고 난 학창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야기 할게있어. “학창시절의 나에게 안녕? 난 2017년도의 희정이야, 희정아 넌 그때 왜 그렇게 못되게 행동했니? 아무리 너를 방어한다고, 하지만 그거 아니야! 그리고 왜 수학 영어 포기자였어? 너 때문에 난 지금도 수학이랑 영어는 못해. 그치만, 국어는 열심히 하는 바람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네.”

 

 3부

 어머! 이야기하다 보니 길어졌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게. 순간이동. 뿅~!

 

 이제부터는 졸업 후 이야기할게. 난 졸업을 한 후 1년 동안 학교에서 바리스타 공부를 했어. 아참 난 원래 불교 쪽이었는데 우연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 그리고 교회에서 성탄절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교회 부서마다 공연을 준비해서 보여주는 발표회를 가졌는데, 나는 그때 청년부였기 때문에 청년부 공연 준비를 하고 공연을 했다. 우리가 준비한 공연은 연극이었다. 공연이 모두 끝난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온 나는 휴대폰을 봤는데, 어떤 남자가 카톡을 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난 깜짝 놀랐다. 카톡 내용이 “안녕하세요”였는데 모르는 사람이 내 번호를 아니까 깜짝 놀랬던 거 같다. 근데 카톡 내용이 조금은 이상했던 거 같다.

 왜냐하면, 나에게 약간 호감 가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용이 뭐였냐면 “안녕하세요? 저는 최관용이라고 합니다. 오늘 무대 잘 봤어요. 얼굴도 예쁘시고, 공연도 멋졌어요. 저도 오늘부터 청년부에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참! 그리고 청년부 부회장이라고 들었어요.”라고 말을 하면서 자기는 지적장애 3급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지적장애란. 정신연령이 3~4세쯤 되고 거의 비장애인이랑 비슷한데 말을 해보면 약간 못 알아듣고 또는 동문서답을 하는 사람을 지적장애라고 함. 그런다고 다 동문서답을 한다 해서 동문서답하는 사람들을 보고 지적이라고 판단하면 큰일임. 오해 마시길.

 

 뭐 그때에 나는 되게 적극적인 성격이었고 말을 삥삥 돌려서 말하기보다는 말을 하면 톡 쏘는 말투라서 직설적이게 말하는 타입이라서 카톡으로 뭐라고 답을 했냐면 “저 좋아하세요”라고 말을 하니까 “네”라는 답이 나왔다. 그 당시 나도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저도 그쪽한테

 관심 있는데, 우리 사귀어요”라고 말했던 것 이다. 근데 그게 화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사람이랑 처음 만나는 날 난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물론 카톡으로 얼굴은 봤지만.. 드디어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가슴이 쿵광 쿵광 거리면서 이게 뭐라고 떨렸다. 드디어 카페에 들어서는데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딱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뒷골이 서늘했다. 음 뭐라 할까? 뒤에 귀신이 있는 느낌이랄까? 근데 나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땐 겨울이었고, 내가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그냥 넘겼다. 만약 그때 내가 빨리 눈치챘더라면 후회는 없었을 것인데... 참. 내가 어리석었던 거 같다. 왜 내가 어리석었냐고?

 

 이제부터 이야기해줄게.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우리는 이상하게 남녀가 바뀌어 버렸어. 다른 커플들은 남자가 여자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데 우리는 내가 그 남자를 데려다줘야만 했어. 그 남자가 길치라서 자기 집도 못 찾아가. 헐! 난 정말 어이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기에 참고, 매일마다 데려다줬어. 나도 참 대단한 거 같지만, 난 남들 커플들이 부러웠어. 그리고 우리 둘은 길을 가거나 공공장소를 가면 항상 그 남자가 1미터 뒤에 오거나, 앞에 먼저 가면 내가 뒤에서 따라가는 편이었다, 보다시피 난 지체 장애라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고, 그 남자는 걸어 다니니, 자기 단에는 내가 부끄러웠던 것 같다. 손도 안 잡아주고, 거리에선 완전 남남이었던 것 이다. 그럼 사귀자고 꼬시지, 말 던지. 자기가 꼬시고 부끄러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난 아직도 의문이다. 대체 왜 그랬는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사고를 쳤다. 뭐냐하면, 나는 아직까지 바리스타 학교에서 공부를하는데, 이 학교는 일 년이면 졸업를 해야 한다. 근데 그 졸업식 때 꼴에 내 남자친구라고 졸업식에 초대를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모른 체... 졸업식이 끝나갈 무렵 교실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다른 여자애 엄마 번호를

 따고 있는 것이었다. 헐! 정말 그때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남자를 복도로 불려서 “왜 그 여자애 엄마 번호 땄어?”라고 물었는데 그 남자가 하는 말이 “걘 귀엽고, 관심 있어서 너랑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너랑 헤어지면 그 애 만나야지”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헐! 난 너무 충격적이라서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만 있는데, 그 남자는 나보고 하는 말이 “너가 뭘 잘했다고 울어? 넌 잘한 거 없어. 난 뭐 너 친구 번호 따면 안돼?”라고 막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땐 엄마도, 이모도, 이종사촌 언니도 왔는데, 그 난리를 피우니 나의 마지막 졸업식은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정말 후회가 되는 건 엄마가 그 남자를 혼내고 있을 때 나는 엄마 편을 들어야 되는데, 내가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보다. 어떻게 그 남자 편을 들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진짜! 미쳤나 보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됐다. 그리고 또 사건이 벌어졌다. 또 뭐냐하면. 우린 어떻게 백일까지는 왔는데, 내가 그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라는 데를 갔다, 그 남자 감시하려고 동구까지 갔다. 거기는 쉽게 말해 밤에 공부하는 학교이다. 근데 거기는 말로만 학교지 운동권이었다. 시위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백일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이벤트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이벤트가 날 더 화나게 했다.

 왜냐하면, 나를 모른 체, 생 깐 다음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것이었는데 하필 그날 내가 하필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나 혼자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남자는

 날 도와주긴 커녕, 화만 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이걸 안 나는 정말 슬펐다. 아무리 연기라도 도와줘야 되는거 아닌가? 정말 그때 이후로 정이 떨어지면서 나랑 친하게 지내던 오빠가 있는 데, 고민이 있거나,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을 때 같이 놀기도 하면서 친해졌다. 그러면서, 그 남자랑은 거리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대망의 사건 하나가 터지면서 우리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난 나도 모르게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되어서, 시위를하고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시위를 하면 술은 따라오는 옵션인 샘 이다. 시위를 마치고 술을 먹는데, 내 남자친구라는 그 남자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같이 시위하는 언니들이 “너 관용이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 만나 너랑 친하게 지내는 준효 만나봐라. 니 보다 나이는 많지만, 이해도 잘 해주고 얼마나 착한데, 니 눈 삐었냐?”라고 말하고 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남자보다 가는 날 이해해주는 남자가 더 끌렸기 때문에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왔는데, 전날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본 나는 나랑 친하게 지내던 준효 오빠한테 가서 “오빠 나 오빠한테 할 말 있는데... 듣고 놀라지마요. 나 사실 오빠 좋아해요. 우리 사귀어요?”라고 말을 했는데 의외의 답이 나왔다 “네 저도 관심 있었는데, 관용씨가 있어서 말 못 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오늘부터 일이에요. 나한테 말 편하게 해. 우리 호칭 뭐라 할까? 음~ 자기 어때 괜찮지 않아?”라고 하니 오빠가 하는 말이 “응 난 자기가 하는 거라면 다 좋아”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때 정말로 심쿵 했다. 너무 좋았고, 너무 행복했다. 근데 걱정이 있었다. 난 아직 그 남자랑은 헤어지지도 않고, 먼저

 준효 오빠한테 고백을 했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오빠가 하는 말이 “난 저쪽으로 가 있을게.

 이야기하고 올래?”라고 말했는데, 난 너무 무서워서 “아니 여기 있어. 해코지하면 누구라도 데리고 와. 알겠지”라고 말한 다음 그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4부

 그리고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지금의 신랑과 어떻게 결혼했는지 이야기해줄게...

 

 시간은 흐르고 흘려 벌써 오빠를 만난 지 한 달 만에 나는 진정한 사람을 만난 거 같았고,

 진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그리고 시간은 흘려 우린 백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린 백일이 오기 전에 약속했다. 그 약속이 뭐냐하면. “오빠 우리 백일 때 결혼하자.” 근데 오빠는 예상외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가 하는 말이 “난 아직 준비도 안 되어있고, 널 보살필 능력이 없어... 미안해 결혼은 좀 더 만난 후에 생각하면 안 될까?”라고 말을 했는데 나는 “안돼!”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기 때문에 오빠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왜냐하면. 날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결혼 승낙을 했다. 그리고 우린 무사히 결혼을 하나 했는데,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이제는 우리 집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결혼 한번 하는데,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결국 우리는

 우리 집 반대를 무릅쓰고 조촐하게 집에서 언약식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 참! 그리고 보니 우리 둘 나이를 이야기 안 했구나? 우리 둘 나이는... 내가 21살에 결혼을 했고, 우리 오빠가 34살에 결혼을 했으니, 우리가 결혼한 지 4년이 조금 넘었으니 내가 25살 오빠가 38살이다. 무려 13살 차이이지만 오빠가 그렇게 나이가 안 들어 보이고, 오빠 나이는 많이 보면 한 30살 적게 보면 24~26살로 본다. 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빠랑 함께해 왔지만, 난 오빠의 있는 그대로가 좋다. 꾸밈없고, 순수한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럽고, 또 제일 오빠다운 모습이다. 난 지금처럼 영원히 오빠만을 사랑할 것이다. 왜? 우린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이기에 더 사랑하고 아껴줄 것이다.

 

 *저자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난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니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들에게 더 해 주고 싶다. 장애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근데 그걸 겉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근데 요즘 사람들은 장애인을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먼 훗날 이 책을 읽어 보는 사람들이라면 장애인들을 색안경 끼고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봤으면 좋겠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취직을 못 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을 못 하는 사람도 없다. 왜? 꼭! 장애가 있다고 해서, 멍청이로 보거나, 바보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장애는 누구나 올 수 있다. 사람 앞일은 신이 아니고서야 모르는 일이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너무 자책도 하지 말고, 장애가 없는 사람도 방심하지 말고, 항상 장애가 없다는 것에 만족하고 장애인을 색 안경 끼지 말고 봐라. 색안경 끼면 언젠간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나의 표어이다. 그리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 말을 꼭 기억해 둬라. 사람은 다 똑같으니까.

 

 이상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다. 안녕~^^

 
작가의 말
 

 제가 장애인으로 25년을 살아 왓던 저의 자서전입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 나의 25년의 삶.... 2019 / 9 / 6 325 0 10647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주택에서 일어난
정희정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