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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이스트 포인트
작가 :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19.9.3

* 美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비교해도 생도들의 자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자신의 학교를 '이스트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집필 의도>

 1653년, 무역선을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태평양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젊은 선원 하멜은, 뜻하지 않게 제주도 근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들과 함께 강제로 조선에 억류됩니다.
이후 하멜은 조선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그 기록을 토대로 소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 반영하듯, 당시 '하멜 표류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발명품이 포함된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잡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에,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나오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어떤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오는 비행기나 낙하산도 판타지 안에 넣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넘보려는 일본의 탐욕에도 일침을 가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네덜란드의 왕자 하멜과 조선의 공주 하이란이 결혼을 하는 로맨스로 결말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7화>
작성일 : 19-09-04 16:08     조회 : 203     추천 : 0     분량 : 1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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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졸개가 되어...

 

  코르의 주력군을 총괄하는 육군사령부와,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인 이스트 포인트는 한즈(Hanz)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동쪽 근처 같은 영내에 있었고, 대장군 에반과 측근들의 집무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해군사령부는 한즈시의 남쪽을 동에서 서로 흐르는 브로(Bro)강의 항구에 있었고, 장군 파르코의 집무실도 거기 있었지만 자택이 이스트 포인트와 가까워, 파르코는 *하멜을 자신의 예하부대 중 하나인 이스트 포인트의 경비대에 배속시켰다.

 

   * 실제로 하멜 일행은 지금의 동대문 플라자(DDP, 예전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있던, 훈련도감에 속한 하도감(한양의 성곽을 지키던 관청)에 배속되어 무기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음.

  

  *          *          *

  

  해가 바뀌었다.

  하멜은 졸병의 신분으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이마에 희한한 문신이 찍힌 별종으로 취급되어 다른 코르 병사들로부터 계속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하멜은 별로 개의치 않았고 언제나 무예를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코르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무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파르코는 배와 함포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얀스를 무기공장의 연구원으로 배속시켰다. 얀스도 코르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하멜과 자신이 사신단에 끼어 디퍼슨으로 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코르와 퓨그 간에 빨리 전쟁이 일어나야 탈출의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얀스는 코르군의 전력을 강화시킬 무기를 발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퓨그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코르군에게 생겨야 전면전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적의 매머드가 그토록 강력했다면... 적의 주력은 오직 육군만이라면... 늘 이런 생각에 잠긴 얀스는 육상전을 벗어난 전투를 차츰 구상하기 시작했다. 

  레오 박사와 함께 네론, 아니 콕센 세계에서 제일 가는 과학자라는 칭송을 들었던 자신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싶었다. 코르군을 열광하게 했던 파르코의 발명을 뛰어 넘는 자신만의 진가를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배율이 아주 뛰어난 망원경을 얀스가 새로 만들어 코르군에게 보여주자, 병사들은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포탄의 모양을 구형에서 유선형으로 변경하니 대포의 사거리도 훨씬 길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얀스는 코르군 사이에서 인기가 점점 높아졌다.

 

  한편, 몰래 한즈로 들어온 하이란은 파르코 장군의 자택에서 호위병의 신분으로 살았다. 

  날마다 무술 연마에 여념이 없었고, 저녁에는 이스트 포인트 근처를 배회하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사관학교 입학의 꿈을 키웠다. 그러면서 하이란은 하멜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잦아졌고, 동갑인 둘은 금새 친한 친구가 되었다.

 

  *            *            *

 

  파르코의 배려로 얀스는 가끔 하멜을 만날 기회를 얻고는 했다. 

  단 둘만의 공간에서 얀스는 조용히 왕자의 건강을 확인하며 안부를 묻고 의견도 교환했다.

  

  “왕자님, 어떻게... 견딜만 하십니까?”

  “솔직히 좀 힘들지만, 어쩌겠어요. 일단은 적응을 해야 탈출도 하든 말든 하겠지요. 그나저나 파르코에겐 내 신분을 알려도 되지 않을까요?” 한숨을 쉬며 하멜이 말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그는 이미 네론(Nehron)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왕자님과 저, 이렇게 둘이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얀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죠?" 하멜은 약간 짜증을 냈다.

  ......

  “호크런을 만나 '사자의 심장'을 뺏으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얀스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네, 한 가지. 바로... 전쟁이지요. 그것도 코르와 퓨그 간에 전면전 말입니다." 얀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면전이라...”

  “네, 왕자님. 빨리 전면전이 일어나야 황제도 출정할 것이고, 그래야만 혼란을 틈타 우리도 코르를 탈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대치가 계속 되면 결국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됩니다. 역사란 가끔씩 충격적인 방법으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코르가 독립을 하든 퓨그가 승리를 하든, 그런 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엄청난 충격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원하던 유성을 차지해서 이 호렌(Horen) 세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얀스의 말은 진지하고도 날카로왔다.

  ......

  “충격적인 방법이라... 그런데 전쟁을 하고 안하고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게 할 방법이라도 찾아 봐야지요. 코르에게 첨단무기를 만들어 줘, 이들이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한 가지요, 코르군이 실수로 퓨그의 침범을 자초하게 만들어, 결국은 양 쪽에서 동시에 전면전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방법이 또 한 가지입니다.” 얀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보아하니 전쟁이 일어나면 힘이 약한 코르가 다시 잿더미가 될 게 뻔한데,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다... 어찌 보면 좀 잔인하네요.” 하멜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잔인하지요. 잔인하고 말고요. 왕자님은 네론 왕국의 현재이자 미래이시고, 결국 네론의 모든 것이 바로 왕자님의 것입니다. 측은한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코르가 잿더미가 되어야 네론이 살 수 있다면, 왕자님은 바로 그 길을 가셔야만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얀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하멜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쫘악 소름이 돋았다.

  ......

  “만약 탈출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호크런을 만날 수 있다는 거죠?” 하멜은 계속 의문이 들었다.

  “전쟁이 나면 코르의 중요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퓨그에 투항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럼 황제는 우리에게 호의를 보일 것이고, 그러다 보면 '사자의 심장'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얀스는 자신의 계획을 세밀하게 펼쳐 놓았다.

 

  하멜은 자기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탈출을 고민하고 있는 얀스의 설명이 한 편으론 고맙고 또 한 편으로는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얀스를 믿는 길 밖엔 없어 보였다.

  

  *           *           *

 

  어느 날 저녁, 

  일과를 마친 하멜이 성곽의 한 망루에 올라 쉬고 있는데, 불쑥 찾아온 하이란이 대뜸 그리로 올라왔다. 멋쩍은 하멜은 그저 주위만 살피다 아무도 눈치를 챈 낌새가 보이지 않자, 아주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이란은 콕센(Coxen)이 어떤 세상인지, 네론은 어떤 왕국인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이미 분위기를 파악한 하멜은, 하이란의 피곤한 닦달을 듣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 말해주었고, 한편으로 코르에 대해 궁금한 것은 솔직히 하이란에게 물어도 보았다. 사실 경비대에서는 특별한 말벗이 없어 하이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지금 네론의 왕은 누구냐고 하이란이 묻자, 하멜은 우리랑 동갑이면서도 아주 훌륭하고 잘 생긴 마크(Mark) 3세라고 대답을 했다. 아직 총각이라는 말도 하자, 하이란은 그런 왕과 결혼하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하겠냐며, 잠시 자기도 어느 나라의 공주가 되어 마크 3세와 춤을 추는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고개만 그저 두리번거리던 하멜은, 어쩌다 이야기의 주제를 완저(Wanzer) 총독에 대한 것으로 돌렸다.

  병사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니, 완저 총독이 대단한 여장부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잘 나가서 앞으로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그 이유가 궁금하다 했다. 

  하이란은 슬며시 웃으며 어머니에 대한 지난 얘기를 천천히 꺼내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지(Cozee)섬은 여자들만 사는 버려진 땅이었어.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한즈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쫓겨난 사람들은 코지로 유배를 많이 보냈거든. 코지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유배를 온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본토에서는 인간 취급을 하지도 않았지. 딸을 낳으면 그냥 코지에서 키웠고 아들을 낳으면 육지에 있는 귀족의 집으로 보내 평생을 하인으로 살게 했어. 그렇게 코지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섬이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내려 오신 다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달라졌는데?”

  “어머니는... 무지했던 코지 주민들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고 역사에 대해서도 깨우치게 하셨대. 그리고 갤라(Gaela)산을 바라보는 그 많은 거석상도,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주민들과 함께 세우신 거야. 예전에 코르의 국왕이셨던 분이 내전에서 패하여 코지로 유배를 와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계실 때 어머니랑 같이 갤라산에 산다는 신선을 기리는 제사를 많이 지내셨대.”

  “갤라산에 신선이 살아? 아니 도대체 신선이란 게 진짜 있기는 하는 거야?” 하멜은 처음 듣는 소리인 척 흉내를 내며 곧바로 물음을 재촉했다.

 

  “글쎄, 나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뭐... 하여간 그런 의식을 치른 이후로, 코지에는 따뜻한 남풍인 마프(Marp)가 불어오면서, 섬은 점점 활기가 넘치고 희망이 생기고 아름답게 변하였지. 마프는 코지뿐만 아니라 여기 한즈까지도 불어왔어. 그래서 호렌의 대부분이 빙하기로 들어섰지만, 우리 코르는 아직까지 그 추위를 덜 타고 있는 거래. 그렇게 보면 우리 어머니의 공이 정말 크지? 그런데 우리 어머니를 여장부라고 부르는 건, 사실 한즈의 귀족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야.”

  “그럼 너의 어머니에 대한 음모 얘기는 도대체 누가 하는 거야?”

  “에반을 비롯한 한즈의 귀족들이겠지. 그들은 전부터 코지 출신을 무시하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뭐, 우리 어머니를 칭찬하는 백성들이 차츰 늘어나니까, 일단은 경계를 하는 거겠지?”

  “그랬구나. 그런데 너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코지로 내려가신 건데?”

  “그건 나도 잘 몰라. 어머니는 한즈에서 아주 높은 가문의 시종이었는데, 그 집안이 누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었대. 그때 그 집안의 귀부인이 어머니의 능력을 알아보시고 너만은 살아남으라며 코지로 보냈다고 했어. 그런데 어머니의 몸에는 이미 내가 들어서 있었다고도 하셨어...” 하이란의 진솔한 고백에 하멜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하이란이 지금은 비록 남자의 복장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녀린 그녀의 숨결마저 남자다운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멜은 코지에서 처음 망원경 안에 보였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의 하이란의 모습은... 그때보다도 더... 훨씬 더... 아름다웠다.

 

  

  밤이 깊어지면서 하늘엔 은하수가 총총 올라오고 있었다.

  “은하수가 참 곱지?” 하이란이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응, 근데 내가 처음 코지에 난파했을 때 갤라산 기슭에서 보았던 은하수와는 비교가 되질 않네. 그때 본 은하수의 아름다움이란 정말......”

  “너도 그걸 봤구나? 갤라산의 은하수를! 사실 갤라산은 보통 산이 아니거든? 북쪽 국경에 있는 **화노블(Farnoble)산이나 갤라산은 우리 코르에게는 굉장히 신성한 곳이야.”

  “도대체 갤라산에 어떤 신선이 살기에 그 큰 거석상까지 만들어서 의식을 하고 그랬다니?” 하멜은 전혀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갤라산은 코르의 모든 신선과 선녀가 모여 사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어. 그런 곳을 여기서는 '퀠파'라고 부르거든? 그 전설을 종교와 단결로 승화시킨 게 우리 어머니지.” 하이란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퀠파...!!’

  하멜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느낌이었다.

  ‘하이란도 퀠파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니! 그저 꿈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갤라산의 지하 세계는 정말 현실이었나?’ 갑자기 초점을 잃은 하멜은 잠시 멍하니 있었고... 그러다 마음에도 없던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는 누구셨니? 그런 건 어머니가 얘기 안 해주셨어?”

  “그건... 말씀하시질 않더라... 어렸을 땐 나도 여러 번 어머니랑 그 문제로 싸웠었는데... 철이 좀 든 이후로는... 어머니의 아픈 기억을 건드릴까 봐 두려워서, 나도 더 이상은 물어보질 못 했어.” 대답하는 하이란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그제서야 하멜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하이란의 눈시울을 적신 책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추, 춥지 않니? 이, 이거 줄까?” 하멜은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줘!" 하이란이 새침스럽게 말했다.

  "어, 여, 여기..." 하멜은 담요를 건네며 말을 얼버무렸다.

  “덮어 줘!!” 하이란은 눈물을 닦고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어? 어... 그래... 아, 알았어.”

  하멜은 서툰 손짓으로 담요를 들어 하이란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때 하이란이 하멜의 손을 꼭 잡았고, 움찔한 하멜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남자 손이 나보다 더 곱네? 뱃사람이라더니 얀스 선장님 심부름은 안 하고 맨날 농땡이만 쳤나 봐? 너는 도대체 고생이란 게 뭔 줄은 아는 거야?” 하이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멜은 손도 빼지 못 한 채 몸이 화끈거려 어쩔 줄을 몰랐다.

 

  ** 백두산

 

  *          *          *

  

  같은 날 밤, 

  파르코는 얀스를 자택으로 불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두 사람이 웃음꽃을 피우는 것 같았지만, 얀스는 파르코로부터 전쟁 계획에 대한 사소한 정보라도 캐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파르코는 분명 탈출을 꿈꾸고 있을 얀스를 어떤 식으로든 빨리 코르에 귀화시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파르코는 우선 하멜 얘기부터 시작했다. 

  이마에 문신이 이상하게 찍힌 것도 좀 그렇고... 경비대에서는 또 훈련에 너무 열심이고... 어떨 때는 굉장히 탁월하고... 또 어떨 때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뭐 하던 아이인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먼 거리를 항해하는 얀스의 배를 탄 것이지도 물었다.

  얀스는 하멜의 부모님이 주술사였던 얘기만을 거듭하면서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얀스가 숨기면 숨길수록 파르코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거꾸로 얀스는 하이란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르코가 대충 얼버무렸다. 무예가 너무 뛰어나 코지에서만 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데려올 정도면 파르코가 완저 총독과 무슨 사이라도 되냐고 얀스가 묻자,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술이나 계속 하자고 말을 흐렸다. 그러자 얀스도 더 이상은 묻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참, 에반 대장군은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보이더군." 얀스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자 파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워낙 대대로 명문 귀족 출신이라 그럴 거야. 이 나라에서 '출신'이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거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출신 성분이 낮으면 출세를 하기가 어렵지. 에반과 그 측근은 모두 이스트 포인트 출신의 귀족들이니 이방인인 내가 폐하의 신임을 얻어 해군 사령관에 오른 게 곱게 보일 리 없는 거지.”

  “폐하도 에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아니, 자네가 잘 봤구먼. 폐하께서도 에반은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게 지금의 솔직한 현실이네. 에반 측 장군과 군사들은 그를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조직을 형성한 엄청난 힘을 가진 집단이지. 그게 사실 우리 코르에서 제일 큰 문제야. 에반의 힘이 너무 커...”

  “에반은 퓨그와의 전쟁에 가장 앞장서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자에게 힘이 집중되어 빨리 전쟁을 시작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면, 그게 코르에 더 좋은 일 아닌가?”

  “피 냄새를 좋아하는 에반이 전쟁을 서두르는 건 맞지만, 그 사람은 백성이 겪을 희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문제가 되는 거지. 자신의 명예와 성취욕에만 모든 것을 맞춘다고나 할까? 뭐, 나름대로 적의 매머드를 꺾을 결정적인 방법을 찾았다고는 하더군... 호크런과 퓨그의 수뇌부는 북극에서 살던 냉혈족이라 여름에는 웬만하면 남쪽으로 내려오질 않아. 아니, 못 내려온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에반은 우리가 여름에 선제공격으로 맨츠(Mantz) 벌판에 든든한 진지를 구축하고 나서 겨울을 대비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네. 그런데 말이야... 적의 매머드 한 마리를 죽이는데 우리 군인 천 명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에반은 반드시 그렇게 할 사람이야.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적이 얼마만큼의 매머드를 보유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 하는 상황이니까, 폐하도 당장은 전쟁에 동의할 수 없는 거지. 전반적인 우리의 전력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에반은 계속해서 전쟁을 재촉하고, 폐하는 계속 뒤로 미루시고... 지금은 그런 어정쩡한 상태라서... 그래서 나는 폐하가 더 걱정돼.”

  “폐하가 걱정돼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어? 아니 뭐, 에반을 설득하고 말리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그럼 당분간은 전쟁을 할 계획이 없다는 뜻인가?” 얀스는 조바심이 나서 말했다.

  “그렇게 쉽게 되지는 못할 거야. 퓨그를 꺾을 특별한 신무기가 개발되지 않는 한 말이야. 자네가 개선한 대포와 포탄이 내가 만든 것보다도 더 훌륭하긴 하지만, 수적으로 우리가 너무 열세에 있거든. 뭔가 다른 획기적인 무기가 나와야 해.” 파르코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에게 무슨 대단한 권한이 있다고? 지금은 그저 연구원의 신분이니, 그 신분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 아닌가? 그럼 자네가 힘을 좀 더 써서 나의 신분을 좀 바꿔주든지...” 얀스는 파르코의 지적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나도 다 알고 있네. 다 생각하고 있다고. 안 그래도 자네의 활동을 폐하께 전해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시더군. 조금만 더 참아보게. 뭔가 좋은 소식이 있겠지." 파르코가 얀스를 달래며 말했다.

  "알겠네. 내가 뭐 힘이 있겠나? 그저 자네만 믿는 수밖에..." 얀스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참, 그건 그렇고 조만간 폐하의 형님이셨던 돌아가신 브리젠(Brizenn) 왕세자 부부를 참배하러 폐하께서 친히 ***크란(Krann)산에 있는 ‘전몰장병의 묘지’에 가실 것이네. 에반도 가긴 하겠지만 그 사람은 참배에는 관심이 없고 난데없이 이 겨울에 크란산 기슭에서 사냥대회를 열겠다는구먼. 에반의 재촉에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사냥대회에 참석하실 것 같아. 하여간 이번에 자네와 하멜도 한 번 데려오라고 폐하께서 명하시더군.”

  파르코의 얘기에 얀스는 반가움은 커녕, 전쟁을 준비한다면서 웬 사냥이냐고 투덜댔다. 그러자 파르코는 얀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게 코르의 현실이니 당분간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속이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얀스는 파르코의 그 말에 속이 더 불편했다.

 

 

  둘은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 밤늦게야 자리를 파했다. 

  얀스를 배웅하려 마당을 지나다가 파르코는 마침 귀가하는 하이란과 마주쳤다. 깜짝 놀란 하이란은 그 자리에 멈추고야 말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용맹한 코지 전사의 대장인 하이란 낭자가 아니신가?” 취기가 오른 얀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뜨끔한 하이란은 고개를 어설프게 숙이며 말없이 인사했다.

  “밤이 늦었는데 이 시각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이냐? 조만간 폐하께 무예를 보여드리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거늘, 이렇게 늦게 다녀서 되겠느냐!” 파르코가 점잖게 꾸짖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하이란은 공손하게 사과를 드리고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하지만 눈이 풀린 얀스가 길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이 어여쁘고 당찬 낭자를 수하로 두었으면서 아직도 눈치를 못 챘는가?” 너무 질책하지 말라며 얀스가 파르코에게 말했다.

  “눈치? 무슨 눈치 말인가?”

  “낭자가 요즘 누구랑 아주 많이 친하다는 건 경비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일 텐데, 직속 상관인 자네만 모르고 있었나 보네. 지금도 거기 다녀오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낭자?”

  “아니옵니다. 왜 그러십니까? 얀스 선장님...” 하이란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너... 혹시 하멜과 사귀고 있는 것이냐?” 파르코가 하이란에게 따져 물었다.

  “아, 아니옵니다. 저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뭐 좀 물어보려고 잠깐 간 것 뿐이옵니다.” 하이란이 난처한 표정으로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는 큰 뜻을 품고 남자로 살기 위해 한즈에 올라왔는데 벌써 그것을 잊었단 말이냐? 몸과 마음의 수양에 정진해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다른데 한눈을 팔아서야 쓰겠느냐?” 파르코의 언성이 거칠어졌다.

 

  “너무 나무라지 말게, 이 사람아. 한창 꽃다운 나이에 남자에게 눈길이 가는 건 여인의 본능이 아니겠나? 하이란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남자를 좀 만나도 자기 관리에는 흔들림이 없을 걸세. 안 그래요 낭자?” 얀스가 파르코를 말리면서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 하이란은 자신의 숙소로 부리나케 들어갔다.

 

  파르코는 하이란을 책임지기로 완저 총독과 약속한 만큼 이를 지키는데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걱정을 하는 파르코를, 얼근하게 취한 얀스가 달래면서 밤이 깊어갔다.

  

  *** 관악산

 

  *           *           *

 

  본격적인 공사는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맨츠(Mantz) 벌판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또 부족들 간에 발생한 무수히 많은 충돌에 참가해 무인으로서 잔뼈가 굵은 도르반이었기에, 황제에게 보고를 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전투에 적합한 비밀기지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와있었다. 기지를 위장하기에도 좋고, 적에게 기습을 가하기에도 좋은 그런 최적지를 벌써 다 봐둔 터였다.

 

  모든 공사는 설계부터 감독까지, 처음부터 대장군 도르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가 가장 아끼는 심복인 카오핑 대령은 공사장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주위에서 꼼꼼하게 점검을 하며 상관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도 역시 핏줄과 출신은 도르반과 같은 부족이었다. 디퍼슨에 있는 냉혈족의 견제를 받아 아직 장군으로 승진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부족에서의 삼촌뻘인 도르반에게 등을 돌리고 냉혈족에게만 아첨할, 그런 가벼운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언제 승진이 이루어질지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었다. 

  

  대장군 도르반도 냉혈족의 견제를 받기는 마찬가지이니,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동족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승승장구하면서 대장군의 자리에까지는 올랐지만, 황제인 호크런과 디퍼슨에 있는 황제의 측근들이 모두 냉혈족이라 도르반과는 핏줄부터 다르니, 비록 전공이 크다하여도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엄청난 대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은 다름 아닌 맨츠 벌판에 사는 부족들이었다. 그 중에는 도르반과 카오핑의 부족도 있었다. 하지만 도르반과 카오핑은 자신의 부족이 공사장에서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직 목표를 이루는데에만 초점이 고정되어 있었다. 동족의 희생보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같은 동족이라 하여도 이런 도르반과 카오핑에게는 당연히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워낙 황제인 호크런과 냉혈족이 부리는 매머드 군단의 기세가 막강하였기에, 잠시 이들과 타협을 하고 코르를 완전히 정복하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도르반에게는, 감히 그 이상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도르반도 황제만큼이나 코르를 무너뜨리고 싶은 야망에 가득찬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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