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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이스트 포인트
작가 :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19.9.3

* 美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비교해도 생도들의 자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자신의 학교를 '이스트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집필 의도>

 1653년, 무역선을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태평양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젊은 선원 하멜은, 뜻하지 않게 제주도 근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들과 함께 강제로 조선에 억류됩니다.
이후 하멜은 조선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그 기록을 토대로 소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 반영하듯, 당시 '하멜 표류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발명품이 포함된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잡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에,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나오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어떤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오는 비행기나 낙하산도 판타지 안에 넣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넘보려는 일본의 탐욕에도 일침을 가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네덜란드의 왕자 하멜과 조선의 공주 하이란이 결혼을 하는 로맨스로 결말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5화><6화>
작성일 : 19-09-04 11:38     조회 : 213     추천 : 0     분량 : 2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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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새로운 왕국

 

  원래 디퍼슨은 맨츠(Mantz) 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평화로운 도시였지만, 호크런이 몰고 온 북풍 보라로 인해 지금은 눈과 얼음의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냉혈족은 도무지 추위를 탈 줄 몰랐다. 그들은 갑옷처럼 두꺼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온몸에는 원숭이처럼 굵은 털도 나있었다. 한겨울에도 몸이 움츠러들지 않으니, 그런 추위를 계속 견딜 수 없던 맨츠의 부족들은 결국 냉혈족에게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호렌 대륙 대부분이 빙하기로 접어들자 호크런은 맨츠의 부족 중 성인 남자는 전부 사방의 전장으로 내보냈다. 대륙의 남쪽과 서쪽 끝까지 계속 원정에 나서 저항하는 여러 왕국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냉혈족은 조금이라도 기온이 올라가면 확실히 힘을 잘 쓰지 못 했다. 그래서 이들은 냉혈족 대신 화살받이로 죽어 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과 아이들도 호크런의 노예가 되어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었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일찍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디퍼슨 중앙의 얼음산 꼭대기에는 호크런이 사는 ‘카론(Karon)성’이 있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자 보물을 가득 실은 마차를 이끌고 대장군 도르반(Dorban)이 대전으로 들어섰다. 단상의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는 불곰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덩치도 불곰만큼 컸고, 몸에는 검은 망토를 둘렀다.

  사실 퓨그(Fuug) 제국의 신하 중 어느 누구도 황제의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아니 감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호크런은 공포와 신비의 대상이었다. 단상 주위에는 진짜 불곰들이 어슬렁거리며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다.

 

  도르반은 계단 앞에 다가서자 무릎을 꿇었다. 원래 그는 맨츠 한 부족의 족장이었는데 비열하게 동포를 노예로 팔아넘기고 호크런의 환심을 얻어, 지금은 퓨그군 중 맨츠 부족으로만 구성된 육군의 사령관 자리에 오른 인간이었다.

  “폐하, 신 도르반 코르에 내려갔다 임무를 마치고 지금 막 귀환하였사옵니다.”

  “그래, 코르의 동태는 어떠하던가?”

  “네, 분부대로 코르의 방방곡곡을 샅샅이 검열한 결과, 저항이나 반항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사옵니다. 기본적인 치안유지만 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이 전부인 게 분명했으며, 특별한 무기를 개발하거나 전함을 건조하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신은 오히려 코르의 영주인 휘레스를 압박하여 저렇게 마차 한 대 분량의 황금을 조공으로 받아왔사옵니다.” 경과를 보고하는 도르반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바보 같은 놈!”

  갑자기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놀란 도르반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불곰 한 마리가 다가와 그를 저만치 내동댕이쳤다. 몇 바퀴 굴러 떨어진 도르반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아픈 내색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계단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그러니 네 놈 부족이 노예밖에는 못하는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코르로 내려갔다 디퍼슨으로 돌아오는 보라(Bora)를 맡아보아라. 바다 내음이 짙은 온풍이 섞여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 속에서 짐은 반역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코르는 분명 우리 몰래 군사력을 키우고 있을 것이니, 우리도 이에 철저히 대비를 해야 한다. 코르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강력한 비밀 기지를 만들라는 말이다. 유독 코르에만 내려가면 보라의 힘이 급격히 약해지는 이유도 알아내야 한다. 코르의 바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게 별로 없지 않느냐? 특히 멀리 남쪽 바다로는 아예 검열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고도 안심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우리도 이제는 해군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 알겠느냐??!!” 한 수 가르쳐 준다는 투로 황제가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도르반은 숨을 한 번 돌리고 차분하게 답변을 시작했다. 그냥 무작정 복종만 하고 밀리는 성격의 그가 아니었다.

  “폐하, 코르의 바다는 지금도 쳐비의 해적 놈들이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고 하옵니다. 이는 해군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사옵니까? 코르의 병권을 쥐고 있는 대장군 에반(Evan)도 육군 출신이라 바다에는 문외한이니, 당분간 코르가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옵니다. 설령 해군을 키운다고 해도 이 맨츠에서 공격해 내려가는 우리 퓨그의 육군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 마시고 신을 믿으시옵소서. 물론 신도 눈여겨보아둔 비밀 기지가 있긴 하옵니다.”

  “보라가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다른 식민지들은 모두 보라의 영향 안에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코르만 아직 예외인지 원인을 알아내야 저 놈들의 씨를 말릴 것 아니겠느냐!” 황제의 노여움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도르반은 그저 시간을 좀 더 달라는 말로만 대충 얼버무렸다.

 

  * * *

 

  “기상! 기상!”

  날카로운 목소리에 얀스와 하멜은 눈을 비볐다.

  날은 이미 밝아있었고,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이 덜 깬 하멜은 경비병의 카랑카랑한 잔소리에 짜증이 났다.

  “아, 좀 더 잡시다. 피곤해 죽겠는데.” 하멜은 비몽사몽 귀찮게 말을 했다.

  “서둘러 식사들 하고 짐을 챙겨서 나오세요. 오늘은 한즈(Hanz)로 가야 합니다.”

  “알겠소. 그만 좀 재촉하시오. 거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앗!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얀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어머? 뭘 하긴? 빨리 일어나라니까요?”

  “여보시오, 지금 나랑 말이 통하는 거요?” 얀스가 놀라며 말했다.

  “호호, 말이 통하니 말을 이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경비병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와, 이럴 수가?!” 하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오늘은 경비병과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경비병은 아마도 어젯밤 파르코 장군이 가져온 술과 약초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귀를 밝게 해주는 ‘이명주(耳明酒)’라는 것이다. 자고 나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던 파르코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코르에 온 파르코가 여러 가지 신비로운 일을 많이 했다는 경비병의 말에 얀스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진 느낌이었다. 예전에 레오 박사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파르코가 항상 자기의 뒤에 있었는데... 지금 파르코는 이곳에서 아주 탄탄한 실력을 자랑하는 고위 인사가 아닌가?

  이제 얀스의 눈에 파르코는 단순히 고향 친구가 아닌 넘어야 할 경쟁자이자 피해야 할 감시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을 뛰어 넘는, 어떤 마법까지도 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파르코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사자의 심장'은 분명 맨츠 벌판 어딘가에 떨어졌을 것이고, 퓨그의 황제인 호크런이 차지했기에 지금의 호렌 세상 모두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 유성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퓨그의 수도인 디퍼슨으로 가야하고, 그러려면 우선은 코르를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다.

 

  

  복장을 갖추고 짐을 챙겨 성으로 간 두 사람은, 한즈에서 내려온 남자 군인들과 코지의 여군들이 함께 도열해 있는 큰 홀로 들어가 맨 앞에 서서 총독과 파르코를 기다렸다. 

  하멜은 뒤에 있는 군인에게 몇 마디를 건네보고는 대화가 통하자 신기하다며 킥킥거렸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얀스가 보기엔 영락없는 철부지였다. 그런 철부지 하멜은 지금 이 순간, 얀스가 뭘 걱정하든 오직 미모의 대장과 제대로 인사를 나눌 생각 뿐이었다.

 

  잠시 후, 총독과 파르코가 호위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들어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엔 그 대장이 보이질 않았다. 

  파르코는 총독에게 표류인을 이끌고 한즈로 떠나겠노라고 말했고, 총독은 파르코에게 잠시지만 머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공손히 물었다. 서로가 서로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으로 봐서,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존경하고 있는 듯했다.

  

  총독은 얀스에게도 다가와 한즈로 가면 파르코 장군이 잘 보살펴줄 것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말했고, 얀스는 그동안 편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짧은 작별을 마치고 얀스와 하멜은 파르코의 사령선인 노리브(Norivv)호에 몸을 맡겼다. 배에 오르기 직전까지 하멜은 계속 두리번거리며 대장을 찾아보았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자 속으로만 아쉬움을 달랬다.

 

  

  코지섬의 부두를 떠나 한즈로 향하기도 잠시, 갑자기 비둘기 여러 마리가 날아와 저 위에서 끽끽 소리를 내다가 이내 갑판 위에 내려앉았다.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에는 작은 주머니가 묶여있었고, 그걸 풀어서 종이를 꺼낸 병사는 곧장 파르코에게 가져왔다. 파르코는 서신을 읽다 말고 이를 부드득 갈며 거칠게 말했다.

  “모든 대원은 들어라. 지금 동해에 쳐비(Chubbie's islands)의 해적 놈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곧장 그리로 출격하여 놈들을 물리치고 난 뒤에 한즈로 귀환할 것이다! 지금부터 모두 전투 태세에 돌입하고, 전함은 속도를 최고 출력으로 올리도록 하라!!!”

  파르코의 명령에 모두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얼떨결에 하멜과 얀스만이 따돌림(?)을 당해 갑판의 한 켠에 남은 듯했다. 그 와중에도 얀스는 코르군이 어떤 식으로 전투를 준비하는지 유심히 살폈다. 반면에 하멜은 해적이라는 말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거꾸로 솟은 피가 한 바가지 정도는 자기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온 상태였다. 주먹을 불끈 쥐며 남는 활과 화살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려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얀스는 하멜의 팔을 붙들며 아직은 좀 참으시라고 속삭였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얀스가 말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턱이 없는 하멜이었기에, 그저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잠시 울분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너무 답답하고 비참하기만 했다.

  

 

  노리브호는 하멜이 타고 온 스페르(Sperr)호보다 크기가 좀 작았다. 돛의 크기도 작고 개수도 적은데 속도는 훨씬 빠르니, 역사상 최강의 범선인 스페르호를 설계하고 건조했다는 자부심으로 늘 당당했던 얀스로서는 솔직히 왕자를 쳐다보기에 민망하기도 했고, 왜 이 배가 더 빠른지 그 이유도 무척 궁금했다.

  파르코에게 직접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얀스는 그냥 배 안이나 좀 둘러보겠다고 쭈뼛쭈뼛 말하며 어설픈 걸음을 슬슬 옮겼다. 예의상 같이 가겠냐고 왕자에게 말은 했는데, 오히려 하멜은 먼 바다를 계속 노려보느라 얀스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얀스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 배의 앞부분부터 살펴보았다. 그러나 스페르호와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는 없었기에 얀스는 배의 중간 부분도 자세히 둘러보았다. 여기서도 흔히 보는 보통 범선의 구조와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결국 바람을 받는 돛 말고 다른 어떤 장치가 더 있을 거란 추측이 들어, 얀스는 곧장 배의 뒤편으로 갔다. 

  그 끝은 막혀있었고, 여기서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더 내려가니, 설마 했지만 얀스가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있었다.

  

  우람한 황소 몇 마리가 큰 나무통을 돌리고 있었고, 나무통에서 연결된 둥그렇고 굵은 기둥은 몇 단계의 중간 장치를 거치며 차츰 속도가 더 빨라져, 마지막 기둥는 배의 끝부분을 뚫고 밖으로 연결되어 뻗어 있었다.

  바로 나사 회전체를 이용한 변속장치였다!

  바람이 약해도, 노를 젓는 군사들이 적어도, 배가 빠르게 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콕센(Coxen)에서는 레오 박사와 얀스가 처음 이 장치를 고안했고, 지하의 물을 끌어올리거나, 풍차를 돌려서 곡물을 빻고 농작물을 잘게 갈아주는 기구로 실용화하고는 있었지만, 차마 전함의 추진장치에까지 응용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 했었다. 그런데 파르코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개발해 이처럼 뛰어나게 적용하고 있었다니...

 

  얀스는 살면서 한 번도 자신보다 탁월한 과학자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늘 남들보다 한 차원 앞서 있었고, 그런 능력을 이해하는 사람은 스승인 레오가 유일했었다. 

  그런데 그런 얀스의 자부심은 지금 이 순간, 바다에 가까이 쌓은 모래성이 한 순간에 파도에 휩쓸리듯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얀스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잠시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나선체의 원리를 이용해서, 물을 끌어올리는 기구나 헬리콥터 같은 장치의 스케치를 남겼음. 실제로 나선체의 스크류가 선박에 적용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임.

 

  한편, 

  시간이 지나도 얀스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하멜은 직접 배 안을 뒤지고 다녔다. 그런데 우연히 배의 뒤편으로 내려간 하멜의 눈에, 어떤 병사가 몰래 무엇인가를 염탐하는 게 보였다.

  어둑한 상황에서 갑자기 긴장이 된 하멜은 소리없이 첩자의 뒤를 밟았다. 그리 큰 덩치의 군인은 아니어 보였다. 가만 보니 그는 저 앞에 있는 누군가를 주시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얀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얀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저기서 그냥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얀스가 저 병사의 독침에 맞은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난 하멜은 조금씩 그 병사와 거리를 좁혀가다가... 순식간에 뒤에서 그를 덥쳤다. 그리고는 양 팔로 꽉 안아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쿵~ 소리를 내며 둘은 몇 바퀴를 굴렀다. 

  그런데 그는 왜소한 체격과는 달리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멜은 그와의 힘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젖먹던 힘을 다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얀스는 바로 달려왔고, 하멜이 엎드려있자 “앗? 왕자님?”이라고 놀라서 나지막이 소리쳤다. 하멜은 얀스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우선은 자신의 다리로 그가 양 다리를 못 쓰도록 계속 조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잠시 후, 

  그는 순간 의식을 잃은 듯하며 몸이 축 늘어졌다. 

  얀스는 하멜이 누군가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확인하자, 손을 입에 훽 가져갔다.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걱정하며, 그의 정신이 깨있는 건지 뺨을 몇 번 때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기절해있었다.

  그때 하멜의 손에 불룩한 무언가가 잡혔다. 여자의 탱탱한 젖가슴을 움켜쥔 느낌이었다. 

  움찔하며 하멜이 쓰러진 그를 돌려보니... 이런!!! 그는, 아니 그녀는... 바로 코지의 대장이 아닌가?!

  이마의 문신은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콧수염을 붙였으며 복장도 남자 병사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미모의 그 대장이었다.

 

  잠깐 의식을 잃어 눈을 감고 있어도, 반듯하고 짙은 눈썹, 도톰한 입술과 뽀얀 살결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하멜은 당장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얀스는 대장의 뒷통수와 몸을 더듬으며 다친 정도나 어떤 무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어디 크게 다치지는 않았소, 얀스?” 하멜은 걱정이 앞서 다급하게 말했다.

  “쉿!” 얀스는 목소리를 낮추라고 눈치를 주며 괜찮을 것이라는 손짓만 내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뒷목을 움켜쥐며 찡그린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하멜은 순간 착각해서 미안하고 어쨌든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얀스가 날카롭고도 낮은 목소리로 어찌된 것이냐고 따져 묻는 바람에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사실대로 말할 테니 전함의 병사들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부탁을 먼저 했다. 진실을 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얀스가 말하자 그녀는 우선 자리를 좀 옮기자며 조용히 둘을 데리고 함장실 옆의 창고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항아리 몇 개와 여러 가지 짐이 쌓여 있는 좁은 방이었다. 숨을 한 번 내뱉은 그녀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코지섬의 총독 완저(Wanzer)의 외동딸인 하이란(Hiran)입니다. 나이는 18살이고 지금은 코지군의 돌격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오, 저랑 동갑이군요!" 하멜이 반갑게 말했다. 하지만 얀스가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눈치를 주자 하멜은 이내 입을 닫았다.

  "아, 그러신가요?" 하이란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 얘긴 중요하지 않고, 어째서 이 배에 타게 된 것이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어온 것 같은데...” 얀스는 아주 냉정하게 따져 물었다.

  “성함이... 얀스 선장님과 수습 선원 하멜이 맞으시지요? 파르코 장군님께 미리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모든 걸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이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얀스와 하멜은 약간 안심이 되었는지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코지(Cozee)는 사실 코르(Corr) 본토에서는 버려진 섬입니다. **한즈의 귀족들 중에 잘못이 있어 벌을 받는 사람들은 대개 코지로 유배를 보내지요. 그래서 코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본토에서는 사람 취급을 하지도 않습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본토로 보내져 노비로 살게 하고, 여자 아이는 평생 코지에서 살아야만 하는 게 이 나라의 법입니다.”

  “세상에 그런 나쁜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멜은 자기가 더 화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하이란이 가볍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하멜은 그 모습에 더 빠져들고야 말았다. 지금 자기가 제대로 얘기를 한 것인지조차 헷갈릴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왜 본토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오? 코지 출신인 것이 밝혀지면 아예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한다면서... 혹시, 한즈(Hanz)의 귀족을 만나 어떻게든 혼인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약간의 동정심이 어린 표정으로 얀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전 남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이란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하자 하멜은 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에......” 하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복수지요. 우리 조국의 원수인 퓨그의 황제에 대한 복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끊임없이 무예를 갈고닦았습니다.”

  “복수라... 처자의 무예가 뛰어난 것은 내 익히 알고 있으나, 혼자서 어떻게 복수를 한단 말이오?” 얀스의 질문은 단호했다.

  “저의 최종 목표는 호크런(Hawkrunn)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입니다. 그러니 코지섬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육지로 나온다고 복수를 할 기회가 주어지기는 한단 말이오?" 얀스가 말했다.

  "기회를 만들어봐야 하겠지요. 일단 호크런을 만나려면 우선은 일반 병사가 아닌 장교가 되어야 합니다. 매년 여름에 코르의 사신단이 공물을 가지고 적의 수도인 디퍼슨으로 가는데, 우수한 장교는 견학 차 이 일행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지금 저의 신분으로는 절대로 장교가 될 수 없기에, 어머니와 친분이 두터우신 파르코 장군님께 부탁을 드려서 선물 항아리에 숨어 이 배에 탄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장군님이 데려다가 키운 수하 중 한 사람으로 행세할 것이고, 당분간은 남장으로 살아갈 것이며, 이 일은 파르코 장군님만 알고 계십니다. 아, 이제는 여기 두 분도 아시는 겁니다. 어쨌든 저는 장교가 되는 기적 하나만을 바라며 한즈로 갑니다. 그러니 제발 저의 비밀을 발설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하이란은 애절하게 말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하멜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얀스는 냉정했다.

  

  “우수한 장교가 되면 디퍼슨에 갈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장교가 되는 것이오?”

  “장교를 양성하는 유일한 사관학교인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에 들어가 생도로서 성적이 아주 좋으면 사신단에 합류할 후보가 됩니다. 물론 최종 선발은 교수회의에서 하겠지만요.”

  “파르코는 아주 뛰어난 사령관이라고 하던데, 왜 그는 아직까지 사신단에 끼인 적이 없는 것이오?” 얀스는 집요하게 파고 들어갔다.

  “장군님은 해군이고 '이스트 포인트' 출신도 아닙니다. 사실 이 나라의 군권은 국왕 폐하가 아니라 이스트 포인트 출신 육군의 사조직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한즈에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사신단 말고 디퍼슨에 가는 다른 방법은 없소?“ 얀스는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여 맨츠 벌판을 탈환하고 디퍼슨을 함락시키면 모를까,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코르를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 아닌가요? 파르코 장군님께서도 두 분이 무역하는 상인들이라고 하시던데... 이미 타고 온 배도 침몰했고, 디퍼슨에는 무엇 때문에 그리 가려고 하십니까?” 차분하게 대답하던 하이란이 이번에는 오히려 당돌하게 캐물었다.

  “그건 자세히 알 필요 없소. 어쨌든 비밀은 끝까지 지켜 줄 테니, 처자도 우리에게 힘을 좀 보태주시오. 당연히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얀스는 딱 잘라 말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얀스가 자리를 뜨려 하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하멜은 어정쩡한 웃음으로 하이란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이란도 가벼운 미소로 답을 해주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하멜은 서둘러 얀스를 따라갔다.

 

 

  ** 제주도가 관광지로 변모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며, 예전에는 대표적인 유배지였음.

 

  *** 美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비교해도 생도들의 자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자신의 학교를 '이스트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           *           *

 

  쾅! 쾅! 둥 둥 둥~ 와 와~!!

  갑자기 북소리 대포소리가 진동했고 병사들의 함성도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멜과 얀스는 황급히 뛰쳐올라갔고, 하이란은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갑판 위의 제일 높은 곳에서 파르코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얀스는 망원경을 꺼내어 들었다. 

  저 멀리 돌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고, 거기서 조금 떨어져 유난히 파도가 거친 해역에는 수십 척의 해적선단과 코르의 전함들이 보였다. 대포 소리는 더욱 격렬하게 달아올랐고, 그만큼 해적들의 반격도 거세어졌다. 불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고 곳곳에서는 물보라가 솟구쳤다.

  얀스가 옆 병사에게 섬에 대해 물어보니, 코르 왕국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작은 섬인 '독트(Dockt)'라고 했다.

 

  노리브호는 그쪽으로 다가가며 더 먼 거리에서도 함포를 발사했다. 

  포탄에 정통으로 맞은 해적선은 폭발을 일으키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르군과 대등하게 전투를 벌였던 해적선단은, 노리브호가 출현하며 분위기가 바뀌자 잔뜩 겁에 질려버린 듯했다. 파르코 장군의 사령선 깃발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한편 얀스는 망원경을 계속 보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했다. 

  바람과 파도가 이토록 거센데... 돌섬 주위를 맴도는 갈매기들은 바람을 타고 비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저 근처에는 바람이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왜 저 섬 근처에만 바람이 없을까?

  

  하멜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알지 못 했다. 주위에 있는 활을 집어 들어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해적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다른 병사가 달려와 이를 말렸다.

  "놔! 놓으란 말이야!” 하멜은 병사의 팔을 뿌리치며 울분에 가득 찬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목걸이에 걸린 반지가 달아 오르며 자신의 심장을 태워 없애려는 것 같았다. 

  놀란 얀스가 왜 그러시냐고 속삭였지만, 하멜은 그저 몸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흐느끼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리브호가 다가갈수록, 화력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해적들은 부리나케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공격을 하던 대장 해적선도 치명상을 입어 불이 나면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배에서 탈출한 해적들은 바다에 빠져 살려 달라며 아우성을 쳤으나, 나머지 해적선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코르군 전함에서는 모두가 “만세! 만세! 파르코 장군 만세!”라는 연호와 함께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파르코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사태를 조금 더 주시했다. 파르코를 칭송하는 분위기에 얀스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발사 중지! 바다에 빠진 해적들을 건져 올려라. 부상자는 빨리 옮겨 치료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아 포박하라. 그리고 노리브호는 속도를 최고로 올려 즉시 한즈로 귀환한다!” 파르코는 전투를 종료하는 명령을 내리며 함장실로 향했다. 코르 전함의 군인들은 구조를 위해 소형 보트 몇 척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하멜이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앞으로 나서며 장군에게 따지듯 말했다.

  “왜 끝까지 쫓아가 모두 침몰시키지 않습니까? 왜 전부 죽이질 않느냐 말입니다! 저들은 코르의 어선을 공격하고 본토로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나쁜 해적 놈들이잖아요!” 하멜의 목소리는 분노에 젖어있었고, 감히 사령관에게 대들고 있는 어린 이방인을 병사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의 긴장감이 흘렀다.

 

  “너는 저들을 모두 죽이고 싶으냐?” 파르코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멜은 그렇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얀스는 옆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르코는 하멜에게 일단 자기의 방으로 오라는 말을 남긴 뒤 갑판을 내려갔다.

 

  잠시 후, 

  터벅터벅 함장실로 들어온 하멜에게 파르코는 앉으라며 자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바로 옆 창고방에 숨어있던 하이란은 중간문 가까이로 귀를 살그머니 가져갔다.

  “너도 해적에게 어떤 원한이 있나 보구나. 나도 저놈들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토록 모시던 왕자님을 잃지도 않았고, 이곳에 있지도 않았다. 해적만 아니었으면 네 상관인 얀스도 얼굴에 저런 흉터를 남기지 않았을 게다. 그것도 원한이라면 크나큰 원한 아니겠느냐?"

  "......" 하멜은 계속 듣겠다는 표정만을 지었다.

  

  "저들을 다 죽이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그럼 너의 원한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냐?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 법. 저 해적들을 봐라. 앞서서 공격하던 대장이 위기에 빠졌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모두들 꽁무니를 빼고 있지 않느냐? 그게 바로 쳐비의 해적 놈들이다. 의리도 없고 전략도 없고 체면도 없는, 얼마나 미개한 족속이냐? 하지만 주동자가 아닌 일반 병사들의 목숨마저 가차 없이 거둔다면, 우리도 저들과 별 차이 없이 미개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지금은 해적질로 먹고 살지만 훗날 저들도 우리 코르와 같이 품위있는 문명을 배우게 된다면 아마도 행동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주 밉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명심하거라.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파르코는 하멜에게 마음을 좀 더 다스리라는 얘기를 해주며 등을 툭툭 두드린 뒤 함장실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하멜은 더 크게 흐느꼈다. 그러다 창가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원수 놈들!! 흑흑... 아버지! 아버지!!”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다.

 

  *          *          *

 

  수평선에는 붉은 노을이 서서히 피어올라 하멜의 몸마저 붉게 물들였다. 

  몸과 마음이 지친 하멜은 함장실을 나와 선실로 가려고 돌아서다 그대로 서있는 하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겁니까?” 거짓말을 들킨 소년처럼 하멜은 움찔했다.

  “아버지가 해적 때문에 돌아가셨나요?” 다정한 목소리로 하멜에게 말을 거는 하이란의 눈도 사실은 좀 젖어있었다.

  “예? 아, 예... 해적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아주 어렸을 때요. 그런데 그쪽은 왜 울먹이는 거죠? 그쪽의 아버지도 해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그쪽의 아버지는 해적 때문에 돌아가셨다지만, 내 아버지는 역적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나도 아주 어렸을 때요. 어떤 역적 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원수을 꼭 갚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아까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니, 뭐가 뭔지 좀 혼란스럽네요.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는 말... 물론 맞는 말이겠죠. 하지만 만약 내 눈앞에 아버지의 원수가 나타난다면... 그땐 저 파르코 장군님처럼 침착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후~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했죠... 언제까지 어떻게 참고 기다리면 내 안의 증오가 사라질까요?” 파르코의 얘기를 되새기며 하멜이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증오가 사라지고 세상이 더 밝아질 수 있는 해답 말이에요.” 하이란도 먼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후 둘은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었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 돌아가셨다는 각자의 아버지를 그리며, 둘은 서로에게 왠지 모를 애틋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            *            *

 

  “이름이 하멜이라고 했느냐?!” 주름이 깊게 파인 노파가 음흉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 그렇소. 당신은 대체 누구요?” 겁에 잔뜩 질린 하멜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강한 기운이 너에게 잔뜩 배어있구나. 최근에 어디에 다녀온 것이 틀림없겠는데...?!”

  “어디? 어디라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오??” 하멜은 순간 갤라산 지하가 생각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거라... 넌 분명 사람이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다 왔어!!!”

  “아, 아니라니까?!” 하멜은 계속 시치미를 떼었다.

  "후후,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리고 코르에 오기 전에 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지?”

  “뭐, 특별? 아니오. 난 그냥... 그냥... 선원이었다고...” 노파의 예리함에 놀란 하멜이 얼버무렸다.

  “그냥 선원? 아닐 텐데... 어디서 감히 내 눈을 속이려고... 나는 너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데... 흐흐흐흐...” 소름끼치는 노파의 목소리에 하멜의 심장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안돼...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

  ...

 

  “아!”

  식은땀에 흠뻑 젖은 하멜이 눈을 떴다. 가슴에는 아직 통증이 남아있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았고, 저쯤에서 얀스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맛있게 잠에 취한 상태였다.

  ‘악몽을 꾸었구나... 왜 그랬지? 이 꿈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혹시 어떤 불길한 징조는 아닐까?’ 하멜은 많이 불안했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말이 좋아 표류인이지, 결국 지금 나는 생판 모르는 곳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네론은 지금 어찌 되어 가고 있을까? 나마저 잃어버린 불쌍한 할아버지... 내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충격이 꽤 크셨을 텐데... 건강은 괜찮으신 걸까? 언제쯤 어떻게 나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다들 편하게 쉬는 이 시간에도 오직 하멜만은 속으로 가뿐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목젖을 애써 재우려 하였다.

 

  *           *           *

 

  여명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 노리브호는 코르 왕국의 서해에서 한즈로 들어가는 브로(Bro)강 어귀에 다다랐다. 폭이 아주 넓은 큰 강이었다. 계절은 겨울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날이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코지섬 근처에서 발원하는 남풍 마프(Marp) 때문이라고 했다.

 

  노리브호는 유유히 육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류를 거슬러 강의 중류로 들어가자 중간에 수목이 우거진 평평한 섬이 하나 보였다. 이 섬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뿜어내는 오묘한 향기에 온갖 철새들이 보금자리로 삼는 *향기섬(Balm island)이라고 했다. 정말 근처를 지나니까 처음 맡아보는 신비로운 냄새가 코끝에서 진동을 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눈이 맑아짐을 하멜은 느낄 수 있었다.

 

  새 중에는 네론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학도 수십 마리 눈에 띄었는데, 그들이 하늘로 고고하게 날아오르는 자태를 본 하멜은 갤라산 지하 세계가 떠올라 적잖이 흥분되었다. 

  학의 날개가 사람의 팔로 변하는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저 학처럼 가벼운 날개가 있다면 하늘을 훨훨 날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사자의 심장'이 있을 호크런의 성 주위에는 유성의 힘으로 인해 혹시 인간이 저 학처럼 날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섬을 지나 더 들어가니 코르의 해군 기지가 있는 항구가 나왔고, 노리브호는 이곳에 정박했다. 배에서 내린 파르코와 일행은 국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곧장 향했다.

  

  생김새가 다른 표류인이 왔다는 소문이 이미 번졌는지, 길가에는 한즈의 많은 백성이 나와서 얀스와 하멜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형편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어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일행을 계속 따라다니며 손을 흔들어 반기기도 하였다. 하멜은 이들의 환영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낭만에 젖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코르의 국왕을 알현했을 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에 대한 긴장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한 시간쯤 더 걸어 파르코와 일행은 코르의 왕궁인 **프로스(Pross)궁에 도착했다. 

  하멜은 자기가 살던 슈반궁의 화려함을 떠올렸지만, 프로스궁은 그렇지 않았다. 궁전을 치장하는 고가의 황금이나 보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궁전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 못했다. 코르가 얼마나 많은 공물을 호크런에게 바치고 있는지, 퓨그의 식민지로 전락한 코르의 몰골이 얼마나 참담한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 한강의 밤섬을 모델로 함.

  

  ** 창덕궁을 모델로 함.

 

  

  6. 미간의 도장

 

  도르반은 황제가 지시한 대로 비밀 기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방엔 눈이 가득하지만, 깊은 산 계곡의 동굴로 들어가니 공사를 하느라 훈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엄청나게 큰 지하의 공간에서는 또 다른 세계가 서서히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희생은 맨츠(Mantz) 벌판과 지안(Jiaan) 대륙에서 데려 온 수많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고된 작업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나갔지만 도르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완성을 재촉하는 그의 매질은 더 사나워졌다.

 

  외부의 지원 없이도 수개월을 버틸 수 있는 식량 창고와 무기고, 병사들의 숙소도 건설되었다. 불곰과 늑대들을 가둘 큰 우리도 수십 개나 완성하고 있었다.

  노예의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코르군의 옷을 입혀 바로 짐승에게 던져주라고 도르반은 명령했다. 더욱더 잔인함을 길러야 코르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도 말했다.

  

  한편, 도르반의 심복인 대령 카오핑(Kaoping)은 지안 대륙으로 내려가서 예전 바르티 제국의 해군 출신들을 찾아다녔다. 호크런에게 겁을 먹어 모두 대륙의 남쪽 끝으로 숨어버렸기에, 그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지안 대륙 자체가 찬 기후로 바뀌었기에 쳐비의 해적들도 굳이 호크런의 영토를 넘보지 않아서 바다를 방어할 필요가 없던 퓨그 제국은, 사실 해군의 씨가 거의 마른 상태였다.

 

  그러나 코르의 바다를 완전히 정복하는 조건으로 파격적인 승전의 대가를 약속하자, 물에 익숙하고 전투에 밝은 인재들이 하나 둘 카오핑의 밑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대륙의 동쪽 해안선 항구에서는 파괴된 시설도 복구되면서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는 작업에도 탄력이 붙었다. 힘없는 백성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지만, 싸움 하나만 잘 하면 얼마든지 출세를 보장해주는 게 호크런의 방침이었다. 

  이제는 냉혈족이 아닌 지안과 맨츠의 과학자와 군인들도, 철저히 황제 호크런만을 위한 용맹한 전사로 변하고 있었다.

 

 *            *            *

 

  파르코는 표류인을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단상에는 국왕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대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얀스와 하멜은 최대한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국왕의 재판 결과에 따라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대신들의 시선은 정작 국왕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대장군 에반(Evan)에게 쏠려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그가 걸친 갑옷은 다른 어느 장군보다 더 화려했다. 그의 근처에 놓여있는 나무기둥 위에는 짙은 갈색의 깃털을 가진 송골매 하나가 있었는데, 그놈은 처음부터 매서운 눈으로 얀스와 하멜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에반의 표정 또한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파르코는 그런 에반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먼저 왕에게 예를 올린 후, 코지섬에 내려가서 표류인을 조사한 내용과 해적들과 교전을 벌인 일에 대하여 간략하게 보고를 하였다. 이들이 무역을 하러 다니다가 방향을 잃고 폭풍우를 만나 코르에 난파했다고 말하자 얀스와 하멜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타고 온 배의 규모나 인원은 어떠했소?” 에반의 옆자리에 있던 장군 나리프(Nariff)가 파르코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범인 추궁하듯 질문을 내뱉었다.

  “이미 침몰하여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큰 돛대를 세 개 가진 범선으로 규모 면에서는 우리 코르의 전함보다 더 대형으로 판단되었소. 승선 인원 60여 명은 풍랑과 난파 때 모두 익사하였고, 겨우 살아남은 선장과 수습선원인 이 둘을 데려온 것이오.” 파르코는 조목조목 얘기를 했다.

  “무역을 하러 돌아다니는데, 거대한 배에 승선 인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니 좀 이상하지 않소, 파르코 장군? 저들이 장군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지금 은근히 두둔하려는 것 같은데, 장군의 이마에는 이미 코르의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오!” 역시 에반의 측근인 장군 토리크(Torik)가 성을 잔뜩 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있겠소? 바다의 아주 멀리까지 나가 무역을 하다 보면 중간에 해적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 상선이 아닌 전함을 타고 군인도 승선하는 것 아니겠소?” 토리크의 다그침에도 파르코는 아주 논리정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자 나리프와 토리크는 혀를 차며 경멸의 눈빛으로 파르코를 노려보았다.

  그때 갑자기 에반의 옆에 있던 송골매가 “꺄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하멜에게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하멜을 쥐어뜯으려 하자, 순간 얀스는 팔을 휘저으며 하멜을 감쌌다. 근위병들도 놀라 달려오자, 송골매는 잠깐 위로 날아올랐다.

 

  가장 연장자인 최고 대신 탐피(Tamphi)가 앞으로 나서며 “이게 대체 무슨 난리요, 에반 대장군??!!”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에반은 탐피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태연히 “어허, 빌로(Veelo)!”라고 점잖게 말했다. 그러자 그 송골매는 다시 에반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국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탐피는 스스로 하멜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얘야, 괜찮은 것이냐?” 손주를 쓰다듬는 할아버지처럼 다정한 말투였다.

  “예? 아, 예......” 하멜은 순간 네론에서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할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말을 더는 잊지 못 했다.

  “아니, 폐하께서 계신 대전에 개인용 매를 데리고 오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추태까지 부린단 말이오, 에반 대장군?” 탐피는 고개를 돌려 에반을 쳐다보며 꾸짖엇다.

  “이제는 연세가 너무 많이 드셨는지 눈도 아주 흐려지셨군요. 송골매도 다 보는 것을 이 나라의 최고 대신이라는 분만 못 보시니 말입니다. 저 아이에게 뭔가 찜찜한 구석이 보이니 빌로가 미리 경고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에반은 느긋하게 말하며 늙은 탐피를 조롱했다.

  “폐하께서 보고 계신데, 연로하신 최고 대신님께 그 무슨 말씀이시오, 에반 대장군?!” 파르코도 약간 언성을 높였다.

  “연로하니 그만 댁에 가서 쉬시라는 것 아니겠소? 파르코 장군은 왜 이리 말길을 못 알아들으시오? 해적들을 다 죽이지는 못 하고 바닷바람만 너무 쏘이셨나?” 나리프가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 파르코가 거칠게 말했다.

  “뭐가??!!” 토리크도 그대로 받아쳤다.

  양 측의 분위기가 거칠어지려 할 때, 국왕이 그만 하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가까이 데려오라.”

  국왕의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대전을 달구었던 잠시의 소음은 이내 가라앉았다. 왕명을 접한 근위병들은 재빨리 움직여서, 얀스와 하멜의 팔을 잡고 옥좌가 있는 단상의 계단 앞까지 안내하였다.

 

  "고개를 들게 하시오." 왕의 옆에 있던 늙은 내관 로야리(Loyari)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근위병이 둘에게 눈치를 주었다.

  얀스와 하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얀스는 국왕을 쳐다보다 공손하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국왕과 시선을 마주쳤다. 온화한 첫인상이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반면 하멜은 국왕의 얼굴을 잠깐 보다, 오히려 그 뒤에 놓여진 큰 병풍 그림에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화폭을 채웠고, 파란 하늘의 좌측에는 하얀 보름달이, 우측에는 붉은 태양이 동시에 떠 있었다. 산과 산 사이의 계곡으로는 폭포수가 흠씬 떨어졌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들이 많았다. 높은 파도가 철썩이는 장면도 있는 꽤 화려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하멜이 슈반(Schwann)성에서 늘 보던 세밀한 풍경화나 인물화와는 분위기부터 많이 다른, 아주 추상적인 것이었다. 

  물론 얀스의 눈동자도 이미 단상 위의 모든 것을 예리하게 다 훑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왕이 어떤 처분을 내릴지에 대해서만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하멜의 눈동자는 계속 그 그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시뻘건 태양과 흰 보름달을 동시에 그려 넣은 그림이 다 있다니... 태양이 이글거리는데 달이 어떻게 보여? ... 그리고 그걸 공식 행사가 열리는 이 대전에 당당하게 갖다 놓고... 여기 국왕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좀 유별난 미술 취향이 있나보군.’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졸작이란 느낌이 하멜에겐 앞섰다.

 

  그런데 가만 보니 약간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그림 속의 풍경과 비슷한 것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저기 저 푸른 다섯 봉우리... 낯설지가 않아. 내가 어디서 보았었지? 꿈에서였나? 분명 어디서...... 어디서 봤더라...... 아, 그래! 갤라산 지하에서! 그 지하 세계의 노인이 처음 서 있던 바위 단상의 뒤편에 살짝 솟아있는 언덕도 저 그림처럼 딱 다섯 개였어. 맞아, 정말 똑같이 생겼네??’ 순간 하멜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살짝 들어 그림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게 큰 실수였다.

 

  “아니, 저런 무엄한 놈을 봤나?? 감히 폐하께 삿대질을 하다니!!” 갑자기 장군 토리크가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파르코도 하멜의 무례한 행동에 어쩔 줄을 몰랐고, 고개를 돌려 하멜을 쳐다본 얀스는 황급히 하멜의 손을 잡아내렸다. 얀스의 입은 바짝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하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얼떨결에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 이 아이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잘 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니 제발 선장인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얀스가 머리를 먼저 바닥에 박으며 애원했다.

  “폐하, 저 아이의 건방짐을 똑똑히 보셨습니까? 이래서 신이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난다고 한 것입니다. 어차피 상인들이라면 우리 코르에 도움이 될 것도 없으니 그냥 이 자리에서 처형을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쾌한 표정을 내뿜으며 에반이 거칠게 말하자, 근처에 있는 수하들이 맞다며 동조를 했다.

  

  “폐하, 신이 데려왔으니 신이 먼저 죄를 추궁하겠사옵니다.” 파르코가 불쑥 나서며 일단 에반 측의 반발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어허, 파르코 장군. 장군은 지금 저 녀석의 행동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장군 나리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파르코는 손을 들어 잠시만 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이제는 국왕만을 쳐다보았다.

 

  일단 한숨을 돌리도록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국왕은 넌지시 파르코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파르코는 감사의 예를 표한 뒤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어린 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도대체 네 놈은 무슨 생각으로 감히 폐하의 앞에서 손가락을 든 것이냐?!” 파르코는 하멜을 꾸짖으며 언성을 높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실은 폐하를 가리킨 게 아니였고, 그 뒤에 있는 그림을 어디서 본 듯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하멜은 바르르 떨며 말을 꺼냈다.

  “그림? 폐하의 용상 뒤에 놓여진 저 병풍을 말하는 것이냐?”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최고 대신 탐피가 말했다.

  “네? 아, 네......” 하멜이 겨우 대답했다.

  “네가 전에 *솔루노픽스(Solunopeaks)를 보았다고? 이런 발칙한 놈이 있나?! 지금 어디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게냐?! 저 그림은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 코르에만 있는, 폐하를 상징하는 가장 존엄한 병풍이거늘, 어디 감히 너 같은 이방인 따위가 솔루노픽스를 입에 담느냐??!!” 칼을 반쯤 뽑아든 나리프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아니 잠깐, 저 그림을 어디서 보았다는 말이냐?” 파르코가 손을 들어 나리프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게... 그게... 저도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코지섬에 난파한 이후에... 이후에... 아마도 꿈에서 저 그림과 비슷한 산봉우리 다섯 개를 본 것 같습니다.” 하멜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주저리주저리 둘러댔다.

  “후후, 꿈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림인데, 코르에 들어오니 자신의 꿈에 바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너야 말로 이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요물이 틀림없구나!”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골매 빌로(Veelo)가 "꺄악~~!!"하고 괴성을 한 번 더 내질렀다.

 

  “보셨습니까, 폐하? 두말할 것도 없이 저 놈은 우리 코르를 넘보려고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악의 세력의 수하가 분명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처형을 하시어 후환을 없애시옵소서!” 토리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자 파르코가 국왕 앞으로 조금 다가가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폐하, 잘못이 있다고는 하나 이미 포로의 몸이 된 자입니다. 우리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는 민간인인데, 후환이 두려워 서둘러 죽인다면 백성들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이들을 감시하고 교육시킬 권한을 신에게 잠시 맡겨 주시옵소서. 만약 이들이 추후에도 이와 같은 죄를 다시 짓는다면, 그때는 신도 이들과 함께 모든 벌을 달게 받겠사옵니다.”

  “파르코 장군의 주청이 옳사옵니다, 폐하. 우선은 지금 미간에 도장을 찍고, 이후 어떤 잘못이 생기면 그때 벌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탐피 총리도 파르코를 거들었다.

  그러자 양 측 사이에서는 다시 설전이 잠시 오갔다.

 

  한동안 듣고 있던 국왕은 점잖게 에반을 달래며 이마에 인장부터 새겨보자고 설득했다. 그런 왕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에반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 일월오봉도

 

 

  코지의 원주민이 거석상 앞에서 의식을 진행할 때 나왔던 그런 종류의 음악이, 대전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향기섬(Balm island)을 지날 때 맡았던 것과 비슷한 향냄새도 실내를 자욱하게 물들였다.

  대전의 중간을 대신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근위병들은 나무 침대 두 개를 가운데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얀스와 하멜은 그 침대 위에 바로 눕혀졌다.

 

  주술을 담당하는 노파가 긴 겉옷을 질질 끌며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얀스는 그냥 편안하게 누워있는 척하면서도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뭐 특별한 것이 없자 얀스는 그냥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모든 걸 체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하멜은 살짝 고개를 들어 노파를 한 번 쳐다본 뒤 깜짝 놀랐다.

  ‘앗? 꿈에서 보았던 그 노파다!!!’

  하멜은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목걸이 반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돌덩어리 하나를 올려 놓은 아주 괴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왕이나 에반에게 어떤 허점이라도 보이면 안 되는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에, 어떻게든 내색을 하지 않고 참아내고 싶어 하멜은 그저 이만 악물었다.

 

 

  문득 불쾌한 주문 소리가 들렸다. 노파가 팔을 들고 계속 뭐라고 씨부렁대었다. 

  하멜은 짜증이 났지만, 살려면 그저 인내하고 기다려야 했다. 전에 파르코 장군이 참고 기다리는 인내에 대해서 한 말도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 하멜은 그냥 그런 인내를 한 번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노파는 앞 탁자에 놓인 조그만 상자를 열었다.

  시꺼먼 거머리 한 마리를 꺼낸 노파는, 그걸 자기 눈 가까이 가져가서 또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덜컥 겁이 난 하멜은 눈을 잔뜩 찡그리고 두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얀스는 이 모든 과정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중얼거림이 끝나자, 노파는 먼저 얀스의 이마에 그 거머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침묵을 하던 거머리는, 노파가 다시 주문을 외우자 이내 꿈틀대기 시작했고 몸에서는 푸른 빛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얀스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얀스는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만 있었다.

 

  잠시 후 푸른 빛이 차차 바래지며 다시 거머리가 까매지자, 노파는 그걸 집어 도로 상자에 넣었다. 어느새 얀스의 미간에는 파란색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노파가 다른 거머리를 같은 방식으로 하여, 하멜의 이마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역시 잠시의 침묵이 흘렀고 거머리도 탐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하멜은 갑자기 깨질 듯한 두통을 호소하며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노파는 이상하게 쳐다보았고 일부 장군은 다 큰 놈이 겁은 엄청 많다며 놀려댔다.

 

  갑자기 거머리도 얀스 때와는 다르게 격렬하게 꼬물거렸다. 푸른 빛도 나오다 말다 하다가, 갑자기 검은 연기가 나며 거머리가 그대로 하멜의 이마 위에서 타 죽었다.

  모두가 놀라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하멜은 오히려 두통이 사라졌는지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된 일이냐고 에반이 흥분하자, 당황한 노파는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말하며, 거머리를 또 올려놓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얀스의 이마엔 파란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졌지만, 하멜에겐 엉성한 흔적만이 남아버렸다.

  그러자 빌로의 고약한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에반도 도대체 이유가 뭐냐며 거칠게 노파를 다그쳤다. 주위의 장군들도 역겹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일시에 하멜에게 날려보냈다.

  노파는 계속 안절부절 못 하며 자기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는 말로, 국왕과 에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주름살부터 찌푸렸다. 엎지러진 물을 자기가 모두 수습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노파는 냉큼 하멜에게 다가왔다.

 

  "코르에 오기 전에 너는 대체 누구였느냐?" 노파가 날카롭게 말했다.

  "예? 저, 저는 그냥 돈을 받고 배에 승선한 수습선원이었습니다." 하멜이 둘러댔다.

  "그래? 코지에서 군인들의 추적을 피해 어딘가에 숨었다가 나오는 길에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그곳이 어디였느냐?"

  "어디요? 그건 잘 모르겠고 그냥 어느 동굴에 숨었다가 허기를 참지 못해 나오던 길에 들켰나 봅니다."

 

  노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머리가 타죽을 정도로 몸에 강한 기운이 있다는 건, 신령스럽거나 신들린 영역에 하멜이 가깝게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왕에게 보고했다.

  요즘 코지의 총독인 완저(Wanzer)가 원주민들을 부추켜서 무슨 석상을 만들고 굿판을 자주 벌인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코지가 혹시 귀신들린 땅으로 변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말도 했다.

  분명 이 아이는 코지에서 귀신이 들렸거나, 아니면 전부터 귀신에 들린 것이 틀림없다는 말도 했다.

 

  그러자 에반은 예상했던 대로 하멜이 부정한 요물이라며 당장 죽이자고 거듭 재촉했다.

  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얀스는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하멜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하멜도 얼떨결에 얀스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왕자의 체면 따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우선 살고 보는 일이 급했다. 저 간악한 무리들이 어떤 비아냥으로 우릴 추하게 쳐다 본들,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국왕의 선처만 있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얀스는 콕센에서 살 때 일찍 죽은 하멜의 부모가 궁정의 모든 의식을 담당하는 주술사이자 무당 출신이었고, 고아로 외롭게 자란 하멜도 늘, 뜻 모를 주문을 외우는 습관이 있어,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라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코르의 생활에 적응하다보면 그 기운이 차츰 사라질 것이니, 제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도 애원했다. 파르코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며 국왕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에반의 측근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지금 즉시 처형하라고 건의를 했지만, 탐피 총리가 다시 한 번 나서며 저들에게 시간을 좀 주자고 말하자, 에반과 수하들도 최고 대신인 탐피에겐 더 이상 모욕적인 말을 꺼내지 못 했다.

  탐피의 지원을 반긴 국왕은, 하멜이 아직 어리니 감시를 철저히 하면서 좀 더 지켜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런 국왕의 태도에 에반의 미간은 강하게 찌그러졌다.

 

  ‘좀 변했군...’

  예전엔 자신의 말에 왕이 꼼짝도 못했는데, 요즘 들어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상황을 에반은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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