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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이스트 포인트
작가 :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19.9.3

* 美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비교해도 생도들의 자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자신의 학교를 '이스트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집필 의도>

 1653년, 무역선을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태평양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젊은 선원 하멜은, 뜻하지 않게 제주도 근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들과 함께 강제로 조선에 억류됩니다.
이후 하멜은 조선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그 기록을 토대로 소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 반영하듯, 당시 '하멜 표류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발명품이 포함된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잡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에,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나오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어떤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오는 비행기나 낙하산도 판타지 안에 넣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넘보려는 일본의 탐욕에도 일침을 가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네덜란드의 왕자 하멜과 조선의 공주 하이란이 결혼을 하는 로맨스로 결말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3화><4화>
작성일 : 19-09-03 15:05     조회 : 202     추천 : 0     분량 : 2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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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상한 사슴

 

  세상이 빙빙 돌았다. 제대로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사슴은 이미 멈추었지만 하멜의 눈동자는 한참 동안 혼란스러웠다.

  기진맥진한 하멜은 사슴의 등에서 내려 잠시 거친 숨을 헐떡였다. 주위를 보니 아까 건넜던 통나무 다리 근처까지 와 있었다. 일단 대장은 따돌린 게 맞는 것 같았다.

 

  ‘얀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있기는 한 걸까? 원주민이 화살을 쏠 줄은 몰랐는데... 저들은 과연 해적이 맞는 걸까? 그렇다면 얀스를 죽였을지도 몰라...’ 걱정과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 외톨이가 된 하멜이 믿고 의지할 것은 이 사슴 밖에는 없어 보였다.

  하멜은 어쨌든 고맙다는 표시로 사슴의 등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껴안았다. 사슴도 하멜과 포옹하는 것이 좋았는지 몸을 슬며시 비볐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하멜의 손에 걸렸다.

  사슴의 털 사이에 얇은 목줄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금반지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때가 많이 타기는 했지만 순금으로 만든 반지임을 하멜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군데 군데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사슴의 목에 감았지?' 하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김을 불어넣고 옷깃으로 때를 닦아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평범한 사람이 끼는 반지 같지는 않았다.

  가운데에 가장 큰 초록 빛깔의 보석이 있었고, 원 둘레를 따라 삐뚤빼뚤하게 작은 보석이 몇 개 더 있었다. 에메랄드라고 하기엔 색이 좀 약하고 페리도트라고 하기엔 좀 진했다. 그리고 보석과 보석 사이는 직선으로 가는 금을 그어 연결해 놓았다.

  콕센에는 없는 새로운 보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원주민들의 주술이 담긴 문양이라는 짐작은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를 쫓은 원주민 말고 다른 누가 여기서 사슴을 사육하고 있다는 말인가?’

  하멜은 사슴에게 “넌 도대체 정체가 뭐니? 왜 계속 나를 도와주는 거지??”라고 따지듯 물었지만 사슴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하멜의 옷깃을 살짝 물더니 어디론지 가자고 재촉을 했다.

 

  답답한 하멜은 모든 것을 다 맡긴 듯 사슴의 등에 올라타 어디든 빨리 가자고 다그쳤다. 그러자 사슴은 또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통나무 다리를 다시 건너 계곡의 반대편 벌판으로 들어오자 처음처럼 오렌지꽃 향기가 짙어졌고, 이번에는 주위에서 몰려든 흰 사슴들이 하멜의 사슴을 따라 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슴 무리의 제일 앞에서 달리고 있는 우두머리(?) 사슴의 등에 탄 하멜은 이 신기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벌판을 지나 나무와 바위가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자 아주 좁은 길이 나왔다. 사슴들은 일렬로 지나갔는데, 큰 나무에 가려 도저히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미로였다.

  그렇게 얼마를 가다가 하멜의 사슴이 힝힝 소리를 내자 갑자기 우거진 수풀이 썰물처럼 열리며 저 앞에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그러자 사슴들은 모두 동굴로 천천히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초록빛을 발하는 사슴의 눈 수백 개가 전부였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가자 저 멀리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흘러나오더니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긴 복도의 양쪽 벽에 램프를 줄지어 켜놓은 모양이었고, 그 불빛은 동굴의 더 안쪽으로 사슴떼를 인도하고 있었다.

  드디어 동굴의 끝이 보였고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더니 거대한 문이 있었다. 양 옆에는 밖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크기의 거석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큰 칼을 찬 군사의 모습이었다.

  ‘거석상이 문을 지키는 곳이라면 뭔가 평범하지 않은 곳인가 보다...’ 하멜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사슴이 규칙적으로 힝힝힝~ 소리를 내자 그 큰 문이 서서히 열렸고 모두들 문을 통과해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멜의 눈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또 다른 지하 세계가 펼쳐졌다.

  사방에서는 매쾌한 냄새를 뿜어내는 용암이 펄펄 끓어오르고 넘쳐나서 강을 이루어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용암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 한참을 더 가니 이번에는 언덕길이 있었고 그리로 천천히 올라가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벌판과 정원이 나왔다. 그 빛이 너무 강해 한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 본 하멜의 눈에,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멜은 여전히 사슴의 등에 타고 있었는데 뒤에서 같이 오던 그 많은 사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얀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만이 근처에 모여 있었다. 오직 하멜의 사슴만이 그냥 사슴으로 있을 뿐이었다.

  너무 놀란 하멜은 사슴의 등에서 내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라고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말없이 입가에 웃음만을 띠면서 저쪽으로 하멜을 정중하게 안내했다. 하멜은 약간 머뭇거리다 사슴이 입으로 쿡쿡 찌르자 이들이 가자는 대로 천천히 따라가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이런 지하 세계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지만, 수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것도 놀라웠다. 오색찬란한 나비들이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새소리는 정겨웠고 사방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런가 하면 공중에서는 백조인지 학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크고 하얀 새들이 평화롭게 날아다녔다.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원추형의 홀처럼 느껴졌다. 높은 천장의 맨 꼭대기 중앙에는 구름 사이로 물결이 일렁이는 게 보였고, 그 물결을 통과해서 햇빛이 정원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천장의 근처에서 학이 비행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에 떠있는 물에서 백조가 자맥질을 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갑자기 저 멀리 큰 바위 위에 흰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노인이 나타났다. 주위에서 공손한 예를 갖추는 것을 보니 이 지하 세계의 왕쯤 되는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함께 날던 새들이 모두 멋지게 날개를 펼치며 노인의 근처로 서서히 내려왔다.

  그런데 땅에 닿으려는 순간 학의 날개는 갑자기 팔로 변했고 몸은 아까의 사슴처럼 흰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변했다.

  순간 한 단어가 하멜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퀠파???!!!”

 

  “그래, 여기가 바로 퀠파로군! 당신들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 정령과 요정이지?”

 놀란 하멜은 손을 들어 사방을 가리키며 크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언어로 웅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라고 하멜이 따지면서 말하고 있을 때, 사슴이 다시 옷깃을 물어 당기자, 하멜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사슴에게 이끌려 노인의 앞으로 나아갔다.

 

  하멜은 잠시 추춤했다.

  저 노인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하멜 자신도 네론의 왕자이자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다. 아무리 표류하고 있는 처지라 해도 어리숙한 자세로 노인에게 굽신거릴 성격의 하멜은 전혀 아니었다.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것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하멜은 먼저 용기를 내어 몸짓을 써가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당당함은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나,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오.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 이곳에 왔는데 원주민에게 들켜 쫓기다 나를 도와준 저 사슴의 등에 올라타는 바람에 여기까지 온 것이오.”

  하멜의 단호한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노인은 아무 말없이 천천히 하멜에게 걸어 내려왔다. 주위의 시종들도 함께 그를 따라왔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은 하멜의 얼굴을 빤히 한 번 들여다보았다. 하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적어도 노인과의 눈싸움에서는 지고 싶지가 않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노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온화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하멜. 저 멀리 콕센(Coxen) 대륙에서 온 하멜이라고 하오? 그리고 나이는 열... 어? 그런데 지금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오?” 조금 안심이 된 하멜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콕센... 너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느냐?”

  “잘 모르겠소. 나는 주변을 항해하다 미지의 땅에 표류했소.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콕센의 말을 이토록 잘하는 것이오?”

  “나는 네가 살고 있는 그곳의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느니라.”

  “전에도? 그럼 여긴 어디란 말이오? 혹시... 쳐비 군도의 일부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하멜은 궁금한 것에 대해 망설임 없이 바로 물었다.

  “너는 호렌(Horen)이라는 세계에 들어왔느니라.”

  “호렌! 호렌이 맞군! 내가 제대로 호렌을 찾아온 것이군!” 하멜은 힘차게 소리쳤다.

  “여기는 호렌 중에서도 코르(Corr) 왕국에 속한 *코지(Cozee)라는 섬이다. 이 섬의 중앙에는 하늘 높이 솟은 갤라(Gaela)산이 있고 정상에는 피딕(Fiddich) 호수가 있는데, 이곳은 바로 그 호수 밑의 지하 세계니라.”

  “그런데 호렌은 얼음 제국의 황제가 지배하는 춥고 황량한 세상이라고 들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소. 혹시 내가 뭘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오?” 하멜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호렌의 대부분은 그렇지만, 아직 그들의 힘이 이곳까지는 미치치 못했느니라.”

  “그럼 여기는 전설에나 나온다는 퀠파가 맞는 것이오? 그리고 콕센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알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혹시... 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십니까?" 하멜의 질문은 쉼 없이 계속 되었다.

 

  * 제주도의 한라산과 백록담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분노와 미움과 고통의 전생을 떠나, 이곳에 모여 자연을 벗 삼아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신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 말처럼 이곳을 '퀠파'라고 부르는구나. 그리고... 내가 왕이라... 왕... 그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노인의 목소리는 느긋한 듯하면서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퀠파가 실존하다니.... 결국 레오 박사의 말이 맞았던 거야!!!’ 여러 가지 생각이 하멜의 머리를 스쳐갔다.

 

  “내가 어쩌다가 콕센의 말을 알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구나. 저 위의 호숫물을 한 번 보겠느냐?” 잠시 생각에 잠긴 하멜에게, 노인은 다정스럽게 말을 꺼내며 지팡이를 들어 높은 곳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지팡이에서 한줄기 빛이 나와 하늘 위의 물결에 닿았다. 그러자 거기서 노닐던 백조들이 사라지고 다른 영상이 나타났다.

 

  잔잔한 물결 속에서 차츰 선명해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저 위의 호수가 아래로 푹 떨어지는 것 같더니, 바로 눈앞의 허공에서 진짜 현실과 같은 영상이 펼쳐졌다. 하멜은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저 노인이 더 젊었을 때 같았다. 바닷가에 쓰러진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의 외모나 머리색은 하멜처럼 콕센에서 온 사람 같았다. 지치고 많이 아픈지 얼굴을 계속 찡그리고 있었다. 노인이 피 묻은 남자의 옷을 찢고 옆구리를 확인하자 무엇인가에 깊게 찔린 상처가 나타났다.

 

  다음 영상에서는 좁은 방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뭐라고 계속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옆에서 그 남자와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지만 표정은 너무도 안타깝고 초조해보였다.

 

  다음 장면에서 남자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더 창백했다. 남자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하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노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힘겹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간 그런 뒤에... 남자가 마지막 힘을 내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몸이 푹 꺼지며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걸 보던 하멜은 놀라면서 소리를 쳤다.

  “아니! 저, 저 사람은??!!”

 ​

  “왜 그러는 게냐,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저분은... 나의 아버지 요한슨입니다! 어려서부터 초상화를 보며 수도 없이 그리워했어요. 갓난아기인 나를 어머니께 잠시 맡겨두고 배를 타고 멀리 나갔다가 쳐비 군도에서 해적의 공격을 받아 불 타는 배 안에서 바로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는데... 큰 부상을 당하신 채 이곳까지 표류해 오셨었군요. 지금 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살아 계십니까, 아니면 돌아가셨습니까?” 하멜의 가슴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요한슨이 네 아버지라면... 그럼 넌 네론(Nehron) 왕국의 왕족이 아니더냐?”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내가 바로 네론의 왕자 하멜입니다. 내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멜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지금 이승의 사람은 아니다. 어린 아들을 두고 머나먼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을까... 바닷가에서 내가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많은 출혈로 탈진한 상태였다. 옆구리의 상처가 너무 깊어 3일 밤낮을 혼수상태로 헤매다가... 결국은 세상을 뜨셨다.” 노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하멜의 흐느낌이 커져갔다.

 

  “해적 놈들이 내 아버지를 죽였어요. 언젠간 반드시 복수를 할 겁니다. 그럼 아버지의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하멜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음... 너의 아버지는 땅속에 묻히지 않았다. 그 죽음이 너무도 원통해 보여 내가 하늘에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다행히도 환생할 기회를 주셨다. 네가 타고 온 저 사슴을 한 번 보겠느냐?”

  노인의 말이 끝나자 하멜은 뒤를 돌아 사슴에게 다가갔다.

 ​

  사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사슴이 왜 울고 있는 겁니까?" 하멜은 사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의 육신과 영혼은 저 사슴으로 환생했느니라. 비록 말은 한마디 못하지만 요한슨의 혼이 온전히 담겨 있으니 표류한 너를 보고 본능적으로 자기 핏줄인 것을 느꼈을 게다. 그리고 그 반지는 요한슨의 것이었으니 이제는 네가 가지고 다니도록 하여라. 아마도 반지가 널 지켜줄 것이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멜은 사슴의 목을 부둥켜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둘의 해후를 바라보던 주위의 신선들도 눈시울을 적셨고, 새와 나비도 노래와 춤을 잠시 멈추었다. 아버지란 존재를 모르고 산 18년의 한이 지금 이 순간 하멜의 온몸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동물이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환생할 수는 없었던 겁니까?” 한참을 아버지와 포옹한 하멜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렇게도 기도를 드려봤지만, 콕센에서부터 와서 그런지 우리처럼 사람의 모습을 한 신선이 될 수는 없더구나...”

  “아버지~~~”

 

  계속 흐느끼던 하멜이... 갑자기 노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왜 안 되는 거지? 왜 나의 아버지만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는 거냐고? 당신은 이 퀠파의 왕이 아니던가? 왜 나의 아버지만 이렇게 만들었냔 말이야?!” 하멜이 노인에게 다가가서 따지려하자 다른 신선이 다가와 진정을 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멜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점점 증오의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사슴도 하멜의 걸음을 가로막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퀠파 안에서는 증오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 노인이 타일렀지만, 하멜의 분노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당신이 이 호렌에서 ‘가장 위대한 자’인가? 맞지? 당신이 가지고 있지? 당신이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아버지에게 뺏길까 봐, 그냥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거지??!!” 하멜의 말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그러자 노인은 “네가 아직 어려서 그냥 이해해주려고 했지만, 이러면 정말 혼 좀 나야겠구나!!”라고 꾸짖으며 지팡이를 들어 하멜 근처에 벼락을 내리쳤다.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힌 하늘에선 폭풍우가 세차게 쏟아졌고, 놀란 신선들은 저만치 피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모래 바람이 일고 자갈들이 사방으로 날리자 하멜도 이를 피하려 사슴의 뒤로 숨었다. 그러자 사슴은 하멜을 등에 태우고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잠시 폭풍을 피한 하멜은 계속 울먹이며 사슴에서 내려 다시 노인에게 따지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 사슴은 그런 하멜이 내리기도 전에 또 달렸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멜은 사슴의 목을 꽉 잡았고, 사슴은 언덕길로 달려 동굴로 들어서 다시 지상으로 달려나갔다.

  하멜은 아버지를 내놓으라며 계속 울부짖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           *           *

 

  부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어보니 다시 통나무 다리 근처로 왔고 사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옷을 만져보니 비에 젖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잠시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퀠파와 신선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했다.

  하멜은 울컥하는 심정으로 사슴을 껴안았다. 그리고 사슴과 함께 통나무 다리를 건너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슴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리를 건널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사슴을 설득하는 걸 포기한 하멜은 목줄을 꺼내 자신의 목에 맞추어 걸며 반지를 주먹으로 꼭 쥐었다.

 

  "아버지, 제가 ‘사자의 심장’을 꼭 찾고야 말겠어요. 그 별의 힘이라면 아버지를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릴 수 있을 거예요. 퀠파가 있는 곳이니 이곳의 원주민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겠죠? 분명 얀스를 죽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선은 그들을 만나야해요. 아버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주세요." 하멜은 아버지 사슴과 작별을 한 뒤 통나무 다리를 건너 당당하게 산비탈을 내려갔다.

 

  그런데 원주민 대장은 아까부터 근처에서 하멜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말보다도 더 빠른 사슴에게 침입자를 빼앗긴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하멜이 내려오는 것이 보이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폈다.

 

  하멜의 시야에서 사슴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대장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 손안에 하멜이 완전히 들어왔다고 느끼자, 아주 작은 침에 마취제를 발라 준비했다.

  그리고는... 긴 대롱에 넣고 입으로 훅! 불었다.

 

  * * *

 

  “왕자님,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하멜의 손을 잡으며 말하는 얀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잠깐 정신을 잃은 후 눈을 다시 뜬 하멜은 자신이 큰 방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행히 얀스도 살아있었다. 둘은 반갑게 포옹을 했다.

 

  얀스는 어디서 어떻게 붙잡힌 거냐고 물었고, 하멜은 조그만 동굴에 숨었다가 나오던 길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다친 데는 없냐고 얀스가 걱정을 하자, 하멜은 뒷목을 움켜쥐며 무언가에 맞은 것 같다고 무심코 말했다. 얀스가 이를 살펴보려다 못 보던 목줄이 감겨 있자 어디서 난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하멜은 재빨리 손을 들어 옷 안으로 넣으며 아무 것도 아니라도 둘러댔다.

 

  지하 세계를 느낀 이후로 하멜에겐 큰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18년 전의 비극은 유일한 생존자인 얀스의 말에만 의존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해적에게 바로 죽었으면 퀠파에 왔을 리가 없고, 사슴이 반지를 갖고 있을 리도 없었다. 얀스가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그러니 꿈이든 현실이든 지하 세계라는 수수께끼가 자신에게 던져졌다는 확신도 들었다. 이를 꼭 풀어야만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얀스, 혹시... 18년 전 원정에 나섰을 때... 슈반궁에서 기르던 사슴도 배에 태웠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소?” 하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슴이라고요? 글쎄요... 제 기억으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요...” 얀스는 왕자가 갑자기 왜 뚱딴지같은 질문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혹시 다른 배에는 태웠을 수도 있지 않았겠소? 내 말은...”

  “아닙니다. 사슴은 분명 태우지 않았습니다. 태울 이유도 없었고요.” 얀스는 잘라 말했다.

  이게 얀스의 스타일이었다. 아무리 왕자라고는 하지만 세상물정 잘 모르고 경험도 부족한 겨우 자기 아들 뻘이다. 얀스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얀스는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짐작이 강하게 들었다. 하멜은 답답한 표정을 억지로 숨기느라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얀스는 살짝 주제를 돌려 말했다.

  “원주민이 전부 여자인데도 그 무예는 남자를 능가하더군요.”

  “얀스는 어떻게 저항을 하다 잡힌 거요?”

  “처음엔 저항을 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습니다. 아마도 거세게 저항을 했다면 오히려 다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안 다치고 잡힌 게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여기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단은 원주민이 하라는 대로 최대한 협조를 하시죠. 그리고 지금부터는 왕자님의 신분을 속이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그냥 어린 수습 선원인 것처럼 대할 테니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음, 그래요? 내 신분을 꼭 숨겨야만 하는 것일까요? 보아하니 그리 사나운 해적 같지는 않으니, 왕자라고 하면 신경 써서 더 잘 대해줄 수도 있잖아요.”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표정으로 하멜이 말했다.

  “아닙니다, 일단 저들이 해적은 아닐 것입니다.” 얀스가 잘라 말했다.

  “남자들이 전부 바다로 나가서 노략질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해적이 아니라고 어찌 그리 장담하는 거죠?” 하멜이 신중하게 물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듭니다...” 얀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내 말이 맞으니 더 이상 따지지 말라는 결론이었다. 그런 얀스의 모습이 하멜에겐 좀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퀠파에 대해 레오의 예측이 옳았고 얀스가 틀렸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언제나 항상 완벽한 판단만 한다고 생각했던 얀스에 대한 환상이 깨진 기분이었다.

  왕자를 바라보는 얀스의 시선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자기에게 다 말을 안 하려 하는 왕자가 좀 낯설게 보였다. 하지만 얀스는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일단 원주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날, 한 무리의 원주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모두 여자였다.

  거석상에서 의식을 할 때 보았던 추장도 있었고 하멜을 쫓았던 그 미모의 대장도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아름다웠다. 나이도 하멜과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벌써 원주민 군대의 대장이라니... 어쨌든 하멜과 얀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납지는 않아서 일단 안심은 되었다.

 

  원주민들은 모두 특이하게도 이마의 미간에 붉고 동그란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양과 크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예외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추장의 것이 가장 크고 화려했다. 저 문신은 원주민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누는 무슨 계급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하멜과 얀스에게는 들었다.

 

  얀스는 우선 추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주니, 엉겁결에 하멜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짓 발짓해가며 무역을 하러 다니다가 배가 난파된 것이라고 둘러댔다. 하멜은 어린 선원이니 잘 좀 봐달라는 부탁도 전했다.

 

  추장이 어느 정도 얀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크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즉석에서 부하들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러자 하멜과 얀스는 원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이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둘은 *추장의 성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 절벽 근처의 외딴 집에 수용되었다. 그곳이 이전에 누구의 숙소였는지 아니면 감옥이었는지는 잘 몰라도, 공간이 꽤 크고 시설도 괜찮았다. 하멜은 어차피 감금될 바에야 별장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고 하여,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불렀다.

 

  하멜에겐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갤라산 지하에서 만난 왕이 아버지를 데려가 치료한 영상에 나온 집이 바로 이 별장이었다. 그렇다면 지하 세계는 온전히 현실이었단 말인가?

  별장 안에 아버지의 체취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자꾸만 더 아련해졌다.

 

  *표류한 뒤 조선군에게 잡혀 제주 목사 이원진이 있는 관청으로 압송되었던 하멜 일행은, 이후에 광해군이 제주도에 유배를 와서 지내다가 죽은 바로 그 집에 일단 수용되어 지냈음.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이곳 음식에 적응이 되었고 지친 체력도 많이 회복하였다.

 경비병의 태도는 예상과 달리 친절했다. 포로의 신분으로 감금된 상태라 마음은 무거웠지만, 제때 식사가 나오고 폭풍우에 시달릴 일이 없으니 사실 몸은 좀 편했다.

 

  얀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하멜은 경비병과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대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불편한 점을 표현하면 그들이 상관에게 뭐라고 보고를 했는지 하여간 하루 이틀 안에는 아쉬운 점이 어김없이 해결되었다. 병사들의 행동이나 옷차림으로 봐서 해적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얀스와 하멜에게 점점 더 들었다.

 

  몰래 별장의 지붕에 올라가면 추장이 있는 성과 들판에서 이루어지는 군인들의 훈련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하멜은 특히 군인들을 자주 관찰했다. 아니 솔직히 그것보단 자기를 쫓았던 그 미모의 대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말을 타는 솜씨며 칼을 휘두르는 솜씨며 그 무예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이곳의 군인들은 커다란 코끼리와 함께 훈련을 많이 했다. 평소에는 느긋했던 코끼리들도 대장이 지시하면 갑자기 사납게 뛰어다녔고, 군인들은 서로 밧줄을 던져 먼저 코끼리의 등에 오르는 시합을 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군인이 대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다가도, 훈련을 마치면 그 대장은 부하들을 친한 친구처럼 여유롭게 대하여주니, 부하들도 대장을 아주 잘 따르고 있었다.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미모의 대장을 훔쳐보는 시간이 하멜에게는 점점 더 많아졌다.

 

  군인들은 육상에서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훈련을 했다.

  조그만 배를 타고 해안 가까이 나가면 아주 큰 바다거북 수십 마리가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거북이의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이 거북이의 등에서 저 거북이의 등으로 빨리 뛰는 경기도 했다. 거북의 등 위에서 서로 목검으로 결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어떨 때는 거북이와 함께 잠수도 하였는데, 특히 대장의 잠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추장의 성으로는 끊임없이 비둘기나 갈매기가 날아드는데, 그들의 발목에 무언가 감긴 걸 보면, 아마도 조류를 이용한 원거리와의 통신을 매우 잘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대체 이곳이 어디기에 인간과 동물이 이처럼 한데 어우러져 잘 지낼 수 있는지 하멜의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갔지만, 지하 세계의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얀스에게 함구했다. 빨리 ‘사자의 심장’을 찾아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탈출할 방법부터 모르니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

 

  4. 먼저 온 사람

 

  어느 날 둘은 추장의 성으로 불려갔다. 수용된 이후 처음으로 돌담 밖으로 나왔으니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릴 법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혹시 우리를 처형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하멜에겐 앞섰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투가 거칠게 들리지는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추장과 대장이 어떤 남자를 정중하게 안내하여 하멜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표류한 이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갑옷을 입은 모습이 아주 높은 계급의 장군 같았다.

  그런데 하멜 쪽으로 걸어오는 그 장군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 바로 얀스와 하멜처럼 콕센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이마에는 원주민과는 달리 파란 색의 문신이 찍혀 있었다.

 

  놀란 하멜은 얀스에게 수군거렸고, 얀스도 멍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혼자 중얼거렸다.

  장군은 더욱 가까이 와서 얀스를 빤히 쳐다보고 눈을 깜박이더니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리고는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야, 얀스? 얀스가 맞지??”

  이런!

  그는 지금 얀스의 이름을 알고 또 네론의 말을 하고 있었다!!

  “얀스? 내, 내가 얀스요.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나, 나를 모르겠는가, 얀스? 날세, 나, 파르코(Parco)일세.”

  “파, 파르코! 자네가 진짜 파르코가 맞는가? 18년 전에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자네가 이렇게 살아있었나?” 얀스는 파르코의 얼굴과 이마를 만져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그때 가까스로 탈출한 모양이군. 그동안 어디서 살다가 이곳엘 온 건가?” 파르코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사령선에서는 나 혼자만 겨우 네론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그렇다면 결국 요한슨 왕자님은... 왕자님은...” 파르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과 얘기가 나왔음에도 하멜의 표정은 좀 달랐다. 네론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혼란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얀스만 살아남고 모든 대원이 죽었다고 알고 있던 지난 원정에서, 아버지도 퀠파에 온 것이 분명하고 파르코란 사람도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지 않은가? 하멜은 거짓으로 슬픈 표정을 짓느라 본인 스스로도 많이 어색했다.

 

  반가운 마음을 진정시킨 파르코가 추장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는 동안, 얀스는 자신의 눈물을 닦으면서도 하멜에게는 왕자의 신분을 꼭 숨기라고 다시 한 번 눈치를 주었다.

 ​

 

  **하멜 일행의 통역을 위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박연(=벨테브레)을 한양에서 제주도로 내려보냈음.

 

 

  세 사람은 지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얀스는 먼저 하멜을 수습선원이라고 소개했다. 이름도 본래는 카멜(Kamel)이라고 했다. 마크 1세가 얼마 전에 승하하시고 손자인 하멜이 마크 3세로 왕위에 올랐다며, 일찍 돌아가신 카멜의 부모님이 슈반궁에서 점성술사 일을 잠깐 했었는데,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신 기념으로 카멜도 이름을 하멜로 바꿨다고 그럴 듯이 둘러댔다. 파르코를 만나 가슴이 벅찬 순간에도 이런 이야기를 순식간에 지어내는 얀스의 치밀한 순발력에, 하멜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파르코는 하멜을 꼬옥 안으며 반갑다는 말을 했고, 어린 나이에 이 먼 곳에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란 얀스가 잠시 움찔했지만 하멜은 그저 어색한 표정만을 지었다.

 

  파르코는 어쩌다 표류하게 됐는지부터 물었고, 얀스는 마크 3세가 즉위 기념으로 전 세계에 축하사절을 보내는 중이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일환으로 호렌까지 가려다가 배가 난파되었다고만 말했다. 비록 파르코일지언정 여기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얀스는 그를 경계하면서 '사자의 심장'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파르코가, 혹시 유성 때문이냐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러자 얀스는 흠칫하면서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자 파르코는 자신이 여기서 18년 동안 살았지만 유성에 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에 믿었던 레오 박사의 학설이 사실과 다르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얀스의 얼굴이 적잖이 달아올랐다.

  “아닐세. 스승님과 나의 추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얀스가 흥분하며 말했다.

  “결국 유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못한 거구먼.” 파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뜨끔한 얀스가 두 손을 들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는 표시를 하자, 파르코도 주제를 돌렸다.

  

  파르코는 얀스가 이곳을 탈출하여 네론으로 돌아가는 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부터 말했다.

  이곳은 호렌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코르(Corr)라는 왕국으로, 하멜이 표류한 곳은 코르의 남쪽 바다에 있는 코지(Cozee)라는 큰 섬이다. 코르는 현재 호렌에서 가장 강력한 퓨그(Fuug) 제국의 식민지가 된 상태인데,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밀리에 독립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방인이 표류를 해도 보안을 위해서 절대로 국외로 내보내는 일은 없다. 다만 큰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는다며, 이곳에서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자기를 보라는 말로 얀스를 위로했다.

 

  하멜과 얀스는 난감했다. 유성을 찾기도 전에 우선은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어려운 임무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효종이 청나라에 대해 북벌을 준비하던 시기에 조선에 표류한 하멜 일행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으로 다시 보내지지 않고 강제로 잡혀있었음. 

 

  별장으로 자리를 옮긴 하멜과 얀스는 파르코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파르코는 가감 없이 긴 얘기를 꺼내 놓았다.

 

  현재 코르의 국왕은 *휘레스(Phoiress)인데 선왕인 그의 아버지 **슈젠타(Pseuzenta)는 왕자 시절에 반란을 일으켜 당시의 국왕이었던 숙부 ***라이션(Lighcean)을 내쫒고 왕좌에 올랐다. 슈젠타는 라이션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코지섬으로 추방했는데 그가 머무른 곳이 바로 지금의 별장이다. 이후 라이션은 코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한 많은 삶을 살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코지섬은 중앙에 있는 거대한 갤라(Gaela)산이 화산폭발을 하여 만들어진 섬인데, 이곳 원주민들은 라이션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여 거석상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결국 라이션은 갤라산의 신선으로 부활했다고 믿고 있다.

  이 얘기에 하멜은 뜨끔했으나 지하 세계에 대한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파르코는 군인이 되어 해군 전함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해적들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운 덕분에, 비록 이방인이지만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서 지금은 해군 사령관에까지 오른 상태였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이방인이 코지에 표류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도인 한즈(Hanz)에서 내려온 것이다.

 

  얀스와 하멜은 내일 코지를 떠나 한즈로 올라가 국왕을 알현하게 될 것이며, 왕의 재판에 따라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코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이마에 도장을 새겨 넣는데 파르코처럼 귀화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도장을 받게 된다. 남자 아이는 파란색, 여자 아이는 붉은색으로, 도장의 문양을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거나 어느 가문인지 알 수 있다. 얀스와 하멜도 조만간 이마에 도장이 찍힐 것이다.

 

 

 

  *효종, **인조, ***광해군을 모티브로 하였음.

 

  파르코로 인해 호렌(Horen) 사람들도 콕센(Coxen)이라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콕센을 정복하러 갈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아니 정복은 고사하고 호기심 때문에 콕센으로 탐험을 가는 사람조차 없다는 얘기다.

  콕센의 권력자들은 식민지를 만들겠다며 앞다투어 동방으로의 원정길에 오르고 있지만, 호렌 사람들은 그저 호렌 안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콕센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하여 동물보다 사람이 위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호렌에서는 동물도 인간과 비슷한 지혜를 가진 영물로 보는 경우가 아주 많다고 했다. 콕센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과학을 발달시키려 애를 쓰지만, 호렌에서의 기술에는 늘 동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볼 것이라고도 했다.

 

  같은 시간 안에 있는 두 세계에서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건지 파르코도 이유는 잘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라고 여러 번 강조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코르의 북쪽에 있는 ****드넓은 벌판인 맨츠(Mantz)에서 신흥 부족이 세력을 키워 국가로 성장했다. 그들의 국왕인 호크런(Hawkrunn)은 북극의 빙하 속에서 살아가는 냉혈 인간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강력한 북풍인 *****보라(Bora)를 날리며 눈보라를 몰고 북극에서부터 남하해 맨츠로 들어와 추위에 움츠린 주위의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여 결국은 왕위에 올랐다.

 

  맨츠는 예전에는 코르의 땅이었지만 700여 년 전, 서쪽 바다 너머에 있는 광활한 지안(Jiaan) 대륙을 지배하는 ‘바르티(Bartee)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모두 빼앗긴 뒤, 코르에겐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초창기의 그런 각오는 차츰 바래져갔고, 코르는 바르티와의 무역을 재개하면서 조공국으로 전락해버렸다. 바르티도 지안 대륙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맨츠 벌판을 그냥 방치한 상태였는데, 그렇게 잊혀졌던 땅에 신흥 부족이 번듯한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들은 국력을 정비하여 곧바로 지안 대륙을 침범했고 바르티 제국마저 대륙의 남쪽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맨츠 벌판의 중앙에 위치한 ******디퍼슨(Deeperson)을 수도로 삼아 제국의 이름을 '퓨그(Fuug)'라고 하여, 현재는 지안 대륙과 맨츠를 모두 호령하는 호렌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것이다.

 

 

  **** 만주 벌판을 삶의 터전으로 하던 여진족(=만주족)은 후금을 세운 뒤 청나라로 개명함.

 

  ***** ‘Bora’는 지중해에 속한 아드리아 해의 북쪽 또는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에 대한 실제 사전적인 명칭임.

 

  ****** 청나라의 초기 수도는, 지금 중국의 동북삼성(東北三省) 중 요녕성(遼寧省)의 성도인 심양(瀋陽)이었음.

 

 

  18년 전, 퓨그의 황제 호크런은 *******한겨울에 대대적으로 코르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7일 만에 수도인 한즈를 함락시켰다. 바르티마저 남쪽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정보에 코르에서도 나름대로 침략에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퓨그군이 몰고 온 처음 보는 거대한 매머드의 괴력 앞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코르군의 수뇌부 중에서는 끝까지 항전을 하자고 주장한 세력도 있었지만, 국왕인 슈젠타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조건으로 그만 항복문서에 서명을 해버렸다. 이를 ‘7일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때부터 코르는 퓨그의 식민지가 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 병자호란을 모티브로 하였음.

 

  패전의 대가는 말할 수 없이 가혹했다.

  슈젠타의 아들인 브리젠(Brizenn) 왕세자와 휘레스 왕자는 많은 백성과 함께 디퍼슨에 볼모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매년 엄청난 공물을 황제에게 바쳐야 했고, 코르군은 겨울에 한 번씩 방문하는 퓨그의 군사 고문단에게 정기적으로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일정한 수 이상의 병력과 무기는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적이 코르의 바다에서 노략질을 하여도 이에 대응할 강력한 전함을 만들지 못 했다.

 

  이후 브리젠 왕세자는 디퍼슨에서 한즈로 돌아온 뒤 갑자기 서거했고, 슈젠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브리젠의 동생 휘레스는 즉위하자마자 퓨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매머드를 이길 방법을 찾는 중이다. 이 때문에 비밀 유지를 위해 어떤 이방인이라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그러니 얀스와 하멜이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파르코는 이처럼 자세한 얘기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럼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은 영원히 없다는 말인가?”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얀스가 말했다.

  “훗날 코르가 퓨그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면 그땐 가능하겠지만...” 파르코는 현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보게, 파르코.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이곳을 탈출하면 어떻겠는가? 그동안은 자네 혼자라서 불가능했겠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못 할 것도 없지 않겠나?” 얀스는 점잖게 파르코를 회유하며 말했다.

  “아닐세. 나는 여기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네. 나는 이미 코르 사람이고 코르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할 코르의 신하일세. 그러니 내가 나중에 묻힐 곳은 코르인 게야.” 파르코는 입술을 굳게 오므리며 말했다. 그러자 얀스는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18년 전 분명 이곳에서도 그 크고 빛나는 초록빛 유성을 봤을 텐데 말이야... 자네는 정말 그동안 어떤 얘기도 들은 게 없는 거야?”

  “그렇다니까... 아마도 호렌까지는 오지 못하고 콕센과 호렌 사이의 대양 어디쯤에 빠진 게 아니겠는가?”

  “아냐... 그렇지 않아...” 얀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성이나 예언에 대한 미련은 이제 그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려.” 파르코는 차분하게 설득을 했다.

  ...

  ...

  “음... 어쨌든 현재 호렌에서 ‘가장 위대한 자’는 퓨그의 황제인 호크런이군.” 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글쎄, 뭐 아직까지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진 자임에는 틀림없지.” 파르코는 이제 그만 체념하라는 표정이었다. 그때 하멜이 불쑥 끼어들며 말을 꺼냈다.

  "코르가 퓨그의 식민지라면, 사신단끼리는 정기적으로 왕래를 하겠군요.”

  그러자 파르코는 놀란 눈치로 하멜을 쳐다보았다.

 

  “사신단! 바로 그거야! 이보게 파르코, 사신단에 우리가 끼일 방법은 없을까?” 얀스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하지만 파르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위직에 오른 자신도 결국은 이방인이라 아직 사신단에 끼어본 적이 없으니, 얀스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퓨그의 황제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무엇을 자세히 알며 어떤 걸 해줄 수 있겠냐고 회의적으로 말했다.

 

  기대 반 실망 반의 이야기가 그렇게 무르익어가던 중, 파르코는 솔나무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도자기를 한 병 꺼냈다. 뚜껑을 열고 약초가루를 조심스럽게 넣으며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도자기 입구에서 파란색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언가?” 얀스가 손을 저어 연기를 흩뜨리며 말했다.

  “자네랑 이 아이를 위한 나의 선물이지. 아주 귀하고 좋은 술에 신비로운 약초를 넣었으니 사양 말고 마음껏 마시게.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네.”

  파르코는 향이 알맞게 배합됐는지 확인을 하면서 일일이 잔에다 그것을 가득 따라주었다.

 

  “이런 거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구먼. 나는 늘 레오 스승님과 함께 새로운 발명과 천문관측에 열을 올렸었는데, 자네는 항상 그 옆에서 딴짓만 하기 일쑤였잖아, 허허...”

  “내가 그랬었나? 허허... 어쨌든 내일은 국왕 폐하를 만나기 위해 한즈로 떠나야 하니 짐도 잘 챙기게나.” 파르코는 건배를 제의하며 말했다.

 

  하멜은 벌컥 마셔댔고, 얀스는 코로 냄새를 여러 번 맡은 뒤 조금씩 마셨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멜과 얀스의 목젖에서 파란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술이 독하지는 않았지만 그 향은 이상야릇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목젖이 굉장히 시원해지고 귀가 뻥 뚫려진 느낌이 들었다.

 

  얀스는 약초가루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보여달라고 떼를 썼고, 파르코는 웃으며 남은 것을 모두 주었다. 주문을 알지 못하면 그냥 약초에 불과하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저런 얘기로 파르코와의 첫 만찬은 웃음과 허탈, 탈출에 대한 열망과 걱정이 교차하며 그렇게 빨리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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