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지 궁을 지나쳐야 하는 나는 들려오는 수근거림들에 혀를 쯧 찼다.
“조용히 해, 지금 저 안에서 백호가 보름과 한율 여화, 천호 폐하가 함께 계신다고.”
“이를 어째, 그럼 조용히 할 게 아니라 빨리 여기를 떠야지.”
“또 불쌍한 한율 여화만 눈물 바람나겠네.”
“그리고 천호 폐하는 또 아랫것들에게 패악질을 부리시겠지.”
“에고, 이 사람아. 패악질이라니 감히 천호 폐하께 그 무슨 망언이오”
“내 틀린 말 했나?”
아둔한 한율 여화.
저 또한 천호가 그때의 천호가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 미련하게도 아직까지 천호의 옆에 붙어있다니.
‘은가람! 은가람! 잘 들어! 나 지금 현실로 돌아가, 게임이 종료된대. 기억도 지워진대. 이제 여기 못 와. 그냥 들어! 나 꼭 다시 올 거니까. 나 잊지 마! 모두에게 전해줘, 나 사라졌다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아, 아니다! 게임이란 거 알려지면 안되니까 그냥 너만 알고 있어!’
‘아니! 절대 안 잊어! 너만큼은, 너만큼 잘생긴 사람은 절대 안 잊어! 내가 먼저 인사할 거야! 너야말로 나 잊지마!’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화연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다. 돌아온다 해놓고 몇 년이나 지난 채였다.
그 생각에 절로 표정을 굳히고 호지 궁을 지나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거기 너, 혹시-,”
가진 건 껍질뿐이면서 오만하긴 더럽게 오만한 말투,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
천호 아닌 천호였다.
하, 옛적 내게 얻어맞고 좀 피하나 싶더니 몇 년 지났고 이런 식으로 부르네.
기분도 가라앉은 김에 잘됐다.
천호가 저에게 패악질한다면 저 또한 패악질 하리라.
그리 결심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홱 돌아봤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천사세요...?”
놀라우리만치 짜증을 사라지게 하는 말.
천사냐고 묻는 말이었다.
천사. 천사.
여기에 천사란 단어는 없다.
‘천사... 천사다. 천사가 내려왔어! 미친, 대박!’
화연님이 사는 세계라면 모를까.
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화연님이다.
화연님이야.
미친 듯이 웃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억을 읽고 다시 돌아온 화연님이 놀라면 안될 테니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가장 자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천사라니, 깊은 찬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화연님이 내 얼굴을 넋 놓으며 감상하자 확신했다.
아, 역시 화연님이 맞으시다.
잘생긴 사람을 무척 좋아하시는 화연님.
그게 너무나도 반갑고 다시 예전처럼 화연님의 마음을 얻고 싶어 나는 나도 모르게 미인계를 펼쳤다.
일단 화연님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 보기 좋게 곱슬거리는, 결 좋은 백금 발이 강조되게 좌로 갸웃.
그러자 화연님은 내가 원하는 반응을 내보였다.
거리가 부담스러워 얼굴을 가리는 척, 하지만 코피가 날까 봐 넓은 소매 뒤로 코를 부여잡는 모습.
여전히 사랑스럽다.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감정이 기꺼워 잔잔히 웃곤 말했다.
“칭찬 말고 제게 질문할 게 있는 듯해 보였는데. 맞나요?”
화연님은 얼굴이 붉어진 지도 모른 채 코를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기분이 몽클해질 때 들려오는 대답은 절대 좋은 쪽이 아니었다.
“한율, 어디 있는지 알까 싶어서.”
한율, 또 한율이다.
‘미안, 한율이 오래.’
‘나중에, 내일. 나 지금 한율이랑 같이 집에 가야 해.’
언제나 밀려났던 그때가 생각난 나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또 한율 때문에 화연님을 화연없이 기다려야 해? 이번엔 그럴 수 없다.
순간 좋은 생각이 난 나는 진실과는 정반대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한율과 ‘무척’ 친한 저이니 어디 있을지 정도는 예상 가능합니다.”
이렇게 한율과 친하다고 해놓으면 화연님과 한율의 사이를 훼방 놓기 쉽겠지.
아니나 다를까, 화연님은 살짝 당황해하며 한율과 화해하기 위해서라며 말을 늘어놓았다.
“한율한테 너무 심하게 한 거 같아서 찾아서 화해하려고. 뭐, 생각하다 화나서 따지러 간다 이런 게 아니야. 어디에 있을지 예상할 수 있다니 잘 됐네. 어디 어디 인지 대충이라도 가르쳐줘. 자세한 건 내가 돌아다니면서 찾을 테니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내가 한율과 친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거 같았다.
나중에 들킬 거짓말이긴 하지만 화연님은 이 정도 거짓말에 화내지 않으실 거니 걱정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화연님이 내게 화내지 못하게 할 자신 있으니 괜찮다.
그럼 일단, 지금은 약혼자인 한율은 월궁에 있다는 기본조차 모르는 화연님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때.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아, 아니다. 폐하. 같이 찾는 게 더 빠를 거 같은데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함께해도 될까요?”
내 말에 화연님은 의심없 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렇게 순진하실 수가.
사랑스러워 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그럼 천궁의 동화부터 가시죠.”
나는 화연님을 향하는 내 미소와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내 시선을 들키지 않게 바로 동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이 정도면 감정이 숨겨졌다, 싶을 때 화연님에게 스스로를 다시 소개했다.
“그리고 폐하. 제 이름은 천사가 아니라 가람. 은가람입니다.”
그에 화연님은 멍청하게 제 이름을 말했다.
“아, 내 이름은 화연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천호 폐하시잖아요.”
아차, 그랬지. 먼저 자기소개하기에 나 또한 자기소개해야 할 거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그만. 을 웅얼거리며 머쓱히 말하는 화연님.
하, 어찌 사람이 머쓱해 하는 것조차 귀여운지.
그런 화연님의 귀여움을 잠시 즐긴 나는 그녀의 민망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말했다.
“아, 그럼에도 말씀하신 건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는 허락인가요?”
그에 화연님은 잠시 움찔하다 이내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불러도 좋아.”
그 말에 내 기분이 하늘 위를 걷는 듯, 두둥실 해진 건 당연했다.
*
동화로 가는 길에서 마저 화연님의 귀여운 행태는 이어졌다.
예전에 여기는 느낌 좋은 휴양지 풍경이라 했던가, 대자연 같은 느낌이라 항상 신기해서 좋다고 하셨지.
이번에도 그런 느낌들을 느끼고 있으려나.
화연님은 풍경을 감상하고 나는 화연님의 귀여움을 감상한다.
그러다 보니 눈깜짝할 새에 도착한 동화.
화연님은 겨울 느낌으로 만든 정원, 동화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감탄을 표했다.
“미쳤네...”
그에 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하며 화연님을 쳐다봤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 흥분에 차 꽉 쥔 두 손, 갓 눈을 뜬 새끼마냥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
그럼에도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조심히 자박거리는 발짓.
모든 것 하나가 사랑스럽다.
아마 내가 자신을 천호가 맞는지 아닌지 의심할까 봐 익숙한 척, 별로 신기하지 않은 척하려는 것이겠지.
귀여워.
나는 화연님이 원하는 대로 모른 척 해주며 그녀를 이끌었다.
“화연님, 우선 이쪽부터.”
“그래.”
그리고 좀 걸으려는 찰나, 화연님의 시선이 강과 그 위에 떠 있는 나룻배에 고정됐다.
하하, 어쩜 생각하는 게 이리 잘보이는지.
화연님은 잠시 나룻배와 강 위에 떠있는 예쁜 조각품을 처다보며 고뇌했다.
한율을 찾으러 와서 나룻배를 타자하면 이상하게 보일까, 강 위에 있는 조각품들을 만지작거리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고민하는 것이겠지.
그런 화연님을 위해 나는 눈치껏 행동했다.
“아, 화연님. 저기 있는 저 배를 타는 건 어떠한가요? 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흐르면 동화 전체가 둘러봐 지니 한율을 찾는 게 좀 더 수월해지면서 다리도 덜 아플거예요.”
그 말에 화연님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무심하게 돌아갔다.
정말, 신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저 모습조차 귀여우니 나는 이제 큰일 났다.
화연님이 귀여워 죽겠어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은 나는 먼저 나룻배에 올라타 화연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절당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화연님의 취향에 맞게 잘생겼으니까.
내 생각이 옳다는 양 화연님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에 나는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나룻배에 딸린 노를 잡았다.
강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돼서 노로 간간이 방향만 잡아주면 되는 간단한 일.
그렇지만 귀찮기도 한 이런걸 화연님이 하게 둘 순 없다는 일념하에서 재빨리 노를 잡은 거였다.
화연님은 항상 편해야 하며 좋은 것만 보셔야 하는 분이니까.
그러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냥 좋다, 사랑스럽다 정도였는데.
몇 년의 시간 동안 화연님을 기다리며 감정이 노르익다 못해 녹아 스며들었나 보다.
마치 과일 청의 과일이 된 기분. 설탕물은 화연님의 귀여움이 되려나.
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열심히 한율 여화를 찾으시던 화연님은 드디어 한율 여화를 찾는 것에 대해 포기했는지 강 위에 떠있는 작고 아름다운 조각품들로 시선을 돌리셨다.
그래, 한율 여화 따위를 찾는 것보단 강 위의 작고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보는 것이 더 이롭지.
내가 기뻐하는 사이, 화연님은 벌써 강 위에서 조각품 하나를 하늘 쪽으로 들어, 태양을 흉내 낸 인공 빛에 비춘 채 구경하고 있으셨다.
태양을 흉내 낸 인공 빛이 조각품을 통해 오로라 같은 빛깔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그 오로라는 화연님의 얼굴로 쏟아진다.
아름답다.
희고 오묘한 동화, 오묘한 분위기, 오묘한 오로라.
그 속의 화연님.
나는 화연님에 취한 채 넋을 놓으며 화연님만을 바라봤다.
1초가 10분 같게, 10분이 1초 같게.
“줄까?”
그 한마디가 느릿한 시간 속에 잠겨있는 날 깨웠다.
나를 빠트린 것도, 깨운 것도 모두 화연님이었다.
그게 행복해 나도 몰래 미소지으며 화연님의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화연님이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는걸-,
“이걸, 저에게, 주는 건가요?”
까...
나는 화연님의 손에 들린 조각품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기억을 잃은 채로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새까맣게 잊어버리실수가.
동화의 강 위에 떠 있는 조각품은 역대 천호 중 한 명이 만든 것이다.
왜? 뭐를 위해서?
자신이 반려들 중 가장 마음에 든 한 명에게 청혼하기 위해서.
그 뒤로 이 조각품은 종종 천호가 제 반려가 될 사람 중 한 명, 딱 한 명에게 내리는 물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연히 결혼하자는 의미에서 주는 거다.
근데 이걸 나에게?
내 혼란은 전혀 모르는 화연님이 신나는 말투로, 꽤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가져.”
그러면서 조각품 하나를 더 건저 제 품에 넣는 화연님에 나는 깨달았다.
아, 화연님이 가지고 싶으신 거였는데 혹시 가지고 가면 안 되는 물품일까 봐 내게 먼저 권해보신 거구나.
역시 화연님 답게 똑똑했고 귀여웠다.
소중히 조각품을 품에 안는 화연님이 사랑스러워 지금 당장이라도 이걸 나에게 주었으니 혼례를 올리자 하고 싶었다.
실제로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화연님이 당황하실 거란 생각하에 나는 애써 삼켰다.
아, 진정으로 청혼받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화연님은 멋모르고 내게 주신 거야, 내게 청혼하신 게 아니야. 되새기지만 소용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물론 너무 귀한 거라 받기 부담스러운 척 거절하는 방법은 내 선택사항에 없었다.
아무리 의미를 몰랐다고 하지만 내게 주신 건 주신 거다.
즉, 내게 청혼한 건 청혼한 거란 거다.
나중에, 조금 나중에.
화연님이 여기에 익숙해진 후에나 이 조각품의 의미를 설명하자.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진정으로 내게 청혼한 거라면 좋을 텐데, 라는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그런 마음에서 나온 말.
“허나...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씁쓸함이 담긴 내 말에 화연님은 망설임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응, 안 해. 절대 안 해.”
강인함이 담긴 붉은 눈,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 태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놀라다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리 굳게 말하는 화연님이 우스워서.
동시에, 그런 화연님에게 신뢰를 느끼며 다시 한번 반한 나 자신도 우스워서.
허나, 이리 단호하게 후회하지 않는다 말씀하셨으니 그때 돼서 이 청혼, 무른다 하셔도 소용없어요. 화연님.
나는 시꺼먼 속내를 감춘 채 화연님에게 상냥히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