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완벽한 내 실수다.
‘진짜 미안. 나도 놀고 싶긴 한데 오늘은 한율한테 사과해야 해서 안돼. 다음에, 아니면 내일. 천궁으로 와. 같이 나들이 가자.’
은가람과 바로 내일, 그러니까 오늘, 나들이 가자는 약속을 잡았었다니.
난 시스템 탓에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된 줄 알았는데 그냥 본능부터가 쓰레기였나 보다.
약혼남인 한율과 화해한 바로 그다음 날 어떻게 은가람과 나들이를 갈 생각을 했지?!
사람이 생각이 있었으면 조금의 텀이라도 뒀어야 했다!
물론 은가람에게 내일이라도 나들이를 가자,라고 말했을 땐 약혼자인 한율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내뱉은 거지만 약혼자를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니 이 부분 또한 쓰레기가 아닌가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도 있잖아.’
한율과도 약속 아닌 약속을 했었다.
좋아, 약혼남과 내연남, 둘 다에게 만나자 말하다니 난 쓰레기가 맞네.
그것도 심지어 겹쳤어.
한참 동안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하다 호위무사에게 그냥 대놓고 물었다.
“은가람한테 오늘같이 나들이 가자 말했는데 한율한테도 오늘 만나자고 말했어. 어떻게?”
“전 또 뭐라고 그리 정신 사납게 구는가 했습니다. 폐하는 천호시잖습니까. 고민할 필요없이 둘 다 만나시면 되는거 아닙니까? 따로 따로 만나든 셋이서 함께 만나든이요.”
뭐가 문제인데? 하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말하는 호위무사에 나는 박수쳤다.
“그래,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래도 너보단 내가 덜 쓰레기네. 따로 따로는 몰라도 어떻게 셋, 다 같이 만나자는 소리를 해?”
게다가 생각해보니 한율과 은가람, 둘은 친구였다.
그야말로 막장.
내가 천호니 차마 뭐라 하지는 못하고 쓰레기한테 쓰레기 소리를 듣다니, 내가 이딴 말이나 들으려고 살아왔던 건가. 하는 회의감과 억울함, 분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 호위무사에 난 내 인성을 보여줬다.
“뭐.”
“...아닙니다.”
호위무사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랬던 게 방금이었는데...
“선택하세요, 화연.”
“선택해주세요, 화연님.”
”나예요, 아님 이 여화입니까.“
“저예요, 아님 이 여화예요?”
정말 셋이서 놀게 생겼다.
바로 어제, 상냥히 대해주기로 약조하셨으면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약혼남인 나 말고 다른 사내와 놀아나시기로 했습니까? 그것도 제 친구인 은가람! 라는 듯한 항의의 표정의 한율과 여느 때처럼 천사가 내려온 듯 살풋 웃고 있는 은가람에 나는 조용히 하늘을 쳐다봤다.
망했네.
“큽ㅋ..”
뒤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리길래 쳐다보니 호위무사였다.
오냐, 어떻게 셋이서 만나냐고 너를 비판한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게 웃기다 이거지?
나는 이왕 쓰레기가 된 거 호위무사에게 좀 더 내 인성을 보여주기로 했다.
손짓으로 호위무사를 가까이 오게 했다.
그에 의아해하면서도 가까이 오는 호위무사의 멱살을 잡고 귓가에 조용히 읆조렸다.
“웃냐? 재밌냐? 감히 웃었으니 내가 천궁에 다시 올 때까지 천궁 주변 계속 뛰어.”
“예?”
“뭐해, 안 뛰고. 밤까지 뛰고 싶어?”
“진, 진짜 뜁니까?”
“그럼 가짜로 뛰어?”
“...”
그렇게 호위무사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천궁 주위를 뛰러 갔다.
겁먹은 척하기는, 그래봤자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왔을 때만 뛰는 척 할 거면서.
뻔히 예상되는 꼼수에 코웃음 치는데 한율의 상처받은 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호위무사까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미친, 환장하겠다.
뭐라변명하지?
뒤에서 비웃어서 천궁 뛰게 만들었다 하면 내 인성이-, 아니. 분노의 화살이 호위무사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특히, 한율. 감히 백호가 보름의 자식인 나를 비웃어? 하면서... 는 너무 한율이 인성질 하는 거 같네.
*
오늘 하루,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
그것으로 약간의 신경전을 하던 한율과 은가람 중 은가람이 먼저 양보했다.
“저는 그저 화연님과 시간을 보내는 거로 만족해요. 그게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요. 한율과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면 화연님의 마음이 편찮으실 테니 오늘은 제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대신, 다음에 두 번 만나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싱그럽게 웃는 은가람은 가히 천사였다.
그리고 영악했다.
착한 이미지도 얻고 하루 만나는 거에서 이틀 만나는 거로 늘리기까지.
그걸 한율도 눈치채고 아차 싶었는지 말을 바꿨다.
“저야말로 화연과 시간을 보낸다는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제가 오늘 양보할 테니 저를 두 번 만나주세요.”
와우, 행복에 겨워 죽는다는 게 이런 걸까.
잘생긴 얼굴로 눈도 호강하는데 이쁜 말만 내뱉으니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쩐다, 나는 둘 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다.
왜냐면 둘 다의 마음을 얻어야 현실로 돌아가니까.
여기서 한율을 택하면 은가람의 마음을 얻기 힘들어질 거고 은가람을 택하면 그 반대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둘 다 사이좋게 오늘 하루를 보내자, 따위의 말을 내뱉으면 더 나락.
이런 이유들에 세 개의 선택 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은가람이 야살스럽게 웃으며 그 말을 원했다는 듯 말했다.
“이런, 한율 여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양보해드릴게요. 한율여화는 다음에 화연님과 두 번의 시간을 보내세요. 저는 한 번인 대신, 오늘 화연과 시간을 보낼테니.”
와, 미친.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격, 이란 게 이 뜻이구나.
불확실한 두 번보다 확실한 한번을 얻기 위한 은가람의 심리전에 한율이 걸려들었다.
게다가 한 번 만난다 해서 한 번만 만나고 두 번 만나자 해서 딱 두 번만 볼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것을 한율도 깨달았는지 얼굴로 욕을 하고 있었다.
“설마 또 마음을 바꾸어 화연님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작정은 아니겠죠, 한율 여화.”
이야, 마지막 퇴로까지 차단.
이 정도면 한율과 은가람은 친구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친구가 아니다.
‘화연, 더러운 것이 화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면 내치셨어야죠.’
아니면 저 때의 더러운 것.이라는 한율의 못된 말에 대한 앙갚음일수도 있고.
아, 속 편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대로 한율을 보낸다면 기껏 쌓은 호감도가 와르르, 무너질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한율을 붙잡아 셋이서 놀 순 없는 노릇이니 당근을 쏟아주기로 했다.
우선은 혼잣말인 것처럼.
“역시, 착한 한율이 양보하네.”
그 뒤는 보상.
“그럼 한율. 바로 내일 천궁으로 와. 아니다, 내가 월궁으로 갈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그에 한율은 사랑 고백을 들은 사람마냥 얼굴을 확, 붉히더니 쑥쓰러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 잠깐만.
나 진짜 쓰레기 짓에 익숙해지는 거 같은데?
급하게 자괴감이 밀려왔다.
*
“어렵게 얻은 기회니, 특별한 곳에 데려다 드릴게요.”
은가람은 나와 단 둘이만 되자 기다렸다는 듯 구석진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너무 구석 아닌가, 싶은 정도가 아니라 무슨 숲속 탐험하듯 몇 차례 수풀을 헤집고 담을 넘고, 나무 하나를 지나고 했다.
그리고서야 드디어 도착한 특별한 곳.
쏴아아, 청량감 있게 폭포가 떨어지고 그 밑에는 밑바닥까지 다 보일 듯 투명한 호수가 있었다.
인어가 사는 곳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을 정도로 청량하고 맑은 곳.
게다가 햇빛이 내려앉아 나뭇잎이든 호수든 반짝반짝 거렸다.
“특별한 곳 맞네.”
“그렇죠? 밤이 되면 반딧물이가 나타나 더 특별해질 거예요. 보고 싶으시죠?”
“오.”
반딧불이라는 것에 감탄 반, 자연스럽게 밤까지 함께 있을 이유를 만드는 은가람에 감탄 반이었다.
이런 거 보면 바론, 한율, 은가람 중 은가람이 제일 여우 같네.
은가람은 내 감탄사를 긍정으로 받아들었는지 선량하게 웃었다.
그리곤 호수 앞으로 걸어가더니 쭈그려 아 나를 불렀다.
“화연님, 이리 와서 이것 봐요. 여기 안에 있는 돌까지 보석처럼 반짝반짝, 이쁘게 빛나요.”
보석처럼 반짝반짝 예뻐?
그 말에 홀린 듯이 은가람의 옆으로 가 호수를 내려다봤다.
“진짜네. 이거 하나 건져서 보석이라 해도 속을 거 같은데?”
내 말에 은가람이 재미있다는 듯 청아하게 웃음을 흘렸다.
오, 세상에.
내가 말실수를 했다.
호수 안에 돌멩이를 보석이라 칭할 게 아니라 은가람의 얼굴을, 목소리를 보석이라 칭해야 했는데.
특히 어떨 땐 파스텔 톤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어쩔 댄 쨍하게 맑은 색인 거 같기도 한 저 오드아이가 매력 포인트였다.
은가람의 얼굴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돌연 은가람이 호수에 시선을 둔 그대로 잔잔히 나를 불렀다.
“화연님.”
“응?”
“이곳을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으세요?”
“음, 예쁘다? 보석함 같다?”
“흠,”
은가람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잠시 호수를 응시하다 내게 시선을 옮겼다.
항상 천사 같던 표정은 가져다 버린 채.
“거짓말하지 마.”
“?!”
샤륵, 은가람이 고개를 기울이는 대로 보기 좋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처음 듣는 무기질적인 말투에, 목소리에, 반말에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너 천의 나라 사람이 아니잖아. 외지인, 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지, 아마?”
“아,”
얼떨결에 떨어진 말은 동공 지진과 함께 이어 나왔다.
“아닌데?! 뭘 보고?! 무슨 근거로?!”
그에 은가람은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청량하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런 거짓말은 못 하시네요.”
마치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보여주듯 천사 같은 미소를 띄우는 은가람에도 내 동공 지진은 멈출질 몰랐다.
미, 미친.
뭐지?
나 이 게임 예전에 플레이했었나?
아니, 그랬어도 은가람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멍청하게 스스로 은가람에게 말했나?
아님 은가람이 미친 듯이 눈치가 빨라서 알아챈 건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은가람이 말했다.
“제가 사계의 숨겨진 세 번째 나이 때 말해주셨잖아요. 자신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며 현실에서 잠을 잘 때, 게임이 저절로 플레이된다고. 바로 여기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걸 말했다고?”
멍청이도 아니고 게임 속 사람한테 이건 게임이야, 따위를 말했다고?
“네, 게임 속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니 특별히 말해준다고 하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화연님의 현실과 여기의 나이는 조금 다르네요. 분명 그때 화연님이 말하시길 15살... 이랬나?”
“아, 미친”
은가람의 말에 나는 바로 이마를 짚었다.
딱! 딱! 내가 한참 중2병 걸렸을 때 나이잖아! 망할 놈의 중2병!
“이러는 걸 보니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네요.”
그 말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띠링 울리며 퀘스트가 올라왔다.
{ [잃어버린 데이터를 찾아서}
어릴 때 플레이했던 내용을 되찾으세요.
보상 : 소원권 1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