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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들을 조용히 억누르는 대신 그저 화연을 한 번 더 품에 안았다.
화연은 의아해했지만 가만히 있어 주었다.
이리 안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증거가 한 번 더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기쁘고도 좋아서,
“...”
...잠깐.
그러나 문득 스치듯 든 생각에 마냥 좋은 기분을 만끽할 수가 없어졌다.
정말, 정말 이런 분위기에 이런 걸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많은 반려를 거느려야 하는 천호의 의무를 가진 화연에게 이런 걸 바라서도 물어봐서도 안 되지만, 약혼자로써의 작은 욕심이 결국 내뱉게 만들었다.
“이런 거,”
내 진지한 어조에 내 품에 안긴 화연이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정말 물어보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입술은 움직였다.
“이런 거 은가람 여화따위와도 하셨습니까.”
“이런 거?”
뭘 지칭하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화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 밖으로 꺼냈다.
“입, 맞춤... 이요”
그저 말할 뿐인데 왜 이리 부끄러운지 절로 얼굴이 홧홧해졌는데 화연은 그렇지 않은지 그저 부정했다.
“아니?”
“...근데 왜 이리 잘하세요.”
바로 아니라니까 기쁘긴 한데 뭔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침울히 중얼거리니 눈을 도록 굴리던 화연이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천호니까...?”
예...?
순간 당황하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유다, 라고 생각했지만 묘하게 납득 갔다.
천호... 천호니깐 그럴 수도...?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끼지만 묘하게 납득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화연이 되려 당당히 되물었다.
“나는 천호니깐 잘하지. 근데 넌? 너도 잘하던데?”
잘하, 잘하던데...?
내가 잘해...?
화연의 말을 듣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부끄러웠던 교육들을 받았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가고 뿌듯함이 밀려왔다.
역시 교육받은 의미가 있었어.
나는 내 옆에 서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구나, 라는 화연의 칭찬이 듣고 싶어져 화연의 물음에 상세하게 답했다.
“저는 당연히 약혼남의 의무로써 화연을 만족시키기 위한 교육을 받았기에 잘하는 겁니다.”
제 노력의 결실이 이겁니다.
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어요, 화연.
어서 칭찬해주시죠.
오매불망 칭찬을 바라며 화연을 쳐다보니 화연은 칭찬 대신 잠깐의 침묵과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칭찬 대신 폭탄을 던졌다.
“실전으로...?”
“이론만이요!”
무슨 기겁할 소리를!
천호의 반려로써 순결은 기본 개념이다.
그걸 이 가군 여화 한율이 어겼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저러시는 건지, 정말 몰라서 저러시는 건지.
억울해져 입술만 꾹 다물고 있으니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화연이 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하게 짓궂은 표정을 짓는 화연에 슬쩍 불안해져 왔다.
아니나 다를까 화연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며 꼭 껴안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럼 잠자리도 이미 완벽하겠네?”
“화연!”
안 봐도 내 얼굴이 붉어졌으리란 건 뻔했다.
내가 다급히 화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살포시 밀어내니 순순히 밀려나준 화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양 짓궂은 기색을 유지하며 말했다.
“왜, 약혼한 사이인데 이런 말 하면 안 돼?”
“화연, 제발-”
쑥쓰러워 붉게 터질 듯한 얼굴로 거의 울듯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화연은 재밌다는 듯 드물게 소리 내며 웃었다.
재미있어 하시니 좋긴 한데 기름에 불붙는 이런 장난은 곤란했다.
화연은 정말, 진짜 내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화연이 허락하기 전까진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잠재우려 노력하며 시선을 사선으로 빗기자 화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 놀릴게, 이제 가자.”
그에 나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벌써요?”
너무 이르지 않나요?
내 반문에 화연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벌써라니, 이제 곧 밤이야. 이리 늦은 밤, 약혼했지만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건 천호의 반려로써 안 되지 않나?”
순간 나를 책망하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 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화연의 표정을 보니 안심되었다.
화연, 몰랐는데 뒤끝이 기시다.
네가 말했잖아, 낯선 사내. 그럼 나는? 낯선 여자.라는 의미를 담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화연에 내가 내뱉은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던 나는 혀를 물었다.
왜 한 치 앞도 못 보고 그리 아둔하게 말을 내뱉어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자니 화연이 안 잡을 거냐는 듯 내민 손을 한번 까딱이며 말했다.
“안 갈 거야?”
그 물음에 나는 화연의 손을 잡아끌며 애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네? 화연-.”
지극히도 불안해서 가고 싶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뿐인 것만 같았다.
내일의 화연은... 오늘 같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이런 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못한 화연은 태평히 말했다.
“내일도 있잖아”
그 내일이 불안하다는 겁니다, 화연.
부드럽고 장난기 가득하게 돌렸지만 명백한 거절.
그에 나는 한 번 더 함께 있자 권하려고 했다.
[“이리 끈질기게 구니깐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거야.”
“하지만 화연-,”
“적당히 해. 더 질리려고 하니까.”]
그러나 떠오르는 추억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삼켰다.
그래, 괜히 욕심부려 좋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네, 내일도 있으니까요.”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화연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에 나는 화연의 기분을 망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면서 마주 웃었다.
*
성공적이었다.
월궁과 천궁 사이 갈래로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행복에 겨워어 쩔 줄 몰랐고 화연은 날 따스하고 다정하게 대해줬다.
행복에 겨워 어찌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버릴 만큼 따스하고 다정하게.
저절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할 만큼.
물론 월궁과 천궁 사이에서 천궁으로 오라는 말도 안 하시고 내게 인사하는 화연에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내일도, 화연의 말처럼 내일도-,
행복에 젖어 자연스럽게 내일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드는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 마냥 현실이 다가왔다.
[저 멀리서 보이는 화연에 반갑게 부르며 달려갔다.
“화연!”
어제처럼 따스하게 인사를 받아주시겠지, 기대하며.
그러나 돌아오는 건 칼날 같은 말 뿐이었다.
“어제 한번 인사를 받아줬다고 이리 개새끼처럼 뛰어오다니. 한율, 매번 어리석네.”
“...네?”
“잠시의 변덕을 좋다고 착각해서 들러붙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아...”
마냥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추억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멍청하게...
화연이 내일도 이처럼 다정할 거란 보장이 어디 있길래 이리 자연스럽게...
혹 예전처럼 화연이 나에게 크나큰 절망감을 안겨주기 위해 잠시 연기한 거라면, 혹 화연의 변덕이 오늘로 끝이라면 이 감정들을, 추억들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리 기뻐하고 있는지.
온기라곤 없는 싸늘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넓고 고급스러운 방이지만 온기 따위 없이 싸늘한 방.
겉모습만 좋은 이 방의 풍경이 마치 이것이 너의 취급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아 입술을 잘근거렸다.
나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완전히 믿을 순 없었던 화연의 말들이, 따스했던 행동들이 순식간에 불안감에 잡아먹혀 걱정과 불안으로 돌아왔다.
오늘처럼 하루 종일 다정하게 대하주신 적은 없지만 한번 다정하게 대해줬다가 다시 냉혹하게 돌아서는 화연을 이미 겪었으면서 멍청하게도 까먹고 있었다니.
화연이 다시 나를 그런 싸늘한 시선으로 본다면, 다시 잔인하게 대한다면.
저번엔 고작 인사 한번 받아줬던 걸 평소처럼 안 받아줬다고 며칠을 앓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
절로 상상되는 충격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좋아서, 죽을 만큼 좋아서, 꿈인 것 마냥 세상이 달라 보여서 그만큼 무서워졌다.
두렵다.
한번 맛본 이 진득한 달콤함이 사라질까 봐.
엿보다 드디어 만끽하게 된 이 사랑스러운 세상이 예전처럼 흑백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행복한 만큼 두려움으로 점칠 된 심장께가 찌르르 울리며 아파져 와 심장께를 부여잡고 몸을 움츠렸다.
두근두근,
“...”
아무도 없는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이곳,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빛의 희미한 불빛만이 흘러들어오는 이 곳에서 곧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심장께를 부여잡고 움츠렸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차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행복해도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니.
“하,”
서러웠지만 고작 이 정도 불안감으로 이 행복을 영원히, 아니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감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 이리 불안하고 아파도 잠깐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면.
그리 생각했지만 장담하지 못할 내일에 우울해지는 건 막을 수 없어 한쪽에 곱게 개어져 있는 이불 위에 위치한 베개를 당겨 껴안았다.
오늘 화연이 울던 나를 안아서 달래주던 걸 회상하면서.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세상 우울함이 사라지고 다시 몽글몽글 행복감이 채워졌다.
내일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만 추억하면 세상 깊은 상처도 이겨낼 수만 있을 것 같이.
혼자 회상하고 상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우울해졌다 하는 게 머저리 같았지만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거려 바보같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조차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