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꽃은 못 찾아도”
화연의 희미한,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에.
동백꽃 가득 피어있는 가지를 떼어내는 그 느긋하고 고풍스런 몸짓에 서운한 것도 잊어버리고 넋을 놨을 때 화연이 내게 가지를 건네며 말했다.
“어울리는 꽃은 찾을 수 있어, 그러니 너무 상처받지 마”
주황, 빨강, 노랑, 푸른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노을 하늘에 물들은 화연의 은발, 바람결에 흔들리는 형형색색의 꽃들과 풀잎, 동백과도 같이 붉은 화연의 눈동자, 희미하게 걸쳐 있는 미소.
온 세상의 색조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이 풍경이, 그 한가운데 서 있는 화연이 너무도 아름다워 떨리는 손으로 화연이 내민 동백꽃 가지를 받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맡아지는 꽃 냄새는 너무도 향기로워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꽃 따윈 모를 줄 알았다.
그저 바론 따위와 혼동하기에 심술부려 본 것인데.
그러나 알고 있었다는 것에 순수하게 감동하기엔 알면서도 모른척한 화연이 얄미웠다.
“제가 좋아하는 꽃...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신 거죠, 화연.”
역시나, 내 말에 화연은 맞다는 듯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알면 안다고 바로 말하면 되지, 모를 거라 예상했음에도 정말 틀리니 순간 심장이 떨어졌었다.
그 잠깐의 틀림이 나에게 얼마큼의 상처를 줬는지 화연은 평생 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자 억울하고 서러웠다.
“...”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화연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는 것에 기쁘고 행복해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그 탓이었다.
내가 충동적으로 진심을 내뱉으려 한 것은.
“화연, 동백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그러나 내 진심을 온전히 말하지 못하고 꽃말을 빌려 하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겁쟁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쏴아아, 시원하게 불던 바람이 멎었고 화연과 나 사이에는 정적이 일었다.
그 어떠한 반응도 없는 화연에 상처받을 준비를 하며 옮긴 시선 끝에 보인 것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것이었다.
내 모든 것들은 각인시키듯 집요하고 애정 어린, 넋을 놓고 나는 지금 너에게 반했다, 를 숨기지 않는 시선.
그 시선이 내게 못 박힌 듯 멈춰있었다.
“...”
두 번째라 해도 언제나 냉랭한 시선만 받아왔기에 낯설고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 시선은, 표정은 천천히 내 심장을 뛰게 했다.
두근, 두근,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은 이내 터질 것 같이 죽을 것 같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행복해서, 좋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나는 정말 내가 죽는 줄 알았다.
{“죽은 것들을 보는 건 질색이야, 그게 작은 짐승의 사체든 사람의 시체든.”}
그 감정에 질식하려는 순간, 스치듯 기억나는 화연의 말에 나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안 된다.
화연이 죽는 걸 볼지언정 내가 죽는 꼴을 화연에게 보여줄 순 없다.
그 일념 하나로 뛰쳐나갔다.
“!”
화연이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도망치는데 화연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왜?!
나는 여전히 달리는 걸 멈추지 않으며 기겁해 물었다.
“왜 따라오시는 거예요!”
“아니, 도망가니깐...?”
이, 무슨 본능적인...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외쳤다.
“따라오지 말아 주세요!”
“아니, 왜?!”
나보다 더 어이없어하는 화연에 차마, 심장 터져 죽는 걸 보여 드릴 순 없으니까요! 라곤 외칠 수 없어 그저 더 빠르게 뛰었다.
그러길 몇 분.
몰랐는데 화연, 엄청 잘 달렸다.
체력도 어찌나 좋다.
이젠 온갖 감정에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지극히 신체적 반응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슬슬 괜찮아졌는데 멈출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익숙한 기운의 룬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화연...? 설마...?”
...아니죠? 저를 억지로 화연 앞으로 끌고 갈 심산은 아니시죠?
이미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외면하며 나에게 달라붙은 룬이 내 착각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이건 아니다!
멈춘다는 말이 화연을 볼 준비가 됐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그저 적당한 거리만 유지해도 될 듯싶어 그런 건데...!
이제야 막 심장이 진정됐는데...!
내 통제를 벗어나 화연에게로 다가가는 내 몸에 속으로 절망하며 또 행복에 질식해 죽을 듯이 심장이 뛸까 두려워 화연에게 애원했다.
“잠시, 잠시만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런 것이니 잠깐만의 시간을,”
“싫어.”
그러나 화연은 몹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절대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룬으로 이러는 건 너무했다...!
“이건 치사해요!”
정정당당하게 달려서 잡으시지 않고 비겁하게 룬으로 이러시다니!
내가 이리 항의하는 순간에도 화연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심장이 위험했다.
안 돼, 나는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질끔 감으며 아무 말이나 외쳤다.
“미... 미워할 겁니다, 화연!”
“...”
?!
아니, 잠깐. 이 무슨...!
내가 내뱉어 놓고도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은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뿐이랴, 내가 미워해봤자 화연은 아무 상관 없을 텐데 이게 먹힐 거라고 스스로 무의식 중에 생각해 내뱉었단 자체가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켰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라 쪽팔림에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연 또한 이런 내 생각과 똑같이 생각했던지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재량껏 해보든가.”
너무도 확실히 단정 짓는 화연에 왠지 모를 반발심이 튀어나왔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입술만 꾹 다물고 있었다.
하긴, 당당하고 자신감 넘쳐 사랑스럽다는 생각부터 먼저 드는 저 모습에 누가 싫어할 수 있다고 하겠어.
반박할 말을 찾다가 포기하고 수긍하니 상이라도 내린 듯 몸을 감싸고 있던 화연의 룬이 사라졌다.
지금이다...!
나는 재빨리 뒤돌아 뛰어가려 했다, 부드럽게 닿는 화연의 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 왜 제게 이런 시련을...
화연의 손을 뿌리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요동치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화연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을 쯤,
“그리고”
화연이 돌연 내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더니 내 손바닥에 입 맞췄다.
“잠결엔 잘도 이런 거 했잖아. 이제 와서 부끄럼타기엔 늦었지.”
“?!”
설마...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다는 건 이런 걸까.
나는 그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꿈이, 꿈이 아니었습니까...?”
제발,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그러나 진실은 잔혹한 법이었다.
화연은 내 간절한 마음 따윈 가볍게 즈려밟으며 다시 한 번 확인사살했다.
“아니지, 손바닥에 뽀뽀라니 신박했어?”
“그, 그건 꿈이라 생각하여...!”
그리한 겁니다! 차마 입 맞추기엔 심장이 떨려 작게라도 하고 싶어서... 라는 뒷말은 자동적으로 삼켜졌다.
감히 화연과 입 맞추고 싶어 했다니, 절대 말 못 한다.
그리 속으로 말을 삼키고 있을 때 화연이 말했다.
“그럼 이것도 꿈이라 생각해.”
“예?”
꿈이라 생각하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애타게 원하고 바라고 기다렸는데.
그러고 보니 억울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오늘 하루 나 혼자만 당황하고 부끄럼타고 놀라고 온갖 추태까지 부리도록 만들어놓고 정작 그 원인인 화연은 이리 평정을 유지하며 나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울고 놀라기만 하고 좋아하는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못하는 유약한 사내 보듯 보다니.
게다가 이때까지 먼저 다가오지도 못하게 상처 주며 내쳤던 탓에 내가 움츠려 들어있던 건 생각도 안 하고 계신 모양이라 더 억울했다.
나라고 다가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닿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화연.”
다가가고 싶고 닿고 싶고 나도 보고 싶었다.
나로 인해 부끄럼타고 얼굴 붉히는 화연을.
“그거 압니까.”
“뭐를?”
“이 천의 나라에서 노을이란 낮과 밤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라고들 하잖아요.”
내 말에 화연은 뜬금없다는 양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그게 여인과의 관계에선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 라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화연, 저는 부끄럼만 타고 도망가기만 하는 약혼남이 아니에요.”
당당히 선언한 나는 계속 화연을 본다면 내가 나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살풋 눈을 감고 다가갔다.
다만, 이때까지의 경험이 있다 보니 화연에게 내쳐질 것만 예상되어 화연이 뭐라 말하지 못하게 빨리, 그러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상상으로 그려만 봤던, 간절히 원했었던 순간이 실현되는 지금.
나는 이것이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것이란 걸 잊지 않았다.
그만큼 덧없이 소중한 기회라 지금 이 분위기, 느낌, 체온, 화연의 모든 것을 천천히 음미하며 새겼다.
화연이 다시 나를 싫어하게 되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냥 좋고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며.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시간은 잔인하게도 흘렀다.
결국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럽고,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내 이성을 완전히 앗아가려는 순간 나는 초인적인 인내로 입을 뗐다.
조금만 더...
그러나 나는 아쉬운 속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요.”
화연이 나를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는 얌전한 사내로만 인식하는 것이 싫다.
“저,”
나도 허락만 해준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내게 좀 더 확실히 마음을 내어주세요, 화연.
“응.”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간단히 응, 이라 대답하는 화연에 씁쓸함이 베어 나오려 할 때 화연이 내 옷깃을 잡아끌어 입맞췄다.
“?!”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빠르게, 그러나 부드럽게 덮쳐오는 화연 탓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뭐 때문에 그쯤에서 그만둔 건데.
화연은 정말 남의 마음 따위 헤아리는 능력은 쥐뿔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기에 한 번 더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눈을 거세게 감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찾아오는, 정신을 날려버릴 듯한 느낌.
내가 한 것은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 화연이 주도한 입맞춤은 격렬하고 화려했다.
머릿속에서 꽃비와 함께 잘게 부순 보석들이 햇빛 속에 섞여 내리는 환상적인 느낌,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 게 투명하고 반짝이는 유리정원 한가운데 서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유리알들의 청아한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시원하고 청아한 느낌도 들었다.
격렬하고 진득하지만 청아한. 그건 말 그대로의 황홀감.
그 황홀감에 젖어있자니 한편의 풍경화처럼 석양을 가운데 두고 입을 뗀 화연이 말했다.
“좋네.”
아,
그리 말하며 천천히 내 가슴팍을 밀어내며 멀어지는 화연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가슴께가 아프면서도 불안하고 한편으론 닿고 싶어 애타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도 행복감이 지배적이라 나는 몰아치는 감정들을 조용히 억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