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은 그만치기 약속하고 함께 발을 맞춰 정원을 거닐었다.
“아, 그래서 이 꽃은 뭐라고?”
“이건 수국 화예요.”
모르는 꽃과 그 꽃말을 물어보는 사소한 일.
이 사소한 일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한율은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행복해할 만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던 중 드디어 한율에게 점수 딸만 한 것을 찾았다.
바로 등 뒤에 동백나무가 있었고 머리 위론 동백꽃이 펴있었지만, 심지어 아까 정자 바로 옆에도 딱 가슴께까지 오는 동백나무가 있어 한율이 자는 걸 구경할 때 잠시 예쁘다 구경했었지만 내게 중요한 건 무궁화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 정보가 틀림없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바로 서두를 띄웠다.
“아, 이 꽃 알아 무궁화지? 꽃말은 일편단심이었던가.”
“네, 맞아요. 이건 알고 있네요.”
내 속셈도 모르고 살포시 미소짓는 한율에 점수를 쌓을 생각이었던 나도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응, 니가 좋아하는 꽃이잖아.”
엇.
잠깐, 분위기가 싸하다.
이건 눈치챔. 따위가 아니었다.
뭐랄까, 생존본능...?
왜 생존본능이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때쯤 원인을 찾았다.
“화연, 그건 바론 예무가 좋아하는 꽃.”
“...”
“혼동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삐졌다...
한율이 활짝 핀 꽃처럼 수려한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눈은 웃지 않고 스멀스멀 움직이는 어둠이 물들어 있었기에 나는 삐진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래, 저 표정이 삐진 거 아니면 뭐겠어.
이래서 가만히라도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나오는 거였다.
아니, 나 멍청인가?
왜 갑자기 한율은 무궁화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은 거지?
의문은 곧이어 올라오는 시스템 창 덕에 해소되었다.
{은밀하게 찾아오는 패널티.
한율이 좋아하는 꽃은 무궁화라고 굳게 믿고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패널티 -1
남은 패널티 : 5개 }
망할 패널티.
싸한 분위기에 속으로 시스템을 욕하며 슬쩍 눈을 대굴, 굴리니 한율이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꽃을 맞추신다면 용서해드릴게요.”
“오-,”
찬스, 찬스.
아무것도 안 궁금해할 거라는 말 취소.
지금 엄청 궁금하니 가르쳐줘, 시스템아
간절히 바라면 모든 게 이뤄진다.
정보를 얻는 것도 그러하리!
아까는 놀리듯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줬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주겠지!
근거 없는 믿음으로 시스템 창을 기다렸다.
그러자 띠링, 옛다, 하는 식으로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한율이 좋아하는 꽃은,}
꽃은?
{...}
애타게 기다렸지만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이 자식아.
나는 가르쳐줄 것처럼 하다 내빼 시스템에 눈을 도록, 굴리며 꽃들을 살펴보다 좀 떨어져 있는 수국 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그래, 내가 선택한 건 바로 찍기였다.
기적처럼 맞추길 바랐지만 당연하게도 기적은 없었다.
“...”
[동백이었다.]
응, 이미 한율 표정으로 틀린 거 알아.
가르쳐주는 거 늦었어, 개새끼야.
한율은 차라리 왜 모르냐고 화를 내지 안쓰럽게 애잔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화연은 정말로, 저한테 관심이라곤 없었군요.”
이거 딱 그 플래그다.
훗날 내가 꽃과 관련돼 무슨 생각만 하면 {바론이 좋아하는 꽃은 맞췄으나 한율이 좋아하는 꽃은 전혀 모르는 천호, 그런 천호에 상처받은 한율}을 띄울 플래그.
나는 대참사를 막기 위해 머리를 굴려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역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곧바로 생각나는 방법에 속으로만 환호하며 다급함이 티 나지 않게, 한율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눈을 위로 굴렸다.
짧은 사이 몇 번을 스캔했을까 드디어 가장 얇은, 한 번에 부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길이와 두께의 동백 가지를 찾았다.
“좋아하는 꽃은 못 찾아도”
그리곤 일부러 여유로이 손을 뻗어 동백꽃이 가득 피어있는 가지를 떼어내 한율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울리는 꽃은 찾을 수 있어, 그러니 너무 상처받지 마.”
내 말에 누가 봐도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동백꽃 가지를 받아 간 한율은 이내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꽃...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신 거죠, 화연.”
어라? 저 반응을 보니 한율이 좋아하는 꽃은 동백꽃이었나보다.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아니, 우연히 그런 건데? 라고 말해 분위기를 깰 순 없으니 나는 그저 아리송달송하게 미소만 지어줬다.
실은 승리자의 미소였지만.
미안하지만 내가 이겼다, 시스템 자식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스템 따위와 싸워서 뭐 하나 자괴감이 들려 하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한율이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화연, 동백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모른다는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한율이 붉어져 있는 얼굴로 애써 나와 시선을 맞추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쏴아아, 시원한 바람이 불며 동백나무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는 내며 흔들렸고 꽃잎 비가 내렸다.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흩날리는 붉은 동백 꽃잎,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띄운 한율, 하늘에 깔린 붉은 노을, 바람결에 흔들리는 매혹적인 한율의 자몽빛 머리카락.
그 어느 하나 붉지 않은 게 없는데 딱 하나.
애정이 담긴, 곱게 휜 한율의 푸른 눈이 시야에 못 박히듯 각인됐다.
“”...“”
시간이 멈춘 듯, 멍하니...
그렇게 영원히 지나갈 듯, 서로가 서로를 각인시킨다는 듯이.
그리고 돌연 한율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도망갔다.
...?
어째서...?
동물적 본능으로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한율을 뒤따랐다.
“!”
잠시 숨을 돌리려 했는지 멈추고 뒤돌아보던 한율은 내가 따라오는 것을 목격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 뛰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왜 따라오시는 거예요!”
“아니, 도망가니까...?”
“따라오지 말아 주세요!”
“아니, 왜?!”
진짜 왜?!
어이가 없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도망가는 한율을 쫓아가길 몇 분.
나는 의미 없는 시간 낭비는 질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다리기는 그만두고 숨을 고르며 룬을 움직였다.
한율 찾기 퀘스트 성공으로 룬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사용해 줘야지.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룬은 시스템 창에 적힌 그대로 내 의지에 따라 한율을 멈추게 했다.
“화연...? 설마..”
한율이 내 이름을 부르며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과 동시에 정답이라는 듯, 내 뜻에 따라 움직이는 룬이 한율의 움직임을 조종했다.
남이 보기엔 한율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조종되었고 한율은 그제야 급박하게 진심을 외쳤다.
“잠시, 잠시만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런 것이니 잠깐만의 시간을,”
“싫어.”
이미 늦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 줬을 텐데 뒤늦게 말하면 무슨 소용이람.
팽, 거리는 내게 한율이 외쳤다.
“이건 치사해요!”
“그래그래, 나 치사하다.”
치사하게 살 거야.
인성 쓰레기역할을 받았는데 치사하게 사는거 쯤이야.
그저 숨을 고르며 다가오는 한율을 느긋이 쳐다보니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한율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미, 미워할 겁니다, 화연!”
붉어진 얼굴로 눈도 못 마주치면서 잘도 그러겠다.
나는 뻔히 보이는 거짓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재량껏 해보든가.”
내 말에 한율은 자존심이 있으니 반박하고는 싶으나 사실이기에 반박할 말이 없어 붉어져 있는 얼굴로 입술만 꾹,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결국 한율은 내 앞에 당도했다.
그에 나는 룬을 거둠과 동시에 이를 눈치챈 한율이 도망가지 못하게 손부터 잡았다.
“...”
도망갈 거란 내 예상이 맞았는지 한율은 내게 손이 잡히자 경찰에게 잡힌 범죄자마냥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도망치질 말던가.
조금 괘씸해져 장난기가 돌았기에 나는 서두를 띄웠다.
“그리고”
나는 부러 보란 듯이 살짝 웃으며 아까 한율이 잠결에 했던 것처럼 나 또한 잡고 있던 한율의 손목을 잡아끌어 손바닥에 가볍게 뽀뽀했다.
“?!”
크게 움찔하며 얼굴이 불타오르는 한율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고 가볍게 말했다.
“잠결엔 잘도 이런 거 했잖아. 이제 와서 부끄럼타기엔 늦었지.”
“꿈이, 꿈이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손바닥에 뽀뽀라니 신박했어?”
“그, 그건 꿈이라 생각하여...!”
“그럼 이것도 꿈이라 생각해”
내 평탄한 말에 한율은 예? 하고 말문 막혀했다.
그모습을 보자니 내가 이긴 기분이 들어 꽤나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자 한율이 잠시 제 두 눈을 꼭 감고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뜨며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화연.”
그리곤 강한 승부수를 둘 사람처럼 긴장 어린 마른침을 한번 삼키며 몹시 침착하고 진지하지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압니까.”
“뭐를?”
“이 천의 나라에서 노을이란 낮과 밤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라고들 하잖아요.”
몰랐으나 모른다고 하기엔 천의 나라이 아닌 티가 날까 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그게 여인과의 관계에선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 라는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응? 그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는 소리 아냐?
갖다 붙이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분위기를 깨기 싫어 가만히 있자 한율이 이어 말했다.
“화연, 저는 부끄럼만 타고 도망가기만 하는 약혼남이 아니에요. ”
살풋, 눈을 내리깐 한율이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내게 입을 맞춰왔다.
갑작스레 미안하다는 듯, 몹시 부드럽고 촉촉한 시작은 예상외였지만 환영이였기에 자연스레 틈을 내줬고 곧이어 말랑한 게 조심히 들어와 입안에서 함께 뒤섞였다.
마지막인 것처럼 애절하고 소중하게, 구석구석 기억하겠다는 듯 섬세히.
눌리기도 하고 쓸기도 하며 여기저기 달달함을 나눠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착각할 만큼 느릿하고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
오, 뭐야, 완전 잘해.
그뿐이 아니었다.
언제 눈감고 들어왔냐는 듯 낮게 가라앉아 풀린 눈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한율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맞았다, 이때까지 했던 키스 중 제일이었다.
역시 역하렘 게임.
키스를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일단 하면 잘한다, 의 법칙은 깨지지 않았다.
개이득...
혀로 입술을 쓸으며 속으로 개이득을 외치고 있는데 한율이 풀린 눈으로 한숨 쉬듯 말했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요.”
한율은 자신의 피딱지 앉은 촉촉한 입술이 내 시선을 빼앗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잘도 입술을 움직여 날 유혹해왔다.
“저,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응.”
좋아, 한 번 더 하자.
말하는 도중 덮칠까 고민하다 인내한 탓에 내 대답은 빨랐고 한율이 또 도망갈까 싶어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덮치는 내 행동도 빨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율이 했던 것처럼 부드러이 다가가니 한율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가 이내 눈을 꼭, 감겼다.
그것을 확인하며 나도 눈을 감았다.
가슴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으면서도 달콤한, 세상에 오로지 둘만이 남는 듯한 기분을 주는 키스는 한율이 했던 것과 달리 다소 격렬하게 사랑을 나눠줬고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느껴질 만큼 빠르게 끊겼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석양을 가운데 두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좋네.”
그에 한율은 알 수 없는 미묘한, 복합적인 어른의 표정을 지었다,
복잡했지만 그래도 뚜렷이 알 수 있는건 행복이란 감정이 절대적이었다는 것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