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율은 코를 훌쩍이며 나를 놓아줬다.
한율은 아쉽다는 듯 천천히 껴안은 손을 풀고 몇 발자국 물러서 얌전히 울었던 흔적을 지워 얼굴을 단정히 하려 했다, 만 붉어진 눈가와 코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 또 한 번 취향 저격당한 나는 다시 울리고 싶었지만 이제 막 울음을 그친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기에 배려를 가장해 내 욕심을 권유했다.
“더 울어도 되는데”
“큼, 크흠...”
그러나 한율은 자신이 이 정도로 울었다는 게 민망한지 홍조를 띠고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하더니 새침하게 말했다.
“...저 원래 잘 안 우는 거 아시죠.”
과거에 울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니 잘 안 울었겠지.
그런데 괜히 장난치고 싶어져 축축이 젖은 내 어깨를 한번 쳐다봐주며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몰아서 울은 걸로 할게.”
“!”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질 거라 예상한 내 반응과 달리 한율은 사색이 되며 안절부절못했다.
“감히, 감히 제가 화연의 옷을, 죄송해요. 지금 바로 닦아드려도 되겠습니까?”
설마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한율이 곱게 자수가 놓인 고급진 손수건을 꺼내 내 어깨에 얹어 약간의 힘으로 섬세하게 눌렀다.
닦는 것보다 손수건에 흡수시키는 게 더 낫겠다는 한율의 판단이 옳았다는 듯 축축함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것보단 아니었는지 한율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제 더러운 눈물 때문에 찝찝하실 테니 갈아입으러 가겠어요?”
그에 나는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더러운 눈물이라니. 네 눈물은 더럽지 않아.”
거의 뭐, 1급수 급의 깔끔함으로 느껴지는데 왜 저런 소리를 하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동안 천호가 얼마나 한율을 갈궈댔으면 저렇게 자존감이 낮아졌는가에 대한 안쓰러움도 밀려왔다.
좋아, 어차피 한율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거. 전의 천호가 낮춰놓은 한율을 자존감을 내가 올려주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낯설지만 좋아서, 좋지만 낯설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한율에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되겠네. 나는 정말 괜찮은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오늘 하루, 우리 둘이 뭘 하며 시간 보낼까 물어보려 했는데. 갈아입으러 가?”
“아니요! 아닙니다!”
순식간에 표정을 반색한 한율은 산책하러 가자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마냥 귀를 쫑긋하며 바로 즉답했다.
예상대로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 할래? 네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줄게.”
그에 한율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하루-”
오늘 하루?
“이곳에서 저와 함께 산책, 해주세요.”
겨우 그거?
우물쭈물하기에 나는 뭐 대단한,
{월궁에 딸린 정원이란 건, 월궁에 배정된 사람의 취향에 따라 제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고유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 고유 영역을 나는 화연이 좋아하도록 꾸몄다.
최선을 다해 최고급의 것들로 화려하지만 단정히.
그 이유는 단 하나, 화연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연, 화연이 말씀하신대로 꾸며놨어요. 그러니 약속...지켜주세요.”
애써 용기낸 내말에 화연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거절할줄알았는데 아니다.
그것이 너무도 기뻐 절로 미소를 머금고 앞서가는 화연을 뒤따라갔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함께하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치며 저절로 행복함이 밀려왔기에 나는 싸늘한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아아-, 아니네.”
앞서가던 화연이 멈추며 띄우는 서두에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까까지 가득 찼던 행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분이 영 더러워서 못 가겠어.”
뒤돌아 곧게 마주치는 화연의 싸늘한 시선이 몸을 굳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말은 가볍게 내 숨통을 조이며 심장을 짓뭉갰다.
“내가 왜, 은가람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하여 너 따위와 정원을 걸어야 하지?”
울면 안 돼.
이런 거 익숙하잖아.
나는 애써 울음을 먹으며 말했다.
“화연이 분명 말씀하셨잖아요”
정성껏 꾸미면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발 한번 들여 보겠다고.
억울함이 담긴 물기 어린 내 목소리에도 화연은 여유로이 비소하며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걸, 다른 이유라도 늘어놔 보지 그래?”
일부러 상처가 되는 말만 골라 내뱉는 화연에도 나는 그저 입술만 잘근거리며 최대한 생각을 쥐어짜네 이유를 찾기 바빴다.
“저는... 화연의 약혼자이니 산책 정도야-,”
“그딴 이유라면 더더욱 발 들일 일은 없어.”
싸늘히 발걸음을 돌린 화연이 습관처럼 입술을 잘근거리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비아냥거렸다.
“혹시나 해서 경고하는데, 네가 진정 이 정원의 주인이라 착각하지 마.”
화연은 그것을 끝으로 나를 완전히 등졌다.
“...”
그 천한 자식에게 갈 것이 뻔한데도 멀어지는 화연을 잡을 수 없었다.
한 번 더 거절당하면 거절당한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저 멀어지는 화연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아, 제바아알...!
내가 나쁜 사람이 맞긴 한데, 아니, 정확히는 전의 천호가!
그래도 이젠 잘 대해준다잖아아아아...!
한율이 얼마나 용기 내서 산책하자는 말을 꺼냈는지 이런 식으로 안 알려줘도 된다고!
마치 전의 천호가 얼마나 못됐는지 보아라! 한율은 전의 천호가 한 짓을 네가 한 짓으로 알겠지! 라며 놀리는 것처럼 올라오는 시스템 창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절대 궁금해하지 않으리, 라는 다짐도 잊지 않고 말이다.
“...”
“...?”
시스템 인성 질엔 내가 당했는데 한율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는 건 왜 때문인데?
내 물음에 정답을 알려주겠다는 듯 한율이 말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해요.”
좋아, 내가 인상 찌푸린 걸 거절한 거로 받아들였다는 거네.
씁쓸함을 한껏 담은 주제에 애써 웃으며 사과까지 하니 안타까움만 배가 되었다.
나는 애잔한 한율이 완전히 체념하기 전에 얼른 껴안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좋지.”
"?!"
한 번밖에 안 썼지만 아무래도 한율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데 안는 것만큼 직방은 없는 것 같아 껴안은 건데 너무 효과가 좋았는지 언제 어두운 표정 지었냐는 양 밝아졌다.
몹시 붉은색으로.
익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목이고 귀고 얼굴이곤 붉어져서는 아까까지는 잘 처신했던 손도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시선도 못 마주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당황한 티를 역력히 비췄다.
“잠시, 그, 화연-! 갑, 갑자기 껴안는 것은...!”
하, 참나.
스킨십에 고지식하다 설정되어있더니 이 정도 까지 일정도야.
하긴 손잡는 거 하나에 그리 의미부여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래도 말이야.
“아까까진 잘도 안았잖아?”
오, 방황하던 손이 안착했네.
나는 방금 전 상황을 되새기듯 눈을 도록- 굴리다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는 한율에 방황하던 손이 자리를 찾았다며 박수쳤다.
물론 실제로 하면 한율이 더 부끄러워할 테니, 속으로만 내적 박수친건 당연했다.
친절한 나는 한율의 부끄러움이 다 날아갈 동안 기다리기로 하며 스스로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열기를 내는 것을 가만히 감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슬슬 지루한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시간이 흘러도 미동도 안 하는 한율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몇 겹의 옷 사이로도 감춰지지 않는 탄탄한 몸매에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 게임에서 나는 쓰레기잖아, 게다가 한율은 내 약혼자고 여기 세계관에서 천호인 나는 이래도 되니까,
실컷 마음속으로 변명을 떠벌거린 나는 얼굴을 파묻고 있는 한율에 씩, 웃으며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래, 계속 눈 가리고 있어 봐.
정면.
한복 특유의 단정한 목깃.
그 깃을 따라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깔끔히 여며진 깃과 허리춤보다 높은 위치에 묶여있는, 문양 새겨진 붉은 세조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거쳐야 할 검문을 하는 것뿐이라는 마음가짐과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양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여 한율의 단정히 여며있는 깃 사이를 파고들었다.
“...?”
내 움직임에 얼굴을 가린 자신의 손을 내려 멍청히 내 손을 내려 보는 한율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고 차분히 손을 놀렸다.
소매도 넓고 겹겹이 입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서 여러 색의 천들이 보였다 가려졌다 하기에 전통적인 답호(옆트임이 있는 반소매 포, 두루마기와 흡사하다)인 줄 알았는데 약간의 퓨전이 들어갔는지 생각보다 쉽게 한율의 맨살을 느낄 수 있었다.
“...”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됐는지 몸을 굳히기만 할 뿐 멍청히 보고만 있는 한율에 닿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세조대가 보통보다 넓어 파고들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세게 묶진 않았는지 내 손 하나 파고들 틈은 있어 매끄럽게 내려갔다.
그래봤자 몇 센티미터 차이겠냐 싶지만 그 몇 센티미터 차이로 탄탄한 복근이 만져졌으니-,
“...!”
한율이 크게 움찔하며 화르륵 타오르더니 제 손 하나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은 한 손은 당혹감에 본능적으로 나를 밀려 했는지 내 어깨로 다가왔지만 나에게 닿기 전 멈춰져 그저 힘줄이 돋을 정도로 꽉 쥐어졌을 뿐이었다.
그 일렬의 과정을 본 나는 붉어진 한율에게 씩, 웃어주었다.
딱히 놀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이로 인해 한율은 현실로 돌아오듯 파드득 놀라며 자신의 옷 속을 파고든 내 손을 잡아 빼고 다른 한 손으론 벌어진 깃들을 잡아 여물며 앙칼지게 외쳤다.
“어, 어찌 낯선 사내의 몸을 함부로...!”
다급히 잡아챈 주제에 무슨 새털 다루는 것 마냥 상냥히 잡아 온 한율에 별 힘들이지 않고 한율의 손에서 내 손을 가볍게 빼냈다.
“낯선 사람이라니. 왜 그래. 우린 약혼한 사이잖아.”
왜 당황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지극히 사실만을 말한다는 평탄한 어투로 말하니 한율은 깃을 붙든 제 손에 힘만 더 주며 붉은 얼굴로 입술만 앙, 다물었다.
이것은 필시 부정하긴 싫고 인정하자니 부끄럽다는 표시.
나는 그런 한율이 웃겨 유쾌히 웃었다.
잘생긴 게 귀엽기까지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