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연...?”
“아,”
정자 끝, 의자에 앉는 것처럼 걸터앉아 방금 막 신발을 다 신었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한율의 표정이 어쩐지 멍청해 보여 귀여웠다.
“찾았다.”
혹시나 벌써 일어났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 보람 없이 없어졌지만 귀여운 표정의 한율을 보았으니 어떠랴 싶어, 그저 한율의 귀여운 얼굴을 감상하며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그러자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한율의 코앞에 당도했다.
“...”
코앞까지 다가가 놓고는 정작 내뱉어야 할 말들은 입안에서 맴돌았다.
사과하는 건 어색하고 쑥스러우니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좋다 생각하며 왔지만 막상 사과하려니 익숙지 않아 망설이게 된 탓이었다.
살짝 망설이던 나는 올지 몰랐다는 듯 쳐다보는 한율의 시선이 민망해 볼을 긁적이다 마음 다잡고 결국 내뱉었다.
“사과하려고. 바론과 네가 싸울 때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고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어. 미안.”
괜히 헛소리를 지껄여 지뢰를 밟거나 천호니까 내 사과받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게 최대한 간단히 사과했다.
간단명료, 하지만 할 말은 모두 담은.
그에 한율은 이런 내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뜸 볼을 꼬집었다.
뭐지?
지금 내 사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항의하는 건가?
너무 간단히 말했나?
그렇게 생각할 때쯤 한율이 아, 라는 단말마를 내뱉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마치 그 시선이 사과라면서 저번에 그렇게 심하게 말해놓고 사과한다는 말이 이렇게 간단해? 양심 어디? 하는 것 같아 순간 당황했다.
“진짜 미안해. 내가 천호라고 억지로 사과 안 받아줘도 돼. 화해도 안 해도 돼. 네가 내킬 때, 그때 받아줘. 기다릴게.”
내뱉고 나니 착한 척, 배려하는 척하면서 되려 사과받으라 압박하는 것 같아서 아차했다.
아니, 사과도 해본 사람이 잘하지.
1초가 1분 같은 정적 후 드디어 한율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금, 바로... 사과도, 화해도, 할 거예요.”
“고마워!”
긴장하고 있었기에 사과도, 화해도 할 거라는 한율의 말에 자동반사로 고맙다가 나왔다.
물론 한율의 어투가 완전히 화가 풀린 건 아닌 듯 조금 뚱했지만 나에겐 은가람이 건네준 비장에 무기가 있었다.
“아, 별건 아니고 이거. 화해의 사탕.”
자, 한율. 어서 먹고 조금 남아있는 화마저도 확실히 풀어버려.
역시나 완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게 맞는지 한율은 좋아한다던 사탕을 받고서 바로 먹지 않고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레 사탕을 까먹었다.
삐져서 먹기 싫어도 좋아하는 사탕이니 먹을 수밖에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안에서 사탕을 도록 굴리는 한율을 뿌듯하게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한율의 눈시울이 우는 사람 붉어지더니 기어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 착각인가 싶었지만 숙인 고개 아래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울, 울어...?!”
왜...?
내 말에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흔드는 한율의 모습이 귀엽지만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울 포인트가 있었던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결국엔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어디가 아픈지 물어볼 생각으로 한율이 고개 들게 했다.
아픈 거 맞네!
내 손길을 따라 순순히 얼굴을 들면서도 바로 자신의 양팔로 얼굴을 가리는 거 보니 상처라도 났거나 눈병이라도 났거나 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과했는데 울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한율이 아픈 게 아닌데도 운 거라면 이 사과는 망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한율의 양 손목을 잡아 옆으로 치웠다.
“...”
그러자 드러나는 한율의 얼굴.
그것은 내 숨을 멎게 만들었다.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잘생겼다.
잘생겼으며 동시에 아름다웠다.
마치 미의 신이 정성스레 빗은 동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동공을 애처롭게 떨다 이내 시선을 피하는 한율은 가녀린 꽃 같았다.
팔랑이며 살랑 내려앉는 속눈썹은 마치 나비 짓과도 같았고 붉어진 눈가와 코끝, 터져서 딱지가 않았음에도 생기 돋는 입술의 조화는 이것이 바로 아련미다, 라고 가르쳐주는 것만 같았다.
이게 그 유명하다는 잘생쁨, 가녀리고 애처로운 미남.
게다가 충분히 힘으로 뿌리칠 수 있음에도 내게 얌전히 손목을 잡혀있다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얼빠 인생 근 몇십 년.
“엉망이라, 보여주기, 싫어요.”
미친 듯이 예쁘고 잘생긴 외모에.
봄비 내리는 날의 꽃잎 마냥 가녀리고 애처로운 분위기에.
저절로 가슴 설레게 만드는 사랑스런 성격에.
울음을 참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제대로 치였다.
“아니야”
내 말에 한율은 놀라며 내리깔던 시선을 올려 눈을 맞췄다.
그 시선, 놀라 하며 물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부드럽고 몽실한 감성이 올라온 나는 넋 놓은 채 감탄했다.
“예뻐. 잘생겼어. 진짜로.”
그러나 생전 처음, 만난 지 한 달도 안되긴 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한율의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넋 나간 내 정신을 돌려났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
당황하며 한율을 쳐다보자 세상 어두운 표정으로 살짝 인상 쓴 한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쁘다면 왜 그러셨던 건가요.”
그러다 점차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앙칼지게 감정을 토해냈다.
“보란 듯이 가람휘 그 자식과 놀아나고 희희닥 거리고...! 저는, 저는 그동안 얼마나, 얼마나...!”
스스로 말하면서 감정이 북받쳤는지 한율의 눈이 그렁그렁 해지더니 이내 보석 같은 눈물이 뽀얀 볼을 타고 주륵주륵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눈물 흘리는, 자신의 상처를 악독함으로 덮어낸 한율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여우비 내리는 하늘을 연상하게 했다.
아,
티 없이 맑은 가을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과 어울리는 맑은 눈물에 저절로 표정이 안타까움을 담았다.
“항상 화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실수를 인지한 다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사과도 했습니다, 물론 사과한다고 받아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뒤로도 최선을 다해 말과 행동으로 모든 것을 표했어요. 그런데도 화연은 언제나 저를 무시하고, 비웃고, 보란 듯이 딴 놈과 놀아나고...!”
다다다. 앙칼지게 쏘아 붙는 모습이, 상처 입어 울분을 토해내는 모습이.
모든 걸 쏟아내고 결국엔 씩씩거리며 거칠게 눈물을 닦는 모습이.
화내고 있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고 애탔다.
아니, 아. 진짜 어떡하냐.
섬세하고 달달한 말로 달래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내 어휘력이 부족해 안 하느니만 못했고 그렇다고 덤덤히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내기엔 괜찮을까 싶었다.
한율이 안타깝고 불쌍하고, 그와 동시에 사랑스럽기까지.
그 감정들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르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 나는 여타 다른 것을 재보기도 전에 행동으로 당차게 외쳤다.
“안아줄까?!”
“...?!”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한율은 이내 표정을 서럽게 일그러트리더니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나를 꽉 껴안아 왔다.
“...”
여태까지 한율이 앉아있어 내려다보는 시선이라 그랬던가, 아니면 상처 많고 애절함이 담긴 눈물을 봐서 그랬던가, 그도 아님 잘생겼으면서도 아름다워 그랬던가.
한율이 키는 크지만 몸채는 여리여리할 거라고 판단했던 내 생각 외로 크고 단단한, 너른 성인 남성의 품이 너무도 의외라 당황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이어 풍겨오는 상큼하면서도 시원한 살냄새에 당혹감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마주 안아주고 있었다.
내가 마주 안아주자 흠칫, 몸을 굳히던 한율은 이내 힘을 풀고 어리광부리듯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것이 애교 피우는 강아지같이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내 귓가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애원했다.
“감정에 못 이겨 건방지게 지껄여서 죄송합니다. 근데 저... 힘들어요, 화연. 진짜, 진짜로... 조금만 다정하게 다뤄주세요...”
귓가에서 울리는 한율의 미성이, 울음을 삼키며 말하는 듯 애틋한 애원이.
내 가슴까지 절절하게 만들며 또 한 번 내 심장을 치고 갔다.
"응, 미안해. 미안했어."
이게 바로 안타깝고 사랑스럽고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를 내뱉고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최대한 상냥하다 느낄 수 있는 손길로 한율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한율은 한참이나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어 숨죽여 울었다.
나는 그저 들썩이는 한율을 모른척하며 안아주는 게 다였다.
체격 차로 안겨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아, 이제야 좀 사랑을 맛본 한율을, 울고 있는 한율을 달래면서 진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더 울리고 싶다.
이 생각은 한참 후에야 진정돼 붉어진 눈가를 하고 새침 떠는 한율을 보면서 더 강렬해졌다.
그에 나는 드디어 숨어있던 내 취향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