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드디어 오늘 패널티가 풀리는 날이다.
{패널티가 사라집니다.}
기다렸던 문구가 적힌 시스템 창이 올라오고 나는 전쟁 나가는 장군 마냥 굳건한 기세로 궁인들이 갈이 입혀주는 옷을 입고 천궁을 나섰다.
{ [울고 있는 한율을 찾아라!]
한율은 울고 싶어질 때 자신에게 주어진 정원을 찾아갔다.
문을 여는 순간 자신에게 알맞은 세계가 펼쳐지는 정원에.
그것은 월궁에 딸린 특별한 정원.
보상: 기존의 룬을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당당히 퀘스트를 받고 자신감 있게 한걸음.
저번과는 다른 디자인, 다른 색깔로 용포 느낌을 낸 겉옷이 바지 끝자락 언저리에서 위세 있게 펄럭였다.
*
월궁에 딸린 정원이라고 표현하기엔 월궁과 정원 사이의 거리가 꽤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지도에 표시된 곳에 가까워질수록 더 긴장되었다.
와, 차라리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거리가 좀 있으니 더 긴장되네.
“큼,”
긴장의 헛기침을 한번 해주니 나무 재질의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문 앞에 당도했다.
건축물 따위도 없이 덩그러니 문만 있어 여기가 정원 입구가 맞는지 의심했다, 만 지도가 여기라고 알려주고 있으니 그것을 믿고 열었다.
“오-”
절로 나오는 탄사.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는 순간 다른 세계와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라는 건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볼 줄이야.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화려하지만 깔끔한 친환경 정원.
잘 꾸며진 계곡이 흐르고 그 위엔 연꽃과 섬세하게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다리.
그 다리를 홀린 듯 건너면 무질서 속의 질서를 보여주며 피어있는 꽃들과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돌길을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살랑이는 바람도 불어와 기분 좋게 걸어가니 역시나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정자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정자 위 낮은 울타리(?)에 불편하게 엎드려 자는 한율도.
{[퀘스트 완료]
기존의 룬을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장소 선정은 좋았으나 타이밍이 나빴네.
단박에 한율을 찾은 것은 좋지만 자고 있는 걸 보니 한순간에 힘이 빠졌다.
사과하는 거라 내 나름, 무척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척까지 다가갔는데도 깨지 않는 한율에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
그 대신이랄지, 햇빛 아래 보석을 부셔 내린 것만큼 아름다워 보이는 한율의 자몽 빛 머리카락에 시선을 뒀다.
“...”
만져보고 싶다.
만져도 될까...?
라는 생각을 할 때쯤 난 이미 한율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러운 실을 들을 만지듯 사륵거리는 머릿결에 중독되는 것만 같았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얼마나 헤집고 있었을까,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끄는 한율에 벌써 일어났나 싶어 쳐다보니 한율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잠결인가?
그에 나는 잠자는 데 거치적거려서 하지 말라는 뜻에 잡은 건가 싶어 손을 걷으려 했으나 한율은 그런 나를 저지했다.
어떻게?
내 손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비비적거리는 걸로!
미이친!
지금 심장 마비로 죽는다면 그건 한율의 사랑스러움 때문일 거다.
그러다가 한율은 정말 나를 죽이고 싶었던 건지, 자연스레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어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그게 마치 내 손바닥에 가볍게 뽀뽀하는 것 같은 게,
와, 이건 진짜 너무 사랑스럽잖아!
새끼고양이가 손안에 데굴거리는 것과도 같은 행복함과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손바닥에 닿는 한율의 입술 촉감도 좋아서 가슴이 몽글거리는 게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절로 나오는 따스한 음성으로 잠에 취한 채 눈 뜨려는 한율에게 말했다.
“졸리면 더 자”
안 졸리면 눈떠서 더 애교 피워주고
그러나 한율은 정말 피곤했는지 다시 내 손을 꼭 쥔 채 다시 잠들었다.
그에 손이 잡혀 발이 묶인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정자의 울타리(?) 같은 것 사이에 한쪽 무릎을 집어넣어 매우 불편하게 앉았다.
사실 앉았다 할 수도 없는 자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볍게 넘어갔다.
하, 진짜 잘생겼다.
보고 또 봐도 잘생겼다.
나는 한율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만끽하며 한율의 외모도 만끽했다.
온종일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한율의 머리카락과 종일 보고 싶은 한율의 잘생쁨이었지만 앉은 거 같지도 않은 이 자세는 체력적인 무리가 엄청났기에 나는 한율 손에 덮인 내 손을 조심히 빼냈다.
다행히 초반과 달리 힘이 많이 빠져있어 한율이 깨지 않게 내 손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한율이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주기로 하며 본격적으로 한율을 감상하기 위해 정자로 올라 가려 했다.
문득 뇌리에 꽂히는 좋은 생각만 아니었다면.
사과할 때, 선물도 같이 건네면 조금 더 좋지 않나...?
이름하여 뇌물인 거지.
‘봐, 상대방이 무척 화났을 때 효과적인 방법은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주면서. 예를 들면 뭐, 사탕이라던가. 초콜릿이라던가. 음료라던가. 그런 걸 주면 더 빨리 화해할 수 있다고’
‘웃기고 있네, 네가 지금 사탕이라던가, 초콜릿이던가를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아, 아닌데?’
친구들의 만담 또한 머리를 스쳤다.
뭐, 별로 도움은 안 되는 거 같지만.
어쨌든 나는 화해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한율에게 줄 자잘한 선물을 찾으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원을 빠져나와 천궁으로 향했다.
궁인에게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를 예쁘게 포장해오라 하면 되겠지?
겨우 선물하나 추가할 예정이라고 이미 한율과 화해한 것마냥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깃털이라도 된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천궁으로 가고 있는 와중, 은가람을 만났다.
“화연님.”
“아, 은가람. 안녕.”
“네, 안녕하세요. 근데 어딜 가시길래 이리 기쁜 표정이신가요?”
살풋, 웃으며 말하는 저 은가람만 있으면 여기가 유토피아.
나는 습관적으로 은가람의 미모를 칭찬하며 대답했다.
“천궁에 가고 있었어. 초콜릿이나 사탕 좀 가져오게.”
그에 은가람이 순식간에 표정을 환하게 만들며 내게 물었다.
“아, 혹 화연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것들을 받으시고 저와 함께 나들이 안 가실래요?”
윽, 잘생겼어.
나는 순간 은가람의 미모에 홀려 당연히 가야지, 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거절했다.
“미안, 혹시 다음으로 괜찮을까?”
“아...”
내 거절에 은가람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서글프기까지 할 일이야? 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단지, 마음이 아파 올 뿐.
물론 내 마음이야 세월아 네월아 은가람과 놀고 싶지.
그러나 오늘은 한율과 화해가 먼저니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삼일이나 지났는데, 여기서 더 시간이 흘러 사과하면 사과 골드타임을 완전히 놓칠 거 같으니까.
“진짜 미안. 나도 놀고 싶긴 한데 오늘은 한율한테 사과해야 해서 안돼. 다음에, 아니면 내일. 천궁으로 와. 같이 나들이 가자.”
내 물음에 은가람은 기쁘게 웃으며 네, 좋아요.라고 대답하더니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굳었다.
그에 내가 의아해하자 은가람이 억지로 그려낸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한율 여화에게 사과하는 것 때문에 오늘 나들이 못 가시는 거예요?”
“응? 응.”
그에 은가람은 누가 봐도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요...? 화연님은 천호시잖아요. 사과따위 할 필요가,”
이를 어째, 아무리 천사라 해도 이 세계관 사람이 이긴 세계관 사람이었다.
“울렸는데 사과는 해야지. 근데 너 한율이랑 친구 아니었어?”
친구면 사과받는다는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약간의 의아함을 담은 내 말투에 은가람은 잠시 침묵했으나 곧 맞다며 한율이 저번에 자신에게 못된 말을 한 앙금이 아직도 남아있었는지 헛소리가 나갔다고 변명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너도 나중에 그거에 대해선 한율에게 사과받아. 그건 한율이 잘못한 거니까.”
내가 납득하자 한율은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화연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아, 그럼 천궁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으러 간다는 것도 한율 여화에게 주기 위함인가요?”
“응, 사과할 때 주면 좋을 거 같아서.”
“이런, 화연님. 모르셨군요. 한율 여화는 이런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거 싫어해요. 화해하자고 그런 걸 주면 질색하는 걸 넘어 화낼 수도 있을 거예요. 괜한 발걸음 하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그래?”
그 정도로 사탕이나 초콜릿을 싫어할 수가 있나, 싶지만 취향이란 게 원래 다양한 거니 여기선 나보다 한율을 더 잘 아는 은가람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럼 어쩌지.”
“걱정 마세요. 그런 한율 여화가 좋아하는 사탕이 딱 하나 있거든요. 한율과 ‘친구인’ 저만 아는 정보지만 특별히 화연님께도 알려드릴게요. 알고 싶으세요?”
그에 나는 당연 응응! 알려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다행이다.
은가람 없었으면 한율에게 사과랍시고 싫어하는 음식을 투척할 뻔했잖아?
안도하며 후광 비치는 은가람을 쳐다보자 은가람이 제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거예요. 이게 한율이 죽고 못 사는 사탕. 아주아주 비싼 사탕이죠. 어찌나 이 사탕을 좋아하는지, 아무 말 없이 이것만 줘도 바로 화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이걸 그 정도로 좋아해?”
내가 보기엔 문방구에서 개당 백 원으로도 안 팔 것 같은 불량식품 사탕 같았지만 천사 같은 은가람이 건네준 것이니 여기선 무척 좋은 사탕인 거 같았다.
비싸다고 강조했으니 맞겠지, 설마 저 착한 얼굴로 거짓말할 리가 없다 굳게 믿고 허리춤에 달린 장식용 주머니에 정성스레 챙겼다.
“아, 그리고 한율 여화. 보기보다 사과나 화해 요청 그런 거 듣는 거 쑥스러워하니까 그냥 사탕만 조용히 건네주세요. 그게 더 효과적일 거예요”
“진짜 천사야...?”
내가 감동먹은 채 말하자 은가람이 얌전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찬사에 감사드립니다.”
“진짜 고마워. 내일 꼭 천궁으로 와. 맛있는 거 들고 나들이 가자.”
“당연하죠. 꼭 갈게요.”
끝까지 착한 은가람에 감탄하며 나는 다시 월궁에 딸린 정원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