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동안 패널티 덕에 한율 근처에도 못 가게 된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서 헛소리를 늘어놓느니 완벽하게 한율을 달랠 방법을 찾아서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 당장 내일이면 패널티가 풀리는 오늘.

　난 완벽히 한율을 달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와, 진짜 망했는데?

　집무실에서 진지하게 팔을 괴며 생각해도 이러이러해서 미안하다, 사죄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근데 과연 그렇게 쓰레기 짓을 해놓고 사과한다고 받아들일까?

　나 같으면 안 받는다.

　아니, 이상할 정도로 천호를 못 벗어나는 한율이니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그게 진짜 사과가 되나?

　실제론 내가 한 짓도 아닌 것들 때문에 한껏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서 있던 호위무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있는 개똥 약에 한 번 써보자.

　“호위무사야.”

　“예?”

　참고로 저번의 이상한 오해를 받은 후로 호위무사와는 꽤나 편안 사이가 되었다, 라고 해봤자 며칠도 안 되었지만 고민 상담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사랑을 약속한 사람 두 명이 있어. 근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엄청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어. 뭐, 대놓고 바람피고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근데 그 쓰레기 같은 사람이 정신을 차려서 제 연인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한다? 근데 그 쓰레기 같은 사람의 연인은-”

　이상하다시피 쓰레기 같은 사람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사과를 받아줘도 그게 진심으로 사과를 받아주는 걸까, 그냥 넘어가는 걸까 블라블라 설명하며 어떻게 사과해야 진심으로 받아줄까, 를 물어보자 호위무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물었다.

　“폐하와 한율 여화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오, 이게 한 번에 알아챌 정도로 내가, 정확히는 전의 천호가 한율에게 쓰레기 같은 연인이었나 보네.

　약간의 감탄을 하며 대답을 기다리자 돌아온 건 가관이었다.

　“허나, 천호께선 천호이시니 굳이 그 점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천호시니 지금까지보다 더한 쓰레기 짓을 하셔도 한율 여화께선 천호님만 바라보셔야 하는 위치이지 않습니까.”

　“오오, 그래, 너도 천의 나라 사람이라는 걸 까먹었네.”

　너 또한 쓰레기에 물든 사람이구나. 를 중얼거리자 호위무사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의아해했다.

　“예?”

　“아니다. 그럼 너와 네 정인이라 치고 네가 쓰레기 짓을 해서 아까 말한 상태인 거야. 어떻게 할래?”

　“음, 그건 한번도 그래 본적이 없어 상상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한번 상상해보자면... 흠, 안돼겠는데요? 전 과거에도 미래에도 쓰레기 짓이라 할만한 일을 하진 않을 거고 제 정인도 그러지 않을 거라 너무 어렵습니다. 조금 더 생각하게 시간을 주-”

　와우, 너네는 사이좋다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한다 이거지?

　시겠습니까...

　짜게 식은 내 표정을 이제야 발견한 건지 호위무사는 말끝을 흐리더니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아, 크흠. 본의 아니게 저희 자랑을 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에휴, 됐어. 누구 탓을 하냐.”

　이 게임을 시작한 내 탓이지.

　나는 호위무사에게서 시선을 떼며 생각했다.

　한율 은근히 눈물 많은 거 같던데 어디선가 울고 있진 않으려나.

　빨리 달래러 가야 하는데.

　망할 패널티 때문에 달래는 것도, 그 푸른 눈에 눈물이 망울망울 맺히는 걸 보는 것도 다 미뤄졌다.

　아, 뒷말은 취소.

　난 순수한 마음으로 한율을 달래러 가고 싶은 거뿐이니까.

　“하아-,”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호위무사가 조심스레 내게 권했다.

　“한숨만 벌써 몇 번째십니까. 어차피 생각 안 나는 거 차라리 산책이나 낮잠으로 머리를 식히시고 다시 생각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그것도 나쁘진 않네. 잠은 안 오니까 나가자.”

　“예. 항상 가시던 곳으로 가시는 겁니까?”

　확신하는 말투로 물어오는 호위무사에 나는 순간 당황해서 내뱉었다.

　“응? 내가 항상 가던 곳이 어딘데?”

　“어디냐니요, 예무들 수련장에 항상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 그랬지.”

　나보다 더 황당해하는 호위 무사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지도를 켜고 앞장섰다.

　참고로 튜토리얼 때 흘깃 본 기억 상, 예무란 무사 혹은 기사 정도 인 것 같았다

　*

　“오...”

　예무들의 수련장에 도착한 나는 저절로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네.

　좋은 풍경, 좋은 얼굴, 좋은 몸, 좋은 광경.

　남녀 할 것 없이 강한 느낌을 물씬 풍기며 어떤 이는 룬과 체술 만으로, 어떤 이는 무기를 들고, 어떤이는 룬으로 무기를 만들어, 개개인의 방식에 맞게, 자유롭게 흩어져 수련하고 있는 예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며 멋졌다.

　이미 각자의 수련에 집중한 듯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수련에 방해되지 않게 가만히 서서 조용히 예무들을 구경했다.

　그런 나에 호위 무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하십니까? 바론 예무는 저쪽에 있습니다.”

　“응? 갑자기 바론을 언급한다고?

　내 반응에 오히려 호위무사가 어리둥절해 하며 너 오늘 왜 이래? 이상해.라고 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갑자기라니, 한율 여화를 보고 난 후면 으레 이 짜증과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한다며 바론 예무를 만나러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뿐 아니라, 평소에도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종종 만나러 오셨으면서.”

　“약혼자랑 싸우고 바론을 만나러 왔다고? 천호-,가 아니라 내가?”

　“예, 폐하께서요. 뭘 새삼스레... 평소에도 그냥 대놓고 만나셨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와우,”

　호위무사는 ‘천호인 내가’ 약혼자를 두고도 다른 남자, 그러니까 바론을 만난다는 것에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낀 채로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에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는 건 내가 되었다.

　역하렘. 그래, 좋지, 역하렘.

　근데 막상 역하렘을 차려주니 양심 찔려서 먹질 못하겠다.

　떠먹여 주는데 왜 받아먹질 못해....!

　잠시 절망한 나는 이내 정신 차렸다.

　아니야, 집에 가려면 어쩔 수 없어.

　잠깐 동안만 쓰레기 하지 뭐.

　나는 쓰레기다, 나는 쓰레기다.

　현대사회, 일부일처, 또는 일처일부 사회에 길든 양심을 잠깐 버리고 있는 거야.

　그래, 옛 시대의 왕이나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마인드컨트롤.

　성공했는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

　돌려 말했지만 해석하자면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지 말고 예무들 수련하는 데 방해되니까 빨리 바론에게로 꺼져라, 라고 말한 호위무사 때문에 나는 투덜거리며 바론이 있다는 쪽으로 향했다.

　뭐, 그래.

　백호가 보름도 없겠다, 패널티 때문에 오늘까지 한율에겐 얼씬도 못 하겠다, 겸사겸사 바론 먼저 공략해보는 느낌으로 가자.

　패널티 탓이라지만 한율에게 막말했던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바론 또한 한율처럼 내게 상처받았었다는 사실도 까먹은 채로 속 편히 생각하며 바론을 찾았다.

　그리고 혼자서 수련을 하고 있는 순간 나는 또 한 번의 감격을 느꼈다.

　미이친... 지구 부술 정도로 잘생겼어.

　말했었나?

　바론의 이미지는 맹금류, 혹은 한 마리의 재규어 같다고.

　그런 바론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려 창이다.

　검은 현실에서 검도를 배웠기에 익숙했지만 창은 아니었다,

　그것도 푸른 삼지창!

　특별함과 잘생김, 멋짐이 한 대 어우러진 이 광경을 구경하지 않는다면 그건 시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사 느낌 나는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바론은 꽤나 화려히, 멋지게 창을 돌렸다.

　얼마큼이냐면, 바론이 ‘너를 죽이겠으니 심장을 내놓거라.’라고 말하며 내 심장에 삼지창 끝을 겨눠도 예이, 가져가시죠. 할 수 있을 만큼.

　아, 진짜로 줄 건 아니지만-.

　바작,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바론 근처로 다가가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그와 동시에 훙, 소리가 나더니 바론의 삼지창이 내게 겨눠졌다.

　““!”“

　나뭇가지 하나 밟았을 뿐인데 삼지창이 겨눠진 나도 놀라고, 본능적으로 천호인 나를 겨누게 된 바론도 놀라고.

　잠깐 서로를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다 바론이 먼저 삼지창을 거두고 각 잡힌 인사로 내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이신지 모르고 그만.”

　“아, 괜찮아.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그리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맞다. 바론에게도 잘못했었지, 라는게 생각나서 더욱 머쓱해졌다.

　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지금은 바론과 나, 단둘.

　‘천호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용이라. 난 신경쓰지 않을테니 어디 마음껏 해봐.‘

　‘정말...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대로, 이대로 넘어가는 겁니까?‘

　‘그래, 딱히 상관없어. 예상도 했었고. 그러니 내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강조하지 말고 봐줄 때 곱게 넘어가.‘

　‘...그러하시다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첫날의 오해를 풀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바론.”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망설임 없이 바론을 부르자 조용하고 듣기 좋게 낮은 단답이 돌아왔다.

　“...예, 폐하.”

　그리고 붉은 테두리의 시스템 창도 올라왔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바론이 당신을 이용한다 어쩐다 했었던 지난 일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연이어 퀘스트도 올라왔다.

　{ [미니게임; 지뢰를 피하라!]

　오늘 하루 바론과의 대화에서 무사히 지뢰를 피해 보자!

　한 방에 끝나면 아쉬우니 방어권 두 개를 드리는 서비스까지.

　보상: 무사히 지뢰를 피해 대화를 끝내면 바론의 오해를 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