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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운 호위무사와 친목을 다지고자 침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옮겨 빈방으로 향했다.
물론 지도의 도움으로 천호가 친한 이들을 불러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방, 이라고 주석이 달린 빈방을 골라서 말이다.
그리곤 지나가던 궁인 하나를 붙잡아 여기로 야참을 내와, 명령하니 빠르게 간식거리들이 올라왔다.
순간 내뱉고 아차, 야참을 여기서 쓰나? 싶었지만 제대로 간식이 온 거 보니 쓰는가 보다 했다.
“여, 여기는...”
저렇게 놀란다고? 아, 천호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방이니 놀란 건가. 호위무사의 반응을 추측으로 이해하며 편히 앉을 것을 권했다.
동양풍이라 해서 좌식문화는 아닌지 푹신한 의자가 있어서 나 또한 편히 앉아 음료가 담긴 컵을 들어 올려 냄새를 음미했다.
오, 과일 향.
그리곤 최대한 상냥히 웃으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그동안 너무 나쁘게 군거 같아서 사과의 의미로 소소한 뇌물(맛있는 간식)도 줄 겸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
그에 호위무사는 더 질겁하며 말했다.
“천, 천호 폐하! 혹 제정신이 아니기라도 하신 겁니까!”
“...?”
얼떨떨하며 놀라는 걸 넘어 기겁하는 호위무사의 반응에 뭐지 싶다가 이내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저게. 잘 지내보자고 데려왔더니-.
괘씸함과 어이없음을 담아 쳐다보자 호위무사가 제 상체를 엑스자로 가리며 말했다.
“아니면 새로운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시려는 겁니까! 제가 아무리 천한 출신이라 하여도 이건 아닙니다! 저는 정혼자가 있는 몸입니다! 역대 천호 폐하들 덕에 천호란 작자들은 임자가 있든 없든 건드린다는 분이란 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약혼자가 있으신 천호, 그래서 이 방으로 향할때 설마설마했지만 그래도 따라 들어온 것인데 역시일줄이야...! 를 중얼거리는 호위무사의 눈빛에서 이런 쓰레기! 라는 문장을 읽은 나는 어이없을 뿐이었다.
뭔데, 이 반응.
급격한 상황변화에 뇌가 따라가지 못했는데 호위무사가 친절히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목숨을 잃어도 제 정혼자를 위해 순결을 지키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폐하의 밤일을 위해 만들어진 이 방에서 어서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아니, 나가겠습니다!”
“켁,”
순, 순결... 이 미친...!
침을 잘못 삼켜 켈록켈록 기침하며 부정했다.
“잠, 잠깐만! 그런 거 아니야! 미친, 난 진짜로 몰랐어!”
시발, 시스템!
자유로운 대화가 이딴 의미였어?!
게다가 친한 이‘들’이라고 적혀있었다.
전대 천호인지 역대 천호 중 한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취향 참. 아, 역대 천호들을 비판할 때가 아니었다.
나 또한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간 호위무사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물론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런데 보이는 광경이라곤 어여쁜 여자 궁인 한 명과 한편의 비극 소설 찍어내는 듯한 분위기로 껴안고 있는 호위무사.
그에 나는 깨달았다.
아, 미친. 아까 야참 내오라고 명령했던 궁인이 호위무사 정인이야?!
순식간에 개쓰레기가 된 나는 나를 보고 호위무사를 제 뒤로 숨기며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대는 궁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난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한술 더 떠 궁인, 그러니깐 호위무사의 정인이 눈물을 머금은 채 장군처럼, 굳건히 외쳤다.
“순결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 정혼자를 죽이려거든 저부터 죽이소서!”
아, 환장.
단단히 오해한 둘에 나는 궁 복도(?) 한가운데서 주절주절 그 뜻이 아니었다며 변명했다.
아무리 천호라도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부터 역대 천호들이 없는 약혼남도 가지고 있지 않냐, 천호 궁보다 백호가 보름 거처에 오래 살아서 이 방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까먹었고 나는 쓸 일이 없는 방이라 아예 이런 의미를 가진 방이 있었던가,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는 어필까지.
이렇게 주절거리고 나서도 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는데 그게 너무 답답한 나머지 바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이래도 여전히 오해하면 진짜 강에 뛰어든다,
결심했는데 다행히 둘은 내가 고개 숙이자 기겁하며 오해를 풀었다.
감동까지 한 거 같아 약간 의아했지만.
그리고 기적적으로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우선 호위무사와 저 방에 들어간 나를 목격한 건 호위무사의 정인인 저 궁인 한 명 뿐.
오해한 저 둘을 설득하고 오해를 다 푸는 모습도 목격한 이 없음.
혹 야참을 명받고 만들러 갔을 때 타인에게 말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혼자 속으로 끙끙 앓면서 야참을 준비해 바쳤다 했다.
그리곤 제 정인인 호위무사가 죽을까 봐 들어가서 말리지도 못하고 방 문 앞에서 안절부절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연 이 부분에서 (의도치는 않았지만) 쓰레기 짓을 했던 나는 양심이 매우 아파지는 걸 느꼈었다.
어쨌든 그렇게 좋게(?) 평탄하게(?) 작은 소란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나는 침실로 돌아가 잠에 들 수 있었다.
아, 침대 푹신해.
옷도 풍경도 건물도 다 동양풍이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땅바닥에 누워 자는 거면 어쩌지, 침대에 길든 내 몸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임금, 혹은 황제의 느낌이 물씬 나는 침대가 있어서 살았다.
*
아침부터 날 깨운 건 따사로운 햇살이 아니라 따가운 외침이었다.
“폐하! 폐하! 얼른 일어나시지요! 백호가 보름께서 오셨습니다!”
“...시끄러”
백호가 보름이 뭔데 깨우고 난리야. 응? 잠깐만, 백호가 보름? 맞아, 나 게임 중이었지.
“폐하! 백호가 보름이시고요! 이름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시는 분이 오늘따라 왜 이리...!”
아. 날 팔아먹은, 어제 극적으로 화해한 호위무사의 목소리도 들린다.
들리는 데 눈은 안 떠지네.
일어나기 싫은 나머지 천호니까 한번 정돈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후폭풍 일어날 생각을 한 채 궁인이 잡아당기는 이불을 되레 꽉 잡아 붙들었다.
그렇게 몇 초 궁인과 힘싸움 했을까. 남자 궁인인데도 나 힘 싸움에서 잘 버티네? 라는 기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띠링,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 아직 게임에 익숙지 않은 듯 보이는 플레이어, 당신을 위한 배려.
오늘 하루 동안 백호가 보름이 관련되면 기존 스토리 설정대로 움직입니다.
즉, 백호가 보름이 관련되어 있다면 당신의 의사 표현 자유는 없다는 말씀.}
{백호가 보름 한정 자동 행동, 대화 기능이 적용됩니다.}
아니, 미친. 게으름 부렸다고 눈치 주는 거봐. 저 내용이 무슨 배려야. 패널티지.
어이없어하는 순간에도 내 행동은 달라졌다.
일단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며 안색이 새파래지는 건 기본,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거리는 궁인들의 속도에 맞춰 바쁘게 채비하는 것도 기본이었다.
아니, 근데 백호가 보름은 한율이 울 때만 나타나는 경고 MPC 같은 느낌 아니었어?
뜬금없네.
궁인들이 입혀주는 옷들을 껴입으며 생각하고 있는데 백호가 보름이 들이닥쳤다.
백호가 보름이 기다리다 못해 들이닥친 듯 인상 쓰며 등장하자마자 내게 옷을 입혀주던 궁인들이 손을 떼고 백호가 보름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이거 봐라?
내가 천호가 아니라 저 보름이 천호네.
아, 천호를 휘어잡는 보름이시지, 참.
헛생각을 하고 있지만 내 몸은 착실히 공손한 자세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에 백호가 보름은 언짢아 표정으로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지적했다.
“해가 중천인데 천호란 자가 이리 게을러서야. 어디 반푼이를 주워다 천호 자리에 앉혀놓은 거 같은 옷 꼬락서니는 또 무어란 말입니까.”
그러면서 혀를 끌끌 차는데 아주 얄미움의 끝판이었다.
저기요, 저 새벽해가 어딜 봐서 중천에 떠 있습니까?
지금 이제 막 새파래지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댁이 입는 중에 들어왔잖아.
게다가 완전히 엉망도 아니었다.
맨 마지막에 용포 비슷한 게 아직 풀어헤쳐 있을 뿐. 그거 빼면 완벽한데 저 정도로 뭐라 하네.
입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앞뒤 상황이나 분위기, 후폭풍 때문에 말하지 못할 생각을 속으로 열심히 했다.
백호가 보름은 그 뒤로도 몇 번 더 나를 깍아내리다 본론에 들어갔다.
“폐하가 천호가 되시고 나서 천무 막이 옅어져 여기저기 구멍이 생겨 괴물들이 날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아실 겁니다. 헌데 이번엔 아주 큰 구멍이 나 천의 나라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하더군요. 천호의 자질이 의심되는 폐하 대신 제가 내려가 백성들을 도울 예정입니다.”
{천의 나라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막을 천무 막이라 부른다}
띠링, 올라온 시스템 창을 대충 넘기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천호 궁에 처박아두고 제가 민심을 챙기겠다는 거네.
아, 아닌가.
내가 약해서 죽으면 큰일 나니까 내보내고 싶은데도 제가 나가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니 폐하, 제가 잠시 천호 궁을 떠나가는 며칠 동안 처신. 부디 잘하시길 바랍니다. 혹, 한율 말고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면.”
쿵, 무거운 기운들이 내 몸을 내리눌렀다.
“제가 어찌할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아마 룬 같은데 확실히, 이건 위협이 되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놀랐으니까.
처음 느껴보는 낯선 느낌에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자 백호가 보름은 제 협박이 잘 먹혀든 것에 만족하며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