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까지 가는 길은 감탄을 자아냈다.
친환경적인 분위기와 동양풍이 섞인 풍경들.
화려함에, 수수함에, 고아함에 눈길이 쏠려 발걸음을 지체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동화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미쳤네...”
크리스탈 같이 맑게 투명하면서도 오묘한 색채가 섞인 유리들로 만들어진 꽃, 나무, 다리, 정자 등의 조각품들과 소소한 건축물들.
심지어 눈 쌓인 틈으로 살짝 보이는 잔디도 오묘한 빛깔에 연두색이 좀 더 도는 유리였다.
밟으면 아플까? 하는 걱정은 이내 감탄으로 바뀌었다.
한 발 내디디면 유리 잔디가 작은 물방울 모양을 흉내 내며 와르르 무너져 내려 눈 밟는 듯한 느낌을 흉내 낼 뿐이었기에.
그리고 발을 떼면 언제 무너져 내렸냐는 듯 원상복구 되었다.
그 신기한 자태에 최대한 익숙한 척 연기하며 티 나지 않게 뽀득뽀득, 발을 많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눈 처음 만난 강아지처럼 날뛰기엔 천호 본인의 정원이라서 좀 그랬다.
은가람이 궁에 딸린 정원이라 많이 와봤을 텐데. 혹은 천의 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건 안 신기할 텐데, 뭐지? 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생각은 그렇지만 실제로 익숙하다는 양 구는 게 잘 이뤄졌을지는 모르겠다.
“화연님, 우선 이쪽부터.”
“그래.”
아니네.
이상하게 처다보는 거 같지는 않으니 익숙한 척이 잘되고 있는 거 같다.
안도하는 찰나, 내 시야에 강과 나룻배가 보였다.
오묘한 빛깔의 배, 그 위에 얹혀진 푹신한 방석, 그 아래에 흐르는 맑은 얼음강.
마지막으로 그 강 위에 둥둥 떠 있는 작고 예쁘고 반짝이는 조각품들.
와-. 너무 이쁜데?
저 배 타보자.라고 하고 싶은데 한율 찾으러 와서 갑자기 배 타자고 하는 건 이상해 보이겠지?
아, 근데 진짜 타보고 싶다.
타서 저 강 위를 떠다니는 조각품들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
근데 한율을 찾아야 해.
천호처럼 보여야 해.
세상 고뇌를 하고 있는데 한율이 내가 보고 있던 나룻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화연님. 저기 있는 저 배를 타는 건 어떠한가요? 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흐르면 동화 전체가 둘러봐 지니 한율을 찾는 게 좀 더 수월해지면서 다리도 덜 아플거예요.”
아싸.
타이밍에 감사하며 나는 최대한 그러던가 말던가, 정도의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신나하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아, 근데 나 천호라며. 천호인데 이상하게 보인다고 뭐라 하겠어?
연기는 내 취향이 아니라 그만하고 싶은데.
잠시 갈등했지만 이내 나는 깨달았다.
응, 무늬만 천호였지. 나.
천호가 이상해졌다고 소문 퍼지고 마음을 얻어야 할 이들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혹은 천호가 기억을 잃어 상식이 없어졌다며 더 하찮은 대우를 받는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열심히 천호처럼 보이게 노력해야겠네.
먼저 나룻배에 올라탄 은가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타란 의미가 확연해서 꼬옥-, 잡아주며 나룻배에 올라탔다.
이정도 미남과 손잡고 뱃놀이라니. 횡재, 횡재.
나룻배를 움직일 작은 노는 신분이 낮은 쪽인 은가람이 자연스럽게 잡았다.
강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돼서 간간이 방향만 잡아주면 되는 쉬운 일이지만 꽤 귀찮은 일이기에 난 편히 은가람에게 맡겼다.
어디 한번 정성껏 천호를 뫼셔보거라.
약간은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주위를 느긋이 구경했다.
간간히 은가람의 얼굴도 구경해주기도 하고. 물론 한율이 있는지 없는지도 열심히 살펴보았다.
이쯤 둘러봐도 없으면 없는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슬슬 들쯤 내 의식은 강 위에 떠 있는 조각품들로 옮겨졌다.
건질까?
작품 품평하기 위한 행동이다, 라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건져서 구경하면 될 거 같은데.
머리는 고민하고 있는데 손은 이미 조각품을 건져 올렸다.
핫, 어쩔 수 없지. 찬찬히 구경해주는 수밖에.
건축물을 작게 축소시킨 것처럼 조각품은 정교하고도 섬세하며 화려했다.
아름다움 그 자체라 마음에 들었다.
햇빛에 비추면 생기는 오묘한 빛깔은 더욱 마음에 들었고.
아, 챙겨 나가서 두고두고 보고 싶을 정도로 예쁜데 하나 정도 들고 가도 되려나?
마음 같아선 그냥 들고 가고 싶은데 무늬만 천호인 내 처지가 걸렸다.
뭐, 백호가 보름 때문에 들고 나가면 안 되는 물건이라면? 지금의 내 권한 밖의 일이라면?
그에 나는 귀찮은 일을 만들긴 싫어 한 번의 확인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슥,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조각품을 은가람에게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줄까?”
이런 대단한 물건을 나에게? 아니면 단조롭게 감사합니다. 이 정도의 반응이면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물건, 그게 아니라 네가, 이걸, 나한테? 그럴 권한이 없을 텐데? 혹은 이건 여기서 나가면 안 되는 물건인데? 라는 식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물건.
자, 어느 쪽이야?
속으론 긴장하며 은가람의 반응을 지켜보는데 다행히 전자였다.
오드아이를 휘둥그레 든 은가람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걸 정말 저에게 주는 건가요?”
“그래, 가져.”
나도 가질 거니까.
아싸, 이건 내 권한 안에 있는 물건이며 이 장소에서 나가도 되는 물건인가보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정말로 소중한 걸 받은 것 마냥 꼬옥, 조각품을 품에 안으며 볼을 붉히는 은가람에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오, 미쳤다.
다들 여길 보세요.
사랑스러운 천사를 그린 한폭의 그림이 여기 있어요.
그렇게 화가가 영혼을 담은 작품 그 자체인 은가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은가람이 돌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나...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아, 미친.
은가람의 눈이 부신 외모에, 내가 다 슬퍼지는 저 씁쓸한 목소리에 생각이 사라졌다.
혹시 이것 때문에 내 신변이 위태로워진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리.
“응, 안 해. 절대 안 해.”
굳은 다짐을 하며 대답했건만 뭐가 걱정인지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려 눈을 내리깐 은가람은 이내 상냥히 웃었다.
*
결국 한 거라곤 동화를 나와 춘화, 하화, 추화 정원까지 전부 돌며 은가람과 신나게 논 것뿐. 한율에 대한 수확은 단 하나도 없이 천호가 휴식을 취하는, 주로 거주하는 천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마중해오는 궁인들의 손길에 따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일절 대화하나 없었지만 궁인들의 시선이나 손길은 정중하기 그지없어서 난 무늬만 천호 아니었나? 하는 의문도 잠시, 곧 깨달았다.
백호가 보름이 나를 싫어하긴 하지만 그 자식인 한율이 날 좋아하는 탓에 완전히 무늬만은 아니라 이건가?
생각에 잠겨 있자 한 인형이 침실로 걸어가는 나의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에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건 백호가 보름에게 날 팔아먹었던 호위무사.
괜히 괘씸해져서 이죽였다.
“아이고, 호위무사 씨. 내 핑계 대고 편안하셨어?”
그러자 호위무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납죽 엎드렸다.
“죽,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응?”
왜, 왜 저래?
백호가 보름이 뒷배경이면 이런 내 말은 상관없지 않아?
코웃음 치거나 따라 비아냥거릴 거라고 예상했던 거와 달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띠링,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호위무사... 그건 너무 힘든 직책이었다. 누군 백호가 보름이란 뒷배경을 등에 업었으니 신분 상승 아니냐, 묻지만 그건 실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들의 착각에 불과했다.
백호가 보름이란 우물 안에서 키워진 천호는 세뇌당했거나 까먹은 듯하지만 천호란 존재는 약혼자란 족쇄가 생길 만큼 하찮은 게 아니었다.
목숨을 부지시켜주는 신. 폭군이나 위대한 천호.
심기를 거스르면 어마무시한 저주를 내릴 위대한 분.
감히 여호나 그 여호들의 자식. 즉, 여화들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신성한 존재.
더욱이 유일한 천호인데 아랫것들이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그런 이유로 호위무사는 백호가 보름에게 치이고 성질 더러운 천호 사이에서 치이는, 슬프고 안쓰러운 운명을 견뎌내야 하는 자가 되었다.}
“어...”
{그나마 자세한 사정을 아는 여호들이나 천호를 엽신이 여기지 그저 쓰임 말일 뿐인 호위무사나 다른 이들은 그저 백호가 보름에게 꼼짝 못 하는 천호의 눈치를 보며 백호가 보름의 눈치도 보는 그런 상황이었다.}
“음...”
{ [눈칫밥으로 백호가 보름이 더 권력자라 눈치챘지만 천호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호위무사의 고단한 나날 중]
“꺼지라 했어!”
백호가 보름에게 깨진 천호가 물건을 던지며 난동을 부렸지만 호위무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면 안 되었다.
“감히!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천호가 룬을 사용해 자신에게 물건을 던진다 하더라도.
단지 호위무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비는 것뿐이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허나, 윽! 하찮은 아랫것일 뿐인 저는-,”
“시끄러워! 응당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어디 감히 입을 놀려!”
“으윽!”}
“그...”
나는 시스템 창을 읽어 내려갈 때 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며 안절부절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넙죽 엎드려있는 걸 일으켜 새우고 싶어 옆에 쭈그려 앉았는데 맞을까봐 흠칫떠는 호위무사에 더욱.
아, 불쌍해. 나야, 이 쓰레기야, 비슷한 처지면서 왜 그랬냐.
내가 아니지만 남들 눈엔 나로 보일 천호의 과거를, 아, 아니야. 방금 호위무사에게 비아냥거린 순간부터 나도 쓰레기야...
나는 나를 비난하며 호위무사에게 손을 뻗으려다 말다를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손도 못 대겠다,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나는 결국 벌벌 떨기까지 하는 호위무사를 토닥여줬다.
“미안... 백호가 보름과 나 사이에 껴서 많이 힘들었지?”
“!”
내 토닥임에, 말에 깜짝 놀란 호위무사가 훽,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천호의 눈을 허락 없이 보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는지 헉, 하고 놀라며 고개 숙여 사죄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례를...!”
미친, 어떡하냐...
안쓰러움이 배로 불어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안 되겠다.
나라도 이제부터 잘해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