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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완] 벙커
작가 : 강냉구
작품등록일 : 2019.9.2

2048년,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가 멸망 후 벙커에 살게 된 상류층들과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실험!

 
의심 - 01
작성일 : 19-09-02 20:43     조회 : 208     추천 : 0     분량 : 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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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 진정제를 맞지도, 이상 행동을 보이지도 여자가 문구멍으로 날 보지도 않았다. 아주 평범했다. 나는 그 평범함이 영원하기를 바랐지만 아무도 내 바람을 들어주지도 듣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던 거야?”

  내 옆에 맨 몸으로 누워있던 여자가 내게 물었다.

  “아무 생각도…….”

  여자는 아주 하얗다.

  그리고 추했다.

  “그래……?”

  내 말에 여자는 내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갓난 애기 쓰다듬듯 내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바깥은 어떨까?”

  여자가 물었다.

  “바깥?”

  내가 대답했다.

  “응. 48번 채널 속 세상 말고 다른 세상 말이야.”

  여자의 말은 의외였다. 나처럼 48번 채널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게 이 여자였다니. 참으로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여자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세상 그런 건 없어. 다 죽었어.”

  어울리고 싶지 않은 내 최선의 말이었다.

  “말이 뭐 그래.”

  여자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내가 원하던 거였다.

  “바깥도 이 벙커 안에도 우리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뭐?”

  나는 여자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다.

  “말 참 이상하게 한다. 우리에게 관심 없다고? 우린 뭐 사기 쳐서 들어 온 거지니까?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여자의 행동은 내 예상 밖이었다.

  난 여자의 말이 듣기 싫어졌다. 여자는 나와 있고 싶지 않아보였다. 그래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빠져 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게 그거지? 벙커(Bunker)는 벙커끼리 미들(Middle)은 미들끼리 그리고 딥(Deep)은 딥끼리. 절대로 벙커는 딥이랑 함께 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여자의 음성은 가장 날카로웠다. 손을 데면 피를 볼 거 같았다. “Z가 연회의 밤을 왜 여는 건데? 짝짓기 하라고. 젊은 벙커랑 미들한테 늙은 딥을 꼬셔서 신분상승 하라고 연회의 밤을 여는 거 아닐까? 거기에는 너랑 나도 해당 되는 거고.”

  여자는 자신이 신데렐라라도 된 마냥 동화책에만 나올 법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너무 우습고 유치했다. 얼른 그런 환상에서 깨져 나오길 여자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싶었다.

  “난 그럴 마음 없어.”

  벙커에 들어 온 순간부터 그런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내게 그런 마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의 환상이 있는 나한테 너는 아주 잔인하게 현실을 자각 시켜주네.”

  여자는 아주 씁쓸해보였다. 얼굴도 말투도 음성도 다 그랬다.

  난 그런 여자를 보고 있자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 저번에 연회의 밤 가지 않았잖아.”

  내가 말했다.

  기억났다. 여자를 처음 봤을 때는 지난 번 연회의 밤 때였고, 옷을 차려입은 나와는 달리 여자는 아주 후줄근한 차림으로 휴게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당황해보였다. 나는 그런 여자에게 기억을 각인 시켜주고 싶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어.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빠져 나온 거 아니냐고.” 정말이다. 여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여자는 내 말을 회피했다. 그리고 B-102를 빠져 나갔다.

  나는 여자가 나간 후에도 침대에 나오지 않고 천장만을 바라본 채로 누워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주 평온하게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을 만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B-102 밖에서 여자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최희준” 여자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부름이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B-102 문을 열고 여자를 반겼다. 여자의 손에는 샴페인과 와인 잔이 들려있었다.

  “뭐야?”

  여자는 내 말을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곤 와인 잔에 샴페인을 담기 시작했다. 여자는 샴페인이 담긴 와인 잔을 내게 건넸다.

  여자가 잔을 기울였다. “짠 하자고.” 내 시선에 뱉은 답변이었다. 나는 여자의 말에 내 와인 잔을 여자의 와인 잔에 맞추었다. 그러자 와인 잔의 청량한 음성이 B-102 안에 울려 퍼졌다. 여자는 목이 마른지 샴페인을 한 잔 비웠고, 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어디가?”

  “화장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지 물을 틀었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토를 하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는 기분 나쁜 색의 액체가 나왔다. 방금 전 먹었던 샴페인인 거 같다. 나는 변기를 내리고 이를 닦았다. 그리고 비누로 손을 닦았다.

  수건 한 장을 꺼내 몸을 감쌌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몸에서 수건 한 장 걸친 꼴이 되었다.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 B-102 안의 여자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여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뭐했어?”

  여자가 물었다.

  화장실에 갔으면 오줌을 싸거나 똥을 싸거나 씻거나 세수를 하거나…… 할 수 있는데 여자는 내가 의심스러운지 내 행동에 대해 물었다. 그럴 만도 하지. 네 샴페인이 의심스러워 마시자마자 토를 했으니까.

  “똥 쌌어.”

  이 상황에서 가장 우습고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내 말에 여자는 거짓 된 미소를 내게 보였다.

  잠이 왔다.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이 스르륵 감겼다. 마치 내 옆에서 누군가가 내 귓가에 양의 수를 세워주는 거처럼 눈이 감겼다. 아니, 눈이 감긴 척 잠이든 척이었다. 여자가 내 눈가 위로 손바닥을 흔들었다.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말이 거짓이 된 걸 안 이후로 모든 것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와 멀어짐이 느껴졌다. 작게 눈을 떴다. 여자는 B-102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내게 보여준 것은 거짓투성이였다.

  나는 작게 뜬 눈으로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걸까. 내게 숨기는 게 뭐가 있는 걸까. 여자는 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하던 행동을 멈췄다. 몸이 굳었다. 나는 그런 여자의 행동에 눈을 감았다. 이런 거 많이 해봤잖아……. 자는 척…… 죽은 척 하는 거. 폐쇄회로 앞에서 많이 해봤잖아. 그래서 아주 쉬웠다. 여자는 내 행동에 속았다.

  “아씨…… 심장 쫄려.”

  여자가 말했다. B-102 안에는 여자의 목소리만 가득했다.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이상함과 수상함을 남겨둔 채로 B-102를 빠져나갔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침대에서 나가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숨기는 게 뭐지? 여자는 Z를 알고 있는 걸까? 여자의 수상한 행동들로 보아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Z랑 여자는 무슨 사이인 걸까. 서로 잘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Z가 바이러스를 만들라고 지시했던 그 사람일까.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게 내 상상력의 한계인 걸까.

 

  몇 가지를 생각했다. 저 여자의 가장 의심 가는 행동 몇 가지를. 그 몇 가지는 보일 정도로 작지 않았다. 아주 컸다. 저 여자는 모든 게 의심 갔다. 벙커에서 처음 봤을 때 순간부터 지금 여자에 대한 생각을 할 때까지 조차 모든 게 의심 투성이였다.

  여자가 벙커에 들어오기 전에 겪었던 것들도 의심 갔다. 정말 미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이 맞는 걸까? 영어도 못 한 다면서. 여자의 말이 맞는 걸까? 여자의 표정은 진짜였다. 자신의 말과 행동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표정이었다. 나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여자에게 네 모든 건 거짓이라며 여자의 믿음을 깨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냥 뭐가 정답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거 같지 않았다. 내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내뱉는 말들이 실제 일어난 일들이며 자신의 기억 속에 아주 또렷이 박혀 있는 것들이라고.

  “도대체 뭐가 맞는 걸까…….”

  몇 번을 되 뇌이고 되 뇌여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답이 없는 퀴즈처럼 내게 내린 거라고는 대답 없는 공기뿐이었다. 이젠 공허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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