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한 거다, 라는 굴레 속에서 피눈물 흘리고 있는데 자동 행동 기능이 뭐라고, 튜토리얼이 뭐라고 나는 아직도 방관자였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화연이 더 나를 싫어할 게 뻔한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저는 혹여나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 궁인이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들어갔어요!”
하얗게 질려 자신의 무죄를 알리는 한율.
애달파하는 그 모습에 내 심금이 울렸건만 나온 것은 제 분에 못이긴 호통이었다.
“변명, 변명, 변명! 언제까지 착한 척 연기하며 가증스런 속내를 감추고 있을 셈이지?! 차라리 네 아버지처럼 대놓고 말해! 도대체 네 진심은 뭐야! 네 아버지처럼 날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어?! 그것도 아니면! 그저 날 놀리고 싶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네 행동 하나 하나에! 네 말, 시선! 네 존재 그 자체에 고통받는 날 보며 즐기고 싶은 거냐고!”
띵, 하는 소리가 울려야 할 만큼 한율이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한율의 반응이 상관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소리쳤다.
“나가! 여기 이곳에서! 천호의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 이곳에서 나가!”
그러면서 충격받아 있는 한율의 팔을 잡고 문 쪽으로 끌었다.
반항할 의지가 없는 건지 힘이 없는 건지 머리 하나 정돈 거뜬히 차이 나는 큰 체격을 가졌으면서 얌전히 끌려오는 한율에 착, 착. 두어개 정도의 문을 순조롭게 지나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율을 내팽개쳤다.
그에 휘청거린 한율은 기어코 중심을 잃고 문과 문 사이에서 주저앉아 나를 허망하게 올려다봤다.
나는 내 의지완 상관없이 그런 한율의 표정에도 잔뜩 화난 태도 그대로 홱, 뒤 돌아 다시 천호 집무실로 돌아갔다.
착, 닫히는 문을 끝으로 나만이 천호 집무실에.
그리고 풀리는 자동 행동, 대화 기능. 나는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물론 진짜 쥐어뜯으면 아프니까 그런 척만.
그래도 소리는 진짜 질렀다.
“으아아아-!”
왜냐면 상황이 미쳤거든.
미쳤다!
쓰레기, 쓰레기, 개쓰레기!
근데 그게 나야!
방금 봤어? 봤냐고.
거의 뭐, 내핵 뚫을 정도로 상처 입은 듯한 한율의 표정!
그 표정조차 잘생겼었지만!
아, 이게 아니라. 미친 시스템 이렇게 해놓고 한율의 마음을 얻어보자, 그딴 퀘스트를 준 거야?
{ [시스템은 죄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스템을 욕하다니 플레이어의 인성이 의심됩니다.
그러므로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 4
중요한 순간 패널티가 적용되며 그에 대한 감당은 오로지 플레이어의 몫.}
“...”
띠링, 거린 시스템 창에 목 끝까지 차오른 욕을 삼켰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못한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화냈다가 달랬다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당장 한율에게 가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네 말 믿고 있다 달래자.
그리 결심한 내가 문에 다가서자마자 띠링, 빨간 테두리 창으로 안내가 떴다.
{스토리 진행 상, 현재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팁 : 튜토리얼을 끝내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개새끼인가?
띠링,
“아, 너한테 한 거 아니야.”
비굴한 내 말에 한번 봐주겠다는 듯 시스템 창이 지직거리며 올라오다 사라졌다.
그에 나는 한번 신호흡 크게 하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않았다.
튜토리얼. 그래. 끝내자.
차근차근 하면 돼.
내 상황에 대한 요약 한마디 하면 된다 했지.
그걸 맞추기 위해선 다시 정보 포인트를 짚어야했다.
“천호, 한율, 백호가 보름, 천호 과거, 천호와 한율 관계, 천호 인물도, 천호의 위치. 천호의 역사, 역대 천호. 천호 현 사정.”
천호가 가장 높은 자리에다 세계관 상 최강 권좌이니 천호 주변 관계에 대해선 천천히 알아가도 된다 생각했다.
근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라니.
천호의 사정을 알만한 정보가 올라오게 생각나는 포인트를 아무거나 말하니 그 중에서 정답이 있었는지 띠링, 장문이 써진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어느 날 돌연, 천호의 핏줄이 조금이라도 이어진 모든 이들이 죽었다.
천호, 천호의 반려, 천호의 자식들, 친척 할 거 없이 모두.
단, 천호의 핏줄이 이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약하디약해 천호의 직계자식이면서도 천호 계승 순위에서 최하위로 밀려난 한 명의 어린 아이만 남겨놓고.}
좋아, 저 어린아이가 나네.
지금의 천호.
이런 건 눈치와 감으로 때려 맞출 수 있었다.
{원래 천호란 이 천의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
아무리 최약체 천호라 해도 반란분자들(대개 천의 나라 사람 전체)을 힘으로 가볍게 누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승 순위 최하위의 어린아이는 천호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선 무척 강하네, 할 정도로의 힘뿐.
단 한 명뿐이게 된 천호, 화연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각 나왔다. 대략 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룬의 기운만 내뿜어도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던 역대 천호들에 비해 매우 약한(게다가 어린) 화연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가장 처음 알게 된 여호들은 이때까지 향락과 사치 그 이상을 즐기며 훌륭하게 폭군 노릇을 했던 역대 천호들에게 쌓인 울분을 풀 겸, 나라를 바로 잡을 겸 화연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자 단합했다.
그리고 화연에게 천호가 되긴 하셨으나 아직 어리니 나라 운영은 자신들이 하겠다며 꼬드겼다.}
천호를 죽이면 자신들도 죽으니 폭군이라 하여도 함부로 반란을 일으킬 수 없고...
게다가 반란분자들, 그러니까 천의 나라 사람 전체를 가볍게 누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 했으니 역대 천호들이 얼마나 마음 놓고 폭군 짓을 했을지 예상 갔다.
{어리긴 하지만 천호의 핏줄을 이은 몸, 화연은 여호들이 자신을 꼭두각시 천호로 만들고자 함을 눈치챘다.
하늘의 피를 이은 사람들 중 역대급으로 강해 제 혈연들까지 손쉽게 억누르고 천호란 권좌에 앉은 사람.
그러니까, 찬란하고 방탄하며 모든 걸 제멋대로 휘두르던 전대 천호.
화연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앉고 싶었지만 절대 앉을 수 없던 권좌.
그게 기적과도 같이 제 앞으로 내려왔는데 이대로 꼭두각시라니.
화연은 달콤한 천호의 권력을 포기할 수 없어 여호들에게 싫다며 반항했다.
그들을 힘으로 누를 자신도, 실력도 없었지만 제가 죽지 않을 거란 사실 하나만 믿고.
그러나 화연은 그 믿음이 어리석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 하나 믿고 이러시는지요, 폐하. 어리석습니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혀를 잘라낸 후 눈을 도려내도.’
덜덜 떠는 자신의 앞에서 씩, 상냥하게 웃은 백호가 보름이 이어 말했다.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게 천호 아니겠습니까.’
깨달았다.
역대 천호들이 폭군 짓을 해도 사지 멀쩡히 살아있던 건 다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화연은 그대로 백호가 보름에게 맡겨졌다.
천호 궁에서 천호가 쫓겨난 것이다.
혀가 아리도록 달콤한 권력이 드디어 내 손에 닿을 거 같았는데.
‘그리되기 싫으면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사십시오.’
울분에 찼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던 화연은 백호가 보름의 거처에서 죽은 듯 살은 듯,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보름의 거처에서 사는 것치곤 매우 초졸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리고 어느 날, 화연은 들었다.
‘꼭두각시로 만들자 생각하였거늘. 생각해보니 그조차 아깝다. 차라리 백성들에게 천호의 핏줄이 전부 죽었음에도 천의 나라가 유지된다며 역대 천호들이 우리에게 거짓말하여 제 이익을 챙겨왔을 뿐이라 공포하고 내 아들을 천호로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
‘어리고 약하다 하지만 천호는 천호. 저희로는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자라날 천호를 계속 억누를 수 있는 건 백호가 보름뿐이니 저는 이이 없습니다.’
‘저 또한-’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허나, 그리된다면 천호는 어찌하실 건지요.’
그 말에 백호가 보름이 그때처럼 상냥하게 웃었다.
‘당연, 숨만 붙어있게 해야지.’}
여기까지 읽은 나는 섬뜩한 느낌에 약간 굳은 채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성교육 내용이 담긴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천의 나라에서 임신은 남성이 하는 것이다.
남녀, 둘 전부가 절정을 맞으면 남성의 성기 끝에 구슬만 한 작은 알이 딸려 나올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딸려 나왔다면 넉 달 동안 정성껏 작은 알을 보살피면 된다.
그리고 넉 달이 끝날 무렵 태아가 점점 큼에 따라 크기를 키운 알을 떼어내고 다시 여섯 달. 알을 깨고 천의 나라 사람이 태어난다.}
뜬금없는 설명에 갑자기? 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거 좋네. 내가 임신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임신하는 거면...
애 열 명은 낳고 싶어지겠는데?
그러고 넘긴 다음 페이지에서 왜 뜬금없는 설명이 나왔는지 이해갔다.
{‘허나 백호가 보름. 천의 나라가 유지되려면 천호의 핏줄이 계속 필요한 법이니 살아만 있는 건 아니 됩니다. 그러니 천호가 성인이 되고 몇 년 지났을 때,’
‘남녀 둘, 모두의 절정이 임신 조건이니 외적으로 잘났으면서도 뒤처리가 쉬운 신분의, 건강한 태아를 임신할 건강한 남성을 골라 천호를 유혹하게 하자는 말이냐?’
‘예, 그리고 그 뒤, 태아는 힘을 지우는 룬석을 몸속에 박아둔 채 지하나 어디 으슥한 궁 꼭대기에 가둬두는 거지요. 미래의 일이니 태어날 천호의 아이가 여아일지 남아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반복하면 다시는, 천호의 폭군 짓에 천의 나라 전체가 아플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한 플레이어의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겠지.
와, 아깐 그냥 쓰레긴 줄 알았는데 사연 많은 쓰레기로 인식이 변했다.
천호도 좀, 매우 불쌍한데?
그 천호가 납니다. 미친.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은 화연은 새파랗게 질렸다.
제 미래에서 권력이란 글자가 저 정도로 철저히 지워진다니.
화연은 성인이 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그런 희망을 품고 이때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라니.
화연은 절망했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아 시름시름 앓았다.
그에 백호가 보름은 천호가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구나, 짐작 후 확신했지만 그닥 신경 쓰진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뜬금없이’ 백호가 보름의 자식, 한율이 화연, 당신이 좋다며 얼굴까지 붉히고 저를 졸졸 따라오는 게 아닌가.
그 뒤로 족쇄 줄이 길어졌다.
즉, 보름의 그 넓은 거처에서 아주 일부분, 방이나 그 앞의 작은 연못 정도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던 화연의 활동 범위가 백호가 보름의 거처 전부로, 장이 열리는 곳으로, 백성들이 사는 거리로 넓어졌다는 말이었다.
한율 덕분에.
옷도, 먹는 것도, 심지어 노는 것의 질 또한 달라졌고 글자 교육도 못 받았던 교육체계도 달라져 기본적인 교육은 받게 되었다.
여호라면, 천호라면 응당 배워야 할 기본예절도.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폐하를, 천호 핏줄을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허나 그러지 않기로 약속한 탓에 아쉽지만 폐하를 천호 자리에 올려놓기로 했습니다. 전부 제 아들 덕임을 명심하시길. 또한, 제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란 것도. 멍청하진 않으니 무슨 말인지 잘 알 거라 믿습니다.’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난 통보를 해오는 백호가 여호에 의해 천호의 권력이 다시 제 손끝까지 다가온 것이다.
그에 화연은 나쁘지 않은 거래라 생각하여 한율과 잘 지내보려 했다.
그러나 그건 나쁘지 않은 거래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족쇄라는 걸 깨달았다.
자식을 많이 남겨야 하는 천호들의 역사상 절대 없었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약혼남이라는, 한율이라는 족쇄.
천호의 자리지만 권력은 저 멀리 있다. 껍데기만 제 손끝에.
그에 화연은 분노했지만 저 싫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 저를 좋다고 오는 사람이 오랜만인지라 싫기만 한 건 아니었는지 한율과 나름 잘 어울려 다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애정이 목말랐던 화연은 호기심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내게 되었고 한율에게 점점 소홀해졌다.
그에 서운함을 느낀 한율은 요새 왜 이렇게 침울해하냐며 물어오는 제 아버지, 백호가 보름에게 속상함을 털어놓다가 어린 마음에 울어버렸고 백호가 보름은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소중한 제 자식 눈물 나게 한 화연을 조용히 불러 이대로 죽은 사람처럼 살고 싶냐며, 너가 지금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한율 덕분임을 알라며 폭언과 압박을 해버린다.
그에 한율과 화연의 사이가 더 좋아지기는커녕 숨겨왔던 열등감과 악감정이 터진 화연 덕에 한율은 더욱 그녀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에 서러워서 일러바치고 화연은 압박 받고의 반복.
그사이 호기심으로 화연에게 다가와 친구가 된 이들이 머리가 크고 권력의 분위기를 읽자 자연스레 그녀에게서 멀어지던 사건이 얹혀진 건 덤이었다.
한율은 어느 날 새어 나오는 불빛에 몰래 화연이 압박받는 장면을 훔쳐보게 되는데, 그것이 너무 충격이라 그 길로 그녀에게 사죄하고 절대 일러바치지 않겠다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것엔 타이밍이 있는 법.
사과와 약속을 들이밀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아 지금 이 상황.}
“와.”
많고 많은 페이지를 넘겨 다 읽은 내 감상은 하나였다.
단 하나뿐인 천호라고 엄청 좋은 조건만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 이렇게 복잡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고?
껍데기뿐인 천호네?
“나 사기 당한 거네?”
허망한 혼잣말이 집무실에 울리고 기다렸다는 듯 띠링, 띠링,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정답입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을 끝내셨군요. 자동 행동, 대화 기능이 해제됩니다.}
{튜토리얼 완료로 [천호의 집무실]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새끼가.
양심은 있는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스템 어쩌고가 붙은 패널티 알림은 올라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