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동양풍의, 연못 있는 정원으로 풍경이 전환된 것에 적응하기도 전에 시스템 창이 띠링, 띠링, 띠링, 시끄럽게 제 존재를 알렸다.
{튜토리얼 [모든 것은 천천히 알게 되는 법.]
방관자의 느낌으로 현재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완벽히 파악하고 현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말을 입력해보자.
팁 : 중요 포인트를 입력하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을 플레이어를 위해 자동 대화 기능, 자동 행동 기능을 실행합니다.
튜토리얼의 정답을 입력하면 해제됩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을 플레이어를 위해 인물 기본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시킵니다.}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플레이어의 감정(진지함)과 심각성 인지 능력을 저하합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도 전에,
퍽-!
상황부터 벌어졌다.
“...”
갑자기 보이는 폭력의 현장에 놀라 굳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은 눈 한번 깜빡이기 마냥 쉽고 빨랐다.
한 대 얻어맞아 넘어진 약혼남 포지션 남자 주인공 후보, 아직 날 발견하지 못한 또다른 남자 주인공 후보, 마지막으로 의무적 역하렘을 이뤄야 하는 천호가 된 나.
갑자기 이렇게 시작한다고?
한 대 쳤음에도 울분에 가득 차 씩씩거리는 남주와 핏방울 맺힌 입술을 쓸어내리는 약혼남.
어릴 때부터라던가, 뭐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났다던가 그런 식으로 시작될 줄 알았던 나는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이걸 어째.
시선은 본능에 충실하게도 약혼남과 또 다른 남주의 잘난 미모에 고정되었다.
하, 뭐야, 아까도 실감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둘 다 외모가 미쳤잖아.
진지함과 심각성 인지 능력을 저하한다 했나?
그래서 그런지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자 남주가 약혼남을 씹어먹을 듯 말했다.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천호님을 압박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나 봅니다."
어? 다시 싸우겠는데?
근데 앞뒤 상황을 제대로 모르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만 방관해보자 생각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내가 천호님을 이용하면 뭐 어-”
“바론.”
약혼남 포지션 남주말고 또 다른 남주가 말하는 중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가? 내가.
내 의지를 벗어난 내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정작 내 표정은 무표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에 이질감을 느꼈으나 곧바로 사라지고 아, 이게 아까 시스템 창이 띄운 자동 대화, 행동 기능이란 건가? 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나만큼이나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바론.
그는 백색 공간에서 띄워진 시스템 창의 서술대로, 본대로. 짙은 밤과 닮은 흑발과 맹금류 같은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아주, 매우 잘생겼다.
중요하니깐 다시 한번 말하자면 숨을 헉, 들이킬 정도로 잘생겼다.
"천, 천호 폐하..."
바론의 입이 달싹이면서 방금의 씹어먹을 듯 읆조렸던 위협적인 음성은 환청이었다는 듯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그러나 떨리고 있는 음성을 내뱉었다.
이게 바로 심금을 울리는 소린가? 와, 세상에. 떨리는 목소리마저 잘생겼어.
이것도 자동 행동 기능에 포함되는지 나는 속으로는 바론의 외모, 목소리에 감격하면서 겉으론 바론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훑었다.
그에 이질감을 느끼긴커녕 나는 바론의 외적인 것에 감탄하기 바빴다.
미친, 몸매도 완벽해.
외모, 몸매, 목소리, 체격. 사박자 고루 갖췄다.
잘생김에 익숙해져서 눈이 높은 탓일까, 현실에선 잘 느껴보지 못한 감동의 물결에 넋을 놓고 있자니 바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난 눈치가 빠른 편이니 왜인지는 곧바로 짐작 가능했다.
권력의 끝판왕 천호 앞에서 천호를 이용한다는 뉘앙스로 말하다가 끊겼으니까 인생 망했다고 판단했겠지.
물론 그 천호가 나다.
그러니 바론은 안심해도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를 이용한다는데.
당연 기분 나빴겠지만 지금은 현실에선 무척이나 드문, 차원이 다른 잘생김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지려 해도 나빠질 수 없는 상태니까.
나를 이용하고 있었어?
응, 앞으로도 애용해줘.
아, 그렇다고 진짜로 애용하면 짜증 날 거 같다.
아닌가?
저 잘생김을 보면 아닐 거 같기도 하고.
행복한 혼돈에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뭔데, 이건 자동 행동 안 해줘?
내가 심각성을 잃어서 그렇지 지금 현재 분위기는 착 가라앉은,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웃는 건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다급히 인상 쓰며 넓은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자 바론을 때린, 그러니까 약혼자 포지션 남주 한율이 기다렸다는 듯 바론을 비꼬았다.
"하, 들었습니까 화연. 이 미천한 자가 감히 화연을 이용한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저까지 같은 취급을 하려 하네요. 제가 이 치와 어울리지 말라는 이유를 이젠 좀 알겠습니까?"
하, 세상에.
이번엔 미성이다.
게다가 저 씁쓸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자몽 빛 머리카락과 악독함이 담겨있는 푸른 눈동자의 조합이라니.
바론에 정신팔려서 지금 눈에 들어온 게 미안할 정도의 외모였다.
내 눈이 본능에 충실하게 한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딱 한 부분만 터져 붉은색을 한껏 문 입술은 섹시한 비웃음을 걸치고 있었고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 바론을 쳐다보는 푸른 눈은 악독함으로 점칠 되어 새침하게 뜨여있었다.
한마디로 세침과 섹시가 공존하는 새침섹시.
즉, 재규어, 또는 맹금류 같은 느낌의 잘생김인 바론과는 또 다른 느낌의 미남이란 이야기.
하하, 난 죽어도 좋아.
멍청한 사람처럼 헤실해지려던 내 표정은 자동 행동 기능이 들어갔는지 여전히 인상 쓰고 있었다.
이건 좋네. 짧은 감상을 속으로 내리자 그럼 이거는? 라고 물어보는 것 마냥 내 시선이,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바론.”
“!”
“괜찮으니 손에 힘 풀어.”
응? 바론 손에 힘주고 있었어?
내가 모르는 사실을 내가 내뱉다니, 놀랐다. 물론 겉으론 티가 안났지만.
“...예, 천호 폐하.”
바론이 대답하자 그를 쳐다보고 있던 내 시선이 드디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슬쩍 아래로, 바론의 손을 쳐다보자 손에 상처가 난 듯 붕대에 감겨 있는 게 보였다.
덤으로 대답만 하고 실천하진 않을 건지 붕대에 짙은 주름이 갈 정도로 꽉 쥐고 있는 것도.
안돼!
그에 기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잘난 사박자에 흠짓 나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참는다.
현실에 동떨어진 외모들에 잠시 정신이 나갔는지, 나는 바론에게 다가가 친히 주먹 쥐고 있는 손을 펴줬다.
“힘 풀라고 한 거 같은데. 흉터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계속 쥐고 있는 거지?”
물론 시스템상, 교정이 들어갔는지 날뛰는 속내와 달리 매우 침착한 태도였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였다.
“화연! 방금 이 치가 한 말을 못 들었습니까?! 하,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런 내 태도에 한율이 앙칼지게 소리쳤기 때문에. 미쳤다, 소리치는 모습마저...
나는 감격했건만 내 입은 엄격히 한율의 이름을 불렀다.
“한율”
말하는 도중에 끼어든 내 부름에 한율은 멈칫하며 놀라는 것 같더니 대뜸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화연”
꽤나 부루퉁하게 대답한 한율은 입술만 잘근잘근 짓이겼다.
찢어진 입술 탓에 분명 피가 삐져나와 비릿할 뿐만 아니라 아플 텐데.
아, 아프면 안 되는데.
언제 봤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올라왔다.
물론 내뱉어진 말은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다르게 분위기에 알맞은 말이었지만.
“똑똑해, 내가 이 시간쯤 항상 여기 온단 걸 기억해서 일부러 바론을 도발하고 맞아 주기까지 하고. 그래놓고 내가 오니 타이밍 좋게 피해자인 척.”
아, 진짜?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저리 잘생긴 게 얼마나 내 관심이 필요했던 거야? 절로 기분 좋아진 속내와 달리 내뱉은 건 비꼼 가득한 말이었다.
“계속 그렇게 해봐.”
한쪽으로만 올라간 입꼬리가 현재 내 표정이 어떤지 쉬이 짐작 가능하게 했다.
아마 싸울 때 상대방을 화나게 할 의도 가득한, 비웃음과 가소롭게 봄이 섞인 표정이겠지.
지금 내 표정이 얼마나 열 받는지 친구가 들이민 사진을 보고 이 정도구나, 아주 깊이 깨달았던 나는 한율이 제발 화나지 않기만을 바랬다.
“예, 화연! 원하시는 대로 어디 한번 계속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악에 받쳐 부들거리던 한율이 도포 자락으로 보이는 옷자락을 홱, 휘날리며 뛰쳐나갔다
그래, 역시 무리겠지.
무리한 희망이지만 이뤄지길 바랐던 내가 속으로 피눈물 흘리고 있자니 바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천호 폐하.”
“왜.”
대답하며 무표정하게 쳐다보니(물론 내 의지는 아니었다.) 바론은 죄지은 사람처럼 내 시선을 빗겨내며 말했다.
“폐하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뜬금없는 말에 물음표가 생기는 것도 잠시, 곧 이해했다.
아까의 연장선이었다.
나를 이용하는 것.
근데 솔직히 입장에선 딱히 실감 나지 않는 말이라 열 받거나 그런 거 없이 뭐라 대답해줘야 하지?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렇잖아? 나는 방금 막 천호가 됐는걸.
이런 내 생각이 반영된 건지 우연인 건지 내 입이 멋대로 움직여 말했다.
“이용이라.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어디 마음껏 해봐.”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나온 말, 그걸 들은 바론의 안색이 순식간에 불안함으로 물들더니 다급하게 되물었다.
“정말...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대로, 이대로 넘어가는 겁니까?”
불안한 가득한 얼굴이 애달프게 다가와 내가 다 마음 아픈 것도 잠시, 내 입이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딱히 상관없어. 예상도 했었고. 그러니 내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강조하지 말고 봐줄 때 곱게 넘어가.”
푸드득-,
한순간 일제히 날아오른 새들 소리에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 새됐네.
날 이용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는데 넌 그냥 재미용이라서 봐주고 있었던 거다, 지
금도 봐 테니 계속 재미용으로 내 옆에 남아있어라, 라는 의미가 가득한 말을 내뱉다니.
바론이 상처받을게 당연했다.
“...그러하시다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심금을 울리고 쓸쓸히 사라진 바론에 나는 절망했다.
한율도, 바론도 다 상처받아서 사라졌다.
아니, 남자 주인공 후보들이잖아.
아까 백색의 공간에서 분명 봤다고.
튜토리얼에서 이렇게 두 명이나 날리다니.
그것도 내 의지가 아닌데!
나 벌써부터 게임 오버야? 이거 못 끝내?
아, 아니야. 그때 몇 명 더 있었으니까 그 사람들이라도 잘 공략하면 될 거 같은데.
그래, 두 명 이상만 되아도 역하렘이라 쳐줄 수 있네!
억울함과 미남 둘에게 상처 줬다는 슬픔, 게임 클리어 조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그
리고 그때, 띠링. 시스템 창 알림음이 떴다.
{메인 퀘스트가 열립니다.}
지금 상황에서?
내 당황과는 상관없다는 듯 시스템 창이 띠링, 띠링거리며 올라왔다.
{메인 퀘스트 [마음을 얻자 1.]
새침한 해바라기일 뿐이었던 한율을 악독하게 만든 당사자는 바로 너.
인과응보, 한율의 마음속 응어리를 전부 풀어주고 마음을 얻어보자.}
{메인 퀘스트 [마음을 얻어보자 2.]
무뚝뚝해 보이나 순수하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바론이 당신을 이용했을 리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바론에게 상처 준 당신.
죄에 대해 속죄하는 뜻에서 바론의 마음을 얻어보자.}
연달아 두 개나 열린 메인 퀘스트를 다 읽은 나는 침묵했다.
“...”
내 의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라는 외적 요소들을 가지고 했던 말, 행동,
그에 상처 받은 게 분명한 표정들로 사라진 바론과 한율이 떠올랐다.
미쳤나, 이래놓고 마음을 얻으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