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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사라진 가족
작가 : 장군12
작품등록일 : 2019.8.7

14년 전 발생한 일가족 실종 사건을 한 주간지 기자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
서로를 파괴하며 처참하게 무너진 가족의 사연과 경찰이 숨긴 진실의 조각.
사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모든 일을 백일하에 드러내려는 이들의 숨막히는 대결로 치닫는데……

 
14. 2016년 3월 24일
작성일 : 19-08-28 18:04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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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6년 3월 24일

 

  새벽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갈수록 거세졌다. 우산을 들고 미용실 앞에서 기다리던 재우의 옷이 금세 흠뻑 젖었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길 기대했는데 비 때문에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미용실 문을 열기 위해 다가오던 강은정이 그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는 다 쓰신 건가요."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됩니다."

  "저한테 말인가요?"

  재우는 대답을 하는 대신 우산을 접었다. 소파에 앉자 강은정은 침착한 모습으로 믹스 커피를 내 왔다. 재우는 하품을 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원룸에서 밤새 기사를 고치고 잠깐 눈을 붙인 후 나오는 길이었다. 몸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2002년 3월 30일 일로 여쭤볼게 있습니다. 동생 분이 사라진 걸로 추정되는 날이죠. 원래 동생 분은 그 다음 날 집을 나가실 생각이었더군요. 기차표까지 사 놨었죠."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던 강은정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조용히 입술을 깨물면서 재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갑자기 동생 분이 가출을 결심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쌓였던 불만이 어떤 계기 때문에 폭발했을 수도 있겠죠. 어쨌든 강희정 씨는 3월 31일 새벽 첫 기차로 목포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입니다. 표는 어른 한 장만 샀지만 동생 분은 아이들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을 겁니다.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강희정 씨가 아이들을 두고 혼자 떠나려 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그런데 막상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자 불안하고 두려웠을 겁니다. 주변에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상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죠. 단 한 명, 친언니를 빼곤 말입니다."

  강은정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희정 씨는 마음을 굳히기 직전이나 직후에 언니와 상의했을 겁니다. 예전부터 이혼을 권했던 분이시니 가출을 만류하진 않으셨겠죠. 오히려 적극 돕겠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분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궁리했겠죠.

  짐작입니다만 두 분이 세운 계획은 이랬을 겁니다. 희정 씨가 미리 필요한 짐을 챙겨서 언니 집에 맡겨놓는다. 그리고 당일 새벽 남편이 자는 사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빠져 나온다. 남편에게 들키면 안 되는 기차표도 미리 언니에게 맡겨 놨을 겁니다.

  언니는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싶어 거사 당일 희정 씨와 만나기로 한 시간을 표 뒤편에 메모해 놨습니다. 새벽 4시. 동생에게 줄 택시비와 함께 티켓을 갖고 기다렸겠죠."

  강은정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재우는 자신의 추측에 조금씩 자신이 생겼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에 동생과 아이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불안했습니다. 혹시 나오다 남편에게 들킨 건 아닌지, 그래서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들었겠죠. 그래서 망설이다 동생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죠. 자동차도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습니다.

  계획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겠죠. 가족이 하루 집에 안 들어왔다고 수사에 나설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동생의 가출 계획을 외부에 일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라도 남편 귀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빚쟁이를 피해 급하게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고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안 됐습니다. 결국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고 판단해 경찰에 신고한 겁니다."

 

  재우는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강은정은 한참 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눈에는 체념 대신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하시네요."

  재우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강은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만난 기자님들은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사실에 추측을 끼워 넣어 제멋대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믿어버리더군요. 박 기자님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결정적인 부분은 마음대로 생각하시네요."

  재우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강은정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입을 열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기사가 나갈 것 같군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님은 왜 동생이 갑자기 집을 나가려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놈이 집에 없을 때 마음만 먹었다면 백 번도 더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왔을 때 결심했을까요."

  재우는 전날 밤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강은정은 재우를 쏘아보며 말을 내뱉었다.

  "최석우는 동생과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려 했습니다."

  역시 그랬던 건가. 재우는 눈을 감았다. 상대는 가시 돋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엊그제 말씀드렸던 건 모두 사실입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을 좀 생략했을 뿐이죠. 지난번에 저와 동생이 서먹한 사이가 됐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한동안 어린이집에서 만나면 한두 마디 주고받는 정도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던 주 화요일이었어요. 점심 무렵 동생이 둘째 태현이를 안고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미용실에 왔습니다. 전날 어린이집 앞에서 잠깐 스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더군요."

  강은정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전날 밤에 남편이 두 달 만에 집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아침을 먹은 후 사실을 털어놨다는 겁니다. 그 동안 전국을 돌며 일한 게 아니라 줄곧 강원랜드 카지노에 있었다고. 돈도 없으면서 마지막 한 푼까지 도박에 다 갖다 바쳤다고. 그것도 모자라 1억 원 가까운 빚까지 졌다고 했습니다. 사는 집을 정리해 일주일 안에 갚겠다며 사정하고 간신히 빠져나왔다더군요.

  인적사항과 주소는 물론 가족 주민번호까지 다 알려주고 온 터라 도망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동생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상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때 동생이 살던 반지하 방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이었어요. 그나마 월세를 못 내 반년 째 보증금에서 까고 있던 중이었고요. 1억 원이라니, 턱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동생은 이제 야반도주라도 해야 할 판이라며 힘없이 돌아갔습니다. 제 마음도 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도 1억 원이라는 목돈을 마련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틀이 지난 목요일 오후였어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가 동생을 다시 만났습니다. 동생은 연희를 데리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요일에 얼굴이 창백했다면 이날은 반쯤은 정신이 나간 표정이었습니다.

  미용실로 가자고 했더니 싫다면서 인근 놀이터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수연이와 연희가 어울려 노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갑자기 말을 꺼냈습니다."

  강은정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재우는 묵묵히 기다렸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동생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초연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 죽는 수밖에 없대.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그쳐 물었죠. 동생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되풀이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랬어. 다른 방법이 없대.

  말문이 막힌 저에게 그 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애들이라도 어떻게 살릴 수 없을까. 아무리 설득해도 안 통해.

  화가 나서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욕까지 나왔습니다. 미친놈, 완전히 미친놈이야. 당장 우리 집으로 가자.

  팔을 붙잡고 잡아끌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버텼습니다. 하루 이틀만 내가 설득해 볼게. 이대로 우리가 나가면 그 사람은 혼자 죽을 거야.

  자업자득이니 죽든 말든 신경 끄라고 해도 안 통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애걸하더군요. 마음이 약해져 하루만 설득해 보라며 물러섰습니다.

  대신 마음을 못 돌리면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새벽에 무조건 집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이들과 어디로든 떠나라고. 그 때 머리를 잡고 뺨을 때려서라도 억지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강은정의 눈에 물이 맺혔다.

 

  재우는 잠시 기다리다 다시 물었다.

  "기차표 날짜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던데요.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강은정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우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기차표 얘기를 하시던데 직접 보신 건가요?"

  재우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던져진 카드였다.

  "직접 본 아니고 다른 곳에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강은정은 이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차표 얘기를 하실 때 정말 놀랐습니다. 저와 동생 말고 그 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라서요.

  말씀드린 대로 설득이 안 되면 금요일 밤 혹은 토요일 새벽에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기다렸는데 날이 밝아도 안 오더군요. 전화도 안 받고요. 그래서 미용실 출근을 안 하고 동생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니 동생이 나왔습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였죠. 그 애는 간절한 목소리로 시간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놈이 있는 상황에서 저 혼자 동생과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말이 길어지면 의심을 살 것도 같았고요.

  그래서 무조건 저녁 6시까지 필요한 걸 다 챙겨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도 안 나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집에서 끌어내겠다고 했죠. 아무리 그놈이라도 대낮에 일을 저지르진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곧장 서울역에 가서 기차표를 샀습니다. 이 부분은 기자님이 틀리셨네요. 기차표를 산 건 동생이 아니라 저였어요. 동생을 집에서 데리고 나와 하룻밤 재운 뒤 아이들과 가급적 멀리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목포행 표를 끊은 이유는 별 거 아니었습니다. 그놈이 일을 저지른다면 집 근처 아니면 출신지인 강원도 어디일거라고 생각했죠. 불운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달아나라는 생각을 담아 표를 샀습니다.

  집에 와선 남편과 상의했습니다. 동생과 두 아이를 제 힘으로 끌고 올 자신이 없었거든요. 남편은 당장 데려오자면서 펄펄 뛰더군요. 당장이라도 달려가 최석우를 때려눕힐 기세였습니다.

  저는 저녁 6시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 안 오면 남편이든 경찰이든 동원해 끝장을 낼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미용실에 출근해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강은정은 다시 말을 끊고 물을 마셨다. 재우는 이제 결정적인 대목에 접어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동생이 혼자 미용실로 왔습니다."

  강은정은 고개를 들고 미용실을 둘러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지금… 기자님이 앉은 그 자리에요. 그 애는 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둘이서 밤을 새고 오후까지 대화를 나눴다고요. 남편이 잠든 틈을 타 잠깐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안에는 도장 통장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어요. 챙겨온 물건 중에 그 흔한 예물반지 하나 없는 걸 보고 다시 화가 치밀었습니다.

  동생은 남편이 일어나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얘기를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내일 새벽에 아이들과 집을 나오겠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남편을 데리고 지금 당장 찾아가 결판을 내겠다고 했지만 동생은 완강했습니다.

  동생은 남편을 설득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만 챙겨 야반도주를 하자, 그리고 어딘가 숨어서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려 보자면서요. 반쯤은 넘어왔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다시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예, 맞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가 동생을 구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수 없이 그 순간을 돌이키며 자책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겠죠. 반쯤 넘어왔다는 얘기는 반 밖에 넘어오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는데…."

  강은정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차표를 건넸습니다. 뒷면에 만나기로 한 시간도 적었죠. 새벽 4시. 지갑에 있던 돈 3만 원도 건넸습니다. 만약의 경우 바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갈 수 있도록요. 근처 약국에서 수면제도 사 왔습니다. 그놈이 설득이 안 되면 재우고 나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동생은 안 왔습니다. 연락도 안 됐고요. 약속시간이 지나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는 남편을 깨워 같이 동생 집에 뛰어갔죠. 그런데… 집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미 너무, 너무 늦었던 거였어요."

  강은정은 얼굴을 손에 묻은 채 어깨를 들썩거리며 오열했다. 재우는 티슈를 서너 장 뽑아 건넸다. 다행히 평일 오전이라 미용실을 찾는 이는 없었다. 재우는 상대가 진정되길 기다리며 아버지를 떠 올렸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이렇게 울어준 사람이 있었을까. 마음 한 구석이 못 견디게 아렸다.

 

  강은정이 조금 진정된 후 재우는 다시 물었다.

  "기차표와 돈은 어디서 찾으셨나요?"

  눈물을 닦던 강은정은 힘없이 답했다.

  "동생 집 우편함에서 나왔습니다. 혹시나 해서 봤는데 거기 있더군요. 남편 몰래 나올 때 가져가려고 미리 넣어놨던 거겠죠."

  "그런데 왜 경찰에는 사흘 후에나 알리신 겁니까?"

  강은정은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그건…. 기사에 안 쓴다고 약속하시면 말할게요."

  재우가 약속한 후에도 상대는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러다 마음을 정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용실로 찾아온 동생은 저한테 걱정하지 말라며 강조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하면 자신부터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라고…. 핏발 선 눈으로 그렇게 말했죠. 저는 그 눈을 보고 날 선 미용실 가위를 하나 줬습니다."

  재우는 강은정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동생 분이 최석우를 어떻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셨군요."

  강은정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남편은 당장 경찰에 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기다리자고 했죠. 동생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면 금방 연락을 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루, 이틀….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요. 사흘이 지나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래서 바로 경찰에 갔습니다."

  강희정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아니면 막판에 최석우의 설득에 넘어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은 걸까.

  재우는 망설이다 물었다.

  "강희정 씨가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상대는 한참 답이 없었다.

  재우는 그 모습을 보고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강은정은 여전히 의심과 걱정,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14년 전의 그 날처럼. 지금의 재우처럼 말이다.

  강은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덧붙였다.

  "머리로는 저도 알아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는 찾기 쉽지 않다는 걸 말이에요. 하지만 그만둘 수 없어서 지금까지 왔어요. 내가 포기하면 정말 끝이잖아요. 저 말고 누가 그 불쌍한 애를 찾겠어요.

  요즘엔 겁도 나요. 세월이 너무 지나 스쳐 지나가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같이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고 수시로 봐요. 미용실 구석에도 사진을 가져다 놓고, 동생을 아는 미용실 손님들에게도 보여주죠.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마주치면 알아봐 달라고 말이에요.

  저마저 잊으면, 누가 그 애의 얼굴을 기억하겠어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정말 끝이잖아요."

  재우는 승미의 추측이 적어도 한 가지에선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강은정이 고순희 할머니의 머리를 무료로 잘라주는 건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한 명이라도 더 동생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재우는 마지막 부탁이라며 한 가지를 요청했다. 강은정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집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재우는 급한 일이라며 다시 간곡하게 부탁했다. 강은정이 집에 다녀올 때까지 30분 동안 미용실을 지킨 끝에 드디어 원하던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재우는 미용실에서 나와 큰 맘 먹고 택시를 탔다. 강은정이 가져온 물건은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잭팟.

  재우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후 휴대전화를 켰다.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을 강 차장에게 구두로 보고했다. 강 차장은 당장 유 편집장에게 전달할 테니 빨리 회사로 오라고 지시했다.

  유 편집장이 정한 데드라인은 전날 밤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팩트가 반나절 후에 나왔다. 아직 커버스토리로 갈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기사 구성을 바꿔야 했다. 메인기사 외에도 보조기사가 한두 개 더 필요했다. 메인기사 분량도 늘려야 했다.

  재우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유 편집장과 강 차장은 편집장실에서 회의 중이었다. 재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 편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는 대충 들었어. 사실이라면 경찰 조직이 뒤집어 지겠구먼."

  재우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지금까지 알아낸 걸 설명했다. 유 편집장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하네. 만에 하나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강 차장과 함께 한 번 더 크로스 체크를 해 주게."

  뭘 더 어떻게 확인하라는 걸까. 반박하려는 재우의 팔을 강 차장이 잡아끌었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콩나물국밥 어때."

  지금 밥이 넘어가느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먹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다.

 

  식당에서 국물과 수란을 들이켰다. 식도와 내장을 따라 뜨거운 액체가 흐르자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몇 숟갈 뜨던 강 차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수고했어. 취재한 내용은 내가 확인 중이야. 유 편집장이 커버스토리로 쓰자고 했으니 돌아가면 기사에만 집중해 주게."

  무엇보다 고마운 말이었다. 강 차장은 돌아오면서 의미심장한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 저녁 때 어디에 같이 가야 할지 몰라. 가능한 빨리 기사를 써 두는 게 좋을 거야."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알겠다고 했다. 마감이 코앞인데 어딜 간다는 걸까. 강 차장과는 회사 앞에서 헤어졌다. 근처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재우는 사무실에서 오후 내내 기사를 썼다. 아무리 써도 쓸 말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피아노 건반을 치며 끝없이 진혼곡을 연주하는 기분이었다.

  무아지경으로 기사를 쓰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해진 분량을 넘었다. 기사를 늦게 쓰는 편인 재우로선 이례적인 속도였다. 이제 원고를 확인하고 몇 번이고 수정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지개를 펴는데 휴대전화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강 차장이었다.

  저녁 9시, 동서울터미널.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었다.

  재우는 강 차장에게 전화했다. 이제 겨우 초고를 완성한 상황이었다. 원고를 고치면서 틈틈이 편집자와 상의해 사진을 배치하고, 경과를 보여주는 시계열 표도 만들어야 했다. 제목과 레이아웃도 점검해야 했다. 자리를 뜰 수 없고, 기사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강 차장은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한정우가 오늘 밤 서울에 올 거야."

  재우는 의자에서 솟구치듯 일어났다.

 

  강변역에 내렸을 때는 오후 8시 반이었다. 아직 저녁을 못 먹은 채였다. 지하철에서 파는 토스트라도 먹을까 하는데 강 차장의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지금 어딘가."

  "방금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4번 출구 앞에서 기다리게."

  다른 설명은 일절 없었다. 말한 곳에 서 있으니 생산된 지 족히 15년은 넘어 보이는 구형 EF소나타가 재우 앞에 섰다. 강 차장이 급하게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얼른 타."

  "한정우는 어디 있습니까."

  강 차장은 이마를 찌푸렸다.

  "타겠다고 했던 서울행 버스를 안 탔어. 누군가 빼돌리려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정우는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었다. 현직 경찰이 이제 와 양심선언을 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제 와서 퇴직한 다른 사람을 찾는 것도 무리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강 차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찾으러 가야지. 더 깊이 잠수타기 전에 말야."

  재우가 안전밸트를 매자 강 차장은 가속페달을 급하게 밟았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재우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작가의 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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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2016년 3월 21일 2019 / 8 / 22 244 0 6901   
10 10. 2016년 3월 20일② 2019 / 8 / 21 239 0 6070   
9 9. 2016년 3월 20일① 2019 / 8 / 20 250 0 7785   
8 8. 2016년 3월 18일 2019 / 8 / 16 233 0 9050   
7 7. 2016년 3월 15일 2019 / 8 / 15 227 0 11486   
6 6. 2016년 3월 13일 2019 / 8 / 14 233 0 5827   
5 5. 2016년 3월 12일 ② 2019 / 8 / 13 256 0 7370   
4 4. 2016년 3월 12일 ① 2019 / 8 / 9 221 1 9865   
3 3. 2016년 3월 7일 2019 / 8 / 8 256 1 9403   
2 2. 2016년 3월 5일 2019 / 8 / 7 272 0 7961   
1 1. 2016년 2월 29일 2019 / 8 / 7 452 0 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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