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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사라진 가족
작가 : 장군12
작품등록일 : 2019.8.7

14년 전 발생한 일가족 실종 사건을 한 주간지 기자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
서로를 파괴하며 처참하게 무너진 가족의 사연과 경찰이 숨긴 진실의 조각.
사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모든 일을 백일하에 드러내려는 이들의 숨막히는 대결로 치닫는데……

 
8. 2016년 3월 18일
작성일 : 19-08-16 18:12     조회 : 233     추천 : 0     분량 : 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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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6년 3월 18일

 

  재우는 승미에게서 실종 신고 얘기를 들고 바로 형을 찾아가려 했다.

  무엇보다 직접 듣고 싶었다. 아버지는 여러 번 집을 나갔는데 왜 그 때만 실종신고를 했는지, 뭔가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건지, 정말 찾을 생각은 있었는지, 신고 후에 찾으려고 다른 노력은 해 봤는지 등 물어볼 게 한 가득이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형이 제대로 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재우가 왜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였다. 재우가 아버지 실종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형과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심의 대가로 평생 가족과 등을 돌리고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의심이 사실로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형과 어머니를 경찰에 신고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형과 어머니가 더 이상 얼굴을 맞댈 수 없다고 생각해 먼저 자취를 감출 수도 있었다. 과거의 일을 들춰 아슬아슬 유지되던 가족이 완전히 파탄 나는 걸 재우가 감당할 수 있을까.

  마지막 선택은 둘의 대화를 못 들은 척 하고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밀의 일단을 알게 된 재우에게는 이 역시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불면의 밤이 이어지면서 거의 탈진한 상태로 한 주를 버틴 상황이었다.

  일과 중에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있는 일이 잦아졌다. 일에 집중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번 주 마감할 때는 원고지 16매 밖에 안 되는 외고 하나에 오탈자를 세 개나 내서 데스크와 편집자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다. 다음 주 성남 실종 기사가 예정돼 당장 맡은 일이 적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유 편집장이 한 마디 던졌다.

  "재우 씨,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혹시 무슨 일 있나."

  점잖고 말수가 적어 ‘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유 편집장이 보기에도 재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아버지와 관련된 비밀이 이제 일상생활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재우는 필사적으로 궁리한 끝에 하나의 계획을 마련했다. 형과 어머니를 의심한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 동시에 재우의 궁금증에 형이 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형태로. 그러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재우는 머리 속으로 다시 한 번 계획을 점검했다. 정말 이 걸로 될까. 일단은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챙겨 퇴근하려는데 강 차장이 슬쩍 책상으로 다가왔다.

  "별 일 없으면 저녁에 한 잔하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승미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완곡하게 거절하자 살짝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얼굴을 풀었다.

  "다음 주 기사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지?"

  재우는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제보자와 경찰을 중심으로 취재하는 중입니다. 제보를 연결해 주신 덕분에 잘 하면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만 잘 하면 될 텐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재우가 말을 흐리자 강 차장은 킬킬 웃었다.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릴 필요 없잖아. 뭐 도와줄 건 없어?"

  "안 그래도 걸리는 게 있는데…."

  재우는 윗집 부부와 고순희 씨의 증언, 가정폭력 정황과 강은정의 반응 등을 두서없이 설명했다. 그리고 직접 목격한 강은정 딸의 이상한 행동을 덧붙이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마감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이대로 기사를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강 차장이 어깨를 치며 웃었다.

  "이제 제법 기자물이 들었네."

  그러더니 반문했다.

  "내가 왜 이 사건을 자네한테 소개한 줄 알아?"

  재우는 농담조로 답했다.

  "집 나간 형수님 때문 아닌가요."

  그런데 강 차장은 진지했다.

  "한달 쯤 전인가 강은정한테 연락이 왔어. 일단 찾아오라고 하고 내가 예전에 썼던 기사를 찾아 다시 읽었어. 14년 전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했던 거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박 기자는 옛날 기사 읽으면서 아무 것도 못 느꼈나?"

  강 차장은 평소에는 이름을 부르다가 진지한 주제로 넘어가면 재우를 박 기자, 라고 불렀다. 기자 대 기자로서 말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했다. 재우는 강 차장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왔다.

  "예전 수첩을 찾아 메모를 보면서 당시 취재할 때 있었던 일을 복기해 봤어. 역시 경찰의 대응이 좀 이상했더군. 담당 경찰은 사건 초반에 좀 있으면 알아서 들어오겠죠, 하는 반응이었어. 몇 번이나 물어봐도 마찬가지였지.

  보통은 언론에서 취재에 들어가면 수사를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하거든. 그런데 그 때는 내가 취재에 나선 것조차 마뜩치 않아 하는 분위기였어. 기사 썼다가 다음 날 돌아오면 어쩔 거냐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말이야.

  마감시간에 쫓겨 일단 기사를 쓰고 금방 잊어버렸지. 기자들이 항상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당시에도 어렴풋하게 짐작 가는 건 있었어. 이번에 강은정 전화를 받고 나서 아는 경찰 몇 명한테 물어봤더니 내 짐작이 맞았더군."

  강 차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 경찰 내부에는 월드컵 대회가 코앞인데 국내외에 치안이 불안한 걸로 비춰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 지역에 따라서는 아예 지시를 내린 곳도 있다고 하더군. 불필요한 사건화를 자제하라고 말이야.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상당수의 형사들은 제대로 수사를 하기보다 일이 생겨도 가급적 사건화를 시키지 않기 위해 힘을 쏟는 것처럼 보였어.

  가족 전체가 사라진 사건이었어. 범죄라면 전담팀이 꾸려지고 전국적인 이슈가 될 만했지. 물론 동반자살일 가능성도 있었어. 그런데 경찰은 그 역시 사회적으로 만만치 않은 파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월드컵이라는 국민적 축제가 열리기 직전에 ‘빚에 시달리던 가족 일가 자살’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는 거지. 물론 이 대목은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야.

  범죄나 동반자살을 입증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어. 경찰로선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고 싶었을 거야. 승합차를 찾는 데 2주나 걸린 게 이상하지 않아? 혈흔이 나오고도 수사를 제대로 안 했지. 물론 경찰도 할 말은 있을 거야. 하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초동수사를 제대로 안한 게 틀림없는 걸로 보여."

  강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내가 쓴 기사였어. 글에 그런 분위기가 배어 있었지. 다시 보니 눈에 확실히 들어왔어. 미심쩍어하면서 쓴 문장, 주저하면서 수위를 낮춘 표현. 기사가 나온 후 가족들이 돌아와도 문제가 안 되도록 여러 시나리오를 소개했지. 사건이라는 확신이 없는 채 기사를 쓴 거였어.

  주민 코멘트도 ‘화목하던 가정에 왜 이런 일이 생긴지 모르겠다’는 정도였어.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전혀 다루지 않았어. 기억에 없고 취재수첩에도 안 적힌 걸 보면 그 부분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것 같더군."

  강 차장은 재우 어께에 손을 얹었다.

  "내가 그렇게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수사를 제대로 안 하는 경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거야. 가족 전부 혹은 일부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시신으로라도 발견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 진전 없이 세월이 흐르는 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동시에 지금이라도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새로운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는 이상 경찰이 수사를 재개할 가능성은 아마 없다고 봐야겠지. 사람들의 기억도 세월과 함께 희미해졌을 테고 말이야.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사건을 처음 접하는 기자가 낫지 않을까 싶었어. 선입견 없이 하나씩 취재하다 보면 뭔가 새로 드러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박 기자한테 강은정을 소개한 거야."

  재우는 왜 하필이면 나였냐고 묻고 싶었다. 강 차장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건 처음부터 선입견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였어. 박 기자라면 차근차근 사건을 되짚으며 꼼꼼하게 취재할 거라고 생각했어.

  기자 중에도 여러 타입이 있어. 입사하자마자 특종을 물어 와 단독기사를 쓰는 기자도 있고,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칼럼리스트도 있지. 하지만 기본을 지키면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도 뛰어난 기자의 자질이야. 그런 점에서 박 기자는 좋은 기자가 될 소질을 갖추고 있다고 봐. 최근에는 그런 기자들이 점점 줄고 있지만 말이야."

  재우는 일단 잘 봐주셔서 고맙다고 답했다.

 

  "그런데, 방금 떠오른 건데 말이야…."

  강 차장은 잠깐 천장을 보다 말을 이었다.

  "박 기자는 가족 중 누군가 사라지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재우는 순간적으로 아버지 일을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에 흠칫했다. 물론 다음 순간 성남 사건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글쎄요, 재우는 애매하게 말을 흘렸다.

  "이번에 와이프가 집을 나가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 전화를 안 받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처음에 들었어. 그런데 와이프 친구들한테는 연락을 못 하겠더라.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얼마나 못나 보일까 싶어서…. 나중에 돌아온 와이프가 곤란해질 수도 있고 말야. 물론 내 경우엔 이틀 만에 친정에 갔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지만."

  재우는 강 차장의 말을 곱씹었다.

  "강은정 입장에서 보면 실종 사건을 알게 된 후 동생 가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을 거야. 하지만 실종이 공개되면서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전혀 없었을까.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후, 실제로는 범죄도 가출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잠깐 집을 떠났던 걸로 나타난다면, 괜히 가족 일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게 되잖아. 대부업체를 피해 도망친 거라면 오히려 추심을 돕는 결과가 될 수도 있고 말이야.

  다른 가능성도 있지. 실종신고가 된 사실을 알게 된 부부가 사라진 걸로 됐으니 정말 사라져 주마,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은 없었을까. 어쨌든 가족들은 그만큼 막다른 지점에 몰려 있었으니 말이야.

  거기다 박 기자가 짐작하는 대로 부부 사이가 평소에 안 좋았다면 어떨까. 남편 입장에선 형수가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게 유쾌하진 않았을 거야. 극단적인 경우까지 염두에 둔다면 강은정은 남편과 있는 동생의 안전까지 생각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강은정은 사건 직후부터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나서서 경찰과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렸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시점에서 이미 동생이나 동생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건가요."

  그 때 재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언제 와. 승미의 메시지였다. 약속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눈치 빠른 강 차장은 뒤로 물러났다.

  "미안, 너무 오래 붙잡았네. 내 감으론 강은정이 뭔가 더 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여. 그게 사건의 열쇠가 될 만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일주일 남았으니 그 쪽으로 좀 더 취재해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요 며칠 간 자네 표정이 안 좋아서 걱정했어. 취재가 잘 안 되나 싶어서 한 번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듣고 보니 취재는 알아서 잘 진행하는 것 같네. 나도 경찰 쪽으로 몇 가지 알아보고 있으니 막판에 같이 좀 더 달라붙어 보자구."

  재우는 차마 집안일 때문에 요즘 잠을 못 이룬다는 말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우가 정한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에 있는 일본식 꼬치구이 전문점이었다. 승미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아사히 생맥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울 스커트에 흰 니트 차림이었다.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재우는 짐을 챙겨 나오려는데 상사가 말을 거는 바람에 붙잡혀 있었다고 해명했다. 너무 상투적인 핑계라 입장을 바꿔도 믿지 않을 것 같았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승미는 흐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재우는 메뉴판을 보고 꼬치구이 모둠과 아사히 생맥주를 시켰다. 생맥주 한 잔에 8000원인 걸 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잔이 나와 건배를 할 때까지 승미는 말이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재우는 승미가 전화로 알려준 아버지 관련 정보를 떠 올렸다. 승미는 그에게 경찰일까, 친구일까. 아니면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걸까. 스스로도 답을 내지 못한 상태에서 승미에게 모든 걸 털어놓긴 어려웠다.

  "저번에 얘기했던 일가족 실종 사건 말인데…."

  재우는 일단 성남 건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아, 그거."

  승미는 약간 맥 빠진 목소리로 맥주를 들이켰다.

  "취재를 하다 보니 이상한 구석이 좀 있어."

  재우는 지금까지 취재 상황을 설명했다. 승미는 건성으로 듣다가 경찰이 일부러 사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듯 하다는 대목에서 갑자기 열을 냈다.

  "너네 차장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우리 서 사람들도 그래. 다들 어떻게 하면 가산점을 받고 승진할지에만 관심이 있어. 우리끼리 하는 말로 견적이 안 나오는 사건은 뒤로 밀리기 일쑤지. 특히 우리 부서는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업무 시간에 승진 시험 공부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정도야."

  강은정의 딸을 만났다는 대목에도 관심을 보이더니, 닭 날개 꼬치를 발라먹으면서 나름의 추측을 제시했다.

  "사라진 부인의 언니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 그게 뭔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말이야. 딸이 우연히 그 비밀의 일부를 알게 된 건 아닐까."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현직 경찰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설득력이 있네. 결국 나로서는 강은정이나 딸한테 감춰진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거군. 그것도 며칠 안에 말이야."

  승미는 피식 웃었다.

  "설마 딸에게 접근하려는 건 아니지? 억지로 취재하려다가 미성년자 인권 문제가 돼 버릴 수도 있어. 누가 인터넷에라도 올리면 난감해질 걸."

  현직 경찰다운 조언이었다. 재우는 눈치를 보면서 3000원짜리 국산 생맥주를 시켰다. 승미도 머뭇거리다 같은 걸 주문했다. 재우는 대신 메뉴판을 꺼내 먹고 싶은 걸 더 시키라고 했다.

  "오늘은 내가 낼게."

  재우가 선심 쓰듯 말하자 승미가 눈을 흘겼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 말이야."

  재우는 성남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강은정의 입을 열려면 그녀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나 증언을 제시해야 했다. 결국 딸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걸까. 동시에 딸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던 강은정의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현장에는 가 봤어?"

  승미는 새로 나온 맥주잔을 든 채 물었다.

  재우는 부부가 살던 집에 가 봤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문득 현장이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차량이 발견된 강릉 외곽 도로, 남편 최석우가 운영하던 휴대전화 대리점, 부인 강희정이 아이를 보냈던 어린이집…. 마감은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어디까지 취재할 수 있을까.

  "이건 내 추측인데 말야."

  승미는 빈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언니는 아마 일부러 동생 집 근처에 살던 주민들에게 접근해 공짜로 머리를 깎아줬을 거야.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생각지도 못한 추론이었다.

  "예전에 담당한 사건 중에 학원 강사가 여중생을 성폭행한 건이 있었어. 자기 수업을 듣던 학생을 상담해 준다고 따로 불러내 몇 번이나 파렴치한 짓을 한 거지. 그런데 여중생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신고를 했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게 됐고, 성폭행도 중단됐는데 말이야. 왜 더 일찍 신고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뭐라고 했을 것 같아?"

  재우는 침묵했다.

  "고등학교 때도 그 학원에 다니면서 복도에서 가끔 강사하고 스쳤다는 거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옛날 생각이 났대. 몇 개월에 한 번 정도였고, 딱히 대화를 한 것도 아니지만 신고 의지를 없애긴 충분했던 거야. 몇 번 학원을 옮기려 했는데, 그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강사가 찾아와 주변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했대. 범죄가 밝혀지는 걸 막기 위해 계속 옆에 두려 했던 거지.

  이번 사건에서 언니가 숨기고 있는 게 있고, 그게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는 거라면 어떨까. 언니 입장에선 관계된 이들을 계속 옆에 두고 감시하고 싶지 않았을까. 머리를 공짜로 잘라준다는 핑계로 말이야.

  혹시 모르지. 참 화목한 가정이었죠, 이런 식으로 계속 말을 걸면서 세뇌를 시켰는지도. 십여 년 동안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정말 그랬나 싶게 될 걸.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건지 너도 수사를 해 보면 금방 알게 될 텐데…."

  재우는 강은정을 미용실댁이라고 보르며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고순희의 얼굴을 떠 올렸다. 동시에 윗집 노부부의 단정한 머리 스타일이 생각났다. 그들 역시 머리를 강은정에게 맡기고 있을까. 14년 동안이나 돈을 안 받고 머리를 깎아준 배경에 있는 건 선의일까, 악의일까. 재우는 현기증이 났다.

  "그건 그렇고, 이번 취재는 꽤 열심이네."

  승미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라면서 웃었다. 재우는 대답 없이 잔을 들었다.

  재우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아버지 실종을 성남 사건에 투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이고, 하나의 기사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점점 거리감이 사라졌다.

  아버지 실종에 대한 의문과 불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 성남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만큼은 이런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한편으론 이번 기사가 아버지 실종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물론 이는 재우가 밤을 새며 필사적으로 세운 계획이 잘 진행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소주도 시키자. 맥주만 마시니 싱거워서 안 되겠네."

  승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재우의 주머니 사정을 배려한 것 같았다. 못 이기는 척 소주를 시키고 어묵탕을 추가했다.

  "형이랑은 얘기를 잘 했고?"

  승미는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재우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다음주 쯤 하려고. 급한 건 아니니까. 이번 주에는 취재 때문에 바빴어."

  평소와 같은 어투로 들리길 바라면서 재우가 말했다. 차마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는 돌린 채였다.

  "그래, 한참 전 일이니까. 지금 와서 급할 건 없지."

  승미는 의외로 선선히 넘어갔다. 물론 재우의 말을 모두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재우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소주를 맥주에 탔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잔을 내밀었다.

 

 
작가의 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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