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레이는 그렇게 약한 녀석이 아니예요.”
“저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기 때문에 어쩌면 당신의 눈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머니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 애는 종종 선함과 약함을 혼동하곤 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엘은 레이가 나쁜 길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어떤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이후 제니와 엘은 루아에게서 식사를 대접받았다. 조금은 거칠었지만 좋은 음식들. 순록 스튜와 절인 채소, 검고 둥근 빵이었다.
"겨울눈 시에 나가면 더 좋은 음식을 드실 수 있을 텐데. 누추해서 죄송하군요."
"뭘요. 아주 맛있는데요."
제니는 엘의 우주선에 있던 건조 식량을 조금 입에 댔던 것 외에 베르드흘린 바깥의 음식을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흥분해 있었고, 음식이 매우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눈을 빛내며 그릇을 닥닥 긁어대는 제니는 처음으로 그 나이 또래 같아 보였다.
잠시 후, 제니는 배를 충분히 채웠는지 그릇에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겨울눈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차를 타면 세 시간 정도 걸리죠. 두 분은 엔 아이츠로 가실거죠? 그럼 일단 겨울눈으로 나가셔야 겠군요."
그리고 루아는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다가 말했다.
"내일 마을의 필요한 물자를 실러 갈 트럭이 출발할 거예요. 거기에 두 분이 같이 타고 나가시면 되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루아는 웃으며 부정했다.
“레이의 친구분께 이 정도 대접도 안 해드릴 수야 있겠나요.”
그날 엘과 제니는 루아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되었다. 제니는 오늘 하루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지만 엘은 도통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몇 년씩이나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음에도 그랬다. 엘에게는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실 엘의 생애가 그리 평탄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이 들기도 전에 유일한 혈육을 잃었고, 뒷골목에서 몇 년이나 방황했다. 그러다 노튼 가주에게 사실상 입양되어 기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야말로 신이 도왔다고 해야 할 천운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동공에서 만난 기계 인간의 목소리도 다시금 떠올랐다. 내 인생이 모두 정해진 것이었다고? 그 모든 일들이, 엘이 후회하고 감사했던 그 모든 생애가 모두 정해진 대로만 일어난 일이었다고?
아니, 엘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삶은 선물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사한 환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오롯이 엘의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놀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기억을 잃기 직전 들렸던 목소리. 아니, 들린 게 아니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었지만.
‘제가 받겠어요. 저주도, 희생도, 죽음도. 모두 제가 가지겠어요. 이게 제가 동생을 구하는 방법이에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올레, 엘의 누나였다.
다음날, 트럭 출발 시각에 맞추기 위해 엘과 제니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엘은 어젯밤 잠을 설치는 바람에 다소 늦잠을 자버려, 제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빨리 일어나요! 갈 길이 먼데 언제까지 잠이나 잘 거야! 기사라면서 뭐 이런 게으름뱅이가 다 있어?”
“......”
십 년 가까이 늦잠을 자본 적이 한 손에 꼽을 만한 엘은 엄청나게 억울했지만 실제로 늦잠을 자버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대충 얼굴을 씻고 나오니 루아가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 놓고 있었다. 엘과 제니는 감사히 식사를 한 뒤 떠날 채비를 마쳤다. 대부분의 짐이 추락한 우주선에 있어서 따로 챙길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 여행길 평안하시길 빌겠습니다. 별의 여행자분들.”
엘과 제니도 루아에게 진심을 담은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마을 입구에는 루아가 말한 대로 트럭 한 대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이 촌장님이 말씀하신 그 손님들이군. 자, 어서 타시오. 좀 좁을까봐 걱정이구만.”
그 말대로 트럭 안은 제법 비좁았다.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동하는 도중 제니가 종종 불편에 찬 신음을 내었지만 별수 없었다.
루아의 말대로 트럭은 세 시간쯤 후에 겨울눈에 도착했다. 기사는 엘과 제니에게 인사한 뒤 자기 일을 하러 트럭을 몰고 사라졌다. 엘은 잠시 가만히 서서 겨울눈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인 도시였다.
도시에도 눈이 함박 쌓여 있었다. 엔지비크 최대의 대도시임에도 모르노르 같은 행성과 비교하자면 제법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그러한 웅장함과는 다른 고즈넉한 느낌이 분명 있었다. 눈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포근해 보인다고 할까.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되죠?”
“물론 우주선을 사러 가야지. 5년 할부로 산 내 우주선이 박살나버렸으니까 말이야.”
“돈은 있어요?”
엘이 손목에 찬 암밴드를 흔들었다. 통신, 신분 증명, 결제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기였다.
“이래봬도 기사단 저축왕이었지.”
“오오, 그럼 번쩍번쩍한 새 우주선 살 수 있는 거예요?”
“꿈 깨라. 기사단 월급이 얼마나 박봉인데. 앞으로 엔 아이츠까지 갈 여비 생각하면 적당한 장물이나 알아봐야 돼.”
“뭐라고요? 그거 범죄 아녜요?”
“지금 상황에 찬 밥 더운 밥 따질 때가 아니야. 언제 또 추격대가 올지도 모르는데 우주선 하나 없이 어떻게 도망치겠어?”
그래도 제니는 영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엘은 아까 이미 트럭 기사에게 물어본 정보를 토대로 겨울눈의 음습한 뒷골목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얼마 후, 둘은 꽤 스산해 보이는 고물상 비슷한 가게 앞에 섰다. 제니가 다소 겁을 냈지만 엘이 머리를 쓰다듬어 안심시켜 주었다. 엘이 가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험상궂게 생긴 남자 하나가 나왔다.
“뭐요?”
“우주선 하나 찾고 있습니다만, 싸고, 빠르고, 별 탈 없는 물건으로.”
“바라는 거 많으시군. 이런 데 올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물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엘과 제니를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나오자 꽤 넓은 공터가 나왔다. 남자는 여러 고물들을 지나쳐 한 우주선 앞에 섰다.
“이 놈은 어떻소? 얼마 전 해적들이 팔고 간 물건이오.”
“해적이요? 출처가 좀 미심쩍은데요.”
“먹어도 별 탈 없소. 해적끼리 다투는 사이에 콩고물로 떨어진 것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거니까. 기종도 공화국 표준이라 어디 가서 눈에 띌 리도 없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