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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별의 여행자
작가 : 아쿠아맨
작품등록일 : 2019.8.16

많은 상처를 품고 공화국의 기사가 된 엘 나이트리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뜻하지 않게 기사단 내부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세력을 직감한다.
그들의 음모를 추적하는 엘은 여태껏 몰랐던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는데...

 
1. 천 년 전 죽은 별에 새겨진 이름
작성일 : 19-08-16 15:37     조회 : 312     추천 : 0     분량 : 1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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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공화국력 126년.

 

 운명 기사단 생도 엘 나이트리버는 기사 서임을 앞두고 제법 긴 휴가를 받게 되었다. 휴가를 받는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고된 훈련에 지친 생도들에겐 서임을 받는 게 확정되고 휴가를 받으면 뭘 할지 떠드는 건 주된 일상 중 하나였다. 어떤 녀석은 바르드 같이 놀기 좋은 행성으로 놀러간다고 하기도 했고, 어떤 녀석은 기사 서임이 확정되면 어떤 여자든 바로 꼬실 수 있다며 망상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엘은 그런 이야기를 수천 번을 들어왔어도 막상 눈앞으로 닥치자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유로운 시간이란 엘의 인생에서 정말 낯선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 긴 휴가를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기숙사 의자를 앉은 채 마구 돌리며 고민하다 엘은 그만 중심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엘의 룸메이트이자 같이 기사가 될 동기인 레이 프로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야?”

 

 엘은 쓰러진 채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넌 집안도 좋으니 고민할 것도 없겠지. 어디 볕 좋고 사람도 별로 없는 행성 해변으로 놀러갔다 오면 되잖아.”

 

 “너도 그러면 되잖아, 멍청아. 저도 좋은 가문한테 후원받으면서 학교 다녔으면서 뭘.”

 

 “너 같으면 빌붙어 먹는 처지에 제가 저기 우주 끝에서 두 달 반 동안 놀고먹고 오겠으니 한 500만 다르쯤 주십시오, 하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겠냐?”

 

 “글쎄 뭐, 나 같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긴 하다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내가 지금 친구한테 너 놀러 가면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돌려 말하고 있는 걸 좀 알아채봐.”

 

 엘은 여전히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다정히 자른 밝은 은발과 마치 맹수 같은 금색 눈동자를 가진 레이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머리도 눈도 모두 새까만 엘과 자주 다니는 바람에 둘에게 쿠키 앤 크림이라는 별명이 붙은 적도 있었다.

 

 레이는 자기 휴대전화로 홀로그램 공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튕기던 공을 놓쳐 기록 경신에 실패하자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겐 못 해. 난 어머니 보러 갈 거거든.”

 

 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어머니랑 같이 안 사는 거야? 그런 얘기는 한 적 없잖아?”

 

 “그랬던가? 뭐,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 아무튼 어머니 못 본지 오래됐어. 지금 아니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 싶어서.”

 

 엘은 얼마간 레이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다시 뒤로 푹 고꾸라졌다. 믿었던 친구 놈까지 저러니 정말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꼭 그 기간 동안 뭔가를 해야겠냐? 그냥 노튼 저택에서 좀 쉬다 와도 되잖아? 여유롭게 독서를 하든, 영화를 보든, 넌 너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어차피 이제 서임 받으면 퇴역할 때까지 몇 년은 구를 텐데 좀 쉰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것도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레이의 말이 맞았다. 휴식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기사라는 목표에 매달려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그만큼 엘의 삶은 치열했고 도태되지 않으려는 투쟁이었다.

 

 “아니면 네 여자친구라도 보러 가. 칼리아 대학에서 공부 중이랬나?”

 

 “여자친구 아니라니까.”

 

 레이는 다시 공놀이 게임을 시작하며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그럼 이번에 그렇게 만들면 되겠네.”

 

 

 

 그 말이 맞든 틀리든, 아무튼 엘이 졸업 준비를 모두 끝내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마야가 있는 칼리아였다. 테라 공화국에서는 수도성 모르노르 다음으로 번화한 행성으로, 칼리아 대학 역시 공화국에서 크고 작게 이름을 날리는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학생들이 공부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는지 만년설이 보일 정도로 높은 산 위에 지어졌지만, 오히려 그 끝내주는 경치 때문에 관광지가 되어버려 수많은 건물과 상가들이 들어선 후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엘은 혼자서 우주선을 몰고 차원문을 통과한 뒤 행성 궤도로 진입했다. 칼리아 대학이 있는 팔크 산은 본래 모노레일로 오르내려야 했지만 엘은 개인 우주선을 바로 몰고 갈 수 있었다. 아직 서임을 받기 전이었지만 졸업이 확정되어 기사 신분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산을 올라가려고 대기만 두 시간을 했던 기억이 있는 엘은 그런 특권에 감격하며 격납고를 찾아 아래로 내려갔다. 구름이 걷히며 칼리아 대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능선을 깎지 않고 그 위에 그대로 건설된 대학은 현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유적지 같은 모습이었다. 높이 솟은 태양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고 학생들을 실어 나르는 드론들이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격납고에 우주선을 넣고 다시 밖으로 나온 엘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올 때마다 경탄할 정도로 멋진 풍경이었다. 학생들을 이런 곳에 가둬 두면 공부에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한 설립자들이 판단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약속 시각까지 두 시간. 적당한 때 도착하였다. 엘은 기지개를 크게 켠 뒤 약속 장소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지나서 카페 안으로 쿵쾅대며 들어온 마야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도 겸하고 있는 카페였기 때문에 오자마자 맥주 한잔을 시키더니 죽 들이켰다. 놀란 엘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별일 아니라고 대답했다.

 

 “누가봐도 별일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그냥 좀 알아들어!”

 

 그리고 마야는 입술을 비죽이며 맥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야는 포장된 꾸러미를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졸업 선물.”

 

 “오, 웬일로 이런 걸 다. 풀어 봐도 돼?”

 

 “아... 아니. 나중에 풀어봐.”

 

 하지만 엘은 마야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꾸러미를 풀어헤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울컥한 마야는 엘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주인이 풀어보지도 못하냐!”

 

 “나 없는 데서 보라고!”

 

 “대체 왜!”

 

 “편지 썼단 말이야!”

 

 “그게 뭐가!”

 

 “부끄럽다고! 꼭 내 입으로 말하게 해야겠냐?”

 

 “이게 부끄러워하는 사람 태도냐!”

 

 마야는 엘에게 눈을 흘기고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엘은 일단 선물을 가방에 넣고 마야를 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마야는 다시 입술을 비죽였다.

 

 “아빠랑 싸웠어.”

 

 “아저씨랑? 무슨 일로?”

 

 “나보고 졸업하면 생추어리로 가라잖아.”

 

 엘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반문했다.

 

 “왜? 좋은 기회 아냐? 너 어차피 졸업하면 외교 쪽으로 갈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건 테라 연합 쪽 이야기지. 생추어리로 가라는 건 아라니라 연합을 상대하라는 거잖아.”

 

 “음... 그걸 그렇게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는 건가? 거기엔 온갖 종족들이 다 있잖아. 결국 테라(인간)대표로 다른 종족들을 상대하는 거 아냐? 거기서 경험 쌓고 나오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거기다 신도시잖아. 나라면 좋다고 얼른 가겠다.”

 

 “넌 기사라면서 생각이 그렇게 없니? 언론에선 평화의 행성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 서로 빈틈만 노리고 있는 두 연합이란 말이야. 그리고 생추어리로 한 번 가면 다시 나오기가 쉬운 줄 알아? 늙어 죽을 때까지 거기서 일하고 결혼도 거기서 해야 될걸. 넌 내가 늑대인간하고 결혼하는 꼴을 보고 싶냐?”

 

 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잘 생각해봐. 솔직히 난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너나 아빠나 똑같아.”

 

 “그야 너네 아빠가 내 스승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엘은 무심코 자신의 옷자락 안쪽에 찬 물건을 더듬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짧은 검이었다. 엘이 가장 오랫동안 수련해왔고 가장 자신있게 다룰 수 있는 무기였다.

 

 앨런 노튼 가주는 엘에게 은인이었다. 길거리를 떠돌던 엘을 거둬 마야와 함께 자라게 해준 것은 물론 엘이 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후원까지 해주고, 노튼 가문 전통의 검술까지 가르쳐주었다.

 

 “너한테 상담한 내가 바보지.”

 

 마야가 술을 다 마신 후 둘은 밖으로 나왔다. 슬슬 어스름이 지자 상점 간판들에는 하나둘씩 불이 켜졌고 놀거리를 찾아 나온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마야는 술을 마셔서인지, 그래도 울분을 어느 정도 입 밖으로 내뱉어서인지 조금은 진정된 모습이었다. 눈치를 보던 엘은 넌지시 말했다.

 

 “이제 선물 풀어 봐도 돼?”

 

 “나 없는 데서 풀란 말 어디로 들었어?”

 

 하지만 엘이 계속 눈빛으로 조르자 마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 저 집 크레페 맛있거든? 하나 사오면 허락해줄게.”

 

 “...내 선물 내가 푸는데 돈까지 써야 되는 거야?”

 

 “싫으면 말아라.”

 

 “알았어, 알았어. 사오면 되잖아.”

 

 엘이 투덜거리며 ‘데퐁 파이’라고 적힌 가게로 걸어 들어갔다. 맛있다는 말은 정말인지 사람이 꽤 많아 조금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엘은 양손에 크레페 하나씩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마야가 없었다.

 

 “마야?”

 

 이상했다. 슬슬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각이긴 했지만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한 명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엘에게 심부름을 시켜놓고 마야가 다른 곳으로 갔을 리도 없었다. 그때 엘의 몸을 어떤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직감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의 눈에 뭔가가 포착됐다. 작은 골목 깊은 곳에 세워진 검은 자동차의 문이 거칠게 닫히고, 그러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엘은 분명히 축 늘어진 마야의 모습을 보았다.

 

 검은 차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엘을 지나쳐 갔다.

 

 “젠장!”

 

 누가, 어떤 이유로 마야를 납치한 건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엘은 미친 듯이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적당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에게 새로 산 재규어 호버바이크를 자랑하고 있던 대학생이었다. 엘은 곧장 들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고 대학생들을 모두 밀쳐버린 뒤 바이크에 올라탔다. 동체가 부드럽게 떠오르더니 앞으로 돌진했다. 평소라면 충분히 빠른 속도였지만 지금은 한참 모자랐다. 마야를 납치한 검은 차와의 거리는 이미 한참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엘이 쫓는 것을 눈치 챘는지 속도를 더 올리기까지 했다. 엘도 이를 악물며 한계까지 속도를 올렸다.

 

 기체 자체의 속도는 엘이 탄 바이크가 빨랐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음으로 직결되는 엘과는 달리 검은 차는 어지간한 장애물은 그냥 날려버릴 수가 있었다. 호버바이크였기에 길가에 튀어나온 돌부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가로등이며, 길가에 세워진 가판대며 피해야 할 것은 천지였다. 조금 후 상가 거리를 벗어나 넓은 도로로 나온 덕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다. 그런데 갑자기 앞서가는 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남자 하나가 상체를 드러냈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뭔지 깨달은 엘은 황급히 핸들을 돌려 경로를 바꿨다. 소총탄이 날아와 방금 전까지 엘이 있던 곳을 휩쓸었다. 엘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나마 사람이 별로 없는 한산한 거리여서 다행이었다. 엘은 초인적인 집중을 해야 했다. 총탄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 않도록 적당히 표적이 되어 주는 동시에 자신도 맞으면 안 되는 곡예에 가까운 주행을 해야 했던 것이다.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대학이었기 때문에 포장된 도로는 금방 끝났다. 앞쪽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그걸 본 엘은 이제 납치범들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상했다. 차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던 것이다. 인질과 함께 자살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멈춰야 하는데, 차는 방향을 바꾸지도 않고 그대로 달려나갈 뿐이었다.

 

 그 순간, 낭떠러지 밑에서 커다란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우주선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올빼미급 수송선이었다. 검은 자동차는 그대로 낭떠러지 끝에서 뛰어올랐고, 우주선의 열린 입구로 들어가 결합되었다. 엘은 아연해졌다. 저건 국가전력급 기술력이 아닌가?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우주선이 출발하고 있었다. 본래 이런 추격전에 어울리는 모델이 아닌 바이크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낭떠러지 바로 앞. 엘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우주선으로 돌진했다.

 

 바이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기회는 한 번이었다. 엘은 공중에서 자세를 바꿔 바이크 안장에 두 발을 딛고 올라섰다. 그리고 우주선과 가장 가까워졌을 때, 힘껏 도약했다.

 

 탁!

 

 엘은 추진기 근처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우주선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바람에 추진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엘은 통구이가 되는 건 가까스로 면했지만 그 바람에 우주선을 붙잡은 한손을 놓치고 위태롭게 매달렸다.

 

 우주선은 상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뚝 떨어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하강하여 협곡 사이로 낮고 느리게 날았다. 협곡 안에 채워진 물 위를 스칠 정도였다. 우주선이 지나간 곳에 물보라가 튀었다. 눈에 띄는 걸 피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안전한 곳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면 곧장 대기권을 벗어날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아직 적들은 엘이 우주선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큰 이점인 것 같지 않았다. 적들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그 누구도 엘이 여기 있었다는 걸 모르게 되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우주선 기체는 물을 맞아 미끈거렸고, 손은 자꾸만 미끄러지려는 중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한 덕에 엘은 간신히 기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제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엘은 기사학교에서 수많은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지만 지금 가진 무기라고는 두 자루 검뿐이었다. 점착 폭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엘은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을 빠르게 살폈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홈이 있었다. 비상용 탈출구였다. 엘은 허리춤에서 검 두 자루를 뽑아 틈새에 밀어 넣었다. 이윽고 틈 안에서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엘이 찾던 거였다.

 

 엘은 검 두 개를 한 번에 다시 뽑고, 찾아낸 위치에 그대로 한 번에 꽂아 넣었다. 뭔가가 팍,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은 그대로 검을 지렛대처럼 써서 힘을 주었다. 문은 손쉽게 열렸다.

 

 선내로 들어오자 바로 앞에 철문이 하나 있었다. 엘은 심호흡을 한 뒤 곧장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무장한 남자 두 명이 있었다. 둘은 뒤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자 놀라 주춤거렸다. 엘은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왼쪽에 있는 남자의 목을 긋고, 곧장 반대편에 선 남자에게 달려들어 때려눕힌 뒤 가슴을 찔렀다.

 

 그때 총성이 울리더니 엘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엘은 쓰러지며 한 바퀴 굴러 의자 뒤로 들어가 엄폐했다. 곧 총성은 멈췄다. 선내에서 마음대로 총을 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 건 엘에게 불리했다. 남자는 엘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쏴버리면 되는 입장이었고, 어깨에 총알이 박힌 건 엘이었다.

 

 결단은 빨랐다. 엘은 의자 뒤에서 미끄러져 나오며 쓰러진 남자의 몸을 들쳐 업었다. 적이 쏘는 총알이 죽은 남자의 몸에 박혔다. 그대로 엘은 뒤로 걸어 적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가까워지자 남자의 시체를 힘껏 던졌다. 총을 든 남자가 고꾸라졌다. 엘은 빠르게 남자의 총을 걷어차 버리고 남자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리고 총을 맞지 않은 쪽 팔로 남자의 배를 두 번 찔렀다. 남자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더 이상 무장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엘은 어깨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선내를 둘러보았다. 앞쪽 구석에 마야가 입이 막히고 손발이 묶인 채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종사가 앉아 있었다. 엘은 당장 마야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조종사가 자동항법 모드로 변경한 후 일어서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은 당장 조종석으로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된 한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지만, 다른 팔로 조종사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조종사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엘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띄엄띄엄 말했다.

 

 “계속 나는 게 좋을 거야. 마음 같아선 당장 죽이고 싶지만, 네놈들이 뭐하는 녀석들인지 알아내야겠어.”

 

 조종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였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우주선 방향을 홱 꺾어버린 것이다. 우주선이 향한 곳은 협곡에 정면으로 들이받는 방향이었다. 급선회 탓에 엘과 마야는 우주선 벽까지 굴러가버렸다.

 

 “이 미친놈이! 다 죽자는 거냐!”

 

 대답은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엘은 마야에게 다가가 결박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간신히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사실 몸 상태로 보면 부축을 받아야 할 것은 오히려 엘이었지만 겁에 질린 마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주선이 협곡에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엘은 미친 듯이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레버가 잡혔고 잡아당기자 벽이 덜컹대며 열렸다. 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야를 안은 채 뛰어내렸다.

 

 물은 깊었다. 수면 위에서 우주선이 폭발하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의식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마야가 품에 안겨 있었다. 엘은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마야를 끌고 올라갔다.

 

 하지만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정신은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엘은 마야를 안고 있지 않았다. 그 반대가 되었다. 엘을 끌어 올리는 것도 마야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수면 위로 솟구쳤다. 마야는 가장 먼저 자신의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엘! 정신 차려! 엘!”

 

 마야는 엘을 흔들어 깨우려다가 포기하고 일단 가까운 바위를 향해 엘을 붙들고 헤엄쳐갔다. 엄청난 노력 끝에 마야는 엘을 바위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엘은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새어나왔다.

 

 “정신 차려! 엘! 제발, 제발... 네 누나한테 약속했잖아.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엘!”

 

 하지만 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첫 번째 기억은 불이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불길이 걷히고 나서야 엘은 앞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엘과 이올레를 폭행하던 소년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황급히 도망갔다. 엘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몸과 생각이 멈춰버렸다. 세상이 멈췄다.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쓰러진 이올레에게 다가가기 전에, 죽음보다 무서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우주가 멸망했으면 했다. 머릿속에선 그만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엘은 덜덜 떨면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 이올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엘은 이올레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은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엘은 한 번 더 시도해보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올레의 손은 엘의 손을 마주 잡지 못했다.

 

 이럴 일이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시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밀쳐진 이올레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 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두꺼운 이불 위로 드러난 손 위로 차디찬 바람이 스쳐갔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바람이 깨우기라도 한 듯 손가락 하나가 움찔, 움직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이 젖혔다. 밝은 조명이 켜지듯 눈동자에도 빛이 돌아왔다. 이윽고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은 방금 연 것으로 보이는 창문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흰 커튼이 펄럭였다.

 

 엘은 천천히 깨달았다. 나는 병원에 있는 모양이군. 그러자마자 모든 것이 떠올랐다. 마야가 납치당한 일, 그 직후 벌어진 추격전, 그리고 그 결과까지.

 

 “엘?”

 

 엘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침대 바로 옆에 마야가 앉아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는 것과 동시에 마야가 안겨왔다.

 

 “돌아왔구나.”

 

 마야의 모습은 항상 말끔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초췌했다. 언제나 풍기던 라벤더 향수 대신 땀과 먼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엘은 마야를 마주 꽉 안았다.

 

 아주 길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보다는 짧았을지도 모르지만. 포옹이 끝나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는 어깨에서 짧게 잘려 나풀대고 있었다. 눈동자도 머리처럼 새까맸고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다. 그것만은 엘과 똑같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둘은 남매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듣고 자라곤 했었다.

 

 열두 살에 처음 만났고,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언제나 곁에 있어 준,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여자.

 

 “엘.”

 

 마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엘은 자신이 자고 있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마야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미 장례가 끝났어.”

 

 마야는 담담한 표정으로 씹어 뱉듯 말했다.

 

 “사고사. 탈론 대사관에 방문하고 돌아오는 중에.”

 

 무릎에 얹힌 마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 납치랑 아빠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불가능해. 살해당한 거야.”

 

 마야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울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엘은 손을 뻗어 마야의 머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마야는 엘의 가슴에 안긴 형국이 되었다. 마야의 어깨가 들썩이다 진정되기를 반복했다. 울음을 참는 거였다. 하지만 결국 마야는 무너졌다. 마야의 눈물로 엘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마야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새빨개지고 얼굴이 엉망이 됐지만 더 이상 억지로 울음을 참는 얼굴은 아니었다. 대신 결연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 생추어리로 갈 거야.”

 

 엘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앨런 가주는 생추어리의 특별 대사였다. 마야를 생추어리로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가주의 죽음을 파헤치려면 그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마야. 그건... 너무 위험해.”

 

 “다른 방법이 없어. 그곳에서 시작하는 수밖엔.”

 

 “정말로 너와 아저씨를 노린 녀석들이 한패라면... 생추어리로 가는 건 그놈들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야.”

 

 “그래. 바로 그거야.”

 

 마야는 대뜸 외쳤다.

 

 “숨지 않겠어. 녀석들 앞에서 말할 거야. 나는 여기 있으니 나오라고! 날 해칠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엘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저랬던 적이 있었다. 누나를 잃은 후, 누나를 죽인 거지들에게 복수하겠다며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복수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선 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의 마야를 말릴 수도 없었다.

 

 “똑똑히 보여주겠어. 노튼을 우습게 본 대가가 무엇인지.”

 

 

 

 마야가 떠났다. 혼자 남은 엘은 그제야 자기 머리맡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다.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손바닥만한 꾸러미. 마야의 선물이었다. 엘은 꾸러미를 풀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칼리아 대학의 작은 카페에서 이 꾸러미를 건네받은 일이 전생의 일인 듯 아득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엘의 은인인 앨런 가주가 세상을 떠났고, 까칠하지만 정이 많은 마야는 변해버렸다. 사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도, 세상도. 하지만 이제 보니 완벽히 정체된 건 엘 뿐인 것 같았다.

 

 엘의 손이 움직였다. 꾸러미를 스르륵 풀어냈다. 안에선 멋들어진 사각형 케이스가 나왔다. 기사 서임을 받을 때 수여받을 배지가 들어가면 딱 맞을 크기였다. 이 정도면 규정을 어기지도 않고, 휴대하기도 편할 것이다. 또 엘의 관심 밖이긴 했지만 상당히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모양이었다. 정말로 고심한 끝에 고른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꾸러미 안을 좀 더 보자 구겨진 종이가 나왔다. 펼쳐들었다. 편지는 짧았다. 하지만 엘은 아주 오래 읽어 내려갔다.

 

 괜시리 머리가 아파왔다. 엘은 양손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어둠속에서 별이 번쩍였다. 입술이 달싹이며 속삭이듯 누군가를 불렀다.

 

 “누나.”

 

 후회이자 원죄인 이름이었다.

 

 “나, 잘하고 있는 것 맞지?”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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