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사라진 가족
작가 : 장군12
작품등록일 : 2019.8.7

14년 전 발생한 일가족 실종 사건을 한 주간지 기자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
서로를 파괴하며 처참하게 무너진 가족의 사연과 경찰이 숨긴 진실의 조각.
사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모든 일을 백일하에 드러내려는 이들의 숨막히는 대결로 치닫는데……

 
7. 2016년 3월 15일
작성일 : 19-08-15 18:21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11486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7. 2016년 3월 15일

 

  재우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전화기 진동소리가 들렸다. 마침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이불을 뒤적이며 휴대전화를 찾는데 관자놀이에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 생긴 두통이었다.

  사흘 전 어머니와 형의 대화를 들은 후부터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누우면 머리 속에 물음표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재우는 아버지의 생존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꿈에 자꾸 아버지가 나온다는 어머니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고, 어머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런 짓’이란 뭘 말하는 걸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걸까. 그렇다면 사인은 무엇일까. 사고일까, 자살일까. 어디서 교통사고라도 당한 걸까. 아니면 술을 마시고 결국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린 걸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을 막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와 형은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사건은 언제 발생했을까. 재우가 상병휴가를 나와 아버지의 부재를 알게 됐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던 걸까. 당시 재우는 최전방에서 실탄을 다루는 부대에 있었다. 혹한기 훈련을 할 때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어머니와 형은 당시 재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싶어 말하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대하고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어머니와 형이 짜고 아버지를 어떻게 해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공범자끼리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무수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재우가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재우는 낯선 외국어로 된 시험지를 받아든 수험생의 심정이었다. 밤을 새며 수없이 원점으로 돌아온 후에야 새벽에 간신히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저절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나마 네 시간 정도 눈을 붙인 셈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이승미’라는 이름이 보였다. 재우는 몸을 돌려 누운 채로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자고 있었던 모양이네."

  "괜찮아, 안 그래도 일어나려고 했어."

  "그랬구나. 다른 게 아니라 일요일에 말한 걸 좀 알아봤는데…."

  승미는 그녀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재우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마음의 각오는 돼 있었다.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면 너희 아버지는 이미 실종신고가 돼 있어."

  재우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신고 날짜는 2008년 1월 23일이야. 아들이 실종신고를 했는데 이름은 박재석, 너희 형인 모양이지? 당시 이유 없이 집을 나가서 일주일째 안 들어온다고 말한 걸로 나와 있어. 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얘기를 안 한 모양이네."

  재우는 손을 뻗어 볼펜을 찾았다. 그리고 승미가 말한 날짜를 메모했다. 재우가 상병휴가를 나오기 이 주 전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한 달 전에 집을 나갔다고 말한 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었던 때라 몰랐어." 재우는 솔직히 말했다.

  "아마 형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찾아드리려고 했던 거 같네."

  이어 반사적으로 둘러댔다. 어쨌든 상대는 경찰이었다.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들었다.

  "근데 신고에는 일주일 전에 사라진 걸로 돼 있던데…. 대학 들어간 후에는 한 번도 못 봤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렇게 말해야 경찰에서 접수를 받아주니까 그랬겠지."

  재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승미는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가? 어쨌든 그 때 실종 신고한 걸로 돼 있는데 찾았다는 기록은 없어. 원래 성인 실종이라는 게 가출이 대부분이라 수사를 잘 안 하긴 해."

  재우는 안양서 정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한 해 성인 실종자가 6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95%는 며칠 후 아무 일 없이 돌아온다고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20명 중 1 명은 안 돌아온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한 해 3000명이 아버지처럼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박재우, 듣고 있는 거지?"

  승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신원을 조회해 봤는데, 어쨌든 지금도 부천 어머니 집에 같이 사시는 걸로 돼 있어. 다른 곳에서 주민등록을 안 했다는 얘기지.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알아본 건데…."

  재우는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손에 힘을 줬다.

  "실은 이동통신사 쪽으로 좀 알아봤어. 그런데 휴대전화 번호가 안 나와. 너희 아버지 주민번호로 가입된 휴대전화가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승미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가능성은 여러 가지야. 휴대전화를 아예 안 쓰고 사실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계실 수도 있고…."

  재우는 생략된 말을 입에 올렸다.

  "아니면 신변에 이상이 생겼거나, 그 말이지?"

  "그걸 누가 알겠어."

  승미는 곤란한 듯 얼버무렸다.

  재우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알아봐줘서 고마워. 형한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게."

  승미는 한 가지만 더, 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 거야. 실종신고를 하고 5년이 지나면 실종선고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어. 쉽게 말하면 법원에서 실종자를 사망자로 공식 인정하는 거야. 물론 나도 너희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찾기 어렵고, 상속 같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면 실종선고를 받아 해결할 수도 있다는 얘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재우는 승미가 처음부터 자신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재우에게 같은 얘기를 했다면 그 역시 의심부터 했을 터였다. 설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것저것 알아봐 준 건 호감의 표시일까. 재우는 다시 고맙다고 말하고 통화를 끝냈다

  기자와 경찰은 사실 끝없이 누군가를 의심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다보면 친구나 가족도 믿지 못하게 되는 걸까. 어머니와 형을 과도하게 의심하는 것 역시 직업병의 발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에 내린 재우는 역 근처 제과점에 들렀다가 마을버스를 탔다. 찌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했다.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 했으니 비가 아니라 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복지회관 앞 정류장에 내려 골목에 들어서자 경사로를 따라 지어진 다세대 주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을 100m 정도 내려오자 모퉁이에 있는 3층짜리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름모 모양의 협소한 부지에 간신히 지어진 기형적인 건물이었다. 면적을 보니 층마다 방 한 칸 들어가는 게 고작일 듯 했다. 강은정이 소개해 준 고순희 씨는 이 건물 2층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집은 여섯 평 정도의 원룸이었다. 고 씨는 8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허리가 굽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다. 갈색 누빔바지에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보라색 털조끼를 입은 채 재우를 맞았다.

  "기자 양반, 날도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 얼른 들어와요."

  재우는 굽은 등을 바라보며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예의를 표했다. 이어 들고 온 카스테라를 내밀었다. 권하는 대로 바닥에 앉자 고 씨가 부엌에서 물을 가져 왔다.

  "늙은이 혼자 살다 보니 뭐 내줄 게 없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 연희네 그걸 취재하고 있다더만. 수연이 엄마한테 들었수다."

  수연이 엄마는 강은정을 말하는 듯 했다. 재우가 그 집 앞에서 만난 여학생 이름이 수연이라는 뜻이었다. 재우는 얼른 이름을 메모했다.

  재우는 상대가 귀가 어둡다는 걸 떠 올리며 큰 목소리로 설명했다.

  "얼마 전에 강은정 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동생 가족이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행방이 오리무중이어서 많이 답답하신 듯 했습니다. 기사가 나와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며 저한테 취재를 부탁했습니다."

  고 씨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강희정 씨 가족에 대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생각나시는 걸 모두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실종 전후에 있었던 일 중심으로요.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걸 압니다.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 부분도 있을 거고요. 다만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떠오르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재우는 최근 틈이 날 때마다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후의 일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고 씨는 아스라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어디 보자. 경찰관 분들하고 기자님들에게 몇 번이나 한 얘기이긴 하지만, 당시 나는 연희네 옆집에 살았어요. 아들이랑 한 오년 그 집에 살았지. 그러다 그 일이 있기 한 달 전인가, 아들이 지방으로 가게 돼 이리로 이사 왔어요. 그러니까 그 일이 터졌을 때는 옆집에 안 살았다우."

  재우는 사건 당시 옆집에서 안 살았다는 대목에서 약간 실망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끈기 있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연희네 가족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사실 잘 몰라. 그래도 연희네가 오기 전부터 옆집에 살았으니, 그네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는 만큼 얘기해 줄 수 있지.

  그런데 지금도 그런 일이 생긴 게 믿기지 않아요. 그렇게 착한 부부가 없었다우. 애들도 얼마나 예쁜지…. 연희는 만날 때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면서 인사를 참 잘 했지. 어린데도 누나라고 동생을 얼마나 예뻐했던지 몰라.

  연희 엄마도 정말이지 참하고 예뻤다우. 남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아들이 아직 결혼을 안 했어. 지금이야 포기했지만, 그 때는 어떻게든 해 보려고 연희 엄마 같은 색시 있으면 소개 시켜달라고도 했다우. 볼 때마다 저런 며느리를 얻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내가 이사를 간다고 하니까 연희 엄마가 ‘태현이 돌잔치에 꼭 오시라’고 신신당부를 하대. 그래서 나도 갈 요량이었는데 그만 그런 일이 생긴 거지 뭐여. 그런데, 기자 양반 알고 싶은 게 뭐라고 하셨지?"

  재우는 메모를 멈추고 상대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 씨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는 주간지 기자고 강희정 씨 가족 실종사건을 취재 중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옆집에 안 사셨다고 하시니…. 그 전이라도 좋습니다. 연희네 가족한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그래그래. 나이 먹으니 말을 하면서도 깜빡깜빡한다우. 경찰한테도 얘기했는데 연희네 남편 사업이 언젠가부터 잘 안 됐던 거 같았어요. 그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좀 있었지. 참 지독한 사람들이었어. 집에 연희 엄마하고 애들 밖에 없는데 문을 막 두드리고 말이우. 나오라고 소리도 크게 지르고 그랬지.

  없는 돈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나오나. 한 번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있다우. 열어주니까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빌려준 돈을 받으러 왔는데 옆집 남편이 어디 간 줄 아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나는 알아도 말 못한다고 하고 문을 쾅 닫았지. 나중에 아들이 집에 와서 해코지 당할지 모르니 다음부터는 아예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재우는 안양서 정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부인이 울면서 ‘애들한테 손대지 말라’고 소리 지른 걸 듣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던 주민이 있었다는. 그 주민이 고 씨였을까.

  "도와주려고 해도 나도 가진 게 없고, 그래도 가끔 연희한테 몇 백원 씩 쥐어주고 했지. 큰 돈은 아니지만. 연희 고것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만나면 꾸뻑 인사도 잘 하고. 누나라고 동생을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우리 아들도 결혼해서 그런 손주를 봤음 했는데, 그게 참 맘대로 안 되더라고. 멀쩡하게 생겨서 말이우. 지금은 나도 포기했지만 말야. 참, 그런데 내가 뭘 말씀드리면 될까?""

  재우는 고 씨의 말이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약간 치매 증상이 있는 듯 했다. 찾아온 이유를 다시 설명하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 집 부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죠?"

  고 씨는 갑자기 뭔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님이라고 하셨지, 왜 그런 걸 물어보시나.

  "주변에 물어보니 종종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더군요."

  재우는 적당히 둘러댔다.

  고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게 있었나. 애 아빠가 연희네를 몇 번 못살게 군 적은 있었다우.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안 그랬는데 말야. 하던 일이 잘 안 돼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말이우. 가끔 큰 소리도 나고, 손도 좀 대는 거 같더라고. 그렇게 참하고 예쁜 색시한테 말이야."

  처음 듣는 얘기였다. 윗층 부부의 말을 떠올렸다. 크게 싸우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은 한 편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뜻이었을까.

  "그런 일이 자주 있었나요?"

  고 씨는 이제 기억이 난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큰 소리가 나는 정도였다우. 애들 우는 소리도 날 때가 있었고. 한 번은 하도 보기가 그래서 아들한테 어떻게 좀 해볼 수 없냐고도 했어. 그랬더니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고만 하더라고. 나도 무슨 힘이 있나, 나이도 있고, 몸은 아프고…."

  재우는 신중을 기하며 다시 또박또박 물었다.

  "남편이 부인을 심하게 폭행한 적도 있습니까?"

  고 씨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뒤늦게 자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생각 나는대로 말한 것 뿐이라우. 뭐든 얘기하라길래. 나중에 보면 얼굴이나 몸은 말짱했으니까. 그냥 소리나 좀 지른 건지도 모르지."

  "경찰에도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까."

  "글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겠네. 이 나이가 되니 사실 오늘 아침에 뭐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우."

  재우는 유도질문을 몇 개 던졌다. 경제적으로 힘든데 가정폭력까지 당했으면 부인이 참 힘들었겠네요, 아이들한테도 손을 댄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등등. 하지만 고 씨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영양가 없는 얘기만 반복했다. 연희가 갓난아이 때 밤에 잠을 안 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힘들었다. 조금씩 걷기 시작하더니 매일 골목에 나와 놀았는데 다들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서너 살 되고나선 노래도 곧잘 불렀다….

  재우는 메모를 멈춘 채 되풀이되는 옛날 얘기를 들어 넘겼다. 고 씨가 물을 마시느라 잠깐 멈춘 틈을 타 얼른 인사를 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벌써 가시게? 연희네 일은 내가 뭐든 잘 아는데…."

  "좋은 말씀,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재우는 완곡하게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고 씨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셔, 그럼. 참, 가는 길에 그 집 한 번 들렀다 갈 텐가? 내가 안내를 해줄 테니 말이우."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지난주에 다녀왔습니다. 날도 추운데 굳이 안 나오셔도 됩니다."

  재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 씨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요 앞이라 걸으면 5분밖에 안 걸린다우. 시장 가는 길에 만날 오가는 걸. 오늘 잠깐 시장도 들러야 하니까, 같이 나갑시다."

  재우는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까운 거리라니 한 없이 얘기가 늘어지지는 않을 거였다. 한편으론 고 씨를 현장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 설명은 ‘사건 직전까지 옆집에 살던 고순희 씨가 일가족 실종 현장을 안내하고 있다’ 정도로 할 생각이었다. 생생한 사진은 현장감을 높이는 동시에 기자가 발품을 팔아 취재했다는 증거도 됐다.

 

  고 씨의 집에서 사건 현장까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골목을 네다섯 번 도니 눈에 익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직선거리로는 300m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하늘색 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이 쪽이 연희네 집이었다우."

  재우는 카메라를 꺼냈다. 고 씨가 손으로 문을 가리키는 모습이 포함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고 씨는 여기저기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쪽 담벼락이 낮았는데 지금은 좀 높아졌다우. 예전엔 도둑도 많이 들었지. 밖에서도 문이 보였으니까 말야. 창문살을 달아도 소용없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있을 땐 어떻게든 안 보이게 하려고 화분도 키우고 했는데…."

  카메라 전원을 끄는 재우의 머리 속에 며칠 전의 한 장면이 스쳤다

  "지난번 이 곳에 왔을 때 학생을 한 명 만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은정 씨 딸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이 근처에서 보신 적 있으신가요?"

  고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 말이지? 나도 오다가다 몇 번 봤다우. 얼마 전에도 이 집 앞에 서 있더라고. 미용실 딸내미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대. 내가 서너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거든. 그 때 딸내미랑 마주친 기억이 나서 말이지.

  미용실댁이 내가 동생 옆집에 살았다고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돈을 줘도 안 받고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말이야. 자기는 어머니 얼굴을 기억 못 한다면서 나한테 어머니 같다고 하더라고. 참 대단하지. 요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한테도 그렇게 안 한다우."

  재우는 조바심이 나서 말을 끊었다.

  "그런데 수연이라는 여학생은 몇 번이나 보셨어요? 왜 왔다고는 말 안 하던가요?"

  고 씨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에 서너 번 봤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정도는 될 거야. 나는 시장 가는 중이었는데 자기도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하더라고. 그런가보다 했지. 자세히는 안 물어봤다우. 주책이란 소리 들을까봐. 근데 어머니한테는 자기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말야."

  고 씨와 헤어진 재우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보통 취재를 할수록 궁금증이 조금씩 해소되면서 머리 속에서 차츰 기사의 윤곽이 잡혔다. 일정 수준 이상 취재한 후에는 책상에 앉아 끈기 있게 기사로 풀어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취재를 할수록 더 막연해졌다. 이 상태로는 기사의 윤곽을 잡기조차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소록에서 ‘강은정’을 찾아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화요일 오후의 미용실은 한가했다. 안에는 단골로 보이는 손님 두 명 뿐이었다. 한 명은 퍼머기를 머리에 썼고, 다른 한 명은 염색 중이었다. 재우가 들어서자 강은정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펑퍼짐한 청바지에 흰색 비닐 앞치마 차림이었다. 동네 미용실 원장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기자님, 인터뷰는 잘 하셨어요?"

  전화로는 고 씨와 만나고 가는 길에 잠깐 들르겠다고 했다. 강은정은 별다른 의구심 없이 쾌활한 모습이었다. 재우는 먼저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잠깐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쁘신 일 끝내신 후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저는 근처 커피숍에도 가서 취재 내용을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흔쾌히 답했다.

  "물론이죠. 옆 건물 1층에 카페가 생겼는데 커피 맛이 괜찮아요. 삼십 분 정도 지나면 시간이 날 거에요."

  재우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손님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 일 때문에 그러지? 언니, 진짜 너무 안 됐다니까."

  전면 창에 덩굴 의자와 투명 탁자가 시원한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전부 열다섯 석 규모였는데 손님은 재우 뿐이었다.

  재우는 커피를 시킨 뒤 노트북 컴퓨터를 꺼냈다. 사진을 분류하고 취재 내용을 정리했다. 인터뷰는 녹음을 들으며 정리하는 게 원칙이었다. 특히 뉘앙스나 어미까지 살려야 하는 중요한 인터뷰면 여러 번 반복해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고 씨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같은 말이 되풀이된 터라 기억만으로도 대부분의 내용을 되살릴 수 있었다. 불확실할 때 가끔 수첩을 참고하는 정도였다.

 

  자리에 앉고 사십 분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강은정은 늦어서 죄송하다며 자리에 앉았다. 재우는 지금까지 취재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들렀다며 양해를 구했다.

  "뭐든 말씀해 주세요. 찾아오실 거 없이 전화로도 괜찮아요."

  강은정은 약간 피곤한 듯 눈두덩을 만졌다.

  재우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덕분에 소개해 주신 분들을 잘 만났습니다. 그런데 동생 분 부부 사이가 항상 원만하진 않았던 모양이네요. 가끔 큰 소리가 들렸다는 얘기도 있고."

  "기자님, 결혼 안 하셨죠?"

  강은정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대뜸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가르치는 어투가 됐다.

  "부부 관계란 게 그렇더라고요. 문제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부부도 한 달이면 얼굴 붉힐 일이 몇 번이나 생깁니다. 결혼한 지 벌써 20년이나 됐는데도 그래요. 동생네처럼 경제적으로 힘들면 부딪칠 일이 더 많겠죠.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재우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저는 아직 결혼도 안 했습니다. 결혼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여쭤보는 건 부부싸움이 아니라 가정폭력에 대해서입니다."

  재우는 가정폭력, 이라는 단어를 뱉으며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강은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가 잠시 후 평온함을 되찾았다.

  "저도 동생 부부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네요. 혹시 어디서 들으신 얘기신지요."

  "그냥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재우는 말을 흐렸다.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건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강은정이 피식 웃었다.

  "혹시 오늘 만나신 고순희 할머님이 그렇게 말하시던가요? 죄송한데 그 분이 요즘 좀 오락가락 하세요. 기자님도 느끼셨을지 모르지만요. 연세가 연세인 만큼 어쩔 수 없겠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숨겨진 부분을 끌어내기에는 재우가 가진 카드가 너무 빈약했다.

  "아닙니다. 다른 분께 몇 번 큰 소리가 났다는 걸 듣고 지레 짐작한 것뿐입니다. 괜한 소리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마침 강은정이 시킨 커피가 나왔다. 재우는 화제를 바꿨다.

  "저번에 우연히 따님을 봤습니다. 연희랑 동갑이라고 하셨죠? 사건 당시 사진을 보면 완전히 꼬맹이던데, 연희도 벌써 저렇게 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무사하다면 말입니다만…. 그건 그렇고 혹시 따님도 사건에 대해 아시나요?"

  상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직접 설명한 적은 없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아는 눈치더군요. 안 그래도 저번에 기자님에게 전화하기 전에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걸 모를 줄 알았냐고 하더군요. 제가 스크랩해 놓은 신문기사를 봤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겠죠. 저는 못 봤지만 인터넷에는 미제 사건을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숨길 순 없는 거니까요."

  재우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한참 예민한 나이일 텐데…. 동갑이었던 사촌이 근처에서 사라진 걸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강은정의 말투가 냉랭해졌다.

  "취재는 가능한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딸애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생이 사라진 지금 제가 지켜야 할 단 한 명의 핏줄이에요.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재우는 눈을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머리 속으로 스스로 퇴각 신호를 내렸다. 지금 상황에서 강은정으로부터 더 이상의 정보를 얻기는 힘들어 보였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9 19. 2017년 3월 ② (完) 2019 / 9 / 5 232 0 6301   
18 18. 2017년 3월 ① 2019 / 9 / 4 231 0 6284   
17 17. 2016년 3월 26일 2019 / 9 / 3 234 0 3845   
16 16. 2016년 3월 25일② 2019 / 8 / 30 252 0 9184   
15 15. 2016년 3월 25일① 2019 / 8 / 29 230 0 8083   
14 14. 2016년 3월 24일 2019 / 8 / 28 246 0 9871   
13 13. 2016년 3월 23일 2019 / 8 / 27 265 0 8514   
12 12. 2016년 3월 22일 2019 / 8 / 23 256 0 7196   
11 11. 2016년 3월 21일 2019 / 8 / 22 245 0 6901   
10 10. 2016년 3월 20일② 2019 / 8 / 21 240 0 6070   
9 9. 2016년 3월 20일① 2019 / 8 / 20 252 0 7785   
8 8. 2016년 3월 18일 2019 / 8 / 16 233 0 9050   
7 7. 2016년 3월 15일 2019 / 8 / 15 228 0 11486   
6 6. 2016년 3월 13일 2019 / 8 / 14 234 0 5827   
5 5. 2016년 3월 12일 ② 2019 / 8 / 13 257 0 7370   
4 4. 2016년 3월 12일 ① 2019 / 8 / 9 222 1 9865   
3 3. 2016년 3월 7일 2019 / 8 / 8 257 1 9403   
2 2. 2016년 3월 5일 2019 / 8 / 7 273 0 7961   
1 1. 2016년 2월 29일 2019 / 8 / 7 454 0 6265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