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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사라진 가족
작가 : 장군12
작품등록일 : 2019.8.7

14년 전 발생한 일가족 실종 사건을 한 주간지 기자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
서로를 파괴하며 처참하게 무너진 가족의 사연과 경찰이 숨긴 진실의 조각.
사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모든 일을 백일하에 드러내려는 이들의 숨막히는 대결로 치닫는데……

 
4. 2016년 3월 12일 ①
작성일 : 19-08-09 20:21     조회 : 220     추천 : 1     분량 : 9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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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6년 3월 12일 ①

 

  재우는 8호선을 타고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렸다. 머리 한 구석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전날 마감을 끝내고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서였다.

  어제는 드물게 유 편집장이 스폰서를 데려왔다. 덕분에 기자들 모두가 쇠고기를 구울 수 있었다. 스폰서는 중앙부처 공무원을 지내다 얼마 전 공기업 사장으로 옮겼다는 편집장의 대학 친구였다.

  "다들 이 친구는 판사나 검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조용히 공부만 하던 친구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시위대 앞에 서 있지 뭡니까."

  공기업 사장이 유 편집장의 어깨를 치며 껄껄 웃었다. 편집장은 조용히 웃으며 잔에 술을 따랐다. 재우는 편집장이 대학 재학시절 열혈 운동권이었다는 소문을 떠 올렸다. 졸업 후 사회를 바꾸겠다며 고시 대신 언론의 길을 택했다고 했다.

  재우는 한 번쯤 편집장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30년 동안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냐고. 문 닫기 직전의 주간지와 지금의 한국 사회가 그 노력의 산물이냐고. 그에 대해 자부심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냐고. 물론 오랜만에 소고기를 먹은 어제 같은 날 할 얘기는 아니었다.

  공기업 사장과 편집장을 먼저 보내고 2차로 호프집에 갔다. 기자들은 선후배 뒷담화를 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토로했다. 선배 기자들은 바람이 불면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회사를 나갔다. 인터넷 언론, 대기업, 벤처기업, 정부 부처와 공기업…. 기회만 나면 회사를 떠날 궁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취재를 빙자해 이직 자리를 알아본 거 아닌가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2차를 마친 강 차장은 집에 가려던 재우를 끌고 실내 포장마차로 3차를 재촉했다.

  "주말인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셔야죠."

  강 차장이 대답 대신 소주잔을 입에 댔다. 그리고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마누라, 지난 달 말에 애 데리고 친정 갔다."

  말문이 막힌 재우는 조용히 소주잔을 비웠다.

  강 차장은 주간시사의 간판기자였다. 일년에 두세 번 있는 특종을 도맡다시피 했다. 사내외 기자상도 가장 많이 받았다. 차장이지만 내근 업무는 많지 않았다. 일상적인 기사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내에선 대체로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번 발동이 걸리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편집장도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세상을 놀라게 할 기사를 내놓을 것을 주문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하더라."

  강 차장은 취재원 관리다 뭐다 하며 허구한 날 술을 마셨다. 특종기자라고 한들 회사에서 술값까지 대줄 리는 만무했다. 결과적으로 집에 돈을 많이 가져다주지도 못하면서 바쁘기만 했다. 술에 절어 살다 보니 몸이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한 현재와 예상 가능한 미래. 부인 입장도 이해는 갔다.

  "내가 지금 누구 찾을 때냐. 니가 성남 가족도 찾고, 우리 마누라도 찾아주라."

  강 차장은 우동 국물을 들이켰다. 재우는 그제야 강 차장이 그에게 사건을 넘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가 막히면서도 한 편으로는 측은지심이 들었다.

 

  지하철 1번 출구로 나왔다. 찬 바람에 머리가 상쾌해졌다. 변호사 법무사 사무실과 식당이 난잡하게 들어서 있었다. 지하철 출구에 성남법원, 검찰청이라고 써 있던 게 생각났다. 강은정은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가 달린 검은색 패딩점퍼 차림이었다.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강은정은 서둘러 손을 들었다. 열 시에 미용실 예약 손님이 있어, 동생이 살던 집까지만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재우로선 반가운 얘기였다. 혼자 다니는 편이 더 여유 있게 취재할 수 있었다.

  강은정은 택시를 잡고 목적지를 댔다. 동네 주민이라는 걸 과시하듯 택시기사에게 주문을 쏟아냈다. "큰 길은 신호등이 있으니 부동산 옆에서 우회전을 해 주세요. 두 번째 골목으로 좌회전해서 가시면 더 빠를 거에요."

  택시는 금세 오르막으로 접어들었다.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이 나타났다. 이면도로 양 측에는 차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택시는 우회전과 좌회전을 반복하며 경사를 올랐다. 재우는 어제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아 침을 삼켰다.

  십 분 정도 경사로를 오르자 좁은 도로가 나타났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골목이었다. 차를 타고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여기 세워주세요."

  기사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미터기를 눌렀다.

  강은정은 재우를 골목 안으로 안내했다. 양 옆에 빌라가 줄지어 있었다. 고작해야 4, 5층에 불과했지만 골목이 좁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100m 가량 걷자 막다른 곳이 보였다. 흰색 철문이 있는 다세대주택이었다. 강은정은 그 집 앞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술처럼 다시 골목이 나타났다. 홀린 듯한 기분으로 50m 정도 걷자 왼쪽에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시멘트 토대 위에 벽돌로 외벽이 올려진 건물이었다. 토대 부분에는 가로로 금이 가 있었다. 벽돌은 안쓰러울 정도로 칠이 벗겨진 채였다. 몇 걸음 더 가자 모퉁이에 있는 하늘색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 안쪽에는 반지하와 1, 2층을 잇는 시멘트 계단이 보였다.

  강은정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재우는 고개를 내밀어 측면을 둘러봤다.

  발 부분에 위치한 반지하 창문은 비닐로 막혀 있었다. 머리 위에 보이는 1층 창문은 대각선으로 깨져 있었다. 청테이프를 붙여 간신히 형태를 보전하는 정도였다. 2층은 창문은 온전했지만 흰색이었을 창틀은 검은색에 더 가까웠다. 전반적으로 ‘낡았다’는 말보다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집이었다.

  강은정은 배달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스르르 밀리면서 건물의 속살이 더 자세히 드러났다. 뒤 따라 들어가자 왼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오른 쪽에는 성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로 내려가니 반지하 세대 간이문 2개가 나타났다. 강은정은 왼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팔을 잡아끌며 귀엣말을 했다.

  "잠깐 나가시죠."

  그녀는 왼쪽이 동생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 거주자가 사건 때문에 찾아오는 걸 싫어한다는 설명이었다. 재우는 이해가 갔다. 기자와 수사 관계자가 계속 찾아오는 걸 좋아할 주민은 없었다.

  한편으론 아쉬웠다. 집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내부 풍경을 묘사하면서 기사를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신발장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든가, 형광등이 쓸쓸해 보인다든가 하는 상투적 표현만으로도 기사가 한층 살아났다. 여기에 현재 사는 주민이 한두 마디 해 주면 더 좋았다.

  그게 안 되면 골목 분위기 묘사를 넣는 방법도 있었다. 이 때 주민 코멘트 한두 개는 필수였다.

  이 동네는 조용한 동네라 실종 소식에 깜짝 놀랐어요, 가족들 하나 같이 그렇게 착할 수 없었어요 같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글에서 현장감을 살리는 데는 요긴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이 얼마나 될까. 재우는 머리 속으로 가늠하며 취재수첩을 꺼냈다.

  강은정은 재우의 마음을 읽은 듯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동생 가족들과 알고 지내던 주민들 연락처에요. 아직 근처에 살고 있어요. 찾아가 보시면 도움이 될 거에요."

  십수 년 간 언론에 호소하면서 익힌 요령이리라. 재우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종이를 받았다. 언니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재우는 신발 끈을 묶었다.

 

  당시 실종 가족의 윗집에 살던 주민은 직선거리로 500m 가량 떨어진 빌라에 살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 방문 사실을 알리고 출발했다. 거리는 짧았지만 길이 미로 같았다. 스마트폰 지도를 참고했지만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도착해 보니 노부부가 이미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거실에는 오렌지 주스와 쌀강정이 준비돼 있었다. 재우는 아침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떠 올리며 강정을 입에 넣었다.

  집은 좁지만 깔끔했다. 백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남편은 갈색 코르덴바지에 칼라가 달린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부인은 두꺼운 검은 바지에 분홍색 울 스웨터 차림이었다. 둘 다 6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벽에는 손자 손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벌써 14년이 지났다니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재우도 맞장구를 쳤다.

  "예, 아이들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됐을 나입니다."

  주스를 마시는 재우를 보며 부인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연희가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부인은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는 그 때 남편과 두 딸과 함께 연희네 윗집에 살았어요. 그 일이 있기 2년 전에 이사를 왔었죠. 원래는 서울 사대문 안에 살았어요. 그런데 외환위기 때 인쇄소를 하던 남편 사업이 잘 안 됐어요. 버티다 집을 좁혀 이리로 온 거죠. 지금이야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땐 저희도 참 힘들었어요."

  남편이 헛기침을 했다. 부인은 괜한 얘기를 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이사를 왔을 때 새댁은 막 둘째를 가진 상태였어요. 임신은 했지만 피부도 하얗고 참 고왔어요. 키도 자그마한데 생글생글 웃고 다녔죠. 연희는 젖살이 안 빠진 게 얼마나 귀여운지. 대학생이던 딸들이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과자도 줬어요.

  애 아빠도 싹싹하니 인사를 잘 했어요. 휴대전화 대리점을 한다면서 우리한테 새로 나온 휴대폰을 싸게 해 주기도 했고…."

  조용히 있던 남편이 거들었다.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없었지. 안사람이 가끔 반찬도 해서 가져다주고 그랬다우. 그러면 거기서도 음식 같은 거 가져다주고,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었지. 부부 사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남편이 말을 흐렸다. 재우는 부부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았을 거란 감이 왔다.

  "최석우 씨가 하던 대리점 일이 잘 안 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집에 대부업체에서 수시로 찾아오고 해서 곤란했다고 하던데요. 부부싸움 같은 건 없었나요?"

  부부는 서로 눈치를 봤다.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했다. 부인은 남편을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라지기 얼마 전부터는 형편이 좀 어려운 것 같았어요. 애 아빠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새댁도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나중에 우리도 신문 보고 알았어요. 부부가 둘 다 그런 얘기는 잘 안 해서…."

  틈을 보던 남편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래도 크게 싸우거나, 그러진 않았다우. 그럴 사람들이 아니었지."

  재우는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라 화제를 돌렸다.

  "경찰은 사라진 날을 3월 30일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날 최석우 씨 가족 차량이 고속도로 CCTV에 찍혔습니다. 당일이나 그 직전에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인은 천장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때가 아마 주말이었을거에요. 한 동안 안 보이던 애기 아빠가 며칠 전부터 집에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예전에 하던 가게를 닫았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뭘 하는지는 저도 몰랐어요. 새댁은 그냥 돌아다니면서 일한다고만 하고.

  그 일이 있기 직전에 집 앞에서 마주친 적은 있어요. 연희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고 있더라고. 둘째는 안고서 말이에요.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였어요. 그래서 나도 별 말 안 하고 그냥 보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라도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게 정확하게 언제쯤이었습니까."

  "그 일이 생기기 하루이틀 전이었어요. 경찰한테도 말했는데 우리는 연희네가 사라진 것도 전혀 몰랐어요. 큰 딸이 토요일 밤에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은 게 전부에요. 그렇게 말했더니 경찰이 몇 번이나 찾아왔어요. 근데 그게 연희네 차인지 어떤지 확실치 않아서 큰 도움은 안 된 거 같더라고요.

  참, 그리고 일요일에는 깻잎 장아찌를 만들어 나눠주러 갔어요. 오후 서너 시쯤이었나. 그런데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안 나오더라고. 주말이라 외식이라도 하러 갔나 했지. 그러다 며칠 후에 경찰하고 새댁 언니가 와서 사라진 걸 알았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며칠 동안은 잠도 안 오더라고."

  남편이 다시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우. 근데 신문에 나오고 하는 거 보니까 뭔가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거 같더라고. 그래서 딸들한테도 저녁에 아르바이트 하던 거 다 그만두라고 했지. 용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숨이 그보다 더 중한 거 아뇨.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니까."

  재우는 슬슬 인터뷰를 끝내고 싶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사라진 가족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기사에 넣을 전형적인 코멘트를 몇 개 건진 게 그나마 수확이었다.

  휴대전화 녹음을 멈추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 집에는 언제까지 사셨어요."

  남편은 찜찜해서 일년 정도 더 살다가 나왔다고 했다.

  "나도 택시운전 시작하면서 수입이 생겼고. 딸들 생각하면 그런 곳에 오래는 못 살겠더라고. 지금이야 다 결혼했지만. 손자 손녀가 와도 그 쪽으론 아예 가지 말라고 해요.

  사건이 나고 부부가 살던 집은 한참 비어 있었어요. 뉴스에 나오고 주변 부동산 가격도 떨어졌지. 집 가진 사람들은 고생 좀 했을 거요. 덕분에 우리는 이 집을 좀 싸게 샀다우.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올랐지. 최근에는 재개발 얘기도 나오고 있고."

  부인이 눈치를 주며 말을 끊었다.

  "이 양반이 참. 하여튼 빨리 연희네가 돌아와야 할 텐데. 세상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정말 살아는 있는지. 그래도 자매라는 게 참 대단해요. 지금도 새댁 언니가 우리한테 자주 연락하고 그래요."

  재우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사라진 이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해 집값 자랑으로 끝난 인터뷰에 쓴웃음이 나왔다.

  강은정이 건넨 메모지에는 노부부 말고도 이름과 연락처가 하나 더 적혀 있었다. ‘고순희’라는 인물이었다. 표시된 휴대전화 번호로 몇 번이나 걸었지만 매번 부재 중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재우는 속이 탔다.

  저녁에는 형을 만나러 어머니 집에 가야 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몸도 힘들었다. 가능하면 오전 중 취재를 마치고 싶었다.

  이미 11시가 넘어 있었다. 재우는 다시 한 번 실종된 가족이 살던 집에 가 보기로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사내에는 사진기자 두 명이 있었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부르면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젊은 기자들은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 직접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해는 갔다. 전성기 때 다섯 명이던 사진기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재우가 입사한 후 4년 동안 신입도 안 뽑았다. 말하자면 사양산업인 주간지에서도 사양직종이었다. 조만간 사진기자라는 직종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회사는 디지털 카메라를 나눠주며 볼펜 기자의 사진 촬영을 독려했다. 웬만한 사진은 통신사 사진을 쓰면 됐다. 급하게 필요하면 프리랜서를 쓸 수도 있었다.

  하긴 주간지에 유망한 직종이 있긴 한 걸까. 볼펜 기자라고 자리가 안전한 건 아니었다. 최근에는 인건비를 아끼느라 자체기사를 줄이고 외부원고를 늘리는 추세였다. 재우는 현기증이 났다. 적갈색 벽돌의 빌라가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이 갈수록 험난해질 앞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동네 골목은 소방차 한 대가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동시에 토요일 낮인데도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빌라 옆에는 ‘재개발 정비구역지정 환영’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오래된 데다 한 쪽이 기울어져 골목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어울렸다. 정말 재개발이 되긴 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재우가 하늘색 문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때,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중학교 고학년이나 고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학생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체크무늬 치마에 흰 블라우스, 진홍색 재킷 교복 차림이었다.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재우는 꺼냈던 디지털 카메라를 다시 넣었다.

  회사에선 가급적 사람이 들어간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골목 사진이라면 행인이라도 넣으라고 했다. 그래야 독자들의 주목도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여학생 뒷모습을 찍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여학생이 들어가거나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문 앞에 선 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재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여학생은 주위를 둘러보고 문을 열었다. 재우는 완전히 들어간 걸 확인하고 카메라를 꺼냈다. 전원을 켜고 건물과 주변 골목 모습을 담았다.

  이어 조심스럽게 하늘색 문으로 다가갔다. 여기까지 와서 사건 현장을 안 찍고 갈 순 없었다. 살짝 들어가 계단과 현관문이라도 찍을 생각이었다. 방금 들어간 학생은 이 건물에 사는 주민일까.

  철문을 미니 자연스레 열렸다. 반지하 쪽으로 몸을 돌리고 카메라를 눈에 댔다. 그런데 반지하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들이 사라진 그 집이었다.

  여학생은 카메라를 든 재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재우는 문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기요. 잠시만요."

  밖으로 나와 말을 걸었지만 이미 학생의 모습은 멀어지고 있었다. 종종걸음은 뜀박질로 바뀌었다. 재우는 몇 걸음 따라가다 포기했다. 대신 카메라로 뒷모습을 담았다.

  여학생은 그 집에 사는 걸까. 그렇다면 귀중한 주민 코멘트를 놓친 셈이었다. 아니면 친구 집에 찾아왔다가 아무도 없어 돌아가는 걸까.

  재우는 다시 들어가 사진을 마저 찍었다. 그리고 실종 가족이 살던 집의 문을 두드렸다. 문전박대 당하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혹시 누구 계신가요."

  목소리를 높였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불도 안 켜진 채 컴컴했다. 아무래도 부재중인 듯 했다. 내친 김에 옆집 문도 두드렸다. 서너 번 두드리자 현관에 불이 켜졌다.

  "누구세요."

  중년 여성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지 않은 채였다.

  재우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2002년 실종 사건에 대해 취재한다는 말을 꺼냈다. 사건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날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저는 몰라요. 여기 이사 온 지 일년도 안 됐어요."

  "그럼, 혹시 옆집에 누가 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신 것 같아서요."

  재우는 붙임성 있게 말을 이었다.

  상대는 한숨을 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받았다.

  "그것도 모르니까 나중에 다시 오시던지 하세요."

  말을 더 붙일 겨를도 없이 현관등이 꺼졌다.

  재우는 다시 사진기를 꺼냈다. 연속 모드로 설정하고 셔터를 길게 두 번 눌렀다. 순식간에 이삼십 장이 찍혔다. 이제 충분하겠지. 재우는 어딘가 음산한 이 골목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받으니 나이가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재우는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강은정이 소개해준 번호였다. 재우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지하철 구석으로 갔다. 통화 중 녹음 기능도 켰다.

  "안녕하세요. 주간시사 박재우 기자라고 합니다."

  "누구요?"

  "주간지 기자입니다. 강은정 씨 소개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누구라고요?"

  가는귀가 먹은 모양이었다. 재우는 지하철 연결 부위로 들어가 반쯤 소리를 질렀다.

  "박재우 기자라고 합니다. 은행동 일가족 실종 사건 아시죠? 사라진 부인의 언니, 강은정 씨가 선생님 번호를 알려줬습니다."

  상대는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 맞다. 얼마 전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어쩌나? 내가 오늘 병원 가는 날인 걸 깜빡했네. 요즘 관절이 너무 안 좋아서 말이우."

  재우는 한숨을 쉬었다. 마침 정차한 역에 내렸다. 다시 목소리를 키워 용건을 말했다.

  "뭐라고? 지금 밖이라 잘 안 들리네. 오후에는 아들이 오기로 했으니, 다음 주에 집에 한 번 오세요. 아는 대로 얘기해 드릴게. 근데 우리 집 어딘지는 아시나?"

  재우는 주소를 받아 적었다. 주소 상으로는 실종 가족이 살던 집 근처였다. 귀가 반쯤 먹은 상대를 전화로 취재하는 건 무리였다. 아무래도 다음 주에 찾아가야 할 듯했다. 불길한 골목을 떠올리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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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2016년 3월 23일 2019 / 8 / 27 264 0 8514   
12 12. 2016년 3월 22일 2019 / 8 / 23 254 0 7196   
11 11. 2016년 3월 21일 2019 / 8 / 22 244 0 6901   
10 10. 2016년 3월 20일② 2019 / 8 / 21 239 0 6070   
9 9. 2016년 3월 20일① 2019 / 8 / 20 250 0 7785   
8 8. 2016년 3월 18일 2019 / 8 / 16 232 0 9050   
7 7. 2016년 3월 15일 2019 / 8 / 15 227 0 11486   
6 6. 2016년 3월 13일 2019 / 8 / 14 232 0 5827   
5 5. 2016년 3월 12일 ② 2019 / 8 / 13 255 0 7370   
4 4. 2016년 3월 12일 ① 2019 / 8 / 9 221 1 9865   
3 3. 2016년 3월 7일 2019 / 8 / 8 256 1 9403   
2 2. 2016년 3월 5일 2019 / 8 / 7 272 0 7961   
1 1. 2016년 2월 29일 2019 / 8 / 7 450 0 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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