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검은 머리에 고동색 눈동자를 가진 순박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특히 뱅 헤어, 그것도 투 블록 바가지머리 스타일의 머리는 그를 더 어리고 어수룩하게 보이게 만들었고, 약간의 살집은 소년을 귀엽게 보이는 했다. 정 윤. 윤은 내가 Winter 보급소로 올 때마다 같이 장을 보던 친구다. 서로 집에 빨리 가야 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친해진 후로는 각자 품목을 분담해 장을 보고는 했다.
나는 티아와 윤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별일이야 없겠지. 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많지 않았지만 그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내가 같이 장을 볼 결정을 내릴 만큼 좋은 아이인데다가, 무엇보다도 티아와 동갑이라 문득 소개시켜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드디어 티아에게 친구를 사귈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도 동갑 친구. 그 부분에서 나는 멈칫하는 걸 그만두고 티아를 데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윤의 이름을 불렀다.
“윤아!”
“윤이라니?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내가 누군가를 부르는 걸 처음 본 티아는 내 시선을 따라가서 윤을 찾으려고 했다. 본적도 없으면서. 아마 내 부름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정 윤’이라고, 오빠랑 같이 장보는 친구야. 그리고 너랑 동갑이지.”
만족스럽게 티아에게 대꾸했다. 하지만 얼른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정작 윤은 여러 차례 부르는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은 듯 내 쪽을 징그럽게도 돌아보지 않았다.
티아는 누군지 알아내려고 나에게 인상착의를 자꾸 물어왔는데 딱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차이점이란 게 없어서 이야기를 해줘도 찾지 못할 듯 싶었다. 옷의 모양이나 색깔이 똑같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할 수 없이 이름의 반응하는 사람을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티아를 보며 처음으로 오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과 동갑인 사람을 곧 만날 수 있다는 건 티아에게는 즐거운 꿈을 꾸는 것처럼 들뜨게 하는 일인 것 같았다. 기대감과 무려 내가 소개를 시켜 준다는 점이 더 놀라운 것 같았지만.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러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로 티아의 손을 잡고 윤이 있는 곳,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유독 사람이 많은 날인데다가 다들 꼼짝없이 묶여있는 상태기에 광장에는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아 젠장.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아닌 욕부터 나왔다. 윤을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움직이고 있기는 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인정한다. 이럴 때에 나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되도록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신경 쓰고 티아를 거의 ‘나’라는 갑옷 안에 감싸 보호했다.
무사히 그들 틈을 지나치고나자 다행이도 윤의 주위에는 2명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해 그들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윤을 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바라볼 법도 한데, 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인지 전혀 알아채지를 못했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매번 만날 때마다 해맑게 웃는 모습만을 본 나는 지금 윤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 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할 것 같았다. 오늘 아침이었으면 핑계가 생겼다는 것에 좋아했지만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저 남자애야?”
“응. 바빠 보이는 데 그냥 갈까?”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
당장이라도 싫다고 투덜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머뭇거리며 대답을 미루고 있는 티아를 보며 나는 그냥 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만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새로운 누군가를 사귄다는 건 두려움을 동반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티아의 반응은 용기가 없다거나 내성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괜찮아. 좋은 애야. 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야.”
“응. 오빠가 그렇다면 만나보고 싶어.”
그런 티아의 손을 꼭 잡고서 다시금 윤을 불러보았지만 여전했다. 어쩔 수 없지. 윤이 알아채길 기다리다간 시간이 다 가버리겠어. 나는 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다섯 발자국으로 줄어들고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기척을 그제야 느낀 사람들이 나와 티아를 먼저 발견했고, 뒤늦게 윤 역시 나를 보고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나와 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람이 많은 공간은 되도록 가지 않는다.’였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말이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윤에게 인사했다.
“안녕.”
잠시 멍한 표정으로 놀라고 있던 윤이 내 인사에 움찔하고는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만의 배려였다.
“형! 오랜만이에요!”
조금 전의 심각한 표정이 거짓말처럼 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저번 달에 안 나와서 그래.”
투덜거리며 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때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장을 봤거든요. 오래 기다렸어요, 형? 죄송해요.”
얼굴 가득 미안함을 잔뜩 붙인 채 말하는 윤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부정을 표현했다. 동시에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가볍게 포옹을 했다. 윤 역시 마주 안아주었다. 근 한 달 반 만에 만난 것이라 반가움이 컸다. 보급소에 오면 항상 같이 이야기를 하며 품목을 정하고, 그리고 또 헤어진 다음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다시 만나는 단순한 관계지만 그렇다고 친분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야. 그래서 10분 지나면 안기다리고 출발했어.”
진지하게 말하자 윤이 내 말에 웃었다. 어느 정도 회포를 풀고서 티아를 소개시켜주려 옆을 보자 좀 전까지 나란히 옆에 서있던 티아가 언제부터인지 내 뒤에 숨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음? 쑥스러워서 그러나? 그리고는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의 시선을 끌더니 수줍게 말했다.
“오빠, 소개 시켜줘.”
처음 보는 티아의 모습에 나는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티아가 원래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었나? 누군가와 만난 적이 없으니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어. 인사해. 이쪽은 정 윤. 윤아, 여기는 내 동생 티아.”
티아의 행동이 매우 이상하지만 일단은 바라는 대로 소개시켜주었다.
“안녕하세요! 정 윤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윤도 동갑은 처음만나는 듯 들뜬 표정이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Tia L Roman’이라고 해요.”
티아의 볼이 약간 붉은 것 같다. 아닌가?
“둘이 동갑이라고 내가 이야기 안했나?”
어색하게 존댓말로 서로에게 인사하는 두 아이를 보며 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 이 분위기는 뭐지. 왠지 더 이상 두고 보면 안 될 것 같은 이 기분은 또 뭐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상히도 내 기분은 점점 하락세를 띠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다. 이대로 있으면 진짜 뭔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만 같아서 나는 급하게 화제를 돌리는 걸 선택했다.
“아까 같이 있던 분들은?”
혹시 아는 사이인데 나 때문에 두고 온 건가 싶어 묻는 게 조심스러웠다.
“저도 잘 모르는 분들이에요.”
나는 윤의 어깨 너머로 그들을 확인했다. 혹시 불쾌해하지는 않을까싶어서. 그들의 뒷모습이나 옆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에 있는 사람은 핑크색 단발머리에 오른쪽에는 화살이 심장을 꿰뚫고 있는 귀여운 문신을 하고 있었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초콜릿색의 피부와 반대되는 빛나는 은발을 한 사람으로 두 사람 다 남자였고, 근육질 몸매에 소유자들로 보였다.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개성적인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시대라 저 정도는 크게 꾸민 것도 아니었다. 뭐, 너무 과한 경우는 보기 별로지만 저 사람들은 멋진데?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변화를 주는 경우를 상상해 봤다. 예를 들면 왼쪽 눈을 파란색이 아닌 녹색으로 한다던가. 저 근육질에 문신을 한 남자처럼 문신을……. 생각하지 말자.
“형?”
갑자기 윤이 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상상을 멈추고서 심하게 가까워진 거리에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윤이 제제를 걸어준 덕분에 나는 내가 그들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마터면 규칙을 어길 뻔했다.
두 번째 규칙 ‘다른 사람이 불쾌감을 느낄 행위를 하지 않을 것. (도찰, 스킨십 등)
모르는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상상을 해본 나는 위험했다는 생각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 뒤로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윤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 미안.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형도 참. 지금 수족관 운행이 안 되는 상태라서 알아보는 중이라고요.”
“저희도요. 그치?”
티아가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들과 같은 생각이라고 재빨리 수긍했다.
“맞아. 혹시 알아낸 거라도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에게 질문했다.
“아뇨. 안내 방송도 30분 째 나오지 않고 있는데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른데요.”
윤도 갑갑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이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다들 그래요. 저분들도 이유를 몰라서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어쩌지······.”
30분이 넘도록 아무런 설명도 움직임도 없었다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대로 계속 기다려야할지 아니면 다음에 다시 와야 할지 고민이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안내 방송으로 현 상황을 알려준다면 결정을 내리기 쉬었을 텐데. 나는 티아, 그리고 윤과 함께 다른 방도가 있는지 이야기를 더 나누었지만, 우리 모두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다가 시야에 티아의 목에 걸린 미니 콘이 들어왔다. 혹시 가능할지도 몰라. 문득 확인해볼 방법이 떠오르자 다시금 활기가 생겼다.
“콘을 시동시켜 줄래?”
무릎을 약간 굽혀 티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떻게? 이 상태에서도 가능해?”
작아진 큐브를 두 손 안에 올려 두고서 티아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능해. 대신, 시동할 때 지금 모습을 유지하도록 명령해야해. 할 수 있지?”
“응!”
이 상황 속에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거에 티아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저러다 목이 삐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의 머리를 나는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귀엽다니깐.
“BChouse69 시스템, 콘. 현 상태 유지 및 시동”
티아가 명령을 내리자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큐브가 작게 진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푸른빛은 점점 사그라지며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시동 완료였다.
“큐브가 움직여!”
손 안에서 움직이는 콘을 티아가 내게 보여주며 놀라워했다.
“대화할 수 있게 바뀌는 거야.”
뭔가를 꺼내는 것처럼 좌우로 움직이던 콘이 우뚝 멈추었다. 변형을 완료한 콘의 모습은 꽤 귀여웠는데 양 쪽에 귀의 기능을 하는 보라색의 나팔이 두 개 생겼고, 앞은 노란색 스피커로 변해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그런가.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변형 완료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플램과 토큰 소식지에서 WC-S19에 대한 내용이 있나 살펴봐줘. 꼭 19번째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도 있으면 전부 알려줘.”
조금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모든 정보 확인까지 1분 소요됩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그게 못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모양인지, 윤과 티아 모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강아지 같네. 근데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닌가? 큐브가 티아의 목에 목걸이 형태로 걸려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티아의 근처에 있어야한다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윤이 티아의 옆에 딱 붙어있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내 손가락들이 아첼레란도(accelerando) 구간을 연주하는 것처럼 팔뚝을 두드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1분이 참 기네. 업데이트 좀 해야겠어. 기다림이 길다고 느껴져 나는 꼭! 4구역으로 돌아가면 콘을 업데이트시키기로 다짐했다. 1분이 아니라 10분이라고 이야기한 걸 잘 못들은 건가. 심지어 나는 그 말을 들은 내 귀의 청력과 기억력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다. 중증이다. 유치해지지 말자, 크리스.
<검색 및 확인 완료. WC-S19를 포함하는 소식지 없음. WC-S만을 포함하는 소식지 없음. 확인 결과 검색된 자료는 총 0건 입니다.>
때마침 나온 결과는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아쿠아리움으로 검색되는 건?”
<0건 입니다.>
0건······. 이건 누가 조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결과 아닌가? 어떻게 한 건도 없을 수 있지!
“어떻게 된 걸까요, 형?”
“오늘 못 가는 거야?”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인상만 쓰고 있자 티아와 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시 몰라 나는 지금의 상황을 콘에게 설명해주고는 그와 관련된 소식지가 10년 이내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했다. 결과는,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단어다. 0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