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0...1...0...4...8...6...1...그 사람이 내게 적어 준 번호를 한 숫자씩 폰에 누르고 있다.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번호를 적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번호를 누르고 그 사람 번호가 적힌 메모를 번갈아보며 제대로 옮겨 적었는지 확인했다. 제대로 옮겨졌다. 드디어 전화를 하는 순간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들렸다. 그 사람이 늦게 받는 건지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지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때쯤,
“ 여보세요?”
그 사람 목소리였다.
“ 여보세요.”
“ 누구세요?”
“ 저기 나 재민인데...”
“ 누, 누구시라구요?”
“ 나 재민이야, 송...송재민!”
“ 어?! 내가 아는 그 송재민?”
“ 어...”
“ 와, 오랜만이다. 저번에 카페에서 보고 내가 바빠서 번
호만 적어주고 갔지? 그땐 미안했었어.”
“ 아냐, 괜찮아. 바쁘면 그럴수도 있지.”
“ 여전히 착하네. 근데 왜 그날 연락 안 주고 지금 연락했
어? 난 그 날 올 줄 알고 기다렸었는데.”
“ 아..나도 요새 바빴다가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
“ 그랬구나, 회사 다녀? 아,아니다. 너 A.I.N 건축 사무소
팀장이랬지. 신문에서 봤는데 순간 잊었었어.”
‘ 기사...? 아! 1년전에 국립도서관 지었을 때 한 인터뷰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그 사람이 신기했다.
“ 아, 그거? 괜히 쑥스럽네. 누나도 회사 다녀?”
“ 나야 머, 이런저런 회사에...다니고 있지.”
“ 무슨 일 하는 회산데?”
“ 그런거는 전화로 하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얼굴 보면서
해야지.”
‘굳이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작스런 그 사람의 만나자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으...응?”
“ 왜? 싫어?”
“ 그건 아니고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 치, 예전 송재민 다 죽었네.”
‘예전 송재민은...그날 다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 죽었지.”
“ 이번주 토요일 저녁 어때? 난 괜찮은데.”
“ 나도 딱히 별일 없긴 한데.”
“ 그럼 보는 걸로~문제 없지?”
“ 그래;;”
“ 오후 5시에 저번에 봤던 카페에서 보자.”
“ 그래.”
“ 그때까지 보고 싶어도 참아, 끊을게.”
“ 별소릴 다...”
끊겼다. 10년 만에 한 대화치고는 나쁘진 않았던거 같다. 비단 내 생각이였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 동안 왜 그렇게 고민, 고민은 했는지...그 사람과 통화를 끝내고 바로 선화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재민아, 웬일이야?”
“ 누나, 나 방금 전화했어.”
“ 뭐했다고?”
“ 그 사람한테 전화했다고.”
“ 정말? 하기 전에 나한테 말하지.”
“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말을 해.”
“ 그래도 네가 힘들어 했잖아, 걱정되서 그렇지.”
“ 캬~나 걱정해주는 사람은 누나뿐이네.”
“ 까분다? 그래, 민영이가 뭐래?”
“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서로 안부 묻고 이번주에 만나기
로 했지.”
“ 아, 안부 묻고 만나기로 하고...응? 만나기로 했다고?! 이
이번주 언제?”
“ 토요일, 왜?”
“ 혼자 갈 수 있겠어?”
“ 당연하지, 통화 할때도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던데?”
“ 그럴 리가 없는데...”
“ 왜? 불편해야 돼?”
“ 그건 아니지만, 아! 그리고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어?”
“ 저번에 본 카페에서 저녁 5시에.”
“ 갔다가 불편하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알겠지?”
“ 별걸 다 걱정하십니다~ 그럼 누나한테 말했으니까 끊
는다?”
“ 그래, 들어가~”
누나와의 통화를 끊고 다시 그 사람과의 전화 통화를 되새겨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섣부르게 약속을 잡은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만난다는거....불편하지 않다고?...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다 확실히 거짓말이다. 단지 그 말은 선화누나를 안심시키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과 약속한 날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다려지기도 안 왔으면 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여느 토요일과 같이 여기 근처에 사는 도현이와 등산을 갔다. 등산을 하면서도 난 계속 그 사람을 만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 ...듣고 있냐? 야! 송!”
“ 응...어?”
도현이가 뭔가를 계속 얘기 했었나보다.
“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 도현아, 나 오늘 그 사람 만난다.”
“ 그 사람? 누구? 저번에 말한 그 고객?”
“ 아니, 저번 동창회때 말한 사람 있잖아...”
“ 그 사람!?”
“ 어...”
“ 결국 연락을 했네, 뭐 그리 놀랍지는 않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오늘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 저녁에.”
“ 그럼 밥 먹으면 되겠네. 좋은 시간 보내면 되지. 무슨 걱
정이냐?”
뭐지...? 내가 예상한 반응과는 너무 다른 침착한 반응에 말한 내가 김이 샜다. 아니면 진짜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게 다야? 끝?”
“ 뭐가?”
“ 내가 10년 만에 그 사람을 만난다는데 좋은시간 보내? 그
러고도 네가 친구냐, 인간아!”
“ 진작에 이럴것이지, 일부러 했거든?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냐, 그 사람한테?”
“ 아니, 그 사람이 먼저.”
“ 하긴 저번에 네 얘기 들었던거 생각하면 절대로 너가
먼저 만나자고 하진 않았을 것 같긴해.”
“ 만나면 무슨 말 해야 할까? 잘 지냈어? 뭐하고 지내?”
“ 뭘 그런거 까지 생각해서 나가냐, 소개팅 나가는 것도
아니고.”
“ 만나면 되게 어색할 것 같아서 그러지.”
“ 그 사람이 먼저 만나자고 말 한거 보면 그 사람은 너
보자마자 어떤 말이든 다 할 것 같은데 넌 그냥 만나서
듣고 있기만 하면 될껄?”
이런저런 얘길 하며 산행을 하다보니 해는 벌써 중천이였고 우린 정상을 찍고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사실 산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동산이기 때문에 왕복해봐야 세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 그럴라나?”
“ 그렇다니까!”
“ 참! 오늘은 뒷풀이 안 간다, 아니 못 간다?”
우린 항상 하산 뒤에는 낮술이 함께였는데 오늘은 부득이하게(?) 내 약속으로 인해 못 가게 되는 거였다.
“ 그러시겠죠~암요~”
“ 미안하게 됐어, 다음에 내가 크게 살게.”
“ 됐고, 오늘 약속 나가서 망치지나 마셔.”
“ 그래, 고맙다~”
그렇게 우린 하산 후에 간만에 서로의 집으로 바로 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까 폰에 문자가 와있었다.
‘ 재민아,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거 기억하지? from 그 사람’
그 사람이었다. 뭐라고 보낼지 고민하다 이렇게 보냈다.
‘ 어, 기억하고 있지. 그때 봐.’
바로 답장이 왔다.
‘ 그래~ from 그 사람’
약속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카페에 갔다. 도착해보니 약속시간인 오후 5시까지는 30분 가까이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사람이 오는지 보기 위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10분, 5분 그리고 1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약속시간인 오후 5시가 되었는데 그 사람은 오질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카페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어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계속 눈길이 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바로 그 사람이었다. 길을 건너오면서 카페 안에 있는 날 발견 못했는지 카페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폰을 꺼내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징~’ 내 폰이 울렸다. 폰을 보니 그 사람이었다. 내게 전화를 건것이었다.
“ 어디야?”
“ 나 카페야.”
“ 카페라고?”
“ 응, 누나 뒤에 있는 카페.”
“ 응?”
그 사람이 뒤돌아서 나를 발견하고는 멋쩍은 듯이 웃는다. 전화를 끊고 카페에 그 사람이 들어왔다.
“ 많이 기다렸지? 차가 막혀가지고,”
“ 별로 안 기다렸어, 괜찮아.”
“ 너 저녁 먹었어? 나 배고픈데.”
“ 아니, 안 먹었지.”
“ 그래, 잘 됐다. 먹고 싶은 거 있어?”
“ 나?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 그럼 나 따라올래? 이 근처 맛집 알아.”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따라간 곳은 우리 사무소 직원들이랑 자주 오는 곱창집이였다. 우린 들어가서 곱창구이를 시켰다. 수저통에 수저를 꺼내 그 사람 자리에 놔뒀다.
“ 잘 지냈어?”
그 사람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 나야 잘 지냈고 잘 지내지. 누난?”
“ 나도 뭐 그럭저럭 잘 지내지.”
“ 누난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네.”
“ 에이~빈말이라도 그건 고맙네.”
“ 난 완전 아저씨지?”
“ 조금?”
그러더니 내 눈치를 조금 살피고는 곧바로,
“ 농담이야~”
라고 말했다. 만나면 입도 못 뗄 만큼 어색할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의외의 전개에 놀랐다. 어느 정도 곱창을 먹었을 때, 그 사람이 소주를 시켰다.
“ 술 마시게?”
“ 그럼 곱창 먹으러 와서 맨입으로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소주를 가져왔다.
“ 자, 재민아 오랜만에 한잔 받자.”
“ 어...어!”
“ 너랑 술 마시는 게 10년만이야, 이야~”
“ 누나도 한 잔 받아.”
“ 그래, 자~짠!”
그렇게 시작했던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됐다. 슬슬 취기가 올라올 때쯤 그 사람은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괜히 더 마시게 했다간 감당이 안 될까봐 계산으로 하고 그 사람을 부축해 식당을 나섰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로 나갈려는데 그 사람이 몸에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았다.
“ 누나! 이민영! 괜찮아?”
갑자기 그 사람이 내 얼굴에 두 손을 양 볼에 갖다 대더니,
“ 송재민!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취기가 확 달아나는 듯 했다. 애써 눈을 피하며 말했다.
“ 나도...나도 보고 싶었어.”
“ 지...진짜?”
“ 으...응.”
순간, 갑자기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에 난 당황했다. 내게 키스를 하는거라 눈을 감았는데 그녀는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잠이 든 것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하는 수 없이 그 사람을 집에 데려왔다. 침대엣 그 사람을 눕혀둔 채 잠시 쉬기 위해 소파에 앉았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보글보글’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 일어났어?”
“ 어...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했다.
“ 집에 있는 재료로 대충 찌개 끓였어, 마침 다 됐네 와
서 좀 들어.”
저번에 선화누나랑 집에서 술 마시고 난 다음으로 누가 날 위해 아침을 해주는 건 슬프지만 참 오랜만이었다.
“ 잘 먹을게.”
“ 어때, 맛있어?”
찌개가 조금 짰다. 그래도 해준 사람 정성이 있었기에,
“ 응, 맛있어.”
이렇게 말해놓고는 괜히 밥을 더 먹어 짠맛을 중화시켰다.
“ 다행히네.”
그러는 그 사람 모습이 왠지 10년전의 그 사람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사람은 나와 아침을 먹은 뒤에 내일 있을 신제품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가봐야 한다면서 집을 나갔다. 아침부터 한바탕 크게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징~’ 폰 진동이 울렸다. 선화누나였다.
“ 여보세요?”
“ 야! 송재민! 너 어디야!”
“ 나? 집이지? 왜?”
“ 근데 왜 전활 안 받아?!”
“ 전화? 잠시만.”
폰을 다시 확인해보니 어젯밤부터 누나에게서 전화가 몇 통 와있었다.
“ 많이 했네, 미안. 어제 정신이 없어서.”
“ 어제 뭐했는데?”
“ 그 사람 만난다고 했잖아.”
“ 민영이 만나는 거야 알고 있었지. 근데 그게 정신이 없을
건 아니잖아? 너희 어제 술 마셨어?”
“ ... ...”
“ 마셨구나, 마셨어. 많이 마셨어?”
“ 난 안 취했었어. 근데 그 사람이...”
“ 민영이는 뭐?”
“ 술 마시다가 뻗어가지고 어제 내 집에서 잤어...금방 아
침 먹고 나갔어.”
“ 뭐라고? 너희 집에서 잤다고? 넌?”
“ 난 소파에서 잤지.”
“ 둘이 어제 뭔일 있었던 건 아니지?”
“ 뭔일이 있기는. 그런거 없었어.”
“ 그럼 다행히고...”
“ 뭐라고?”
“ 아냐...아무것도, 그건 그렇고 어제 안 불편했어?”
“ 응, 생각보단 괜찮았어. 편하게 얘기하고 그랬지.”
“ 오랜만에 만나서 보니까 어땠어?”
“ 어떠긴...”
“ 민영이가 네 첫사랑이지?”
“ 몰라, 그런거.”
“ 맞구나...”
“ 그래도 막상 만나고 보니까 마음속에 응어리 맺힌게 좀
풀리는 기분이랄까 그랬어. 예전 생각도 나고.”
“ 좋았겠네. 여튼 어제 잘 만났다니까 다행이다, 그럼 쉬어.”
전화를 끊고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 어제 재밌었어, 오래간만에 너랑 술 먹어서 그런지 예전
생각이 나서 계속 술이 들어가더라고, 나 실수 안 했지? from 그 사람’
‘술 마시면 필름 끊기는 건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어제 그 사람이 주저앉은 채로 내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생각났다. ‘그것도 생각이 안 나려나?’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 안했어. 나도 어제 많이 재밌었어. 프레젠테이션 준비 잘
해.’
‘ 그래, 다음에 또 보자. from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