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제로스는 내가 아는 제로스가 맞았다.
어쩌다가 내 이야기 속의 존재가 내 몸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건지, 잘 모르겠지만.
다중인격의 한 갈래로 여기기로 마음먹으니, 한결...
'편하기는 개뿔!'
몸을 빼앗길 때부터 이미 팔 하나가 날아갔다.
그 뒤엔? 보는 내가 다 아플 정도로 그나마 하나 남은 손이 망가졌다.
마음이 아주 그냥 불편해서 돌아가실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 안심이 되는게 있다면, 진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제로스가 내 몸을 차지한 상태라는 것이다.
제로스는 약속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이 몸을 소중히 다루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이상, 어처구니 없게 몸이 망가지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끼릭 끼리릭
현재 제로스는 무인으로 기동 중이던 로봇 안에 들어와 있다.
임시 관리자 코드가 잘 먹혔는지, 이 로봇은 제로스가 들어온 이후로 계속해서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대화를 하며 체력을 어느정도 회복한 제로스는, 나와는 달리 현 상황에 대해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갔다.
첫번째로 한 것은 로봇 안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엇들이 있는지 확인한 제로스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몇몇 기계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끼리릭-
한쪽 손만으로도 여유롭게 기계들을 다루는 제로스.
그는 움직이지 않는 왼쪽 팔을 어떻게든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보려는 것인지,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기계팔을 만지작 거렸다.
철컥!
"후우..."
고비를 넘긴 것인지, 내내 집중하고 있던 제로스가 땀을 훔치며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이어, 다시 한참을 씨름한 끝에, 내 왼쪽에 붙어있던 기계팔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웅웅웅-
천막 없는 우산살 마냥, 이리저리 뻗어있는 다양한 크기의 금속 부품들.
그 부품들을 치워내며 들어가니, 묘한 공명음을 내고 있는 푸른빛의 발광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마나를 담고 있는 핵이라는 건가요?]
"그렇다."
아까 전에 제로스가 말했다.
마나라는 것을 담고 있는 핵은, 특수한 장치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만질 수 없다.
만지게 된다면 내 오른손 처럼 스물스물 녹아내린다.
또한 잘못 다루다가는 폭발해버리기에, 조금이라도 과열될 기미가 보이면 즉각 사용 중단하는, 아주 민감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근데,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예요?]
"여기서 잘못하면 팔이 날아갈 수도 있겠지."
솔직히 그 말에 움찔하긴 했다.
하지만, 제로스가 내 몸을 소중히 다루겠다 약속했다.
그 약속을 떠올리자, 금세 동요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걸 이용하면 팔을 움직일 수 있는거.... 맞죠?]
"당연히 움직일 수 있다."
[휴우... 다행이네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네?]
"나는, 이런 몸과 이것을 연동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뭐라는 거야?
팔을 움직이게 할 수도 없으면서, 저렇게 위험한 걸 꺼내놨다고?
혹시 내 몸에 들어오게 되면서 머리에 이상이 생겼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비참하긴 하지만, 내 몸과 제로스의 본래 몸의 스펙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극과 극이었으니까.
[...이런 젠-]
"대신, 전투력을 증가시킬 수는 있다."
[-장.... 뭐라고요?]
"단순한 장식물에 불과한 것에서, 쓸만한 무기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 머리가 나쁠리가 없잖아!
제로스는 내 몸에 들어오면서 머리에 이상이 생긴게 아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제로스가 이런 기계를 다루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있어도 무기류 따위를 테스트 용으로 잠깐 만져본게 전부.
그가 혼자서 왼팔을 기동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는 얘기이다.
왼팔에 들어 있는, 저 푸른색의 핵을 이용해서 전투력을 올린다는 말도, 분명 무기와 관련된 말일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제로스는 노출되어 있는 왼팔의 핵을 두고, 한쪽에 놓여 있는 금속제의 통을 집어들었다.
[그건....?]
"비상용 무기다. 여기서 긴급 탈출해야 될 때, 자기 몸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는, 최소한의 무기지."
제로스의 손놀림에 의해 이곳저곳 만져지던 금속 통은, 촤라라라-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속살을 바깥으로 노출시켰다.
그 드러난 속살을 바라보던 제로스는, 역시나... 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문제라도...?]
"마나가 담긴 핵은, 귀중한 자원이다. 그런 자원을 함부로 낭비할 리는 없겠지."
아아, 그러니까... 무인으로 기동 중인 로봇들한테는 인간이 사용할 무기가 필요 없을테니까...
비상용 무기에 필요한 핵이 삽입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웅웅웅-
개방된 금속 통을 왼팔의 핵에 가까이 가져간다.
이어, 오른손을 놀리니, 들고 있던 금속 통에 변화가 일었다.
차라라라락-
얼핏 보면 벌레들의 다리를 보는 같은 느낌의 가느다란 실들이, 왼팔에 삽입되어 있던 마나 핵을 뒤덮어 간다.
왼팔에서 마나 핵을 떼어 낸 그것들은, 그 마나 핵을 자신의 몸통 속에 집어 넣었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의 타원 형태의 마나 핵은, 그렇게 금속 통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이즈가 맞으려나?]
"생각 보다 크긴 했지만,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나는 놀랐다.
고작 손가락 두마디 정도의 사이즈에 불과한 마나 핵이, 생각 보다 큰 거였다니...
하긴, 왼팔과 금속 통의 사이즈 차이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왼팔에 삽입되어 있던 핵이 아무리 보조용이라지만, 고작 비상용 무기를 기동시키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다.
우웅-
핵의 삽입 장착이 끝났는지, 어느새 초기의 상태로 돌아온 통이, 은은한 빛과 함께 미약한 기동음을 내뿜었다.
기동 준비가 끝난 무기를 가볍게 쥐어보는 제로스.
"마나 블레이드 기동."
제로스 어(語)로 이루어진 짧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손에 쥐고 있던 무기가 급격히 떨린다 싶더니, 쭈-와-앙- 이란 효과음과 함께 푸른빛의 원기둥을 세차게 뿜어냈다.
"음."
푸른빛의 원기둥은 약 1m 가량 뻗어가다 멈췄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제로스가 '기동 중지.' 라는 내뱉자, 푸른빛이 사그라들고 무기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것을 본래 무기가 놓여 있던 곳에 꽂아넣는 제로스.
그러자 차가운 냉기가 돌며, 과열되어 있던 무기를 빠르게 식혀갔다.
잠깐 기동해본 것 치고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과열된 것 같다.
내 생각이지만, 규격에 맞지 않는 핵을 사용해서 보다 빠르게 과열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기는 그렇다 치고... 팔은 어떻게 하실 거죠?]
"....난 다시 조립하는 방법을 모른다."
....뭘까? 이 익숙한 느낌은.
나는 황당해 할 것도 없이,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런 상태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
하이고야... 더 이상 환장할 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뾰족뾰족한 것들을 덜렁덜렁 달고 다니다가 넘어지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것 같다.
제로스가 이것도 알아서 해줄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사람이란 무릇 실수라는 것을 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뭐 묶을 만한 것 없을까요? 이 상태론 그냥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다행히 제로스는 내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활짝 펼쳐진 우산살이, 거대한 철판에 의해 그 모습을 감춰갔다.
그렇게 내 기계 팔의 위로 두개의 거대한 철판이 덧대어졌다.
이어, 그 팔을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방패 대용으로 유용하겠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허리춤에 고정시켜 놨으니 몸을 가려주는 방패 역할을 하긴 할 것이다.
아, 참고로 제로스는 이곳에 있는 예비 슈트를 하나 착용한 상태다.
벨트 형태의 기기를 허리에 두르고, 그 버클을 조작하니, 벨트에서부터 신체를 뒤덮는 얇은 슈트가 생성되었다.
그 슈트는 손목, 발목, 목의 경계선을 앞두고 신체를 뒤덮어 가는 것을 멈췄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어느정도 정비를 마쳤다 생각한 나는, 제로스에게 물었다.
"이곳을 탈출해야 된다."
제로스의 말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로스는 이곳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임시이긴 해도, 관리자 코드를 알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정보의 이점을 버리고 이곳을 탈출해야 된다니?
무언가 위험하다 해도, 탈출보단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곳에 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