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가 실제로 헛다리를 짚고 헤매다가 송년회에 참석도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설 때 정미경은 차 자랑을 하며 남편의 위세를 세워주려던 계획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전혀 다른 세상에 다녀 온 것처럼, 새로운 경험을 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평소처럼 터져나올 잔소리를 예상한 듯이 핸들만 꽉 붙잡고 앞만 보고 가는 남편을 힐끔 보던 정미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월을 알리는 초록들로 덮여있는 교정이 가끔씩 꿈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면서 머리로 향했던 곤봉도 데리고 왔다. 그날은 여지없이 정미경은 비명을 질러 남편의 잠을 깨웠다. 그런데 방금 본 교정엔 그런 초록이 없고 새하얀 세상밖에 없었다. 앞으로 꿈 속에서도 하얀 최루탄 가루가 아닌 하얀 눈만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덜컥 들은 정미경이 말했다.
“자기야! 우리 돌아가서 내가 쓰러졌던 데서 눈싸움 하고 하자. 자기는 학생운동 했던 내 역할을 하고 나는 경찰이 되고. 재미겠는데! 안 그래?”
그때 김근수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얼굴 이었는데 그렇잖아도 눈길에 더디게 가던 속도를 더 늦추어 반대 차선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정미경이 웃으면서 어깨를 치며 말했다.
“호호호!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하여튼 능구렁이야!”
능글맞은 놈! 전혀 놀라지 않고 핸들을 원상복귀하고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은근히 약이 오른 정미경이 속에 묻어뒀던 잔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학교에서 송년회 행사를 하는 가 싶어 이상하다 했다. 아이고 내가 정말 속 터져서. 이 차 어떻게 할거야?”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떤 날은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가계부며 장부며 통장이며 카드내역을 담은 우편물이며 등기 봉투에 코를 박아 살피면서 당신은 뭐 했냐? 왜 못 봤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김근수가 예상하지도 못한 선제공격에 당황하고 있었다.
즉시 돌아 올 잔소리는 훤히 예상하면서도 적절히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한 김근수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끙끙 앓으며, 인상만 찡그리고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 봉투 속에 송년회 참석자에게 기름값과 도로 이용료도 주고 거기다가 백화점 이용권 만 원짜리까지 준다는 문구가 있었으면, 송년회 장소를 인터넷을 검색해서라도 알아 내, 김근수가 운전하는 내내 손가락으로 요리조리 하면서 귀신같이 송년회 장소로 안내를 했을 것이다. 힐끔 고개를 돌렸다.
“뭘 봐! 운전이나 똑 바로 해! 아이고 내가 정말 이걸 신랑이라고 지금까지.......”
신경질을 냈으니 당연히 속에서 열불도 난 것 같았다. 차장을 끝까지 내려버렸다. 찬바람에 뒤섞인 하얀 눈이 최루탄을 피해 도서관으로 도망쳐 온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처럼 우르르 차 속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 무리에서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지 않고 겁 대가리 없이 맞서 싸웠던 정미경이 최루탄이 도서관으로 휘날려 들어오는 걸 막을 방법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어이 차가워! 문 닫아! 눈이 그대로 들어오잖아!”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그러던 말던 김근수가 무시해버렸다. 정미경이 피부의 결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뽀얀 얼굴의 단점.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거나 등등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숨길 수 없는 현상. 얼굴이 벌써 홍당무가 돼 있었다. 추워서 발개 진 게 아니란 건 본인이 더 잘 안다. 기고만장했던 정미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장 밖 하얀 세상만 보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저……. 자기야! 이 차 팔면 원가 그대로 받겠지?”
발개진 원인은 피부나 악몽이었던 옛 추억이 아닌 단지 돈이었다. 이 기어들어가는 듯 애교를 담은 투정 또한 김근수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식상 해져버린 수법이었다.
“이런 똥차를 누가 사겠어?”
“그래도 똥 냄새만 없애면 새 차잖아?”
“창 틀 속에 들어간 똥을 끄집어 내려면 공업 사에 가야 하잖아. 거기서 열면 값이 더 떨어져. 이대로 똥 차 값 받고 파는 게 오히려 몇 푼이라도 더 받아.”
정미경의 똥 고집. ‘그럼! 그냥 타!’ 이 말은 절대 하지 않고 입술만 뽀로통하게 내밀고 김근수의 포기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길에 김근수의 자녀들에게 과외공부를 시키던 이수현이 정미경의 시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일찍 온 김근수 부부를 보고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정미경이 먼저 투덜거렸다.
“아니! 송년회 가는 사람이 장소도 모르고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언니! 이 사람 원래 이랬어?”
시어머니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수현의 대답은 번개같이 간결? 아니 강렬했다.
“응! 원래 그래!”
돌변한 아버지의 인상이 사납기까지 했다. 김근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밥상 앞에 앉고 있었다.
“너! 나가!”
“예?”
눈이 동그래진 김근수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살벌한 저음이 나왔다.
“빨리 안 나가고 뭐해?”
“아! 예!”
‘저런 눈치 없는 년들’
이수현과 정미경을 노려 볼 시점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김근수가 벌떡 일어서 나갈 때 김근수의 아들과 딸도 벌떡 일어서 쫓아 나가고 막내 아들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날쌘 다람쥐처럼 기어서 뒤쫓아 나가버렸다.
“아이고 저런 머저리들! 너희들은 뭐해! 안 나가고!”
정미경과 이수현이 동그란 눈으로 마주보다가 숟가락도 내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든 채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방문도 닫지 않고 나가 버렸다.
“아이고 어떻게 세 놈이 똑 같아! 애들 따라 할 까 무섭다! 방문 닫아! 춥다!”
김근수 아버지가 혀를 차면서 양반집 아들 며느리 손주들과 머슴의 딸이 나간 뒤를 보며, 전부 똑같다는 평등주의자가 된 듯이 혀를 차고 있었다. 마구간 여물 끓이는 아궁이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은 다섯 명이 타다 남은 불씨에 서로 손을 가까이 대려고 쟁탈전을 벌이듯이 쪼그린 엉덩이를 서로 밀칠 때 아들의 김근수를 자기 할아버지처럼 노려보며 야단을 쳤다.
“아이! 참! 저는 아빠 따라서 안 할 거예요. 아빠는 어떻게 맨날 야단 맞아요? 좀 잘해요! 제가 보기에도 민망하잖아요.”
당황한 눈빛들! 막내 아들은 정미경의 품에, 딸은 이수현의 폼에 쏙 들어가 눈만 말똥거리고 있었다. ‘아! 저 놈의 장손!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뇌되었구나!’ 김근수 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따뜻한 아궁이에서 밀려 난 상태. 엉덩이부터 먼저 뒤로 밀어낸 김근수가 마구간 밖으로 어기적거리며 나갔다. 그때 큰 아들이 김근수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채로, 엉금엉금 한 발짝 더 아궁이 앞에 다가가, 손이 익을 정도로 따뜻한 장작 바로 앞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