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키는 도중에도 김근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이수현이 입술을 깨물고 바르르 떨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이놈에게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릴 때 얘기를 했더라면 자존심만 상했겠지만 지금은 청상과부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보듬어 안아 달라는 구걸밖에 더 되겠나! 이 생각이 들 때, 눈물이 이수현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수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주르르 흘려 내렸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수현을 멀뚱히 보던 김근수가 밖을 쳐다보다가 원두막에 바람이나 비가 들어오지 않게 방문처럼 쳐놓은 낡은 천만 주물럭거리며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측은한 눈만 이수현의 눈에 들어왔다. 답답한 사람은 이수현이었다.
“너! 정말로 몰라?”
“뭐?”
“내가 너를 멀리 한 이유?”
김근수가 한숨을 내쉬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쓰럽게 이수현을 보면서, 그의 직설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너 잘났으니까. 내 같은 놈과 가까이 있어봤자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뭐 별다른 이유가 있나? 너하고 같은 학교에 다녔으면 상황이 달라졌겠지.”
이수현이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악은 겉으로 나오지 않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변호를 해 줄 사람도 누명을 벗겨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는 가해자가 된 것처럼 가슴만 치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단세포 인간처럼 비수를 꽂는 말만 하던 김근수가 자세를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수현이 억울해하는 이유를 깨우친 심각한 표정이었다. 곧 거침없는 질문이 나왔다.
“혹시 우리 엄마가 집안 얘기로 내 옆에 못 오게 했어? 울지만 말고 솔직히 얘기해.”
이수현은 울기만 했지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고개는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근수도 이수현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잃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수현의 손을 잡고 손등만 다독이며 구름에 가려져 가는 달만 보고 있었다.
천 사이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김근수가 윗도리를 벗어 오돌오돌 떨고 이수현의 어깨위로 윗도리를 덮어주며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널 미워만 했구나.”
“아니! 남편을 잃고 너희 부부가 우리 어릴 때 사귈 때처럼 사는 걸 보고 후회를 했어. 내가 자격지심에 빠져 용기를 내지 못했구나.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보고 싶어서 너한테 갔었어. 그때 도서관 휴게실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예쁜 여학생이 너한테 커피를 가져다 주며 앉더라. 그때 그걸 보고 다시 한번 네 곁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옛 것이구나. 네 집사람보다는 못하지만 그 애도 엄청 예쁘더라. 그래서 떠났어.”
이수현이 그때가 떠올랐는지 소주를 한잔 더 마시며 컴컴해진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니스커트만 입고 다닌 이수경을 봤구나! 김근수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수현이 그때 눈에 힘을 주며 김근수를 보고 있었다.
“나 있지! 이건 꼭 얘기해야 오해를 풀 것 같아.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털어놓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아서.”
김근수가 한숨을 내쉬며 속죄하듯이 말했다.
“내가 사죄할 게. 우리 엄마가 네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머슴이어서 내한테 반대를 하지 않고 너한테 매몰차게 한 걸 몰랐던 내 잘못이지.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이수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씁쓸히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김근수의 눈을 보면서 망설이다가 떨리는 입술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그때 네가 나를 울러 매고 도망쳤을 때 내가 못 이긴 척 하고 울러 매진 채 갔어야 했는데 그때부터 꼬인 것 같아. 네가 나를 짊어지고 도망칠 때, 사실 그때 나는 데모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단지 학창시절에 한번쯤의 추억 만들기로 여겼어. 그러다가 네 학교에 원정 간다 길래 너도 보고 싶고 했어 따라 갔었어. 처음 갔을 때 그 미니스커트가 생각나 망설였지만 나는 그런 애들하고 다르다는 걸 너한테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그때 네가 백마 탄 기사처럼 나타나 나를 울러 맸을 때 하늘을 날 것같이 기분이 좋았어. 거기서 눈 꽉 감고 모른 척하고 업혀 갔어야 했는데 왠지 우쭐하는 거 있지. 네가 옆에 있으니까 경찰도 안 무서웠어. 그때 쓰러진 여학생을 보고 날려 차기 하는 모습이 멋이기도 해서 그냥 막 따라가는 가는 것 있지. 그게 화근일 줄이야.”
잠시 말을 멈추고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쩝쩝 소리를 내면서 말을 이어갔다. 김근수는 그때를 떠올리며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붙잡혀 가고 신랑이 인두를 내 눈 바로 앞에 내놓고 거래를 하자더라. 자기하고 결혼을 할거냐? 아니면 나도 너도 전부 지진다고 하더라. 그때 성화가 무릎을 꿇고 내 신랑이 된 그 사람에게 빌었어. 우리는 전부 친구라고. 한번만 봐주면 안되겠냐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 그러나 남편은 비웃으며 완강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어. 그건 자기와 결혼을 하면 가능하다는 눈초리였어. 나는 그때 그것뿐인 줄 알았어.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 놈이 그걸 빌미로 학생 운동하는 학생들 정보도 내 놓으라고 하더라. 그래야 너도 나도 풀어준다며. 그리고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더라. 여자가 결혼을 그렇게 쉽게 결정하냐며 비꼬면서 협박을 시작했어. 농락당했단 사실을 알고 절대로 못한다고 지지라고 했어. 그런데 인두가 내 가랑이사타구니 앞에서 아른거릴 때 너무 무서워서 기절해버렸어. 그때 찬물을 끼얹더라. 물에 젖은 눈가에서 희미한 뭔가 보일 때 그게 벌건 인두가 아닌 이미 죽어서 지옥의 불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못 참겠더라. 그래서 항복해버렸어. 그렇게 나오고 남편이 죽고 난 뒤에 혹시 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송희씨가 거기서 성화를 만났잖아. 그때 같이 고문당한 송희씨가 우리 신랑을 죽였지 않나 하고 의심이 쉽게 떠나지 않아.”
김근수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윤성화의 도움으로 나온 줄만 알았는데 이수현의 도움도 있었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그것도 말만 결혼이지 몸까지 팔아가며 자기를 구한 거나 다름없는 이수현의 남편이 죽었을 때 얼마나 통쾌했는가?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근수의 정신은 더 이상 과거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릴 만큼, 과거로 회귀해 능글맞음의 대명사로, 머슴의 딸 앞에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