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혼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동네 같았다. 아마 그때는 주소만 보면서 온다고 주변을 둘러 보지 않아서 그랬나?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을 때까지 주변은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술집이 줄을 서 있었다. 정미경이 김근수를 힐끗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술집에서 고개만 쏙 내밀은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김근수를 불렸다.
“어! 근수야! 여자 친구 생겼네. 웬일이야? 우리 샌님이!”
잠시 헷갈렸다. 아주머니를 한번 다시 보고 김근수를 쳐다봤다. 굉장히 쑥스러워 하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옆 통수를 한대 쥐어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네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점잖은 척을 하고, 고향 사람이 모르는 동네에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 짓을 했단 말이지? 김근수가 눈을 찔끔 감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정미경의 손을 잡았다.
정미경의 기분이 굉장히 찜찜한 상태였지만 손은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속도를 맞춰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약간의 고개를 넘어서부터 술집은 보이지 않고 넓은 평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세상에 이런 시골도 있나 할 정도로 논과 밭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많은 전답이 있는 동네에서 딸랑 두 마지기 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난에 찌들은 집안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던 정미경의 발걸음이 돌 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워졌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면서 왜 따라 왔을까?
조금만 더 신중할 걸. 도망 칠 때도 없었다. 벌써 노란 벼들이 환영이나 하듯이 고개를 내밀어 손을 살랑거리며 흔들고 있었다. 그때 약간 절뚝거리는 젊은 여자가 지나치면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면서 똑 같이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그때 김근수가 돌아서 뒤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우리동네에 저렇게 예쁜 사람이 다 있었나. 이사 왔나. 진짜 예쁘네.”
정미경의 넋이 나가버렸다. 김근수도 마찬가지였다. 정미경이 멀뚱하게 넋이 나가 있는 김근수의 볼을 탁탁 쳤다.
“야! 야! 정신차려! 너! 이씨! 나! 돌아간다. 솔직히 내가 왜 왔는지도 굉장히 헷갈리고 있는 중 이거던. 내 열 받게 하지마!”
머리를 한번 흔들던 김근수의 표정에 안쓰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미경의 고개가 다시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김근수가 한숨을 내쉬며 정미경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이런 식의 위로를 받는 건 죽기보다 싫어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 지나치는 가을바람을 맡으며 걸었다.
어디선가 구수한 여물 삶는 냄새도 바람을 타고 오고 있었다.
“다 왔다.”
소 여물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집이 약간 길 아래여서 집안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큰 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채만 있는 게 아니고 방문이 몇 개 더 보였다. 오른쪽에는 창고인 듯한 건물이 보였다. ‘음매’ 하는 소 울음소리가 많아서 고개를 완전히 왼쪽으로 틀었다. 한두 마리 있는 마구간은 집에도 있어 낯설지 않았지만 여러 마리가 있는 소 우리는 처음이었다.
“여기야?”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물었다.
“그래! 여기다. 들어가자.”
그 뒤로 정미경은 김근수에게 무엇이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몸으로 익히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마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밥상 차리듯이 여물을 나란히 붓는 것까지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젖소만 있는 소 우리로 갔다.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김근수는 소 똥을 치우고 담요를 깔듯이 풀을 뿌리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정신 없이 비지땀을 흘리고 손바닥을 탁탁 칠 때 김근수가 불렀다.
“여기 와봐! 젖 짜는 거 가르쳐줄게.”
벌써 온 몸이 소 똥으로 떡 칠이 돼 있어 옆에서 앉던 눕던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만약에라도 소 발에 걷어차일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김근수 등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먼저 마음을 안정시키게 목을 이렇게 부드럽게 쓸어줘야 해. 집에 키우는 소와 똑 같아. 무서워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돼. 손 이리 줘봐!”
정미경의 손이 바짝 긴장된 채로 닿을 듯 말 듯 다가간 손이 서서히 닿으면서 문지르기까지 할 때, 소에서 나온 따듯한 감촉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는지 손에 힘을 조금 더 줘 문지르고 있었다. 그때 소 뒷발이 꿈틀했다.
“으악! 엄마야!”
비명 소리 뒤로 질퍼덕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김근수도 웃고 소도 웃고 있었다.
“어이 씨! 이게 뭐야?”
손에 소 똥을 잔뜩 묻혀 일어서면서 구시렁거렸지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알았어. 우리 소보다 훨씬 순한 것 같다. 다음에 어떻게 해?”
“이놈이 지금 너하고 장난치고 싶어 하네. 저것 봐! 웃고 있지. 허허! 긴장을 늦췄으니 이젠 저 젖 있지? 저걸 부드럽게 살살 만져줘. 지금 아마 딱딱 할거야. 말랑했다 싶을 때 네 젖꼭지 만지듯이 가슴을 꼭꼭 눌러주면 돼. 한번 해봐! 이게 안 되면 예비 연습 해 볼래?”
심각한 얼굴로 귀담아 듣던 정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연습 한번 하고 해야겠다. 기구 있어?”
“응! 거기 있네. 윗도리 벗어봐. 딱딱 한지 먼저 확인부터 하고 해야 해!”
정미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숙이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 똥으로 떡 칠 된 손을 김근수 얼굴에 문질러버렸다.
“에이 씨!”
얼굴에 묻은 소 똥을 닦으면서 일어선 김근수가 소 발을 기둥에 묶고 젖 짜는 기계를 내려 소 젖에 꾹꾹 붙이고 있었다. 정미경이 바짝 옆에 붙어 물었다.
“이건 뭐야?”
“응! 젖 짜는 기계!”
신기한 지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눈에 힘을 주고 물었다.
“이렇게 좋은 걸 놔두고 왜 손으로 짜라고 했어? 골탕 먹이려고 그랬지?”
“기계로 하면 소가 아야 한다. 웬만하면 손으로 해야지. 만약에 기계가 고장이 나면 젖이 퉁퉁 불잖아. 소가 얼마나 아프겠어. 너도 한번씩 가슴이 딱딱하고 아팠을 때 있었을걸? 그래서 내가 가리켰다. 서방님이 집에 없을 때도 대비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지만 농사라면 진절머리가 나 있는데, 매일 소 똥까지 치워야 할 불행을 내가 자초할까? 정미경이 손사래를 치며 소 우리에서 나가버렸다.
‘어이 씨! 어림도 없지. 오빠보다 더 한 놈이야. 오빠는 그래도 양해를 구하고 농사 일을 시켰는데 저 놈은 아예 집어 넣어버리네. 그것도 똥 통 속에. 어이 씨! 나쁜 놈!’
고개를 획 돌려 돌아서다가 ‘엄마야!’하면서 소리를 내지를 뻔 했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머리가 마당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