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샴푸를 콸콸 쏟아놓은 듯 메스껍게 꾸물대는 배경 앞에
덩그러니 선 그 집은,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세모 지붕의 갈색 집
경계가 움찔거리는 게 배경과 섞이어들까 걱정된다.
그러던 중, 위에서, 남자 한 명이 퐁당 빠져들었다.
허우적거리며 백색 물감 아래로 침전하다가, 집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팔다리를 저었다. 어떻게든 도달해 문고리를 당겼지만, 액체는 잡힐 리가 없다. 오히려 문의 갈색과 방울지어 섞여든 탓에 그나마 있던 문고리마저 없어져버렸다. “우욱...!” 남자는 터져 나오려는 숨을 간신히 입 안에 머금은 채 두 손을 마구 휘저어댔다. 이에 문 부근의 물감이 밀려나고, 그 뒤로 깜깜한 구멍이 드러났다. 그는 그 구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빼꼼 나와 있던 다리까지 낑낑 잡아당기더니, 남자는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밀려났던 물감들은 자리로 돌아왔지만, 주변의 벽과 뒤섞여 그것은 더 이상 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출입구가 사라졌다.
나갈 땐 어쩌려고 저런 거지?
뭐 하긴, 저런 상황에서 뒷일을 생각할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지.
가엽군 가여워.
응, 가여워.
집 안도 역시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평면이 아니고 공간이라서, 벽이나 바닥을 직접 밟지 않는 이상 집이 헤어질 일 같은 건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그런데 내 집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창하나 없어 밖이 보이지 않지만 뭐 어때. 몽글몽글하니 푸근해서 좋네.
아까는 숨 막혀 죽을 뻔했다고 정말.
“휴―.”
그렇게 한숨을 내뱉자 입에서 기포가 새어나갔다.
올라간 공기방울들이 천장에 납작하게 붙었지만 별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을 헤엄쳤다.
책상 위에는 집을 나서기 전 그렸던 그림이 있었다.
아 맞아, 은하수가 한가득 들어있는 밤하늘을 그렸었지.
반가운 마음에 도화지를 짚자 그것은 형체를 잃고 방울이 되어 공기 중을 떠다녔다.
어라? 녹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지?
...아니, 물감인데 당연히 녹겠지.
뭘 기대한 거지 나는.
아무래도 아까 그 일 탓에 조금 혼란스러운가보다. 화장실에서 세수나 하고 오자.
그렇게 나는 한쪽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의 문을 통과해, 그 뒤로 나아갔다.
음... 뭐하는 거지 저 남자.
노란 별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끝에서, 남자는 예상도 못했다는 듯 어벙벙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뒤에는 아까 보았던 갈색 집이 한 채. 그리고 그 한 구석에 뚫린 까만 구멍으로 별들과 함께 쏟아져 나온 그는, 그 뒤로 벌써 몇 분 째 저러고 서 있다. 자기 발목을 별의 급류에 담그고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뭐, 사방은 밤하늘처럼 아득하고, 그 벼랑보다 높이 솟은 거대한 그림들이 도화지 없이 물감만으로 서 있으니 놀라지 않을 것도 없지만서도...
본인이 그렸던 그림들이잖아?
그것도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화백이라며 칭송받던 시절의 것들인데, 그걸 보고 자기가 놀라면 어쩌자는 거야.
『으아악!』 멍하니 서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급류에 휩쓸려 벼랑 아래의 좁은 강으로 떨어졌다.
저 봐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깐.
재밌어 보이니 별들의 기세에 꼴사납게 쓸려 내려가는 남자의 뒤를 쫒아보았다.
『푸확! 크읍...!』
굉장히 좁은 폭의 강은 유속이 굉장히 빨랐다. 양옆은 거대한 그림들의 숲. 환상처럼 일렁이는 그림들이 뒤로 흐른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지만, 덩치 탓인지 그림들은 미적미적 미끄러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강 밑으로 허우적대며 잠겼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아래에 뭐가 있길래 그러는 거지. 궁금하긴 하지만 귀찮기도 하고 위험해보이니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급류 속으로 잠기니,
우주가 있었다.
발이 닿지 않는다는 수준이 아니다. 한 번 정신을 잃고 빠져버리면 평생 저 방대한 은하 속 어딘가에서 홀로 둥둥 떠다녀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온몸이 터져 죽어버릴 것이다. 겁이 덜컥 들어버린 나는 허겁지겁 팔다리를 저었다. 차라리 심해라면 그 발버둥의 의미를 부글대는 공기방울 정도로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그러지 못했다. 나의 그 발작에 아무것도 동요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이 티끌보다 못한 나라는 존재만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뿐이다. 어떻게든 위로 고개를 내밀어야한다. 겨우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보냈다.
『푸화악!! 콜록!』
앗, 수면 위로 얼굴이 올라왔다.
한동안 안 보여서 어떻게 됐나 했는데,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네.
그나저나 급류 양옆으로 나열된 그림들의 모습이 아까 절벽 근처에서 보던 것과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난색 계열로 반짝반짝 빛나던 화풍이었는데, 조금 전부터 어째 그림들이 조금씩 퀘퀘하게 변하더니 지금은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두운 그림들만 늘어서 있다.
팔다리가 달린 심장으로부터 혼비백산 도망치는 사람들.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서 상체만을 일으킨 남자와, 한 숟갈 뜬 푸딩마냥 일부가 사라져버린 그의 뇌.
대충 그런 부류의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이었다.
들어본 적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의 공개를 멈춘 채 사람들의 구설수에서 사라져버린 천재화백의, 숨겨진 그림들에 대하여.
『으아악!!』 다시 한 번 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수면 밖으로 고개 내밀기를 반복하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별들로 이루어진 급류의 끝이자, 직선으로 윤곽을 드러낸 낭떠러지의 모습이었다. 급격하게 빨라진 노란 물살 너머로 대공동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밑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우주? 날 선 가시들? 혹은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구멍? 그 무엇이든 절대 도달해선 안 되는 곳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이대로 휩쓸려선 안 된다. 안 되는데, 아무리 악을 써 봐도 급류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으아, 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잔뜩 겁에 질린 채 소리를 질러대던 나는, 속절없이 그 칠흑 속으로 떨어졌다.
치지직.
화면 전환.
백색 샴푸를 콸콸 쏟아놓은 듯 메스껍게 꾸물대는 배경 앞에
덩그러니 선 그 집은, 물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세모 지붕의 갈색 집
경계가 움찔거리는 게 배경과 섞이어들까 걱정된다.
그러던 중, 위에서, 남자 한 명이 퐁당 빠져들었다.